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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단의 정식 명칭은 요르단 하심 왕국(The Hashemite Kingdom of Jordan)이다.
수도는 암만이고 아랍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북쪽은 시리아, 동쪽은 이라크, 남쪽은 사우디아라비아, 서쪽은 이스라엘과 접하며 홍해 북단의
아카바만 연안에 유일한 항구인 아카바항이 있다. 요단강 및 사해의 동안에 해당하는 구(舊) 트란스요르단 지역과 요단강 서쪽 기슭에 있는 구
팔레스타인의 일부로 구성된다. 요단강 서안지역은 유대, 그리스도, 이슬람 세종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이 있으며, 1967년의 제3차 중동전쟁 이후
이스라엘에게 점령당하여 현재 팔레스타인 문제의 초점이 되어있다.
기원전 페트라를 건설한 나바테안(Nabatean)이 이 일대를 통치하며 강력한 국가로 떠오르지만 다른 중동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오스만 터키의
오랜 지배를 받게된다.
제1차 세계 대전이후 무력해진 터키로부터 독립하지만 또다시 오랜 세월 영국의 통치하에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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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5월 영국
런던 협정으로 요르단은 완전히 독립하게 되지만 1951년 요르단을 통치하던 압둘라(Abdullah) 왕이 피살되고 후세인(Hussein)이
국왕으로 즉위하여 1999년 2월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기 까지 중동 평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현재의 요르단 왕국은 성경에 요단 동편 지역으로 언급되는 곳으로, 주요한 4개의 강을 경계로 몇 개의
지역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최북단은 골란(바산) 고원 지역으로 갈릴리바다 남단 동쪽에 위치한 야르묵 강의 북쪽을 말하며, 야르묵 강에서
아르논 강까지는 길르앗 산지로 구분된다. 아르논 강의 남쪽 지역은 세렛강을 경계로 북쪽의 모압과 남쪽의 에돔이 위치해 있으며, 또한 길르앗
산지의 얍복 강과 아르논 강의 동부는 암몬의 지역이다.
◈ 개
요
o
공식국명 : 요르단 하쉬마이트 왕국(The Hashemite Kingdom of Jordan) o
위 치 : 이스라엘,
시리아, 이라크, 사우디, 이집트와 접경
o
기 후 : 반건조성,지중해성 기후(1월 : 섭씨 4-12℃. 8월 : 섭씨 18-32℃)
o
면 적
: 91,869㎢(WEST BANK 제외), 남한크기와 비슷
o
인 구 : 539만명(2000년, 요르단 통계청자료, PA난민등 포함)
o
수 도 : 암만(AMMAN, 인구 약 200만명)
o
주요도시 : 자르카, 이르비드, 아카바, 카락, 쌀트
o
민 족 : 아랍족(베드윈 및
팔레스타인, '팔'계 2/3 차지)
o
언 어 : 아랍어(영어도 널리 통용)
o
종 교 : 회교(수니파) 90%, 기독교 10%
o
정 체 : 입헌군주제
o
독 립 일 : 1946. 5. 25.
o
국 경 일 : 5. 25(INDEPENDENCE
DAY)
o
국가원수 : 압둘라 국왕(ABDULLAH BEN AL HUSSEIN)
o
의 회 : 양원제 (하원 110명 민선, 상원 40명 국왕 임명)
o
사법제도 : 민사, 종교, 특수법원
o
인구밀도 : 56.4명㎢
o 시 차 : 우리 나라보다
7시간 늦음. (SUMMER TIME 실시할 경우 6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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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
리
요르단의 면적은 약 91,880㎢로, 요르단의 북쪽과 동쪽에는 거의
사막에 가까운 요르단 고지가 자리잡고 있다. 서북쪽은 이라크, 동남쪽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접해 있다. 요르단 대지는 빗물에 의한 협곡이 많지만
시리아 국경 방면은 거친 풍토이며, 남쪽은 표고가 1,727미터에 달한다. 동요르단의 고원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요르단 지방의 산들이 양떼처럼
뻗어있는 것이 보인다. 그 서요르단 지방과의 경계선을 달리는 것이 구르 지구대로 이곳은 요르단 강 골짜기, 사해, 아라바 지구로 뻗었다가
마지막으로 홍해에 이르고 있다. 반면 요르단 강 서쪽은 현재의 이스라엘이다. 국토의 5분의 4가 사막과 불모의 산으로, 풍부한 것이라고는
광물자원뿐이다. 사해의 칼리염, 암만지방의 인산염 등이 중요한 수출품이다. 이밖에는 직물, 가죽, 시멘트업 등이 발달되어
있다.
| ◈ 기
후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를 나타내는 요르단의 여름은
건조하고 더우며 겨울은 가끔씩 눈이 내릴 정도로 춥다. 건기(5-10월)와 우기(11-4월)로 분명히 구별되며, 우기에는 집중적인 강우가 있다.
◈ 통
화
요르단 디나르(JD: 1JD=1000fils)로, 500 fils, 1,
5, 10, 20JD짜리 화폐와 1,5,10, 20, 25, 50, 100, 250, 500fils의 주화가 있다.
◈ 전압
- 220V, 50H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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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경일
➀ 1월10일 라마단의 마지막 날
➁ 3월18일 희생의 축제일(The
Feast of the Sacrifice)
➂ 4월8일 이슬람 신년
➃ 5월1일 노동절
➄ 5월25일 독립기념일
➅
6월16일 마호메트 탄생일
➆ 11월30일 라마단 시작일
➇ 12월31일 라마단 마지막 날
☞ 라마단 기간 중에
무슬림들은 낮에 아무 것도 먹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기간동안 낮에는 문을 열지 않는 식당들이 있는가 하면 문을 열어도 음주와 흡연을
금하는 곳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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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
사
유목민(베두인)이 천막을 치고 점점이 흩어져 방목생활을 하고 있다. 사막과 바위산의 나라.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낙타를 몰고 달리던 무대이기도
하다. 파도처럼 무늬진 흰 사막에 커다란 태양이 떨어져가는 저녁놀의 아름다움을 잊을 수가 없는 사막의 풍경이다.
요르단의 수도
암만은 일공 언덕에 둘러 쌓인 사막 속의 오아시스 같은 곳이다. 요르단에는 로마제국 시대의 유적이 많다. 서쪽으로 이웃해있는 팔레스타인과
마찬가지로 요르단도 제1차 세계 대전 후 오스만 터키 제국 붕괴 후에 생긴 나라이다. 1916년 6월, 아라비아 반도의 히자즈 지방에서 메카의
태수 후세인은 예언자 마호메트가 태어난 하심가의 분가 출신이어서 그 일족은 1천년 가까이 성지 메카의 태수직을 맡고 있었다.
