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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는 동·서 유럽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발트해 연안인 폴란드 북쪽 국경을 통해 스칸디나비아와 북해 항구에도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국토는
동서로 689km, 남북으로 649km의 크기로 거의 사각형을 이루고, 그 면적은 약 312,683㎢로 유럽에서 8번째로 크다.
국토 대부분이 북유럽 평야 지대에 위치해 있어 지형은 대체로 완만한 편이다. 남쪽 국경에 있는 수데티와 카파시안 산맥을 제외하고는 약
100m
이상인 곳이 드물다. 리시산(Rysy 2,499m)은 폴란드 최고봉이다. 폴란드에서 가장 긴 강인 비스툴라강(비스와강, 1067km)은 국토
중앙을 가로질러 흐르고, 오데르강(오드라강, 848km)은 서쪽 국경을 따라 흐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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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인 바르샤바는 폴란드의 정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러시아,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슬로바키아, 체코, 독일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10세기 후반에 피아스타 왕조를 중심으로 통일국가를 이루어 14세기경에는
황금기를 이루기도 했으나, 18세기에는 프러시아, 러시아, 오스트리아에 멸망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후 국토의 대부분이 전쟁에 의한 폐허가 되었고, 아우슈비츠의 슬픈 역사가 고난의 역사를 대변하지만, 쇼팽과 코페르니쿠스, 퀴리부인, 바웬사 등을
낳은 나라이기도 하며, 경제 성장을 이루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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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 요
o 국 명 : 폴란드 공화국(THE REPUBLIC OF POLAND) o 면 적 : 312,683㎢ (한반도의 1.4배)
- 유럽에서 8번째 크기
o 위 치 : 북위 49°-54˚, 동경 14°-24°에 걸쳐 중부유럽 대평원 지역에 위치
(국토의 75%가 해발 200m 이하)
- 동쪽으로는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리투아니아 및 러시아(칼리닌 그라드), 남쪽으로는
체코 및 슬로바키아, 서쪽으로는 독일등 7개국과 접하고 있으며, 북쪽 으로는 발틱해.
o 인 구 :
3,870만명(123.5명/㎢)
|
o 수 도 : 바르샤바(WARSZAWA, 170만명)
- 주요도시 : LODZ(79만),
KRAKOW(74만), WROCLAW(63만), POZNAN(57만), GDANSK(45만), SZCZECIN(41만),
LUBLIN (35만), KATOWICE(34만)
o 기 후 : 대륙성 기후(동부), 해양성 기후 (서부) - 연평균 기온
: 7-10℃(겨울최저:-21℃, 여름최고 : 34℃)
o
나라꽃 : 팬지 o 민 족 : 폴란드인(98.7%), 독일인, 벨라루스인, 우크라이나인등
o 공용언어
: 폴란드어(POLISH)
o 종 교 : 카톨릭(95%), 신교, 희랍정교, 이슬람교, 유태교등
o 교 육 : 의무교육 6년(취학율 97%)
o 언 론 :
- 3대 일간지(현지어) : GAZETA
WYBORCZA, RZECZPOSPOLITA, ZYCIE
- 통신사 : POLISH PRESS AGENCY(국영)
- 국영 방송사
: 폴란드 텔레비젼(CHANNEL 1, 2)및 라디오(1, 2, 3)
- 민영TV : Polsat, TVN
- 민영라디오 :
Radio Zet, RMF
o 입법부 : 양원제, 임기 4년의 상원 100명 및 하원 460명
o 행정부 :
이원집정부제(내각책임제와 대통령제 혼합)
o 국제기구 : UN, WTO, IMF, IBRD, CSCE, OECD
및 NATO등 가입
o 국 방 : 육군 14만, 해군 2만, 공군 5만여명(총 15만 수준으로 감축중)
o 국 경
일 : 1.1(신년) 4.20,21(부활절) 5.1(노동절) 5. 3(1791 헌법 제정일) 6.19(성체의 날) 8.15(성모승천대축일)
11.1(만성절) 11.11(1918 독립기념일) 12. 25,25(성탄절)
o 화폐단위 : 즈워티(ZLOTY) - 환율 : US$= 3.78ZLOTY (2003.5월 현재)
o 주요자원 : 석탄, 구리, 유황, 천연가스,
은, 납, 소금
o 시 차 : 한국보다 8시간 늦음(SUMMER TIME 실시할 경우 7시간)
o 전
압 : 220V 50HZ
o 쇼 핑 : 모피, 크리스탈, 카페트, 자수용품, 호박, 실크, 목각조각, 도자기, 민속인형
o
특산품
* 폴란드의 특산품으로 호박(Amber)과 전통 술인 보드카가 유명함
- 보드카로는 선물용으로 '쇼팽 보드카'가 유명함. 쇼팽의 얼굴이
그려진 병이 이색적임.
- 미주지역에서 최고급 보드카로 판매되고 있는 'Belvedere'보드카도 좋은 선물이 될 수 있음.
* 손으로 수를 놓은 폴란드 특산 식탁보도 이색적인 기념품임
◈ 기후 및 자원
폴란드 기후의 특징은 비교적 추운 겨울과 따뜻한 여름으로 요약할 수
있다. 중앙 유럽시간대에 적용되는 폴란드는 표준 GMT(그리니치 평균시)보다 겨울에는 1시간이, 4월부터 10월까지는 2시간이 빠르다.
폴란드는 상당한 양의 광물자원과 농업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구리, 황, 아연, 납, 은, 마그네슘, 암염 등의 광물이 많이 나고, 무연탄과
갈탄은 폴란드가 세계 5위 보유국이기도 하다. 이런 천연자원은 폴란드의 수출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 또한 상업적으로 유용한 석회암,
고령토, 점토, 칼륨과 천연 가스등의 자원도 보유하고 있다.
폴란드의 주요 농산물은 밀, 감자, 사탕무, 사료용 작물 등이고, 가축으로는 800만 마리의 식육용 소, 젖소, 1천900만 마리의 돼지가
있다. 경작 가능한 토지는 1천 870만 헥타아르(4천 700만 에이커)정도이다. 890만 헥타르(2천200만 에이커)는 방목과 임업에
사용되는데, 이 땅은 또한 천연 자원의 매장지이기도 하다.
◐ 바르샤바 기후
- 기온-℃ / 강수량-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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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역
|
구
분 |
1월 |
2월 |
3월 |
4월 |
5월 |
6월 |
7월 |
8월 |
9월 |
10월 |
11월 |
12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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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
(Warszawa)
|
최고평균
|
-1
|
0
|
5
|
12
|
19
|
22
|
24
|
18
|
18
|
12
|
4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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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평균
|
-6
|
-5
|
-2
|
3
|
9
|
12
|
14
|
13
|
9
|
5
|
0
|
0
|
평 균 |
-3.5 |
-2.5 |
1.5 |
7.5 |
14.0 |
17.0 |
30.1 |
22.2 |
13.5 |
8.5 |
2 |
1 |
강우량mm |
42 |
54 |
30 |
42 |
63 |
99 |
90 |
90 |
54 |
54 |
42 |
42 |
◈ 종 교
ㅇ 전 인구의 95%가 카톨릭으로 폴란드 카톨릭 교회는 일반 신도의 지지를 바탕으로 정부에 대해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
- 2개의 대교구에 추기경 3명 (수석추기경은 Cardinal Glemp)
ㅇ 폴란드 정부는 1972년 장기간의
카톨릭 교회와의 대립관계를 청산하고 교회의 신규건설 허가 등 바티칸과의 관계개선을 도모, 93. 7월 교황청과 Concordat 체결
ㅇ 카톨릭의 국민에 대한 영향력은 지대하며 폴란드의 탈공산화를 위해 자유노조와 긴밀 협조해 옴.
ㅇ 폴란드내
외교단장직을 교황청 대사가 맡고 있으며, 90년 가을부터 공립학교에서의 자발적인 종교교육이 부활됨.
◈ 정
치
폴란드 정부는 중부유럽과 동유럽 국가들 중 가장 먼저 사회주의를 버렸다. 이러한
움직임은 1989년 초반 전지역으로 퍼져나간 협상으로 더불어 시작되었는데, 이 협상은 사회주의 진영과 반대파의 '원탁 회의'로 불렸다. 결국
대다수의 찬성에 의해 당시 폴란드의 민주화를 이끌던 폴란드의 자유노조 '연대'의 합법화와, 1989년 6월 4일의 자유 선거에 대한 동의가
이루어졌다.
이것은 정부에 대한 의회의 반대가
합법적으로 가능한 혁신적인 시스템으로의 전주였다. 또한 국가 수장을 기반으로 하는 대통령제의 채택과 상·하원의 신설도 새로운 발전 중의
하나였다. 1989년 6월에 실시된 선거에서 자유노조의 대표가 승리하자, 폴란드는 제2차세계대전 이후 중부 유럽과 동유럽 지역 최초로 비사회주의
정부를 수립하게 된다.
