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UNITED KINGDOM)

 런던(LONDON)에든버러(Edinburgh)도버(Dover)벨파스트(Belfast)

 윈저(Windsor) 캠브리지(Cambridge)  옥스포드(Oxford)

 스트래드퍼드 이폰에이번(Stratford-Upon-Avon) 우드스톡 리버풀(Liverpool)요크(York)

 브라이튼(Brighton)포츠머스(Portsmouth) ∥ 솔즈베리(Salisbury) 웨일스(Wales)

 우드스톡(Woodstock) ∥ 리버풀(Liverpool)

 

 영국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와 북아일랜드로 구성된 연합 왕국(UNITED KINGDOM)이다.

 면적은 24만㎢로 비교적 작은 나라이나 매우 복잡한 지질구조를 가지고 있어 짧은 거리내에서도 다양한 풍경을 볼수 있다. 인구는 약 5천 6백만명이며, 기후는 일반적으로 온화하고 사철의 변화가 뚜렷하지 않은  반면 그 유명한 안개를 특징으로 들 수가 있듯이 날씨의 변화가 매우 심한 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앵글로 색슨족으로 형성되어 있지만, 1 - 2세기에는 로마인에게 지배되었고 8-10세기에는 바이킹족의 지배를 받았으며, 10세기 초에는 프랑스 북부의 노르만디족에 의하여 지배되면서 노르만디 왕가가 형성되었다. 이것이 왕조 형성의 시초가 되었다. 그후 수많은 작은 왕조를 거쳐 1356-1539년 사이에 종교개혁이 발생하였다. 현재도 왕국으로 남아 있으며 엘리자벳 2세 여왕이 1952년부터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다.

 

개 요

ο 정식국명 : 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ο 수   도 : London (인구 730만명)

ο 면   적 : 242,910 ㎢

ο 인   구 : 5,950만명(2000)

ο 인구밀도 : 245명 (㎢당)

ο 영   토 : England, Wales, Scotland, Northern Ireland로 구성

   - Man섬과 Channel제도는 United Kingdom에는 포함되지 않으나 왕실 속령(Crown Dependencies) 으로서의 지위를 갖고 있어 1765년 이래 영국정부의 국방 및 외교 관할하에 있음.

ο 민   족 : Anglo-Saxons, Celts

ο 언   어 : English(Wales 지방인구의 19%는 웨일즈어 사용)

ο 종   교 : 성공회(50%), 개신교(30%), 카톨릭(11%), 기타(9%)

ο 기   후 : 온대해양성 기후

   - 평균기온 : 여름 16℃, 겨울 4℃

   - 년평균강우량 : 800㎜

ο 국가원수 : Her Majesty Queen Elizabeth Ⅱ(1952.2.6. 즉위)

ο 정치체제 : 입헌군주제

ο 국 경 일  : 6월 세째 토요일(여왕생신기념일)

ο 정부형태 : 내각책임제

ο 의회제도 : 양원제

   - 상원의원 : 710명(의장 : Lord Falconer)

   - 하원의원 : 659명, 임기 5년(의장 : Michael Martin)

ο 선거제도 : 소선거구제

ο 화폐단위 : £(Pound Sterling)

ο 환 율 : 변동환율제 (£1.00≒ $1.68, 2003.6월 현재)

ο 도량제 : Metric System으로의 대체를 시도중이나, 아직 Mileage(Yard), Pound System이 보편적으로 통용되고 있음.

ο 전   압 : 240 V

ο 시   차 : 우리나라보다 9 시간 늦다. (SUMMER TIME 실시할 경우 8시간)

 

 

 런던의 기후(℃)

지   역

월    별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런   던

(London)

최고평균

6

7

9

13

17

20

22

21

18

13

9

7

최저평균

2

2

2

4

7

11

12

12

9

7

4

2

평     균

5

5

7

8

12

15

18

17

15

11

7

6

강우일수

15

15

14

13

12

12

13

13

12

16

16

16

강우량mm

60

35

50

43

45

45

45

43

43

73

45

58

 

 