유능한 영국인 고문장교였던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도움을 얻어, 후세인은 [히자즈 왕]이 되어 터키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 아랍
베드윈군은 먼저 엘아카바를 공략하고 이집트에서 예루살렘, 다마스커스, 알렙포로 진격하는 영국군에게 원조 협력하여 그 임무를 다했다. 전쟁에는
승리했으나 전후에 [히자즈 왕위]는 인정되지 않고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게 되었다. 이때 아랍군단을 이끌고 다마스커스에 입성한
후세인의 제3자 파이잘은 [대시리아 왕국]의 국왕이 되었고, 제2자인 압둘라는 이라크의 왕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중동지방의 기득권을 주장하여 1920년에 산레모 회의에서 시리아와 레바논의 위임통치권을 얻었다. 그래서 영국은 1921년 파이잘에게는 이라크를,
압둘라에게는 요르단 강 동쪽의 영국 위임통치령을 맡기기로 했다. 즉 트랜스요르단의 수장인 셈이다. 그러다가 1946년 압둘라가 영국의 지배를
완전히 벗어나지도 않았으면서 독립 트랜스요르단 국왕 자리에 오르고, 1946년 아랍 연맹의 가맹국으로서의 권위와 입장에서 이스라엘의 독립선언에
반대하여 단호히 팔레스타인을 침입하였다. 이 팔레스타인 전쟁(제1차 중동전쟁)에서는 이스라엘군과 격전을 벌여 예루살렘의 일부를 빼앗았는데,
이곳에는 유태인 점령지구에서 도망쳐온 아랍인들이 피난해 있었으므로 휴전 후, 이 지방의 팔레스타인들은 요르단 왕국의 국민이 되기를 결의했다.
그후부터 이 지역은 중동의 화약고로 분쟁이 그칠 사이 없는 지역이 되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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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
사
B.C. 6 - 1세기 : NABATEAN족(아랍족)에 의한 현재의 요르단,시리아지역 통치
A.D. 105년 : ROMA 제국 통치하에
들어감
5 - 6세기 : BYZANTINE 제국(동로마) 통치하에 들어감
6세기 이후 : 이슬람제국통치하에 들어감
1516년 : "오토만 터키"지배
1916년 : 회교창시자 모하마드 직계손 SHERIF HUSSEIN,
영국의 지원하에
OTTOMAN TURKEY에 반란(ARAB REVOLT) ,독립국가 수립시도
1921. 03 : ABDULLAH 토후
TRANSJORDAN국 건설
1923. 05 : 영국, 요르단의 독립을 인정
1946. 05 : LONDON협정으로 영국의
위임통치로부터 완전독립
1946.
05 : HASHEMITE KINGDOM OF JORDAN 탄생, ABDULLAH 토후국왕 즉위
1947. 02 : 헌법공포, 양원의회 창설
1948.
05 : 이스라엘독립으로 팔난민 요르단으로 대거 이주
(제1차중동전)
1949. 04 : 이스라엘과 군사협정체결, 군사분계선 설정
1950. 04 : West Bank 요르단에
합병
1951. 07 : ABDULLAH왕 피살로 장남인 TALAL 국왕 즉위
1952. 08 : TALAL왕 퇴위
1953. 05 : HUSSEIN 국왕 즉위
1955. 12 : 유엔가입
1956. 10 : 제 2차 중동전(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점령)
1967. 05 : 이집트와 상호방위조약 체결
1967. 06 : 제 3차 중동전(6일전쟁) 발발, 이스라엘에
JORDAN강 서안 및 동예루살렘 상실(시나이, 골란고원 점령)
1973. 10 : 제 4차 중동전 발발
1974. 10 :
RABAT아랍정상회담시 WEST BANK에 대한 주권포기
1974. 11 : 국왕칙령으로 하원해산
1984. 01 : 하원재소집
및 Obeidat 내각출범
1985. 04 : Rifai 내각 출범
1986. 02 : 후세인국왕, 대PLO 정치협력 결별선언
1988. 07 : WEST BANK 행정적.
법적 관계 단절
1989. 04 : Shaker 내각 출범
1989. 11 :
하원 총선(80명) 및 상원의원 임명(40명)
1989. 12 : Badran 내각 출범
1991. 06 : Masri 내각
출범
1991. 08 : 후세인국왕 걸프사태에 이라크지지입장 발표
1991. 11 : Shaker 내각 출범
1992. 03
: 후세인국왕, 걸프전이후 첫 미국방문
1992. 07 : 국회에서 정당법 통과
1993. 05 : Majali 내각 출범, 평화협상
추진
1993. 10 : 이스라엘과 평화협상 의제에 관한 협정에 서명 및 미.요.이 3자경제위 구성
1993. 11 : 최초로
1인 1투표제와 다당제에 의한 제12대 총선실시
1994. 07 : 미.요.이 3국 정상, 워싱톤선언 서명
1994. 10 :
요-이 평화조약 서명
1995. 01 : Shaker 내각출범
1995. 04 : 요.이스라엘대사 상호교환
1995. 08 :
Hussein Kamel 이라크대통령사위 일가 망명(요르단, 반이라크노선 추구)
1996. 02 : Kabariti 내각
출범
1997. 03 : Majali 내각 출범
1997. 11 : 제 13대 총선실시(최대야권세력인 무슬림형제단 전위대 "이스람
행동전선당=IAF" 선거불참)
1998. 08 : TARAWNEH내각 출범
1999. 02 : Hussein 국왕 서거 및 현
ABDULLAH 국왕 즉위 (회교창시자 모하마드의 43대 직계손)
1999. 03 : RAWABDEH 내각출범
2000. 06 :
RAGHEB 내각 출범
2003.6.17 :
제14대 총선 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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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명소 |
암만(Am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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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만은 현대의 하시미트 요르단 왕국 (Hashemite
Kingdom of Jordan)의 수도로서 행정부와 왕궁 (까스르 라가단 : Qasr Raghadan)이 자리하고 있으며,
구약성경 신명기에서 처음으로 언급되고 있는 고대 근동의 주요한 고대도시의 하나이다.
구약시대 '암몬의 랍바 성읍(신명 3:11)' 이라고 불렸던 이곳은
물이 풍족한 지역이었으며, 지금부터 약 9천년전,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어 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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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랍바'란 단어는 '주요
도시' 또는 '수도'란 의미를 지닌다.
이곳 랍바가 역사무대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기원전 13세기 암몬 왕국의 수도가 되면서 였다. 랍바를 중심으로 했던 암몬 왕국은 요르단강을 사이에 두고 이스라엘과 인접해 있었다.
두 나라는 적대적 경쟁 관계여서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스라엘에 위협적인
존재였던 암몬 왕국은 주전 8세기 말, 앗시리아 제국에게 정복당한 후 4백년 이상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암몬'은 롯의 후손(창세 19:38)들로서 '나의 백성의 아들(벤 암미)' 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족속들의 가나안 진입과 관련하여 암몬 자손의 땅을 지나 여러 중요 도시들을 점령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민수 21:24-35, 신명
2:19-37)
이 시기에 암몬은 이미 강한 나라로 성장해 있었으며 그 경계는 견고하였다. (민수 21:24)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암몬 자손의 땅 절반 곧 랍바 앞의 아로엘까지를 갓 자손에게 분배하였다.(여호 13:24-28) 암몬 족속과 이스라엘 족속은 서로 적대적 관계에 있었으며, 따라서
종종 전쟁이 벌어졌다. 여호수아에서 사울 왕까지 이르는 판관시대 동안(1,200
- 1.025 B.C.) 암몬 족속들은 모압의 에글론왕과 동맹을 맺고 여러 차례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예리고를 18년 동안, 에훗에 의해 퇴각될 때까지 점령하기도 하였다. (판관 3:12-30)
판관 입다의 시기(판관 10:6-12:6)에 다시 이스라엘을 공격했으며,
사울왕 때(기원전 1,025년경)에 암몬왕 나하스는 요르단강 서편지역 '야베스 길르앗'까지 침입해 들어왔다.