폴란드는 법치 독립 민주 국가이다. 다양한 정치색을 가진 복수 정당이 존재한다. 5개의 정당과 정치적 연맹이 현입법부에서 활동하고 있다.
폴란드는 대통령제와 의원 내각제를 혼합한 입헌공화국이다. 상원과 하원, 이원제(二元制)로 구성된 국회는 1997년 2월 전사회주의 헌법을
승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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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이 국민투표의 적법성을 인정하고, 알렉산데르 크바스니예프스키 대통령의 승인이 떨어지자 1997년 10월 17일부로 새로운 헌법이
효력을 발휘했다.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이 헌법은 1791년 5월3일의 폴란드의 역사적인 최초의 헌법 이래 10번째로 수정된
헌법이었다.
폴란드는 직선제 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임기 5년의 대통령을 국가 최고 통수권자로 한다. 대통령은 예산안을 승인할 수
없거나 정부를 수립할 수 없을 때에 국회를 해산할 권리를 가진다. 자유노조의 지도자인 레흐 바웬사는 1990년 11월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1995년 임기를 마쳤다. 알렉산데르 크바스니예프스키는 바웬사의 뒤를 이어 2000년 10월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국회는 상·하원의 이원제(二元制) 국민의회로, 상원(세나트) 100명, 하원(세임) 460명으로 구성되며, 임기는 각각 4년이다. 가장
최근의 국회의원 선거는 2001년 9월 21일에 있었다. 최근 Leszek Miller 총리의 폴란드 연립정부는 민주좌파연합과 농민당,
Samoobrona (farmers party)에 의해 생겼다. Leszek Miller(레쉑 밀레르) 총리는 하원으로부터 총리로 임명된 직후,
2001년 11월 10일 의회에 자신의 계획을 알렸다.
| ◈ 역
사
|
| 1. 피아스트 왕조
6세기께 지금의 폴란드 북서 지역에 진출하기 시작한 서슬라브인은 10세기께 폴라니족에 의해 통일된다. 그리고 이들은 966년, 폴라니족
피아스트(Piast) 왕조의 미에슈코 1세(Mieszko I)가 로마 카톨릭을 받아들임으로써 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025년
볼레스와프가 왕위에 올라 피아스트 왕조의 기반을 다지며 지금의 폴란드와 유사한 영토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주변 세력의 팽창으로 안정적으로 국가가
발전하지는 못했다. 게르만족은 포메라니아 지방에 진출, 정착하였으며 보헤미아 왕국은 실레지아 지방을, 프로이센(프러시아)은 북부 지역을 각각
점령하며 국가의 기반을 위협하였다. 이에 1226년 마조비아 공은 독일의 튜톤 기사단을 불러들여 북동부의 프로이센을 진압하였다.
1241년과 1259년에 연이어 타타르족의 침입을 받아 폴란드 남부 지방이 황폐화되는 등 피아스트 왕국은 1320년 통일될 때까지 외세의
침입에 따른 국권의 수호에 힘을 쏟아야 했다. 14~17세기는 폴란드의 전성기로 기록된다. 특히 피아스트 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던 카지미르 3세는
문화의 부흥과 개혁에 많은 치적을 남겼는데 크라쿠프, 루블린, 포즈난 등의 도시가 이 때 세워졌다.
2. 야기에워 왕조
왕위를 상속할 자식이 없이 카지미르 3세가 죽자 왕위는 헝가리의 야드비가 공주에게 계승되었다. 야드비가 공주는 1386년에 리투아니아의
왕자와 결혼하여 양국은 야기에워(JagieLLo) 왕조로 통합되었다. 이 결혼은 다분히 정략적이었는데, 당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우크라이나에서의 패권을 놓고 경쟁하고 있었으며 한편으로는 독일 기사단의 팽창에 함께 위협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1410년에
폴란드·리투아니아·우크라이나 연합군은 그룬발트 전투에서 독일의 튜톤 기사단을 물리쳤고 1454년에 시작된 13년 전쟁에서도 승리하여 그들을
완전히 와해시켰다. 이렇게 되자 프로이센은 1525년에 폴란드의 속지가 되었고, 1490년에 카지미르 4세는 헝가리의 왕위까지 겸임하게 되었다.
16세기에 들어 폴란드는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아 문화와 종교·사회 전반에 걸쳐 역사적 부흥기를 맞았다. 1543년에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한 저작을 내놓았으며, 종교면에서는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여 교조적인 중세의 종교 행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한편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러시아의 팽창에 대항하여 1569년에 공식적으로 합병하였는데,이로써 폴란드는 남쪽의 흑해에서 북쪽의 발틱 해에 이르는 대국가를 건설하며
최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이 시기에 들어 귀족 계급의 권력화가 이루어져 귀족들의 투표에 의해 왕이 선출되는 등, 왕은 절대 권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러나 몇몇
왕들은 귀족 계급과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국력을 신장시키기에 힘을 쏟았다. 스테판 바토리 왕은 군사력을 강화시켜 16세기 말과 17세기 초, 두
차례에 걸친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얀 소비에츠키 왕도 투르크 군의 빈 봉쇄를 종식시키고 퇴각시키는 공훈을 세웠다.
한편, 이 시기에 폴란드에서는 우크라이나의 코사크족이 농노제와 예수이트 교단의 카톨릭화 정책 등, 폴란드의 지배 정책에 반기를 들기
시작하였다. 결국 우크라이나 동부 지방은 폴란드의 통제에서 벗어나 러시아에 예속되었고, 1655년 프로이센은 스웨덴과의 전쟁 패배로 폴란드에
대한 세력 확장을 꾀해 왔다. 이러한 국가적 혼란은 왕권의 약화를 가져와 귀족의 동의 없이 왕은 어떠한 권력도 행사할 수 없게 되었고,
1652년에는 귀족 회의에 거부권까지 부여되어 폴란드는 정치 공황기를 맞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경제적 불안과 함께 러시아, 스웨덴, 터키와의 전쟁 등으로 폴란드는 강대국들의 내정 간섭까지 받으며 급격히 쇠퇴해 갔다.
한편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왕은 정치적·사회적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로마 카톨릭과 정교회 간의 분쟁으로 야기된 러시아와의 갈등과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개혁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를 이용하여 주변 강대국들은 폴란드의 내정에 적극 개입하였고 마침내 1772년에 폴란드 분할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폴란드 영토의 3분의 1이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에 분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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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분할 시대(1573~1795)
분할이 되자 폴란드 정치인들은 고질적인 귀족 회의의 거부권을 폐지하고 교육 제도를 정비하는 등 일련의 정치·경제 개혁을 시작하였고,
1791년 5월 3일 신헌법을 공포하였다. 이러한 개혁을 시작한 초기에는 터키와 스웨덴의 폴란드 침공을 우려한 러시아가 폴란드의 개혁을 지원하여
성과가 있었으나 개혁이 완성될 즈음에는 자신들의 기득권이 약화될 것을 우려한 귀족 연합 세력이 러시아에 개입 요청을 하였고, 이를 빌미로
러시아는 폴란드를 침략하였다. 그 결과 폴란드는 1793년 러시아와 프로이센에 의해 2차 분할이 단행되었다.
2차 폴란드 분할이 일어난 후, 폴란드 내에서는 거국적인 봉기가 발생하였다. 특히 타데우시 코쉬치우스코(Tadeusz K ciuszko)는
농도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군대를 조직하여 러시아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의 군사력 앞에는 역부족이었고, 러시아는 이를 계기로 다시
바르샤바를 침공하여 1795년에 3차 폴란드 분할을 주도하여 폴란드의 나머지 영토마저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으로 분할되었다. 이 때부터
폴란드는 1919년에 독립할 때까지 120년 동안 지도상에서 사라지는 비운의 역사를 맞게 되었다.
4. 망국기(1796~1917)
폴란드가 완전히 분할된 때는 독립 투쟁의 시기였다. 1797년 폴란드 군단이 이탈리아에서 창단되었고, 나폴레옹의 1812년 러시아 원정에
10만 명의 폴란드인이 가세하였으며 세 차례의 무장 봉기――러시아에 대항한 1830~1831년 혁명, 프로이센에 대항한 1848년 혁명, 그리고
1863~ 1864년에 러시아에 대항하여 일어난 1월 봉기 등――가 일어났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의 병참 기지로 프로이센이 점령한 폴란드 지역 내에 바르샤바 공국을 세움으로써 폴란드인은 한 줄기 독립의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바르샤바 공국은 나폴레옹 군이 러시아에 패배하여 철수함으로써 붕괴되고 그 결과 1815년, 빈 조약에 의해 폴란드는 러시아
황제에 귀속되어 반자치 국가인 폴란드 왕국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세 차례의 민중 봉기를 지나고 나서 반자치 국가였던 폴란드 왕국은 붕괴되고
완전히 러시아에 흡수당하고 말았다.