왕실과 여왕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재임 기간 동안 군주국인 영국이 전 세계에서 차지하는 위치에는 주요한 변화가 일어났고 또 영국 사회 내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여왕이 1952년 즉위했을 때에는 영국은 50여 개의 해외 보호령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 중 대부분이 여왕을 국가 원수로 하는 영연방의 독립 회원국이 되어 있다. 또한 영연방 회원국들 중 다수는 여왕을 국가 원수로 인정하고 있다. 현대적 교통수단의 발달로 여왕은 과거의 어느 군주보다도 더 많은 해외 순방을 수행할 수가 있었으며 텔레비전의 발달로 왕실 가족들이 영국이나 해외에서 보통 사람들과 만나는 모습이 텔레비전을 통해 방영됨으로써 왕족들은 사람들에게 예전보다 훨씬 더 친숙한 존재가 되었다. 그와 동시에 왕실 가족들은 수 세기에 걸쳐 내려온 군주국인 영국의 역사를 사람들에게 상기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국가적 화합과 영연방의 화합을 상징하고 있기도 하다.

 오늘날 군주국인 영국의 특수한 한 특징은 형식적인 면과 격식을 차리지 않는 면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전통적 의식들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과 나란히 모든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과의 직접적 접촉이 이루어지고 있다. 왕족들이 거리를 걸어 다니며 서민들과 접촉하는 일은 영국 왕족들이 영국이나 해외를 순방하는 동안 그들의 일정에서 주요한 국면이 되어 있다. 여왕의 즉위 25주년 기념 축제와 50주년 기념 축제, 왕실 가족의 생일과 결혼식 등은 무수한 군중을 군집시키는 주요한 의전 행사들이며 이러한 행사가 텔레비전으로 방영되는 경우에는 수 억의 시청자들이 그것을 시청하게 된다.

  변화하는 상황에 비추어볼 때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재임 기간 동안 군주국으로서의 영국의 역할에 일어난 변화는 오랜 기간에 걸친 영국의 발전의 역사에서 가장 최근의 한 실례에 불과하다. 적어도 9세기에 시작된 군주국의 형태는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통치 제도이다. 군주국이라는 형태는 입법부인 의회보다 4세기나 먼저, 사법부보다 3세기나 먼저 시작된 정부 형태이다. 여왕은 829 년 잉글랜드를 통일시킨 에그렛 왕의 직계 후손이다. 이 군주국의 역사가 중단되었던 시기는 단 한 번밖에 없다. 그것은 1649년부터 1660년까지 올리버 크롬웰과 그의 아들 리처드(둘 다 호민관이라는 칭호로 불림)가 통치했던 공화정 시대였다.

 직계 왕위 계승 전통의 일시적 중단에도 불구하고 군주국인 영국의 세습 원칙은 줄곧 지켜져 왔다. 앵글로색슨 시대에는 위탄, 즉 추밀원에서 왕족들 가운데서 왕을 선출했었다. 1066년 노르만 족이 영국을 정복한 후 노르만 왕이 즉위하고 처음 몇 대를 내려오는 동안에도 이러한 선출 원칙이 적어도 형식상으로는 준수되어 왕의 선출은 노르만 왕조에 와서 위탄의 후신으로 조직된 커몬 카운슬(국가 평의회)의 승인을 받는 형식을 취했다. 그 후 곧 왕위 세습 제도가 확고히 자리잡긴 했지만 승인이라는 절차는 현대에 와서도 영국 왕의 대관식 도중 치러지는 한 중요한 절차로 자리잡고 있다.

 수 세기 동안 영국의 군주는 최고의 행정·입법·사법권을 직접 행사했었다. 그러다가 이러한 관행은 의회와 사법부의 발달과 함께 쇠퇴했다. 17세기에 들어서 일어난 왕과 의회 사이의 투쟁의 결과 1688-89년 영국은 입헌 군주 정치 체제를 갖춘 국가로 변신했다. 그러나 18세기에 와서도 왕은 계속해서 상당한 행정권을 행사할 수가 있었다. 그러다 19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확고한 행정 책임을 띤 행정부와 현대적 정당 제도의 확립과 함께 정치면에서 군주의 능동적 역할은 최소한으로 제한되었다.