(1사무 11)
다윗의 암몬 정벌의 기록이 있는가 하면, (2사무10:1-14)
솔로몬(c. 970-945 B.C.)은 그의 후비와 빈장들 중에 암몬 여인을 취했고, 그들의 영향으로 암몬 사람의 가증한
몰렉을 쫓고, 예루살렘 근처 실로암에 신전을 지었으며, (왕상 11:1, 6, 7) 그
여인들 중의 한 사람, 즉 르호보암 왕의 모친의 이름은 '나아마'로 암몬 사람이었다. (왕상 14:21)
여호사밧 왕(876-849 B.C.) 때, 모압과 에돔과 동맹을 맺고 이스라엘을 공격하였고, (대하 20장) 웃시야왕(785-740
B.C.) 때에는 유다에 조공을 바쳤으며, (2역대 26:8) 요담왕 때는 암몬을 다시금 정벌하여 통치를
강화하였다. (2역대 27:5)
알렉산더 이후 랍바 암만은 기원전 259년에 프톨레미 왕조에 의해 통치되면서
'필라델피아' 라는 이름으로 불려 지게 되는데, 이는 프톨레미 2세의 이름인 '필라델푸스(Philadelphus,
283 -246 b.c.)' 의 이름을 따른 것이다. 제논 파피루스에서는 이 도시를 '비르타(Birta)', 즉 '성곽 거주지' 라 불렀다.
기원전 218년 안티오쿠스 3세는 이 성을 포위하고 수로를 차단하여
정복하였으나, 기원전 1세기부터 점차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뻗치기 시작한 나바테안 때문에 오랫동안 지배하지 못하였다. 하스모니안 왕조의 알렉산더 야나이가 여러 차례 정복을 시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으며, 기원전 63년에 로마의 폼페이가 이 성을 점령하고 데카폴리스의 하나로
지정되면서 필라델피아는 로마 시대의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도시가 되었으며,
'비아 노바 트라야나(Via Nova Traiana)' 의 중심지로서 홍해와 다메섹을 연결하는 통로가 되었다.
기원 후 4세기초에서 7세기초에 이르는 비잔틴시대에는 기독교 전파와
함께 교회들이 건설되면서 필라델피아는 주교가 있는 요르단강 동편 지역 교회의 중심도시가 되었으며, 니케아 공의회(주후 325)와 칼케돈 공의회(주후 451)에 대표를 보내기도 하였다. 아크로폴리스 서쪽에 세워진
성 엘리야 교회와 성 조지 교회는 6세기에 가장 잘 알려진 교회였다.
635년 아랍의 통치가 시작되면서 움마야드 시대(661-750)를 거쳐 압바시드(750-969),
파티미드(969- 1071), 십자군(1099-1268), 마멜룩(1263-1516),
오토만(1516-1918) 시대를 지나 영국 위임 통치 기간동안 자치 정부를 인정받은 요르단 왕국이 독립한 이후 요르단의 수도로 선택되어 지금에 이르러서는 요르단 최대의 도시로서, 이스라엘의 점령지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연결하는 정치, 경제적 전략지로서 기능하고 있으며, 지금은 인구
160만 명이 넘는 도시로 성장했다.
◈ 로마 원형 극장(Roman Amphitheat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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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운타운(중심가)으로 부터 5분 거리의 공원에 자리하고 있는
로마극장은 암만이 로마 도시의 하나인 필라델피아로 기능했을
당시의 유산들 중에 파손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의 하나이다.
기원 후 138년에서 161년, 안토니너스 피우스(ANTONINUS
PIUS)가 통치했던 시기인 기원 후 2세기에 건설된 것으로, 암만의 동쪽 언덕을 깎아서 곧바로 만들어 놓은 형식으로 대략 6,0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이며, 현재도
공연장으로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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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의 양쪽 옆으로는 '전통 장식 및 의상 박물관'과 '민속 박물관'이
각각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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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데온(Od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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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 원형극장의 오른편 앞쪽에 위치한 작은 극장이 오데온이다. 로마 극장과 같은 시기에 건설되었으며 지금도 한창 복원중이다. 보통 음악회를 위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며, 2세기초에 지어진 이 작은 극장은 수용 인원이 500명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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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님프 신전(Nympha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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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 극장에서 서쪽으로, 후세인 사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돌로 만들어진 건물 하나를 보게 된다. 이것이 2세기 말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님프 신전이다. 몇 년 전만해도
빽빽히 늘어선 주거용 건물들로 가려져 있었던 이 유적은 로마 극장이나 오데온보다 약간 늦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데카폴리스의 일원이었던 고대 필라델피아(암만)의 주요한 물 공급
우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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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타델(Citadel) : 암몬 성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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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발 850m의 고지에 매우 견고하게 건설된 암몬 성은 현재 아랍어로
'자발 엘 깔라아' 로 불리운다. 주변 사방의 깊은 계곡을 사이에 두고 서 있는 성채는 로만 비잔틴 시대의 것이 남아 있으나 아래 성채는 청동기 시대의 것으로 성경 이전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 이 지역의 유적은 많이 손상되고 파괴되어 있다.
지금도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으며 움마야드 왕조에
의해 건설되었던 왕궁(기원후 8세기)은 복원 작업이 한창이다. 6, 7세기 비잔틴 시대에 세워진 교회 터가
발굴되어져 있고, 로마 시대에는 이곳을 중심으로 아크로폴리스가 형성되었다.
로마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161-180)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헤라클레스 신전이 발굴되었으며, 이것은 일부가 복원되어 있는데,
이 자리는 철기 시대 암몬 족속의 신 밀곰의 성소가 있었던 곳이다.
그 외에도 로마시대의 방어 성벽이라든지 움마야드 시대의 물 저장고를 비롯해서 아직도 발굴을 기다리고 있는 많은 유적이 이곳 고대의 랍바성에 자리하고 있다.
주변에는 청동기 시대로부터 철기 시대에 매장을 위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많은 둥굴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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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타델 북쪽 중앙에는 암만 고고학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1950년대에 오스틴 해리슨(Austin Harrison)에
의하여 세워졌다. 규모는 작지만 나름대로의 가치를 간직한 중요한 곳이다. 전시물들은 선사시대부터
주후 170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유물들로써, 각 시대별로 잘 정리되어 있으며, 이러한 유물들을
통하여 요르단을 중심으로 한 중근동과 이집트의 문화가 어떻게 융합되었는가를 가늠해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나바테 문명의 흔적과 이집트의 막강했던 영향력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전시물들 중에는 기원전 180,000년까지 올라가는 유물들에서부터 비잔틴
시대, 아랍 시대, 십자군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전시물이 소장되어 있어 이 지역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성서과 관련하여 1868년 디반에서 발견된
모압 비문의 사본 (2열왕 16:23-29)과 텔 데이르 알라에서 발견된 브올의 아들 발람의 예언에 관한 이야기
(민수 22장-24장)가 기록된 기원전 8세기경의 돌 비문도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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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대(암몬 시대의 망대)
많은 수의 망대들이 암만 주위에 남아 있는데 구약 성경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암만 산의 자흐란 궁전 근처와 아랍어로 '둥근 망대' 또는
'양배추 망대' 라는 뜻의 '루즘 엘말포우프', 바야디르 와디 엣씨르 근처의 키르벳 싸르의 망대 등이 암몬
시대의 망대들로써 이들 망대들은 암만 지역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석회암을 8~22m 크기의 거대한
규모로 쌓았다.