1864년 봉기를 끝으로 민중 봉기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지만 농민 계층을 중심으로 민족 의식은 꾸준히 이어져 갔으며 경제·사회 제도도
부분적으로나마 발전되어 나갔다. 특히 프로이센 점령 지역은 독일의 산업화로 공업이 발달하게 되었고, 오스트리아 점령 지역은 발전은 늦었지만
갈리시아 지방에서는 자치권이 인정되어 활발한 민족 운동과 정치 활동이 전개되었다.
해외에 망명해 있던 폴란드인들도 독립을 위한 꾸준한 활동을 전개하며 점차 정파나 정당의 형태를 띠게 되었는데, 1882년에 폴란드 최초의
사회주의적 정당인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가 비밀리에 조직되었고, 1883년에는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oura)가
이끄는 좌파 그룹들이 `폴란드 왕국 사회 민주주의'를 조직하여 폴란드의 독립에 반대하고 러시아의 혁명 세력들과 협력하는 국제 공산주의의 산파
구실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피우스드스키가 이끄는 폴란드 사회당의 일부 세력이 1908년 로자 룩셈부르크가 이끄는 정당에 가세하여 폴란드 최초의
공산당인 `폴란드 공산당'을 창당하였다.
5. 독립
이렇게 끊임없이 독립에의 의지를 키우던 폴란드는 마침내 러시아 제국의 멸망,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몰락, 그리고 독일 제국의 패망과
함께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주장한 민족 자결주의 원칙에 힘입어 1918년 자력이 아닌 외부의 힘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국가 건설 과정은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우선 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던 지역의 행정 및 경제 제도의 차이,
그리고 민족간의 이해가 상충되어 혼란 상태에 빠졌으며, 피우스드스키가 주도하는 독립 운동파와 드모프스키가 주도하는 민족주의파 간의 갈등이
심화됐고 급기야는 비폴란드계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으로 선출됐던 나루토비치(Gabriel Narutowicz)가 민족주의자에 의해 암살당하기까지
하였다. 결국 신생 폴란드 공화국은 이러한 정치적 혼란으로 당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고, 피우스드스키가 군부의 지지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자 폴란드는 강한 정치적 통제를 가해 독재 국가의 면모를 띠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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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세계 대전중의 폴란드
1930년대에 들어 폴란드는 소련과 독일 제국 등의 세력 확장으로 또 한 번 위기를 맞게 된다 . 특히 1차 세계 대전 이후 세력 확장을
꾀하던 독일은 폴란드와 체코를 비롯한 동유럽에 서유럽의 방관 아래 침략을 시도하였다. 1938년 독일은 마침내 오스트리아와 체코를 침략하여 일부
영토를 점령하고 1939년 8월에 소련과의 비밀 조약으로 폴란드를 침략하였다. 나치 독일은 유태인뿐만 아니라 폴란드인에 대해서도 무자비한 학살을
저질러 폴란드 전체 인구의 20%인 600여만 명이 희생되었다.
7. 공산 정권하의 폴란드
폴란드인들은 나치 독일에 대항하여 폴란드 노동당을 주축으로 지하 운동을 전개하였고, 런던 망명 정부와도 협력해 나갔다. 1944년 7월에
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얄타 회담의 결과로 폴란드는 독일의 일부 영토를 할양받아 국경이 서쪽으로 240km 이동되었다. 한편 폴란드
노동당은 사회주의당을 흡수하여 `폴란드 통일 노동자당'을 결성하고 친소 정부를 수립하였다. 당시 서기장이었던 고무우카(WLadysLaw
GomuLka)는 농업 집단화 정책에 반대하여 실각하였으나 1953년 스탈린 사후, 당 제1서기로 재집권하여 사회주의 체제에 다양성을 둔
독자적인 정책을 펴나가지만 다시 계획 경제 체제로 복귀되어 폴란드 내 산업은 크게 위축되었다.
한편 전후 복구 작업으로 공산당 정부는 6개년 경제 개발 계획을 수립하여 토지 개혁 등 사회주의 원칙에 기반을 둔 국가 건설에 박차를
가했으며, 1952년에는 신헌법이 채택되어 최고 권력 기관인 의회가 구성되었다. 이후 본격적인 사회주의 체제에 돌입한 폴란드는 1970년
12월에 실질 임금 하락에 항의하는 대규모 노동자 시위가 발생하여 고무우카가 실각하고 뒤이어 기에레크(Edward Gierek)가 당 제1서기로
취임하여 경제 재건을 위한 산업화의 추진과 교회와의 관계 개선 등을 꾀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 들어 무리한 중공업 정책은 서방의 기술과 자본에 의존하게 되어 외채가 증가하고 상대적으로 소비재 산업이 낙후하게
되어 심한 소비재 부족 현상을 가중시켰다. 급기야는 1980년 7월, 육류 가격 인상에 항의하는 노동자들의 파업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기에레크가
물러나게 되고, 공산 국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파업권 등의 권한을 가진 자유 노조 솔리다르노시치(Solidarno )가 탄생하게 되었다.
한편 야루젤스키(General Jaruzelski)는 1981년 11월 계엄령을 선포하고 자유 노조를 불법화시켰으며 바웬사(Lech
WaLe瑚a) 등의 자유 노조 지도자와 반체제 인사들을 구금하였다. 계엄령은 1983년 6월 교황의 폴란드 방문으로 해제되었으나 대신 긴급
조치권이 발효되어 폴란드에서는 강압 정치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폴란드 내 사정은 개선되지 않고 계속되는 물가 상승과 임금 하락, 소비재 부족 등으로 사회 불만이 커져 갔고 다시 자유 노조 중심의
노동자들의 쟁의가 잇따르자 1989년 4월, 정부와 자유 노조는 원탁 회담을 갖고 정치·경제 개혁 합의서에 서명함으로써 본격적인 개혁이
시작되었다. 원탁 회의 결과 자유 노조의 합법화와 대통령제의 신설, 양원제 실시 등이 합의되었고 1989년 6월 4일에 실시된 전후 최초의 자유
총선에서는 자유 노조가 압승을 거두게 되었다. 이로써 폴란드는 동구 최초로 비공산 연립 정부가 출범하게 되었고, 이는 동구 개혁의 신호탄이
되었다. 이어 자유 노조 정부는 국호를 `폴란드 공화국'으로 바꾸고 헌법의 사회주의 국가 조항을 삭제하여 본격적인 시장 경제 체제에 바탕을 둔
민주주의 국가를 지향하게 되었다. |
◈ 폴란드의 약사
1. 건국에서 2차대전까지
-966년 : 폴란드왕 미에슈코1세(Mieszko)의 세례로 폴란드 역사 시작(피아스트 왕조)
-1399년 : 야기엘로니안 왕조 시작
-1572년 : 귀족 공화정(선출왕 시대)
-1795년 : 제 3차 폴란드 분할(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의 폴란드 지배)
-1918년 : 독립 및 폴란드 공화국 성립
-1939-1945년 : 나치 점령시대
2. 2차대전이후
-1956년 : 포즈난 폭동
-1970년 : 발틱 3개도시 폭동
-1980년 : 그단스크
조선소 폭동 및 자유노조 출범
-1981년 : 야루젤스키 장군, 계엄령 발효(1983년까지)
-1989년 : 원탁회의, 자유총선,
최초의 비공산 정부탄생
-1990년 : 바웬사 대통령 당선
-1993년 : 좌파세력 총선 승리
-1995년 : 민주좌파연합 당수
크바스니에프스키 대통령 당선
-1997년 9월 : 우파세력 총선 승리
-1999년 3.12 : NATO 가입
-2001년 9월 :
좌파세력 총선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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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명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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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광산(비엘리치카
: Wielicz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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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Warsza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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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수도. 면적 445㎢. 인구 165만(2002). 폴란드 중동부(中東部) 마조프셰지방에 있다.
시가지는 비슬라강 중류 양쪽 연안의
하안단구 위에 형성되어 있다. 비슬라강 유역의 평야는 북독일평야에서 광대한 러시아평원에 이르는 구조평야(構造平野)의 일부이다. 바르샤바는
비슬라강 중류유역의 농업지역 중앙에 위치함으로써 경제적으로 후진지역 속에 섬처럼 있는 대도시이다.
1월
평균기온 -3.3℃, 7월 평균기온
18.1℃이며, 겨울은 춥고 여름은 지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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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좋다.
제 2 차세계대전 후 폴란드의 경제성장 거점으로 발전하여 인구는 1950년 83만에서 60년
116만, 70년 135만으로 급증하였다. 공업은 금속·기계공업이 중심을 이룬다. 기계공업은 전체 공업생산의 62.3%(1979)를 차지하며,
특히 자동차(전국 생산의 33%)·트랙터(100%)·텔레비전(68%) 등이 중요 생산품이다. 그 밖에 화학·금속가공·식품·섬유 등 여러 공업이
들어서 있다.