 영국의 정부는 두 가지 주요한 방식으로 책임을 진다. 각료들은 투표로 선출된 다수당의 지지 없이는 정무를 수행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의회에 대해 책임을 진다. 각료들은 또 자신들이 여왕에게 하는 조언에 대해 책임을 진다. 따라서 여왕이 취하는 모든 조치에 대해서도 책임을 진다. 정치적 결정은 각료들이 하고 여왕은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않는 공정한 국가 원수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역 사

》고대: 켈트 족의 정착과 로마제국의 지배

 기원전 4세기경부터 영국 땅에 켈트 족이 거주. 영국 땅에 자리잡은 켈트 족은 씨족들이 모여 사는 부족국가로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기원전 55년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자르의 침략으로 영국의 남쪽은 로마제국의 영토에 속하게 된다. 로마군대는 템스 강가 평야에 요새를 세우고 영국을 지배하는 데 필요한 물자를 수송하는 기지로 쓰게 되는데 이 항구의 이름을 론디니움 Londinium 이라고 불렀고, 이곳이 뒷날 영국의 수도 런던이다. 차츰 켈트 족과 로마인은 섞이게 되어 영국에는 라틴문화가 일찍이 뿌리 내린다. 로마의 정복 후에 약 300년동안 전쟁 없는 로마의 평화태평시대 Pax Romana 가 지속되었다.

 

앵글로 색슨 시대 

 4세기초 게르만 족의 대이동과 함께 영국의 로마군대는 본국을 지키기 위해 돌아가고 그 사이 켈트 족의 일파인 스코트 족이 살기 좋은 남쪽으로 대대적인 침략을 시작했다. 로마인과 어울려 살던 남쪽의 켈트 족은 (현재 독일의 북쪽 작센지방에 거주하던) 색슨 족에게 구원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색슨 족은 켈트 족을 돕기는커녕 침략을 시작했고, 이에 앵글로 족도 가세하여 켈트 족은 대부분 지금의 스코틀랜드, 웨일즈, 아일랜드로 도망쳐 그곳에 자리잡게 되었다. 평야지대인 잉글랜드 지방엔 지금도 앵글로 색슨 족의 자손이 살고 있으며, 잉글랜드라는 지명은 이들 종족의 이름에서 비롯된다.

 앵글로색슨족이 지배하던 시기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기독교로 개종한 사실이다. 577년 그레고리 교황은 영국의 선교를 위해 아우구스티누스를 파견하였고, 8세기 이후 영국 전 지역은 로마 카톨릭 교회에 귀속되었고, 왕들은 로마 교회의 제도와 조직 등을 받아들였다.

 영국은 783년부터 덴마크 바이킹 족의 침략에 시달리게 된다. 그때 앵글로 색슨 족은 몇몇 작은 나라로 갈라져 싸우고 있었는데 바이킹의 침략을 계기로 단결하였고 단결된 영국의 지도자로 나선 이가 바로 전설적인 알프레드 대왕이다. 이로써 영국 역사에 처음으로 나라다운 나라 즉 '영국 왕국'이 태어났고, 이것이 앵글로 색슨 족의 첫 통일 국가이다. 알프레드 대왕은 침략자 덴마크 군대를 물리친 뒤 덴마크와 화평 조약을 맺는다. 알프레드 대왕은 또한 학문을 크게 권장하여 영국 역사에 길이 빛나는 위인으로 존경받게 된다.

 

》노르만 족의 정복

 바이킹 족이 프랑스 왕에게 신하임을 맹세하고 노르망디에 자리잡은 것은 911년. 그후 100년이 지난 뒤 노르망디 왕에 오른 이가 윌리엄이었다. 노르만 족은 100년이 흐르는 사이 완전히 프랑스화되어 있었고, 1066년 노르망디 공 윌리엄의 영국 정복은 프랑스의 영국 정복이나 다름 없었다. 덴마크도 영국을 침략했으나 그들은 앵글로 색슨 족과 비슷해 영국에 큰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으나, 노르만 족의 영국 정복은 로마제국에 이은 라틴문화의 두 번째 정복이었다. 이때 영국은 언어, 풍습, 정치, 문화 등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윌리엄은 영국 정복 후에 윌리엄 1세로 노르만 왕조를 열었고, 영국의 모든 권력은 노르망디에서 건너온 귀족들의 손에 들어간다. 그러면서 왕실과 귀족들은 자연히 프랑스 말을 쓰고, 영어는 평민과 농민들이 쓰는 말로 구분되어 영어는 이때 프랑스어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정복왕 윌리엄 1세는 영국 왕이면서 동시에 프랑스 왕의 신하였다. 그러나 노르만 족의 왕들은 프랑스 내에 영토를 계속 넓혀가 프랑스 왕보다도 더 넓은 땅을 차지하기에 이르고 이것이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백년전쟁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윌리엄 1세는 왕이 된 후 반란을 진압하고, 몰수한 땅을 기사에게 나누어 주는 노르만식 봉건 제도로 통치하였고, 중세 영국의 특징인 집권적 봉건 국가의 기초를 다졌다. 자문회는 왕의 의견을 청취하고 승인할 뿐, 법률과 재판은 왕이 직접 관장하였으며, 경제 체제도 마찬가지로 왕 중심이었다.