◈ 엣 쌀트(Es Sa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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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만에서 북서쪽으로 30㎞, 해발 790~880m 지점의 두 개의 언덕 위에 세워진 쌀트는
발까(Balqa) 지방의 행정 도시이다. '쌀트'라는 지명은
나무로 둘러싸인 골짜기라는 의미의 라틴어 '쌀투스' 에서 파생된 말이다. 비잔틴시대 때는 '쌀토스 히에라티콘'로 불렸고, 이곳에 주교좌가 있었다.
몽고에 의하여 파괴되었다가 마멜룩 왕조의 쑬탄 바이바르 1세(재위
1260-77)가 다시 건설하였다. 이 당시에 세워진 요새가 아직 남아 있다. 1830년대 초기에 이집트인(viceroy)
이브라힘 파샤(Ibrahim Pasha)의 팔레스타인 원정 기간에 다시 파괴되었다.
마을을 지나가는 길은 오래 전부터 암만과 예루살렘을 연결하던 주요 도로로 쌀트 길로 불린다. 이 길을 따라 가면 요르단 골짜기로 이어진다. 몇 ㎞ 가지 않아서 왼쪽
길을 따라가면 '자발 유샤(Jebel Yusha)'라 불리는 산등성이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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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무슬림의 전통에 의하면 호세아 에언자의
무덤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이곳에 무슬림 사원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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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텔 다미예(Tell Damiyeh) : 아담읍
암만 북서쪽 75㎞ 지점으로 오늘날의 '텔 다미야' 는 성경에 언급되는 아담 읍(여호 3:16)으로, 요단 여울을 지키고 있던 도시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진입을 위해
요르단강을 건널 때 물이 멈추어 쌓인 장소로 성서에 언급되고 있다. 오늘날 다리가 있는 가까운 곳에서 로마시대의 다리를 볼 수 있다.
◈ 자르까 강(Zarqa) : 야뽁강(Jabbok)
암만에서 85㎞정도의 북쪽 지역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개울처럼 규모가 작은 하천이 자르까(Zarqa) 강으로 성서의 야뽁강이다. 이 강은 길르앗 지역을 절반으로 나누는 역할을 하였으며,
동서 교통로로 이용되었다.
◈ 툴룰 엣다합(텔 엣다합) : 브니엘(Peniel)
텔 데이르 알라에서 야뽁강을 따라 약 7㎞ 정도에는 '동쪽 황금의 언덕'이라는 뜻을 가진
'텔 엣다합 엣 사르끼에'지역이 나온다. 이 마을의 서쪽산 주변이 성서의 브니엘(또는 브누엘, 부느엘) 지역이다. 성서는 이곳을 야곱이 하느님의 사자와 씨름한 곳으로
언급한다. 일부 고고학자는 이집트 룩소의 카르낙 신전의 시삭 기념벽화에 나오는 기원전 926년경의 시삭 왕의 원정 기록 중에 나오는 정복 도시 목록의 53번째 도시를
이곳으로 지적한다.
이곳은 유적발굴이 작은 규모로 진행되고 있으며, 초기 철기 문명에서부터
초기 로마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명의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아카바(Aqa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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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카바와 에일랏은 홍해변에 자리하고 있는 쌍둥이 도시이며, 이 중 아카바는 요르단의 유일한 해변 도시로 이스라엘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항구
도시이다. 이집트에서 연결되는 배편이 이곳을 항해하고 있으며, 걸프지역에서 아프리카 지역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항구이기도 하다.
아카바는 고대의 에시온 게벨에 해당하는 곳으로, 오늘날 이곳에는 고대 에시온 게벨에 있었던 솔로몬의
구리 제련소의 흔적이 있다. (신 2:8, 왕상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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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에시온 게벨은 출애굽 여정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진을 쳤던 지역이며, 솔로몬 때에는 국제
무역항으로 발전하였다. - (민 33:34-35, 신 2:8, 왕상
9:26) 10세기 말엽 애굽의 시삭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아사왕 때에 에돔을 점령하면서 여호사밧왕 때에
이르러 다시 복구되어 해상 무역을 재개하였으며 주전 6세기까지 홍해를 통한 해상 무역의 중심지로 그 전성기를 이루었다.
고대에는 왕의 대로가 연결되는 교통로로 이용되었고, 로마시대 때는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와 암만, 페트라를 연결하는
도로망이 건설되어 이 길을 통하여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지역을 오가도록 하였다. 요르단이 아랍화된 7세기 이후에는 아카바 주교청이 자리하기도
하였으며, 십자군 시대에는 십자군들에 의해 요새화 되기도 하였으나. 1170년에는 살라딘에 의해 점령되었다. 1250년 마멜룩이 이 지역을
차지하였고 16세기에는 오토만 터어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이후 아카바는 제1차 세계대전 시기까지 평범한 어촌 마을로 자리하였다.
1차 대전후에는 아랍 혁명의 과정에서 이곳을 점령하여 오토만 터키의 세력을 몰아내나 곧 영국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요르단이 독립한 후, 후세인 요르단 국왕에 의하여 1965년에 해안선이 조정되었다. 후세인 왕은 6000 sq km의 요르단 사막을
사우디 아라비아에 제공하는 댓가로 12km의 해안선을 요르단의 영토로 영입함으로 바다로의 출구를 확보하였다.
아카바는 1940년대에는 보잘것없는 촌락에 불과했으나 1958-60년에 새로운 항구가 건설되고 1965년 관광객 유치를 위해 국제공항 및 호텔
건설을 추진하면서 관광도시로 크게 발돋움하고 있다. 또한 여름 별장과 콘도 등 숙박시설이 들어서고 있어 휴양지로 개발되고 있는 항구 도시로
암만에서 아카바 항까지는 차로 4시간 거리이다.
아카바는 요르단의 유일한 해상 배출구로서 대부분의 교역이(주 수출품은 인광석)
이곳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여름 평균 섭씨 26℃, 봄,
가을, 겨울은 평균 섭씨 20℃내외의 따뜻한 수온을 가지고 있어 거의
일년내내 해상 스포츠를 즐길수 있으며 근해에는 140여종의 각종 산호림(CORAL REEFS)이 울창하게 우거져 장관을 이루고있어 홍해 바다 밑
산호초는 수중 다이버들의 천국으로 알려져 있다.