시 북부와 비슬라강 오른쪽 연안에 새로운 공업지구가 건설되었고, 주변의 위성도시인 우르수스·제라니·프루슈코프 등은 새로운
공업지역이 되었다. 바르샤바는 수륙공(水陸空)의 교통상 요지로서 레닌그라드·모스크바·베를린·파리·빈·소피아 등지로 향하는 국제열차가 바르샤바
중앙역에서 발착한다.
시 남부의 오켄체국제공항에서 동서유럽 각 도시로 가는 항공로가 개설되어 있으며, 비슬라강에 있는 하항은 운하망에 의해
드네프르강·오데르강·엘베강과 연결됨으로써 내륙수운의 중심이 된다.
학술·문화·예술관계의 시설로는 폴란드과학아카데미와 그에 속한 여러 연구소,
1818년 창립된 바르샤바대학과 26년 창립된 공과대학 등의 고등교육기관 및
국립박물관·역사박물관·오페라극장·교향악단·국립도서관·바르샤바공공도서관 등이 있다. 또한 1927년 이래 5년마다 개최되는 쇼팽국제피아노콩쿠르가
유명하다.
옛 왕궁을 비롯하여 17∼18세기의 궁전은 정부관계의 청사로 이용되고 있다. 남쪽 근교에는 소비에스키 3세의 여름철 이궁(離宮)이었던
바로크양식의 빌라누프 궁전이 남아 있다. 시장광장을 중심으로 하여 14세기 고딕양식인 성 요한성당 등 전통이 오래된 교회가 많이 있다.
◐
역
사
10세기경 취락과 성벽이 형성되고, 15∼16세기에는 마조프셰공(公)의 거성(居城)이 있었다.
1526년부터 폴란드왕국령이 되었으며 96년에 지그문트 3세가 이곳을 왕국의 수도로 정한 이후 발전하였다.
17세기에 스웨덴군의 침입과 페스트의
유행으로 한때 발전이 저해되었으나 그 후 급속히 부흥하여 18세기 후반에는 현저하게 발전하였다.
제 3차 폴란드분할(1795)로 프로이센령이
되면서 인구가 감소하였다.
1807년에는 B. 나폴레옹이 창설한 바르샤바공국의 수도가 되었고, 15년부터는 빈회의 결과 성립한 러시아령
폴란드왕국의 수도가 되었으며, 18년에는 대학이 설립되어 문화·산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30년과 64년에 반(反)러시아봉기가 일어났으며 봉기가
진압된 뒤에는 억압정책이 강화되었으나, 19세기 후반에는 유럽의 여러 도시와 철도로 연결되어 상업의 중심지로 번영함으로써 인구도 증가하였다.
19세기 말부터는 노동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제 1 차세계대전중에는 독일군에게 점령되었으나, 1918년 폴란드공화국의 독립으로 그 수도가
되었다.
제 2차세계대전중에 나치스 독일에게 점령되자 시민의 저항운동이 일어나 많은 폴란드인과 유대인이 억압·학살되었다. 특히 43년의 유대인
게토의 봉기에 대한 진압은 아주 혹독하였다. 또한 44년 8월에는 폴란드인의 봉기가 일어났으나 소련측의 지원을 받을 수 없어 많은 시민이
학살되자 그해 10월 항복하였다. 제 2 차세계대전으로 시의 80%가 파괴되었으나 전쟁 후에 급속히 부흥하였다.
◈ 구시가지(Stare Mias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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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시가지는 바르샤바에서 가장 오래된 지역으로, 포드웨일 거리의 오른쪽에 아직까지 남아있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시장이 있다. 이 곳도 제
2차 세계 대전으로 파괴되었다가 15세기의 외관으로 복구되었다.
구시가지 광장에는 레스토랑, 술집, 카페와 관광객을 상대로 선물을 파는 가게들이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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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 과학 궁전(Palac Kultury i Nau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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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건립된 건물로 데필라트 광장에 있으며 바르샤바의 주요 명소중 하나이다.
37층에 탑높이는 234m이고
전망대는 오전 9시부터 7시까지 개방된다. 이 건물은 폴란드와 구소련의
우정에 대한 구소련 연방의 선물로 건물안에는 3개의 영화관, 4개의 극장, 2개의 박물관과 연구소, 그리고 스포츠
센터와 같은 편의 시설이 들어서 있다.
데필라트 광장은 바르샤바에서 가장 큰 광장으로 군대 퍼레이드나 다른 행사가 열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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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 박물관(Musium Narodow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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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에 Masovian 왕자에 의해 지어진 고딕 양식의 성으로
16세기에 지그문트 아우구스트왕에 의해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1596년 폴란드의 수도가 크라카우에서 바르샤바로 이전된후
이 성은 왕의 거주지로 이용되었다. 1599년에서 1619년, 1740년에서 1747년 두 번 재건되었고 세계 대전중에는 대통령의 거주지로 사용되었다. 세계 대전중 폭격당해 화재로
피해가 매우 컸고 바르샤바에서 반란이 일어난 후인 1944년
독일인들이 건물 전체를 폭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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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전쟁 후 이 성은
꾸준히 복구되어 1974년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지금은 국립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나라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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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스키 공원(Ogrod Sa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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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지엔키 공원과 함께 바르샤바를 대표하는 공원으로,
18세기 폴란드 왕 아우구스트 2세가 문을 연 것으로, 나무가 우거진 사이로 산책을 즐기는 시민이 많다.
바르샤바 구시가지의 중앙광장 근처에 있고, 일명 '승리의 광장'으로 부른다. 원래는 귀족들의 수렵장소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공원은 별로 특별한 것은 없고, 다만 공원 안에는
1925년에 건립된 무명용사들의
묘가 있다. 과거 130년 동안 폴란드의 독립을 위해 각종 전쟁에서 죽은 이름없는
용사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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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넋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무덤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각 전장에서 가지고 온 흙을 14개의 항아리에 담아 유해와 함께 묻었다고 한다.
묘 앞에는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 피워 놓은 성화가 항시 타오르고, 위병들이 하루 종일 묘 앞을 지키고 있다. 한 시간마다 이루어지는 위병들의 교대식과, 일요일 오전 11시에 격주로 열리는 군악대 연주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인근에는 2,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극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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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 십자가 교회(Kosciol Sw. Krzyzza)
신세계 거리가 크라쿠프 교외 거리로 이름이 바뀌는 지점의 코페르니쿠스 동상의 맞은 편에 위치한 건물로 쇼팽과 인연이 있는 교회로 본당 왼쪽에는
쇼팽의 심장이 묻혀있다고 한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다른 건물과 마찬가지로 파괴시켰으며 그로 인해 건물의 1/3이
파괴되었고 그 때 쇼팽의 심장도 파헤쳐 졌다고 한다. 그러나 전쟁 이후 바르샤바 시민들의 노력으로 교회가 복구되면서 쇼팽의 심장도 다시 원래의
장소로 돌아와 묻혔다고 한다. 교회의 내부는 금과 은을 많이 사용해 장엄하면서도 화려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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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 동상
(Pomnik Syreny)
인어는 바르샤바의 상징이다. 바르샤바에는 2개의 인어 동상이 있다.
그
중에서 Vistula 강의 서쪽둑에 있는 인어상이 더
유명하다. 다른 인어상은 구시가지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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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 대학
1818년에 창설되어 폴란드에서는 크라쿠프의 야기에오 대학 다음으로 오래된 대학이다.
대학내에는 코페르니쿠스 상과 미츠키에비치 상, 코슈스코 상이 있다. 코페르니쿠스상은
1830년에 세워졌고 2차 세계대전때 훼손되었으나 전쟁이 끝난 후 재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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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팽의 생가(Chopin
Monu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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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에서 서쪽으로 약 54km 떨어진 젤라조바볼라(Zelazowa Wola)라는 작은 마을안에 있다. 프레데릭
쇼팽이 1810년에 태어난 곳으로 전세계에서 많은 음악 애호가들이 찾는 장소이다.