 

》헨리 2세의 영토 확장

 정복왕 윌리엄 1세가 죽은 뒤 (1087) 그의 손자인 헨리 2세부터 프랑스의 피가 반쯤 섞인 (아버지가 프랑스인 앙주 백작) '앙주' 왕조가 시작된다. 그는 프랑스 루이 7세의 왕비였던 엘레노아와 결혼 남프랑스의 엄청난 땅을 얻게 된다. 프랑스 땅에 프랑스 왕보다 더 큰 영토를 소유하게 된 헨리 2세는 영국 내에서도 스코틀랜드와 웨일즈 지방을 평정 단단한 통일 잉글랜드의 기반을 다짐으로써, 알프레드 대왕과 더불어 후세에 길이 존경받는 왕이 된다. 헨리 2세는 영국의 정치를 안정시켜 많은 법과 재판 제도를 만들어 1154-1189년까지 35년 동안 평화로운 영국을 이끌어갔다.

 

》마그나 카르타

 헨리 2세는 아들들의 반란으로 쫓겨나 비참한 최후를 마치고 1189년 셋째 아들 리처드가 왕이 된다. 그가 사자왕 리처드 1세이다. 그는 모험심이 강해 십자군 원정에도 몸소 참가하였으며, 1199년 왕이 된지 10년만에 전쟁터에서 화살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그를 이어 왕이 된 이가 동생 존이다 (1199).

 존 왕은 왕이 된 후에 실정을 거듭하면서 국민의 신망을 잃게 된다. 그러자 프랑스가 군사를 일으켰고 1204년 노르망디를 시작으로 남부 프랑스 대부분의 영국 소유 땅을 빼앗기에 이른다. 그러면서 왕과 귀족, 신하 사이는 더욱 멀어졌고, 귀족들은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래 존 왕에게 칼을 들이댔다. 그것이 대헌장 즉 마그나 카르타 Magna Carta (great charter) 이다.

(1. 세금을 거두려면 반드시 대표자 회의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2. 법에 따르지 않고는 자유민을 체포, 처벌하지 못한다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함)

 마그나 카르타는 영국의 첫 헌법이며 현대 의회 민주주의의 주춧돌이 된다. 왕에게서 세금을 거둘 권리를 크게 제한한 마그나 카르타의 제정으로 (1215) 영국의 왕은 권력을 휘두를 길이 막혀버리고 사실상의 권력은 세금 내는 대표자 회의로 넘어가게 되는데 (납세자 대표: 귀족, 영주, 농장주인, 부유상인 등) 이로써 영국에는 이른바 '국회'라는 씨앗이 뿌려지게 되었다.

 

》영국 국회의 탄생

 '못난 왕'이라는 국민과 신하들의 비웃음 속에 존 왕이 세상을 떠나고 (1216) 그 위를 이어 헨리 3세가 왕위에 오른다. 그러나 헨리 3세가 교황의 권위를 등에 업고 마그나 카르타의 정신을 위배 국민에게 세금을 징수하고 폭정을 일삼자 귀족은 다시 왕에게 맞서기 시작한다. 대헌장을 어기고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헨리 3세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이는 왕의 매부인 프랑스 인 시몽 드 몽포르였다. 그는 뛰어난 전술을 사용하여 왕의 군대를 격파하고 헨리 3세를 포로로 잡는다. 권력을 쥔 몽포르는 '각계 각층의 대표들이 모인 회의에서 국사가 다루어져야 하며, 따라서 각 주와 자유도시는 두 사람씩 대표를 뽑아 런던으로 보낼 것이며 이들 대표들은 나라 일을 다룰 의회를 이룰 것'이라고 포고했다. 이렇게 해서 1265년 영국 역사상 처음으로 각 주, 지방 대표들이 모인 의회가 열리게 되었는데 이것이 영국 국회의 탄생이며 오늘날 의회 민주주의의 시초이다.