아카바 남서쪽 해상(배로 30분 거리)에는 파라오섬(PHARAOH ISLAND)이
있는데 AD1116년 십자군 발드윈(BALDWIN)왕에 의해 점령된 후 아랍장군 살라딘(SALADIN)에게 정복당할 때까지(AD 1170)
50여년간 십자군의 전략기지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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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디 룸은 세계 어느 곳에도 뒤지지 않는 극적인 사막 풍경을
가진 곳 중 하나이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아랍혁명 중 이곳에서 오랫동안 머물렀으며 영화 장면 중 상당부분도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넓게 펼쳐진
모래 언덕은 볼 수 없지만 야릇한 풍경, 제벨로 알려진 솟아오른 바위 형상 등을 이곳에서 볼 수 있다. 많은 여행자가 방문하지만 가까이하기
어려운 위엄은 변함이 없다. 유일한 주민은 4000명의 마을 사람들과 베두인 유목민이며 유일한 건물은 거위털 천막과 몇 곳의 콘크리트 상점과
가옥 그리고 사막 순찰대의 본부 건물뿐이다. 호텔은 없다.
룸 마을 주위에는 볼거리들이 몇 곳 있다. 로렌스의 우물은 마을에서 남서쪽으로
2km 떨어져있다. 우물은 단지 괴어있는 웅덩이에 불과하지만 풍경은 놀랄만하다. 제벨 룸의 기슭에는 더 예쁜 샘이 있다. 페트라를 세운 나바테
제국은 룸에도 폐허가된 사원을 남겼으며 이 지역은 타무딕(Thamudic)과 쿠픽(Kufic) 바위 예술품으로 덮여 있다.
그러나 이 지역의
진짜 매력은 사막 그 자체로 차나 낙타를 타고 사막으로 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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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사람들은 단지 몇 시간만 지내고 오지만, 가이드를 동반하는 경우 베두인
가정에서 묵거나 사막에서 캠핑을 하면서 며칠 여행을 할 만한 가치가 있다.
◈ 와디 무집
- 성경지명 "아르논강"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과 건넜던 강. 요르단의
"그렌드 캐넌"으로 웅장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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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라(Pe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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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지명 "셀라" 에돔족의 도시.
이사악의 아들 에사오가 호리족을 몰아내고
정착한 도시, 모세 출애굽 당시 이 곳에 도착. 이
도시를 통과하고자하나 거절당해 사막대로로 우회함. 모세가
바위를 쳐서 솟아나게한 므리바 우물이 있음. 페트라
하룬산 정상의 모세의 형사제 "아론"의
무덤이 있음. BC 4C부터는 아라비아에서 온 나바태족이
이 도시를 장악하여 사막대상들의 무역을 관할. 모래로
만들어진 붉은색의 바이도시로 현재 수많은 건축물들이
남아있음.
요르단의 수도 암만의 서남쪽 150km 지점에 페트라의 유적이 있다. '영원한 시간의
절반만큼 오래된, 장미빛 같은 붉은 도시-' 라고 영국의 시인 존 버곤 신부는 페트라를 묘사하였듯이 붉은
사암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위 틈새의 좁고 깊은 골짜기를 따라 한참을 가면, 갑자기 웅대한 건물의 정면이 나타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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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전 아니면 신전으로 생각되는 헬레니즘 양식의 건물 정면은 커다란 암벽을 파서 만든 것으로 정면에 있는 문으로 들어
서면 복도가 나타나고, 이 복도를 따라가면 암벽을 파서 만든 방들이 나타난다.
페트라 시는 대부분의 건물들을 이와 같이 암벽을 파서 만들었으며, 결코 좁지 않은 지역에 펼쳐진 이곳에는 극장과
온수 목욕탕, 그리고 상수도 시설이 갖추어진 현대 도시 못지 않은 도시가 유령처럼 버티고 있다.
천연의 요새로 사방이 절벽으로 방어된 이 도시는
마치 지하에 구축된 지하 왕국이 연상될 만큼 신비롭다.
나바티안 이라고 불리우는 민족에 의해 건설된 이 도시는
실크로드의 길목으로 수많은 대상들이 들러가는 상업의 요충지로 한때 크고 번창했었으나, 대상 무역의 쇠퇴와 함께 폐허가 되어 여러 세기 동안
발견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이 도시에 대한 이야기가 옛 기록에 나오고 있지만 소멸한 많은 도시들이 그렇듯이 이 도시의 위치도 잊혀졌다.
그러던 중 1812년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
하르트라는 스위스의 한 젊은 탐험가가 현지인 안내자의 안내를 받아 이 웅장한 유적을 발견한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유대 민족을 이끌고, 당시로는
최강의 파라오의 땅을 벗어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의 긴 여행 중, 당시 에돔 왕국의
수도이던 이곳의 통행 허가를 못 받아, 멀리 우회하여 느보산으로 갔다는 전설의 진위를 알 수는 없지만 이곳에는 모세가 지나 갔다고 하여,
'무사와디' (모세의 계곡) 라고 불리우는
곳과 '모세의 샘'이라고 불리우는 우물이 여러 곳에
있어 현대의 순례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현대의 수수께끼 유적의 하나로 남아있는 이곳은, 이집트의 피라밋과 더불어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이며,
최근에는 영화 '인디아나 죤스 / 마지막 성배'의
촬영 장소로 유명해 졌다.
이곳의 고대 세계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거대한 것들이며, 유럽 문명의 골간을 이룬 성서의 무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은 잊혀진 지구상의 변방에 불과한 곳이
되어 버린 곳이며, 황량한 광야에는 남루한 베두윈들이 염소떼를 한가히 몰고있는, 마치 고대세계에서 시계가 멈춰 버린것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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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트라(Petra) : 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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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트라는 요르단이 세계에 자랑하는 국보 1호의 역사적 유적이다. 이곳은 기원전 1400-1200의 에돔과 모압의 접경지역에
자리한 곳으로 구약에서 에돔의 셀라(Sela)로
언급되고 있다.
'셀라'는 히브리어로 바위를 나타내고, '페트라'는 그리스어로 바위를 나타내고 있다. 이 지역은 또한
'바위에 거하는 자들'이라는 뜻을 지닌
'호리 족속'의 거주지였으며, 사사기 1:36에서는 '아그랍빔 비탈의 바위'로 언급된다. '바위' 라 불리우는 이 도시의 이름은 시실리의
디오도루스에 의해 최초로 언급되는데, 그는 나바테안들이 기원전 312년 안티고누스 1세의 공격을 받고 그들의 생명과 음식과 가재들을 이 도시에
숨겨놓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구약의 셀라와 이곳을 같은 장소로 본 사람은 교회사가 유세비우스였으며,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스라엘이 미디안의
다섯 왕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때 처형당한 미디안의 왕 레켐을 페트라의 왕과 동일인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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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이 지역에서 이루어진 발굴 작업으로 이 지역에 적어도 기원전 7000년 경에 문명이 존재했었음이
드러났다. 당시에 농경 문화를 간직한 공동체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부터 에돔이 이 지역을 다스리던 기원전 1200년 사이의 역사적인 정보는
아직 밝혀져 있지 않으나, 이후 형성된 에돔 왕국은 셀라를 수도로 하고 있었으며, 이 에돔 왕국의 실체는 성경을 통하여 추정해 볼
뿐이다.
무엇보다도 페트라는 나바테안들이 남긴 아름다운 건축물들로 인해 그 명성을 얻었다. 유목 생활을 하던 서부
아라비아에서 이주해 온 부족들이 이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6세기의 일이다.