쇼팽의 생가는 한적한 공원안에 위치해 있으며 이 건물 또한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파괴되었다가 복구되었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9시부터 5시까지 개방되며 쇼팽의 사진과 악보, 악기 가구등을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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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철에는 쇼팽을 기념하는 피아노 콘서트가 5월에서 9월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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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 왕궁 (Royal
Cas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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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란드의 왕국의 상징인 왕궁은 2차대전이 시작되면서 최초로 시작된 독일군의 공습에 의하여 파손을 당한 후 전쟁이 끝날 즈음에는
주춧돌만 남을 정도로 완전하게 파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971년부터 이 왕국을 복구하자는 국민들의 열망에 해외동포들을 비롯하여 고사리손에
이르기까지 이루어진 헌금과 정성으로 완벽하게 재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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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왕궁은 13세기 이 지역을 다스리던 마조비아(Mazovia) 공작의 요새였으며 마조비아 지역의 중심이 바로 바르샤바였다. 14 세기 중반에는
방어용의 큰 탑과 성벽이 세워졌으며 전후 나치가 퇴각하면서 바르샤바를 파괴하는 와중에서 이때 만든 탑의 화강암 기초만 남아있었다고 한다.
15세기 초에는 벽돌로 고딕식 왕국이 세워졌고 수개의 부속건물들이 건립되었다고 한다. 오늘날의 모습을 하게 된것은 야기에오왕조의 마지막 왕이던
지기스문트 아우구스투스왕 시절이었다고 한다. 그는 종래의 건물을 우아드로라는 궁정건축가에게 의뢰하여 오늘날의 르네상스식 왕궁으로 변모시켰다고
한다.
1600년 스웨덴의 침입과 커다란 화재로 많은 손실을 입은 크라쿠프의 바벨궁을 개축하는 대신 수도를 바르샤바로 천도하고 이곳을 새
수도의 왕국으로 거처를 정한 것은 지기스문트 바자 3세였다. 오늘날 구시가의 입구에 높이 서 있는 높다란 원주의 동상의 주인공이 바로 이
지기스문트왕의 동상이다. 이후로 이곳은 역대 왕조의 왕궁으로 사용되었다. 이 왕궁은 제 2차 스웨덴의 침입으로 왕궁이 전소되는등 많은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그때 마다 다시 새롭게 복구되었다고 한다.
16,7세기에는 왕궁이 1572년의 의회(Sejm)를 포함한 정치의 중심이었으며 폴란드에서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이교도들에게 법적으로 자유를 부여한 법안이 통과되는등 커다란 역사적 의미를 지닌 건물이다. 또한 1791년 5월 3일 이곳에서
유럽최초로 성문헌법이 상원을 통과하여 폴란드의 현대국가 형성을 목표로 무혈혁명이라고 까지 불리워진 개혁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폴란드왕국의 마지막 왕이었던 포니아토프스키는 예술분야뿐만아니라 이 왕궁을 아름답게 치장하였던 주인공이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매주 자신의 왕국의 학자, 예술가들에게 만찬을 베풀었으며 그들과 토론을 벌였다고 한다. 1918년 독립국가가 된 이후 왕궁은 대통령의 관저로
사용되었다. 나치의 침략에 의하여 파괴되었던 이 왕궁은 1949년 하원의 의결에 의하여 왕궁 재건법령이 통과되어 왕궁재건 시민위원회의 주도로
1984년에 이르러 완전히 제모습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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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엔키 공원(Park Lazienkowski)
18세기 폴란드 최후의 왕 Stanisław Augustus Poniatowski 에 의하여 만들어진 공원으로 바르샤바에서
가장 넓고 아름다운 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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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공원안에는 많은 꽃들과 수목들이 우거져 있으며 작은 새들과 다람쥐들이 한가로이 노니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시민들의 안식처로서 항상 많은 시민들이 평화롭게 산책하는 공원이다.
러시아의 여황제 에카테리나 2세의 젊은 연인으로서 그녀의 후광으로 왕이 된 포니아토프스키는 정치적으로 무력하여 현실에서 도망치듯
공원의 조경에 열중하였다고 한다. 그는 폴란드영토가 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의 삼국에 의하여 분할되는 것을 막지 못하고 1795년
에카테리나 2세로부터 폴란드 분할문서의 조인을 강요당한 후에, 퇴위하여 1798년 상 페체르부르그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이 때부터 폴란드
국민들은 1918년 다시 독립을 할 때까지 123년동안을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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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이 없는
식민지 생활을 해야만 했다.
포니아토프스키왕은 열렬한 그림애호가로서 당시
이 궁에 소장되었던 회화와 조각품은 5천점이 넘었는데 그가 페체르부르그로 갈 당시에 약 2천점을 가지고 갔었고 그 대분이 현재 페체르부르그의
아르미타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편 포니아토프스키 왕은 사후 망명지 페체르부르그에 묻혀 있다가 그후 200년만인 1998년고국으로 돌아와
왕실의 성당이었던 구 시가의 세례요한 성당의 지하묘지에 묻혀있다.
이
공원의 이름은 와이엔키라는 독특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름의 유래는 이렇다. 당시 이 지역은 귀족들의 수렵장이었는데 이 수렵장에는 수렵을
마친 후 목욕을 하던 목욕탕이 있었던 장소라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지역을 수렵장내의 목욕탕이라고 불렀고, 나중 왕이 이 지역을 사들여
자신의 별궁을 짓고 나서도 이 궁에 별다른 이름을 붙이지 않고 그냥 와이엔키 궁이라고 불렀던 까닭에 지금도 여전히 그 지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2차 대전당시에 이 궁에 소장되었던 많은 그림들이 독일로 유출되었고 1944년 큰 화재로 인하여 내부가 완전히 불타는 수난을 겪었으나
복구되어 지금은 국립박물관의 일부로 사용되고 있다.
우야즈도프키에 (Al. Ujazdowskie) 거리에 면한 이 공원의 입구에는 보리수나무아래 쇼팽공원이 조경되어 있고 여기서는
해마다 여름철 주말이면 쇼팽의 피아노컨서트가 열려서 많은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한편 입구의 오른쪽에는 대통령의 관저였던 벨베데르궁이
있다. 1918년 독립후 신설된 폴란드 공화국 대통령의 집무실이었으며 사회주의 시절에는 역대 당 서기장의 집무실이었다. 1990년 사회주의정권이
물러나고 최초로 실시된 자유선거에서 승리하여 대통령이 된 노조출신 지도자 바웬사 대통령도 이곳에서 집무하였으나 임기 말년 브리스톨 호텔 옆에
있는 라지뷰궁으로 집무실로 이전하였다.
한편
공원의 동쪽에는 귀족들이 수렵후 휴식을 취하던 레스트하우스와 화이트하우스가 있으며 유명한 금세기 초 폴란드의 피아니스트이자 정치가였던
파데레프스키의 박물관도 이곳에 있다. 또한 남쪽에는 식물원과 함께 야외극장등이 산재해 있어서 언제나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o
개관시간 : 공원은 상시. 궁전 : 10:00 15:20, 월요일과 경축일 다음날은 휴관
| ◈ 게타 영웅 기념비(Pomnik Bohaterow Getta)
제 2 차 세계대전시 유태인 수용을 위해 나치가 만든 특별 수용지구를 게토라고 한다. 여기에 수용된 유태인들은 스스로 무기를 들고 나치에 도전했으나 완패로 끝났다.
| 그들은 전원 가스실로 보내졌고 게토는 소멸되었다.
기념비는 전후 유태인들의 영령을 위로하기 위하여 세워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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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퀴리 부인 박물관
(Muzeum Mari Skodowskiej)
구시가(Old Town)의 북쪽에 위치한 퀴리부인 박물관은 두번이나 노벨상을 받은 퀴리 부인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박물관이다. 박물관은 퀴리부인이 태어난 생가를, 퀴리부인의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1967년에 박물관화하여
만들었다. 퀴리 부인과 그녀의 남편 피에르의 흉상과 소장품으로는 실험기구, 연구 자료, 여러 기념사진들이 있으며, 방문객을 위한
퀴리부인의 일대기를 담은 영화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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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라노프 궁전(Wilanow Palace)
바르샤바 남쪽 교외의 빌라노프지역에 위치한 빌라노프 궁전(Wilanow)은 와젠키 공원과 쌍벽을 이루는 아름다운 공원에 있는 멋진 궁전이다.
17세기 중엽 회교도의 침입에 대항하여 유럽의 기독교문명을 구출했다는 얀 소비에스키 3세가 바로크 양식으로 건립한 여름 별궁으로
규모가 웅장하고 매우 아름답다.
폴란드의 베르사이유라 불리우며, 프랑스의 베르사이유궁전을 모방한 이 건물은 소비에스키왕의 왕비가
정성스럽게 조경한 프랑스식 정원도 유명하다.