 이때부터 영국은 왕과 국회라는 두 세력으로 갈려 서로 상대를 누르려는 투쟁이 벌어지게 된다. 영국 국회는 그후 1341년 양원제로 발달하게 된다: 귀족과 승려 등 고귀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진 '상원'과, 그리고 소귀족, 농장주, 상인, 지식인 등 실지로 국민의 대표들로 이루어진 '하원'.

  시몽 드 몽포르 백작은 영국 민주주의에 큰 공적을 세운 사람있으며, 정복왕 윌리엄이 영국을 점령한 뒤 영국 역사에 영향을 끼친 마지막 인물이었다. 이로써 영국은 근 200여년에 걸친 프랑스의 정치, 문화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된다. (1066년: 윌리엄의 영국 정복 - 1272년: 시몽 드 몽포르 죽음)

 

》100년 전쟁 (1337-1453), 장미전쟁 (1455-1485)

 1337년부터 영국은 프랑스와 100년 전쟁을 벌이게 된다. 1328년 프랑스의 카페 왕조가 끝나고, 발루아가(家)의 필립 6세가 왕위에 즉위하였을 때, 영국의 에드워드 3세는 카페 왕조와의 인척 관계임을 내세워 왕위 계승을 주장하며 프랑스에 침입하였다. 그러나 전쟁의 실질적인 배경은 에드워드 2세가 스코틀랜드와 대립했을 때 프랑스가 스코틀랜드를 지원했기 때문에, 또 프랑스의 플랑드르 지방의 양모 시장을 둘러싼 양국의 이해 관계가 대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 초기에는 영국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어 한때 프랑스령의 대부분을 점령하였으나 헨리 6세 때 오를레앙 전투에서 패배한 후 (잔 다르크의 활약) 대부분의 대륙령을 상실하고 끝났다.

 100년 전쟁이 끝나고 2년 후에 영국에서는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귀족들 간에 전쟁이 일어났다. 에드워드 3세의 손자 랭커스터와 요크를 각각 지지하는 귀족들 간에 30년 내전이 시작된 것이다. 요크가(家)의 문장(紋章)은 백장미, 랭커스터가(家)의 문장은 빨간 장미였기 때문에 장미 전쟁이라 불리는데, 요크가의 승리로 에드워드 4세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에드워드 4세는 단명하고 그의 아들 에드워드 5세의 나이가 어린 것을 이용하여 리차드가 에드워드 5세를 가두고 왕위에 오르나, 그 역시 튜더가의 헨리에게 패하고 영국에는 튜더 왕조가 시작되었다.

 

》절대왕정

 100년 전쟁과 장미 전쟁으로 귀족 세력이 쇠퇴하였다. 왕위에 오른 헨리 7세는 귀족이 가신단을 거느리는 권리와 재판권을 박탈하였고 상인을 규제하고 왕실 제정을 튼튼히 하는 등 절대주의 왕권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이어 헨리 8세는 이혼문제로 로마 교황과 갈등을 일으켜 1534년 로마 교황과 결별을 선언하고 직접 교회의 수장이 되는 영국 국교회(성공회)를 설립하였다. 그는 복종하지 않은 수도원을 해산시키고 토지를 몰수하였다.

 그러나 헨리 8세의 아들 에드워드 6세에 이어 메리(1553~1558)가 여왕으로 즉위하자, 메리 여왕은 철저한 카톨릭 신봉자로서 교황과 화해하고 카톨릭으로 돌아가 수장령을 폐지하고 영국 국교회의 많은 신도들을 화형시켰다. (오늘날 칵테일의 일종인 블러디메리 Bloody Mary는 여기서 이름이 유래되었다.) 메리 여왕 이후 엘리자베스 1세는 두 종파의 갈등에서 오는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이 영국 국교회를 확립하였다. 가신단을 해체하고 빈민 대책으로 구민법을 제정하는 등 국내 정책도 충실히 행했으며, 스페인의 무적 함대를 격파하고 식민 사업을 추진했으며 중상주의 정책을 펼쳐 절대 왕정을 확고히 했다.

 

》스튜어트 왕조와 영국의 내란 (1603~1660)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후손없이 죽자 인척인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스튜어트가 제임스 1세로 영국 왕위에 올라 양국 왕실이 통합되었다 (이때부터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를 합쳐서 그레이트 브리튼으로 부르게 되었다).