이들은 기원전 580년경 에돔족과 혼합되었으며 기원전
6세기에서 주후 106년경까지 페트라를 중심으로 거주하면서 이곳을 나바테
문명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나바테안들은 왕의 대로를 장악하고 이 지역의 무역과 상권을 주도하였으며, 페트라를
교역의 중심지로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주후 106년 로마에 점령당하기까지 문명의 절정을 이룩하였다.
기원 후 106년 로마의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점령당하였고, 131년에는 하드리안 황제가 페트라를 방문하고 이곳
이름을 '하드리안의 페트라' 라 불렀다. 로마 시대에
아라비아 사막에 새로운 상업로가 개척되면서 페트라의 중심적 역할은 점차 쇠퇴하였으며, 후기 로마 시대에 이르러서는 도시의 상업적 역할보다는
트랜스 요르단과 남부 시리아의 종교적 중심 도시로 자리하게 된다. 주후 4세기에는 콘스탄틴에 의하여 기독교화되었고, 언제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주후 6세기에 있었던 큰 지진으로 인하여 함몰되어 폐허화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 아랍 이슬람이 요르단을 점령한 7세기에서 1812년까지 이곳은 잊혀진 도시가 되었다. 이곳이 발굴되기 시작한
것은 1880년대이다. 1812년 젊은 유럽 탐험가인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
하르트가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에서 카이로로 가는 그의 행로중 이곳에 엄청난 유적들이 숨겨져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해 8월 아랍인으로 위장한 부르크하르트가 우여곡절 끝에 페트라를 찾아내었고, 그의 여행기가 출판됨으로 유럽인들은 비로소 페트라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예루살렘 성서 고고학 연구소의 도미니칸 수도사가 발굴을 시작하면서 1896년에 최초의 보고서를 출간하였다. 그후
1897-1898년에 걸쳐 독일의 부른노우와 도마츠브스키에 의해 무덤과 건물들이 발굴되었으며, 다른이들에 의해 로마시대의 나바테안 도시가
발굴되기도 하였다. 페트라의 본격적인 발굴은 1929년 콘웨이와 호스필드에 의해 이루어 졌고, 그후 1982년에 이르기까지 성 입구의 문을
비롯해 로마 극장과 여러 유적들이 추가로 발굴되었다.
나바테안들은 불후의 문명 유산을 남겼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역사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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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당시 널리
사용되던 아람(Aramaic)문자를 사용하였으며, 지금까지 약 4천점에 달하는 나바테안들의 문자 기록이 수집되었다. 그러나 이들 기록은 지극히
단편적이어서 그들의 역사와 관계된 내용은 거의 없다. 고도의 문명을 이룩했던 나바테안들이 문자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역사와 문학,
사상과 종교를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고대 문명이 앉고 있는 또 하나의 수수께끼다.
나바테안들은 돌을 깎아 웅장한 건물들을 만들었다. 이곳 페트라에는 암벽을 깎아서 만들어 놓은 거대한 암벽 도시의
유적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으며 주변의 경관은 아주 대단하다. 이곳에 나타나는 건축 양식은 초기의 단순하고 투박스러운 나바테안 고유의
건축양식으로 시작해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건축양식을 거쳐 후기의 세련되고 건축미가 넘치는 그리스, 로마식 건축에 이르기까지 시대적 흐름에 따라
건축양식의 변천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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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들의 손은 거칠고 투박한 석공의 손만은 아니었다. 그곳에서 출토되는 질그릇의 문양은 놀라울 정도로
세련되었고, 토기의 두께는 2㎜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고 섬세해 '계란껍질 토기(egg-shell pottery)' 라는 이름이 붙었을
정도다.
》시크 : 하늘을 가릴 듯한 높은
암석들 사이로, 미로와 같은 균열 부분을 따라 2km 정도를 걸어 들어간다. 이 암벽 사이의 좁은 통로를 아랍어로 협곡이라는 의미를 가진
'시크(Siq)' 라고 부른다. 이 시크를 따라가면서도 고대 수로가 벽면을 따라서 이어진다.
》보고 : 페트라의 유적 중 대표적인 것으로 '보고' 라고
부르는 건물을 손꼽을 수 있다. 전면에 6개의 고린도식 석주가 서있는 높이 약 25m의 그리스식 건축 양식의 건물로 기원전 1세기경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 출입구 좌우의 벽면에는 그리스의 이시스신을 상징하는 식물이 조각되어 있고, 2층에 장식된 6개의 고린도식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여인 모양의 양각이 새겨져 있다. 건물 정면 제일 윗부분에는 항아리 형태가 조각되어 있는데, 그 속에 나바테안들이 보물을 숨겨 놓았다는
속설이 전해져 [보고]라는 이름이 생겼다.
》수도원 : [수도원]이라고 부르는 건물은 페트라의 유적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전면의 폭이 50m, 높이가 45m에 이른다. 수도원으로 불리게 된것은, 이 건물 내부 벽면에 십자가 몇 개가 새겨져
있는데서 유래했다. 나바테안들이 이 건물을 세웠던 원래 용도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내부에 십자가를 새긴 것으로 미루어 서기
4세기 이후 비잔틴 시대에는 교회 건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페트라 건물들의 내부는 의외로 단조롭다. 돌을 파내 규모가 큰 직사각형 방들을
만들어놓았다. 건물의 내부 벽면에는 아무런 장식이나 벽화가 없다. 그러나 암석 자체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색깔과 기하학적 또는 물결 무늬들이
방 전체를 휘감고 있어 어떤 궁중 벽화나 장식보다도 현란하고 황홀하다.
》바로의 궁전 : 이집트의 나바테 문명에 대한 영향은
이집트의 건축 양식의 특징인 거대한 탑문에서 볼 수 있다. 페트라의 한복판에 있는 바로의 궁전은 이집트의 파라오가 이곳에 시집온 그의 딸을
위하여 지은것으로 생각된다. 1927년에 이곳에서 있었던 지진으로 일부가 파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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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원형 극장 : 바위산 자체를 깎아서 만든 것으로
나바테안들의 기발한 독창성과 우직한 추진력이 마음껏 발휘된 작품이다. 약 30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너비가 40m에 이르는 로마 원형
극장은 2세기 경의 유적으로, 33층의 계단식 의자가 모두 바위를 그대로 깎아 만들었다. 이 극장은 각종 예술 행사나 오락적 행사를 위한
기능보다는 하나의 제의적 기능을 갖춘 장소로 여겨지며, 왕의 장례식은 물론 각종 회의 및 종교 의식을 치룬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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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 제물의 언덕 : 원형 극장 뒷편 언덕으로
나바테안들이 희생 제사를 드렸던 산당이다.
》왕족 무덤 지역
》열주로 : 기둥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거리로 로마시대의
유적이다.