지금 일부는 박물관으로도 사용되고 국가 영빈실로도 사용되고 있다. 정원 관람과 궁전
견학을 모두 하려면 최소한 3시간 이상 걸린다.
o
개방시간 : 09:30~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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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트라
산(Ta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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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파티아 산맥에서 제일 높은 산인 타트라 산은, 높이 솟은
봉우리들과, 빙하 호수까지 수백미터를 돌진하는 급한 바위 절벽으로 된 지대이다. 겨울은 길고 여름은 짧으며, 눈이 모두 녹을 만큼 습하지는
않다. 늦은 봄과 초가을은, 날씨가 좋은 맑은 계곡과 관광객이 별로 없는 한가함을 즐길 수 있어 여행하기에 최상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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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트라 산기슭
북쪽에, 점 찍어 놓은 것 같은 몇 십개의 작은 마을로 된 포드하레(Podhale)지역이 있는데, 그 곳에서는 아직도 전통적인 고산지대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이곳에는 셀 수 없이 많은 길이 있는데, 피크닉, 소풍, 산악등반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즈도 다양하다. 이들 중 가장 장관을
이루는 도보코스는, 동부에 이르는 짜브라트 파스(Zawrat Pass)로 가는 길이다. 그 곳은 카스프로비 비르히(Kasprowy
Wierch)까지 가는 케이블 카로 갈 수도 있고, 아니면 산등성이를 따라 난 길도 많이 있다.자코파네(Zakopane)는 폴란드 타트라 산맥의
관광 핵심지이다. 쾌적한 이 마을은, 특히
여름과 겨울 휴가철을 벗어나면 더할 나위 없다. 산에서 스키와 하이킹을 즐기기에도 정말 좋다. 바르샤바로 가는 버스는 매일 한 대 있고,
크라코프와 다른 주요 중심지로 가는 버스는 하루 몇 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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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코프(Krak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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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0년 동안 황실의 수도였던 크라코프는, 폴란드 역사의 산
증인이고 그 역사를 빨아들인 도시이다. 게다가 과거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손상되지 않아, 다양한 시대의 고전 건축물들을 풍부히 볼 수 있다.
크라코프 상공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마천루가 아니라, 20세기 산성비에 의해 흠집이 난 오래된 교회의 뾰족 첨탑들이다. 그러나 크라코프는 과거
사건들을 조용히 기념하는 역사의 도시가 아니라, 그 역사의 성격과 정신을 가지고 살아 있는 도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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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에 둘러 쌓인 이 곳의 구시가는,
아담하고 아주 매력적이다. 광장 시장(Main Market Square)옆으로 역사적 건물들과 박물관, 교회가 있다. 10세기 성 아달베르트
교회(St Adalbert's Church)는 가장 오래된 교회 중 하나이다. 관대하고 열정적인 신부를 만난다면, 개종한 프란체스코 교회 건물에
있는 관을 열어줄 지도 모른다. 이 안의 미이라를 볼 수 있다. 가장 가 볼만한 박물관 중 하나는
크자르토리스키(Czartoryski)박물관으로, 아시아의 수공예품과 무기뿐만 아니라 인상적인 유럽 예술품도 전시되어 있다. 크라코프는 오스카
쉰들러가 늘 다니던 곳으로, 그의 이야기와 스필버그 영화 촬영 장소를 돌아보는 투어가 있다. 버스와 기차 정류장은 구시가 북동쪽 끝 부근에
나란히 위치해 있다. 500m 반경 이내에 있는 호스텔과 식당들은, 숙박가격과 식당메뉴를 내 건 광고판 불빛에 덮여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 ◈
바벨성 (Zamek krolewski na Wawel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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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 남쪽 비스와강 상류에 위치하며 성의 역사는 9세기 초부터 시작된다. 성 내부에는 중세때의 갑옷,
검, 장신구, 초상화등을 전시하고 있다. 근처에 녹지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경관이 수려하다. 화재 후에 고딕 양식의 바벨성은 1502년부터 1536년까지 르네상스 양식으로 개조되었다. 주변에는 커다란 정원이 있고 문 네 개와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복도가 있다. 바벨성은 현재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으며 진기한 보물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 바벨 대성당은 세 번째의 고딕 양식의 건물이다. 20개의 예배당 가운데서 황금색의
돔으로 덮힌 지그문트 예배당(Kaplica Zygmuntowska)은 르네상스 양식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보여주는 아름다운 건물이다.
대성당 내부에는 폴란드 왕의 석관과 가치있는 예술품들이 있다. 그리고 지하에는 폴란드 왕과 영웅들의 묘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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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성당 탑에 올라가면 특별한 경우에만 울리는 유명한 지그문트 종이 있다.
도시의 소음에도 불구하고 수 km까지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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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폴란드 역사가 시작 때부터 이곳 크라카우 바벨 언덕은 세속적이면서 종교적인 중심 지었다. 서기 1,000년에 크라카우를 주교 관할구로
만들면서 바벨 언덕에 처음 대성당을 만들었다. 바벨성은 11세기 중엽부터 17세기 초까지 폴란드 통치자들의 거주지 기능을 하였다.
현재의 모습은 로마네스크 양식에다 고딕 양식을 가미한 것이지만 현재의 모습은1504-1548년 사이에 알렉산더 왕(1501-1506)과
야기엘로 왕조의 지기시문드 (Sigismund) 1세(1506-1548) 때 갖게 되었다.
지기시문드 3세가 1609년 크라카우를 떠나자 바벨성은 왕실로서 기능을 상실 했으며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1795년 3차 분열 때 왕실 이었던 곳은 오스트리아 군대의 병영으로 사용하였다. 19세기에도 계속해서 사용했고 1905년이 되서야
군인들이 이곳을 떠났다. 그 이후로 역사적인 유산들을 보존하는 일을 시작 할 수 있게 되었다.
1930년이 되면서 바벨 성안의 박물관은 국가 미술 수집의 일부로 보호를 하였다. 동시에 폴란드 대통령의 공식령의 공식적인 거처로
사용되었다.
2차 대전 동안 이곳은 폴란드 정부 장관과 독일군 한스프랑크의 집무실로 사용 되었다.
폴란드가 자유를 찾게 되자 다시 박물관을 복구
시켰다.
1992년 대대적인 보수 작업을 하여 바벨 성 왕실과 대성당 주변을 정비하였다. 그 뒤 주교 관구 천 년을 기념하여 2,000년도에
크라카우를 “2000년 유럽 문화 도시”로 지정하여 많은 행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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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The Cathedral)
대성당은 14세기에 고딕 양식으로 만들면 서부터 대관식과 장례식을 했던 곳이고 폴란드 수도가 바르샤바로 옮겼을 때에도 이곳을 대관 교회로 사용
했다.
역대 폴란드 왕과 왕비 그리고 영웅들이 묻혀 있는 이곳은 폴란드 국민들의 사당인 셈이다.
언덕 위에 만든 이유는 기독교를 전파 시키고 확대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리고 이 곳은 여러 가지 다양한 건축 양식들을 사용해서 조금씩 개
보수를 해왔다.
특히 내부에 있는 예배당들은 그런 흔적들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지그문트 예배당)
그리고 이곳은 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hn Paul II)가 젊었을 때 이곳에서 사제 생활을 했던 곳이다.
들어가는 입구에서 계단 왼편 위에 아주 특이한 뼈가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뼈들은 체인으로 묶여서 걸려 있다. 이 것들은 고대 고래
발 뼈와 코뿔소 그리고 맘모스의 뼈 들인데 전설에 의하면 이 지역은 고대에서부터 이 바벨 성을 어슬렁거렸다고 한다.
이 지역에서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따르면 체인인 끊어지고 뼈가 바닥에 떨어지면 이것은 지구의 마지막을 알리는 신호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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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The RoyalChambers)
성의 내부 장식이 없는 것은 오랜 세기 동안 이민족들의 출몰에 의한 쓰라린 역사를 나타낸다. 그러나 아주 웅장한 벽장식과 벽에 걸려있는
양탄자들은 과거엔 부유했음을 보여 준다.
왕실은 또한 오랜 기간 동안 보수작업 해왔다는 이유 때문에 방을 다 공개하진 않고 있다. 이곳 박물관 사람들은 가이드 북을 보고 자세히
알고 가라고 한다.
왕실에서 가장 중요 하면서 가장 큰방은 알현을 받던 방이다. 벽면에 장식된 것들은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여정을 담고 있다. 그리고 벽에
걸린 양탄자엔 다양한 종류의 식물과 동물들이 있다.
한때 지기시문드 아우구스트스 (Sigismund Augustus:1548-1572)가 소장하고 있었던 프래밍 지방의 벽걸이용 양탄자는
바벨성의 운명과 역사적인 연관이 아주 많다. 18세기 말, 폴란드가 3국에 의해 분열 되었을 때 양탄자들은 러시아로 피난살이를 했고
1920년에야 다시 바벨 성으로 돌아 왔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첫날 이번엔 루마니아로 보내 졌으며 다음엔 프랑스, 영국, 캐나다를 돌았다.
바벨 성으로 돌아온 것은 1961년이었다.