》두 사자 신전 : 험한 산허리에 위치한 이 신전은
출입구가 병모양을 하고 있으며, 양쪽 벽면에 사자 형상이 새겨져 있어 두 사자의 신전으로 불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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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다바(Mada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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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다바는
암만에서 30㎞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다. 성경에 메드바로 일컬어지는 도시로 출애굽하던 이스라엘이 정복한 도시였다. (민 21:30, 대하 19:7, 사 15:2) 다윗 왕이 암몬을 정벌할
때에 메드바에서의 전쟁 기록이 성경에 나타나 있으며, (대상
19:7) 모압왕 메사의 비문에도 9세기 후반에 이 도시가 모압에 속해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후기 성경 자료에서도 메드바는 모압의 도시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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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67년 마카비 전쟁 당시
'잠브리의 아들들' 이 성에서 나와 유다 마카비의 형제 요하난과 더불어 전투를 벌여 요하난을 전사케한 사실이 있으며, 후에 이곳은 요한
힐카누스에 의해 오랫동안 포위당한 끝에 정복되었다.
이후 알렉산더 야나이의 치세 기간에는 그의 통치하에 있었으며, 그 후 힐카누스 2세는 자기의
형 아리스토불러스와의 전쟁 때 이 도시를 나바테안 왕국의 수도 페트라의 아레타스왕으로 하여금 다시 되찾아 주도록 요청하기도
하였다.
기원 후 106년 마다바는 아라비아 지방의 도시로 편입되면서 기독교 문화가 급속히 확산되어 나갔다.
디오클레시안(Diocletian)의 박해 때에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순교 당하기도 하였고, 기원 후 451년의 칼케톤 회의록에 근거하여 마다바는
보스트라의 대주교 밑에 주교를 가지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기원 후 614년에 있었던 페르시아의 침공에 의해 마다바의 비잔틴 도시는 파괴되었고,
8세기 중반에 이 지역을 강타한 지진으로 잊혀진 도시가 되었다.
1880년 초에 이르러, '키락'(Kerak)에서 그 곳에 사는 기독교인들과 회교도이 종교 문제로 충돌하게 되자,
수적으로 열세였던 크리스천은 추방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이 상황에서 카락의 크리스천들은 황급히 당시 통치자 오토만 터키 당국에 그들이
이주해서 살 수 있는 땅을 배정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러한 청원에 따라, 오토만 제국은 카락에서 북쪽으로 약 85㎞떨어진 곳에 있는 마다바의
땅을 지정해 주었다. 오토만 제국이 오갈 데 없는 카락의 크리스천들에게 과거 크리스천 도시로 명성을 떨쳤던 마다바 지역을 배정해 줌으로서
이곳은 다시 기독교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터어키 당국은 이주자들로 하여금 집은 자유롭게 짓되, 교회만은 과거 비잔틴 시대 교회 건물들이 있던
자리에만 지을 수 있도록 제한하였다. 마다바로 이주한 2천여 크리스천들은 무너진 비잔틴 시대의 교회 터 위에 새 교회를 세우는 작업을
시작했다. 1887년 마다바에 머물던 라틴 선교사 슈마허(G.Schumacher)가 처음으로 도시의 주요 흔적을 찾아냈으며, 1897년에
마다바 지도가 클레오파스 키킬리디스(Cleopas
Kikilidis) 신부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 지도는 지금까지 발견된 로마-비잔틴 시대의 가장 오래된 지도로써 기원 후 542년 11월 20일에 봉헌된
예루살렘의 네아 교회가 지도에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유스틴 황제(기원 후 527-565)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모자이크 지도는
고대 근동지역의 지도로서, 북쪽의 레바논의 시돈과 두로(티르), 남쪽으로는 이집트의 북부 델타 지역까지 연결되어 있다. 이 지도상에는 많은 고대
유적지들과 교회 등이 나타나 있으며, 예루살렘 지역의 지도는 손상되지 않은 채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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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과 성의 이름들이 희랍어로 기록된 이 모자이크
지도는 현대의 지도 그리기 기법에 기준 하면 사실적 균형미가 많이 떨어지나, 성서지리학의 연구결과 이 지도의 정확성은 더욱 확증되고 있어, 이
지도의 역사적 가치를 더욱 높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이 지도가 가지고 있는 지리학적 - 지형학적 가치는 의심할 필요 없이 매우
높다.
마다바 모자이크 지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자이크 예술에 관해서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모자이크(mosaic)는
여러 가지 색깔의 자연석을 깎아 주사위 모양으로 만들고, 각석들을 정교하게 배치하여 작품을 만든 것이다. 작품의 주제는 동물, 식물, 조류,
어류, 자연풍경을 비롯해서 현란한 기하학적 문양에 이르기까지 매우 많다. 각석의 크기도 0.5㎝ 정도로 작고 세밀한 것부터 3∼4㎝ 이르는 큰
것까지, 모자이크 장인의 솜씨와 작품의 주제에 따라 다양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각석의 크기가 작을수록 고급 작품으로 인정받는다. 모자이크
예술의 전성기는 로마시대와 비잔틴시대였다. 이때 지은 저택이나 교회 건물의 바닥은 거의 예외 없이 모자이크로 장식되었다. 모자이크 작품은
자연석을 소재로 삼아 만들었기 때문에 견고할뿐더러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색깔이 변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세계적 고대 문화 유산의 하나로 손꼽히는 모자이크 지도가 발견된 마다바는 3500년의 긴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도시이다. 비잔틴 시대 마다바는 요단강 동편 지역에서 가장 중요하고 번성하는 기독교 도시가 되었고 이때 이 곳은 모자이크 예술의 중심 도시가
되었다. 당시 이름을 날리던 모자이크 장인들이 모여들면서 이 곳은 모자이크 도시로 비잔틴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기독교 도시였던
마다바에는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고, 교회의 바닥에는 모자이크 거장들이 심혈을 기울인 작품들이 남겨졌다. 그들의 작품 중 최고의 걸작이 '마다바
모자이크 지도' 이다.
19세기 말 이 모자이크 지도를 바닥으로 해서 희랍 정교회에 속하는 성 조지 교회가 세워졌다. 원래 이 지도는 가로
5.6m, 세로 15.7m의 대형으로 약 30평의 바닥을 채울 수 있다. 그러나 그간 3분의 2가량이 훼손, 지금은 10평정도 분량만 남아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그나마 한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예루살렘 부분은 동편 끝의 약간만 제외하면 잘 보존되어 비잔틴 시대의 예루살렘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암만에서 33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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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835m의 느보산은 출애굽 여정의 마지막 기착지이다. 40년 동안의 광야에서의 방랑 생활을 청산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모세는 이곳에서 가나안 땅을 조망하고 숨을 거두게 된다. (민 21:20,
23장, 신 4:49) 느보산은 성경의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산' 과 동일한 장소로 히브리어로 '비스가' 란 '꼭대기' 라는 의미이다. 출애굽 이후
가나안으로 진군해 들어오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모리 족속의 온 지경을 점령하고 이 지역에 머물러 살기를 원했던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에게 요단
동편 지역을 분배해 주게 되는데 느보는 르우벤 지파에게 분배되었다. (민 32:3,38
대상5:8) 기원전 9세기의 모압왕 메사의 비문에 의하면 느보읍은 그때까지도 이스라엘의 도시였다. 그런가
하면 성경은 느보가 모압의 도시였다는 보도를 남기고 있다. (사15:2
렘48: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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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시야가 산이 바가티의 지휘하에 발굴이 시작된 이래 1935년, 1937년에 수도원의 모자이크를
발견하였다. 고고학적 발굴에 따르면 기원 후 4세기 말엽 비잔틴 시대에 모세 기념 교회가 시야가 산 정상에 세워졌으며 교회는 각종 새와
동물들이 새겨진 모자이크로 장식되었다.
6세기 후반에 첨가된 새 예배당에는 무덤 터가 파괴된 후 그곳에 새로운 침례소가 설치되었는데 대략
597~8년경에 건설되었다. 현재 느보산 정상에는 모세의 무덤 위에 처음 세웠다는 교회 터가 다시 복원되어 있으며, 1932년에 세워진
프란체스칸 수도원이 자리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모세의 무덤이 이곳에 있었다고도 하며, 초대 기독교인들은 이곳을 순례하거나 수도원을
짓기도 하였다. 물론 느보산 또는 비스가 산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며, 이 산맥의 한 지점일 것만은 분명하다.
느보산
모세 기념 교회 앞 공터 전망대에서 살펴보면 멀리 사해와 여리고 지역이 눈에 들어온다. 날이 맑은 날은 그 시야가 더 넓게 펼쳐져 예루살렘의
감람산 지역까지도 식별이 가능하다.
이곳 정원에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조각가 지오바니 판토니의 작품이 세워져 있다. 이것은 모세가 시내광야에서
뱀에 물린 사람들을 살려내기 위해 만들었다는 놋뱀과, 인류 구원을 상징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복합시킨 의미 깊은 작품으로 모세를 거역했던
이스라엘 민족의 범죄를 인하여 불 뱀에 물려 죽은 사건의 상징물이다.(민
21:6-10) 시야가 교회 왼쪽으로 있는 둥근 언덕은 브올의 아들 발락이 발람에서 모압 평지에 있던
이스라엘 자손을 향하여 저주를 퍼부어 달라고 요청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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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만에서 40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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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카위르
- 성경지명 "마케루스".
해로도 안디바의 하궁이 있는 곳으로 세례
요한이 효수형 당했던 곳. 세계 요한이 갖혔던 감옥이 남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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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시대 10개의 위성도시(데카폴리스)중의 하나로 암만 북쪽
45km지점에 위치한 도시이다.
세계에서 가장 잘 보존된 크레코로만 도시중의 하나이며 BC 332년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동양의 폼페이 또는 1000개의 기둥도시라고도 불린다.
BC 63년에 POMPEY 로마왕에 의해 수도로 사용되었다가 나중에10개 위성도시 (DECPOLIS) 의 하나로써, 보석,비단, 상아 등의
판매가 이루어지던 사막 대상(CARAVAN)의 경유지였다.
AD 1-2세기가 전성기였으며 AD 6세기경에는 14개의 기독교 교회가 있을 정도로 기독교가
융성하였으며, 그후 AD 614년에 페르시아에 의해 그리고 AD635년에는 이슬람교도에 의해 점령되었다가 AD726년 지진으로 폐허가 되었으나
1806년 독일인 SEETZER에 의해 발견되어 1920년부터 발굴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입구에는 AD129년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돌아가는 헤드리안 장군을 기념하여 세운 13m 높이의 개선문이 웅장하게 서 있고, 안으로 들어가면 56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둥그런 광장과
5000석 규모의 로마식 극장이 있으며 75개의 각주가 길 양편으로 서있는 중앙도로 그리고 제우스, 아테미, 림프신전, 비잔틴 교회 유적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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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줄룬
- 성경 지명 "길르앗 지방".
구약의 왕 "에글룬"왕의 이름을
따서 아즐룬이라 불리움. 비잔틴 시대의 수도원 자리 위에
12C에 모슬렘 살라딘이 성을 구축 십자군의 동태를 살피던
곳. 해발 약 1,024m 위의 성에서 요르단 계곡과
이스라엘을 볼수 있음. 암만에서 70km
◈ 왕의 대로(KING'S HIGH WAY) -
약 5,000년부터 이용되어온 요르단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대로. 이 대로를 따라 수많은 구약의 성지들이
있음.
★ 길르앗 지방의
성서 지역들 : 므낫세 반지파
마길의 후손에게 기업으로 준 땅 (13-17)
야곱이 하란에서 가나안땅으로 가때 형 "에서"를
만나기 직전 건넜던 강이다.
선지자 "엘리야"의 고향으로 엘리야
기념비와 비잔틴 시대에 지어진 건축물들이 남아 있음.
사밧의 아들 엘리사의 고향으로 엘리야가
호렙산에서 야훼의 말씀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 아벨므 홀라에
있는 엘리사를 찾아가 겉옷을 던져 후계자로 지명했던 곳.
아합왕의 왕비 이사벨의 강요로 모든
이스라엘인들이 "바알신"을 믿어 야훼의 노여움을
사 온 이스라엘땅에 수년간 기근이 들었을 때 "엘리야"는
야훼의 지시에 따라 이 강변에 살았다. 그때 까마귀가 조석으로
빵과 고기를 물어다 주었음. 3년후 그 시내마저 말랐다고
하는 그곳이 발로 그릿시내임.
야곱이 하란 생활을 청산하고 부모님의 고향으로
가던중 머물렀던 곳. 다윗왕 시절 압 살롬의반군과 다윗
군대가 전쟁을 할 때 압살롬의 상투가 상수리 나무에 걸려
죽음을 당했고 그의 시체가 던져진 곳이 남아 있음.
★ 요르단 계곡과
사해 부근의 성서들 (18-22)
베뢰아 북쪽 경계 지역.
여신 아쉬다롯등 가나안 신을 믿었던 블레셋의
도시였으나 시라아의 셀로니드조 안디 오쿠오스 3세가
정복 헬라도시로 건축 예수님의 예루살렘 포위 경고후
기독교인들이 이곳으로 대량 이주 당시 기독교 고위
성직자들이 대량 이주해와 정착했음. 현재 교회당 터와
그외 아랍족의 유적이 남아 있음.
모세가 아모리족의 시온왕과 바산왕을 정복한후
상당 기간을 이곳에서 머물 때 이스라엘족들이 모압 여인들과
음행을 저질러 야휘가 벌을 내린곳. 모세가 죽기 직전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이곳에서 가나안땅에 들어갈 때 규칙과
명령을 전한곳 (모압 평야 모압뜰에 있음)
사해의 남쪽에 위치. 롯이 아브라함과의 분가
이후 가족과 함께 멸망 이전까지 지내던 곳. 유세비우스의
증언대로 주변 환경이 검은색 바위로 되어 있어 당시 유황불로
멸망 했음을 짐작케함. 현재는 제1차 발굴이
되어 있음.
소돔. 고모라 멸망 이후 롯이 두딸과 살았던
동굴로 그리스인에 의해 1994년에 발견됨. 비잔틴시대에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살았던 곳으로 발굴 과정에 나타남.
마다바에 있는 모자익 성지 지도에도 나타나 있음.현재도
계속 발굴중이고 이곳에서의 느낌은 상당함.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난
후 형의 에돔 지역으로 가자는 제의를 거절하고 숙곳을
거쳐 사마리아 지방으로 갈 때 숙곳에서 텐트를 치고 잠깐
살았던 곳. 후에 이곳은 성경에 여러번 언급됨
★ 스타투어(Star
Tour)
☎:(02)723-6360
http://www.startour.pe.kr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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