16세기가 시작되면서 몇몇 바벨성안에 있던 방들을 초기 바로크 양식으로 장식 했다. 방의 대리석 바닥으로 했으며 벽난로를 갖추었고 천장은
금도금한 틀 속에 그린 그림으로 장식했다. 천장에는 가장 이상한 모습의 그림으로 장식을 하고 있다. 16세기부터 전해 오는 소위 바벨의
우두머리들이다. 그 들은 천장을 보는 사람을 다소 멍청한 모습으로 뚫어지게 보고 있다. 그리고 194명의 우두머리들 중 30명만 살아 남았다.
이것은 무엇을 하려는지 아니면 무엇을 말하려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아주 유명한 전설에 의하면 이 방에서 일어난 재판에서 한 우두머리가 말을 하기 시작 했는데 물건 훔친 혐의를 갖고 있는 여인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한다. 비록 여자가 고소를 취하 당했다고 하나 우두머리는 결코 어떠한 판결을 내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입에 나무 재갈이
물리게 만든 것을 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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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agon 전설
아주 오랜 전설에 의하면 바벨성은 용의 동굴 위에 만들었다. 용에겐 매주 가축들을 주어야만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을
납치해서 먹었다 한다.
왕은 용을 해치우는 사람에게 큰상을 내리고 공주와 결혼을 시켜주겠다고 선포를 했으나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중 젊은
구두장이가 해보겠다고 나섰다.
그는 양 가죽 속에 황을 가득 집어 넣고 용이 사는 굴 앞에 놓았다. 용이 이걸 집어 삼키자 몸 속에서 타기 시작했고 불을 내뿜기
시작했다.
용은 심한 갈증에 ‘비스와’ 강에 뛰어들어 물을 마시기 시작 했다. 한참 물을 마신 뒤 용의 몸은 폭발을 했다. 바벨 성 밑 강변을
걸어가다 보면 용의 살았던 동굴과 폭사한 용의 동상을 볼 수 있는데 20-30초 간격으로 불을 뿜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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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마리아 교회(KOSCIOL MARIAC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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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장광장 어디에서도 보이는 성당이 하나 있다. 성모마리아 성당이다. 1290년에 처음 만들기 시작하여 14세기 후반에 완성한 것으로 처음엔
교구성당으로 지어졌다. 특이하게 높이와 모양이 다른 두개의 첨탑이 있다.
높은 쪽은 81m로 후기고딕 양식의 쇠철탑이며 낮은 것은 69m로 둥근
첨탑이다. 두 탑의 높이가 다른 것에는 이곳에 전해져 오는 두 형제의 전설이 있다. 그들은 성당 건축에 고용되었었다. 낮은 탑을 만든 건축가는 욕망에
사로잡혀 형을 죽이고 스스로도 자살을 했다고 한다. 최근에 보수를 했으며 내부는 엄청 화려하다.
이 교회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Veit Stoss 대 제단이며 모둔 방문객들이 찾아오는 이유이다. 이것은 1477년 뉘룬베르크에서 크라카우로 온
독일의 조각가 바이트 스토스(Veit Stoss)가 만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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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이 약 12년 걸렸고 유럽 후기 고딕양식의 걸작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이 장엄한 작품을 충분히 다가가서 스토스가 묘사한 모든 인물들의 근육과 핏줄을 자세히 감상하지 못하는 것을 실망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표현한 인물들은 200명이고 크기는 3cm에서 3m에 이른다. 가운데는 성모 마리아가 실제보다 크게 묘사된 12사도들에게 둘러 쌓여 마지막 잠을
자는 모습을 표현했다. 가장 위에는 예수가 그의 어머니를 천국으로 받아 들이려는 준비를 하는 모습이다.
열고 닫을 수 있는 날개 부분엔 성경 속의 여러 장면들을 표현 했는데 좌측 면엔 예수의 탄생과 동방박사 마기승이 경배하는 모습이 있다.
그리고 우측 면엔 예수의 부활과 천국으로 승천을 나타냈다. 이모든 것들을 폴란드의 수호성인인 St. Stanislaus 와 St.
Adalbert의 초상화가 측면에서 보호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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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이 약 12년 걸렸고 유럽 후기 고딕양식의 걸작으로 평가 받고 있다.
그리고 매시 정각에
꼭대기 쪽에서 부는 트럼펫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전해오는 중세 전설에 의하면 매일 아침과 저녁에 나팔수는 도시 문이 닫히고 열리는 것을
알렸다고 한다. 그리고 화재를 감시 하기도 하고 적군이 쳐들어 오는 것을 알렸다고 한다.
1241년 몽고 군이 쳐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팔로 알리기 시작 했는데 중간에 갑자기 나팔 소기가 멈추고 말았다. 그것은 몽고 군의 화살이
나팔수 목을 관통해서 죽었기 때문이다. 이 후로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트럼펫이 매시 정각에 울리며 역시 갑자기 음악을 멈춘다. 트럽펫은 한
방향으로만 불지 않고 사방으로 돌아 가면서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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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장 광장(Rynek Glowny)
중앙시장 광장은 크라코프의 사교장으로서의 역할을 했던 곳이다. 구시가지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총 4만m²의 넓은 광장이다. 주위에는 옛 크라코프 귀족들의 저택이 줄지어 있다. 광장 중앙의 건물은 직물 회관으로 고딕 양식에 르네상스 양식이 혼합된 건물이다. 직물 회관안에는 관광객들이 기념품을 살 수 있는 많은 잡화점이 있다. 직물 회관에는 18,19세기의 폴란드 조각과 회화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국립박물관의 일부가 있다.
시장옆쪽에 있는 "Bei Noworol"이라는 카페에서는 민속 예술품같은 각 시기의 가구들을 구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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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류관(Sukiennice, The Cloth Hall)
중앙 광장의 또 다른 주요 건축물로 성 마리아 교회 맞은 편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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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리안스카 거리
(Florianska)
플로리안스카 문(Brama Florianska)은 중앙광장에서 구시가로 들어가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3km에
달하는 구시가지 8개의 성벽 중의 하나이다. 바르바칸이라는 방호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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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코프 대학
1364년에는 폴란드의 최초의 대학인 크라코프 대학을 이곳에 세우게 되었고 훗날 야기엘로 대학으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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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플로리안스 문(BRAMA FLORIANSKA)
(ST. FLORIAN`S GATE)
이것은 완벽하게 남은 중세의 성벽과 탑의 일부분이다. 14세기에 만들어 졌으며 성문의 윗 층은 15세기에 첨가되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물결
치는듯한 형태의 모습은 바로크시대에 만들어졌다.
이러한 형태로 남아 있는 성과 성문은 이곳 폴란드에만 존재하는 아주 독특한 양식으로 아주 오래 동안 보존 해야만 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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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토호바(CZESTOCHOWA) 마을
크라코프 근교에는 체스토호바라는 마을이 있는데 야스나고라 수도원은 가톨릭 성지로서 「검은 마돈나」는 성모 마리아의 성화로
기적의 힘이 있다고 믿어지고 있으며 폴란드를 지키는 수호신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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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마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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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의 체스토코바 성모의 역사는 야스나 고라(JASNA GORA = 빛의 언덕)에 있는 성 바오로
은수자회의 수도원이 공경하는 성모화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그러나 이 성화의 기원은 전설적이다. 일반 신자들은 이 성화를 성 루가의 마돈나
이상으로 공경하는데, 그 이유는 성 요셉이 성 가정을 위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식탁위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성화를 조사해본 결과, 5세기 내지 8세기의 것으로 판명되자 그 열기는 더욱 고조 되었다. 그런데 이 성화는 신비스런 여행 끝에 이곳에 모셔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에는 팔레스티나에 있다가 비잔티움으로, 그 다음은 헝가리로, 루테니아로, 맨 마지막에는 베츠성(城)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라디슬라오 오플치크 왕자가
전리품으로 이 성화를 획득하여 체스토코바로 옮겨 온 뒤, 1384년에 성 바오로 은수자들에게 넘겨준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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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430년에는 약탈자들이 침입하여 많은 손상을 입혔는데, 국왕 라디슬라오 야기엘로가 아우구스부르그 궁중 미술가를 불러 복원시켰다. 그런데 이 미술가는 원상 회복을 시킨 것이 아니라, 비잔티움과 서방 양식을 혼합하였던 것이다. 체스토코바의 마돈나는 "호디지트리아"로 알려진 동정
성모님의 모습인데, 이 말은 "성모 마리아가 당신 왼팔에 안고 있는 거룩한 예수 아기를 오른 손으로 가리키고 있는 모습"이란 뜻이다. 이
성화의 신비스럽고도 극적인 역사가 대중적인 공경을 불러일으키고 순례자들의 발걸음을 그치지 않게 한다. 그리고 1402년에 일어난 첫 번째 기적
때문에, 이 성모상은 "병자의 구원" "자비의 어머니" 그리고 "폴란드의 여왕"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1957년까지 대개,
1,500회의 기적 이야기가 보고되어 있다.
처음부터 이 성화는 정치적 불안 시대에 살던 수도자들과 기사들 그리고 치유의 은사 받기를 간절히
바라는 병자들, 교회의 일치를 희구하여 기도해온 신자들로부터 큰 공경을 받았다. 또
폴란드의 통치자들도 그들의 왕관과 홀을 성상 발아래 두고
동정 마리아께 선정을 서약했고, 마리아를 여왕으로 모시도록 명을 내리기도 하였다.
15세기에는 금으로 된 식탁이 등장했고, 16세기에는
동정녀와 아기 예수에게 왕관이 씌워졌는데, 이것은 라디슬라오 4세의 선물이었다고 전해온다.
1655년, 야스나 고라의 수도자들이 스웨덴의 침략을 기도로써 물리친 다음부터 순례자들이수 없이
몰려왔고, 성모님의 발현으로 적을 격퇴하였음에 감사하였다. 이 때문에 폴란드 의회는 이 축일을 수도자에게 감사드리는 날로 선포하였고,
1764년에는 폴란드가 성모 마리아께 은혜 입은 것을 영원히 갚아야 할 것이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18세기에는 폴란드가 독립을 잃게
되었는데, 이때 성모님은 모든 항쟁의 수호자가 되셨고, 민중들은 마리아를 해방과 국가 통치권의
수호자로 열렬히 모셨다. 그러므로 침략자인
러시아는 순례를 금지시키고, 이 성상을 제거하려고 애썼다. 이 때, 그들을 비웃는 희화를 비롯하여 성모님께 더욱 매달리기를 호소하는 책자들이
쏟아져 나왔고, 또 체스토코바의 성모 성당이 최초로 건립되었다. 지금은 전 세계 270여 개의 성당들이 이 성모상의 이름으로 봉헌되어
있는데, 미국에만도 27개 성당이 있다.
단체 순례는 14세기부터 시작되었고, 17세기경에는 순례자들의 수효가 연간 4~6만이었으나, 1717년에는 20만명이 한꺼번에 몰려들기도 하였다. 그 후 19세기에 이르러 폴란드가 자유를 잃게되자, 야스나고라 수도원은
폴란드 애국주의의 중심이 되었으며, 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국민들이 나찌에 항거하며 이 수도원까지 행진하여 그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므로 이
성모님과 성당은 폴란드 국민의 힘의 원천이다. 이리하여 폴란드는 천주의 성모님께 봉헌되었는데, 폴란드의 신앙은 체스토코바의 성모 손에
달렸다고 국민들은 인식하고 있다.
공산
치하에서도 폴란드 정부는 이 성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온갖 교통수단을 차단하여
순례를 방해하였다. 그러나 1979년, 한 해에만도 바르샤바까지 도보로 걸어온 순례객들의 수효는 4만 명이 넘었다. 이런 여행자들 중에는 미국의
케네디 형제들, 라 피라, 알도 모로 등등이 유명하고, 이탈리아의 "일치와 해방" 운동 단체들이 순례하여 폴란드 국민들에게 큰 감명을
주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야스나 고라 수도원은 폴란드의 영적 수도로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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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Auschwi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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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라코프에서 서쪽으로 60㎞ 정도 떨어져 있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폴란드 남부 오슈비엥침(Oswiecim)(독일어명은
아우슈비츠)에 있었던 독일의 강제수용소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를 점령한 독일군은 비밀리에 이곳 교외에 거대한 강제수용소를 건설하여 군
포로는 물론, 유럽 각지에서 연행한 일반시민(주로 유대인) 25만 명 정도를 대량 수용하였다. 수용소를 40개의 캠프로 나누었는데, 피수용자는
강제노동과 영양실조·전염병으로 사망하거나 또는 ‘욕실·청결·건강’이라는 등 거짓 푯말이 붙은 가스실로 연행되어 학살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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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된 자의
금니·모발 등은 자원으로서 회수되었다.
1945년 1월, 국제연합군에 의해 해방되기까지 약 5년
동안 400만 명 이상이 희생되었다. 67년 4월 수용소 자리에 위령비가 세워졌는데, 제막식에는 그곳에서 살아남은 사람을 포함하여 약 12만
명이 참석하였다.
수용소로 들어가는 입구 철문 위에는 독일어로 “ARBEIT MACHT FREI(일하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라고 쓰여 있다. 바로 영화 "쉰들러
리스트 Schindler List"에도 낯익은 간판이다. 제 2수용소인 브르제진카는 제 1수용소 정문으로 나갈 때 오른쪽, 기차역 방향으로 제
2 수용소로 가는 안내판이 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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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수용소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전체가 28동으로 되어 있는데 빨간 벽돌 건물들로
되어 있으며 현재는 박물관과 전시관으로 꾸며져 있다. 티트론 가스실과 시체소각로와 2만 명을 총살한 벽, 환기가 안되는 방, 수용소에 있던
사람들의 구두, 모자, 의복, 식기, 편지 등이 전시되어 있고 그 당시의 끔찍한 흔적들이 생생히 남아 있다. 이곳에서 「안네의 일기」로 유명한 안네의 어머니가 숨졌고 안네와 안네의 언니는 아우슈비츠에
수용되었다가 베르젠 수용소로 옮겨진 후 장티푸스에 걸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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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르케누프(Brzezinka) 수용소
이곳은 아우슈비츠보다는 덜 알려져 있지만 규모는 10배 이상으로 큰 살인공장이라고 할 수 있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죽어
갔다. 원래 300개가 넘는 막사가 있었으나 불타거나 파괴되고, 단지 45개의 블록 건물과 22개의 목재 건물만 과거의 아픈 모습을 간직한 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수용소 안까지 기차가 들어갈 수 있는 철로가 놓여 있어 이 수용소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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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노조의 도시, 그단스크(Gdan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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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 역사, 관광, 자유 노조의 도시, 그단스크는 발틱 연안에 위치한 인구 50만의 도시이다. 1000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르네상스,바로크
식의 건물이 곳곳에 서 있는 구시가지에서는 오랜 역사를 직접 느낄 수 있다.
폴란드 상업의 중심지였고 16,7세기에는 유럽
상업의 메트로폴리스였다. 그단스크는 폴란드의 바웬사가 자유노조의 위원장으로 민주화를 지휘하게 됨으로써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세계 제 2차
대전, 폴란드 자유 노조의 설립과 같은 역사적인 사건을 겪은 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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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해에 있어 발트해안의 박물관으로 지칭되고 있는
조선업이 발달해 있는 곳이다. 명소로는 그단스크 조선소와 베스테르플라테, 넵튠분수, 구시청사, 구지가지의 성모 마리아 교회 등이 있다. 발트해
연안은 아름다운 해변과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어서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많은 휴양객이 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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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시청사(Ratusz Glownego Miasta)
코르젠나 거리에 있는 구시청사는 15세기 때의 고딕식 건물로 이곳에서 가장 자랑하는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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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차례에 걸쳐 계속 증축되어 왔는데 높이
15m의 탑에서 시 전경을 내려다 볼 수 있다. 현재 이 건물은 이 도시의 역사적인 수집품, 예술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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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금요일은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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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단스크의 수호신
넵튠 분수(Neptune
Fount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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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에 완성된 르네상스 양식의 분수로 구시청사 옆에 있다.
넵튠은 바다의 신으로 항구 도시, 그단스크의 수호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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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베스테르플라테(Westerplatte)
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곳으로 1939년 9월1일에 독일의 홀슈타인호가 발포를 하였고 전쟁이 시작되었다.
발트해 연안에는 전쟁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며, 기념비에는 'NIGDY WIECEJ WOJNY(No More War)'라는 글귀가 흰색으로 씌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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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상징인 그단스크 조선소
자유 노조 '기념 연대비'
1980년 8월 레닌 조선소의 노동자였던 바웬사가 노조를 결성하고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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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상징 레닌
조선소(1989년 그단스크 조선소로 이름이 바뀜.)앞에 있는 3개의 기둥은 민주화를 외치다 희생당한 이들의 이름이 적힌 자유노조 기념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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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의 벽돌 건물
성모 마리아 교회(Kosciol Najswietszej Marii Panny)
14~16세기에 160년을 걸쳐서 만들어진 건물로 폴란드에서 가장 큰 교회이고, 벽돌 건물로는 세계 최대이다. 세계 제 2차 대전으로 인해
완전히 파괴되었으나 전후 복구되었다.
탑의 높이는 78m이고 이곳에서 연주회등 문화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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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우기 광장(Dlugi Targ)
구시가지의 대표적인 광장으로 옛날부터 여러 행사가 열리던 곳이다. 주위에는 옛 귀족들의 저택이 있고 이곳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을 상대하는 많은
노점상이 즐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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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투어(Star
Tour)
☎:(02)723-6360
http://www.startour.pe.kr
블로그
: 스타투어
E-mail:startour2@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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