 제임스 1세는 카톨릭과 엘리자베스 시대부터 성장해 온 칼뱅파 청교도들을 탄압하며 왕은 법 위에 선다는 왕권 신수설을 주장하여 의회와 대립하였다. 1628년 조세나 공채는 의회의 찬성이 있어야 하고, 법에 의하지 않고 함부로 시민을 체포하지 못하며 각종의 자유권을 보장하는 내용의 `권리 청원'을 의회가 통과시키자 제임스 1세는 의회를 해산시켰다. 결국 왕과 의회의 대립은 의회파와 왕당파 사이의 내전으로 발전하였다. 당시 부유했던 남부와 동부는 의회를 지지했고, 빈곤했던 북부와 서부는 왕당파을 지지하였다. 대부분의 세입이 런던에서 징수되었고, 외국에서 군대가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있었기에, 의회가 남부와 동부의 지지를 받게 된 것은 전략상 큰 이점이었다. 결국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군은 찰스를 패배시키고 권력을 장악하여 공화 정부가 들어섰다 (청교도 혁명). 그러나 크롬웰의 엄격한 종교 정책과 군사 독재로 국민의 불만은 커졌으며, 크롬웰이 죽자 의회는 네덜란드로 망명한 찰스 2세를 맞이하여 왕정을 복귀시켰다.

 

》왕정복고 시대

 찰스 2세(1660~1685)는 마그나 카르타와 권리 청원의 존중을 조건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즉위한 후 사실상 이러한 선언은 무시되었고 찰스 자신은 카톨릭 교도로, 비국교도는 공직을 가질 수 없다는 심사율을 제정하는 등 국교주의의 재건에 힘쓰는 의회와 다시 마찰을 빚었다. 찰스의 뒤를 이은 제임스 2세 역시 카톨릭주의와 절대주의로 복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의회가 네덜란드의 메리와 오렌지 공 윌리엄(윌리엄 3세)을 여왕과 왕으로 불러들이자 제임스는 프랑스로 망명하게 된다 (명예 혁명). 1689년 의회는 왕권을 제한하는 일련의 법안을 통과시켰는데 이것이 마그나 카르타, 권리 청원과 함께 영국 헌법의 근간을 이루는 권리 장전이다.

 이후 윌리엄 3세는 영국 내정은 의회에 맡기고 당시 확대되는 프랑스 루이 14세의 유럽 지배를 막는 데 전념하였다.

 

》18 세기

 윌리엄 3세와 그 뒤를 이은 앤 여왕의 치세 동안 영국은 스페인 계승 전쟁을 통해 지브롤터, 미노르카, 노바스코샤, 뉴펀들랜드 등을 차지하며 주요 해상국으로 부상하였고 식민지 체제를 확대해 나갔다.

 1714년 앤 여왕 이후 의회는 독일의 하노버 왕조의 조지 1세에게 왕위를 부여했다. 하노버 왕조의 왕위 계승 이후 평화가 지속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산업 혁명이라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프랑스와의 식민지 쟁탈을 위한 7년 전쟁 후 영국은 북미와 인도를 지배하게 되었다. 영국은 전쟁에서 소요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식민지에서의 수입을 늘리려 하였고, 이것은 미국에서의 불만을 야기시켰다. 인지세법이 1년 만에 폐지되고 수입세의 부과가 시작되었지만, 독립 전쟁으로 결국 미국의 독립을 승인하게 되었다.

 18세기 후반 산업화가 경제적 지배권을 가져다 주었다면 프랑스 나폴레옹과의 전쟁은 정치적 우위를 가져다 주었다.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을 패배시킨 후 영국은 유럽과 세계 여러 지역에서 지배권을 행사하게 되었고, 영국은 입법 활동, 전쟁 그리고 개인의 기업 활동을 통해서 식민지를 더욱 확장시켜 나갔다. 1820년에 영국이 지배한 영토의 인구는 전 세계 인구의 26%인 2억 명에 달했다.

 

》19 세기

 19세기 초반 수송 수단으로 철도와 기관차의 도입은 중공업 분야에서 커다란 수요를 유발시켰고, 농업 분야에서도 새로운 시장의 확보와 비료의 값싼 수송을 가능케 함으로써 커다란 이익을 가져왔다.

 한편 1801년에는 그레이트 브리튼과 아일랜드의 통합으로 연합 왕국이 탄생하였다. 그 후 아일랜드 공화군(IRA)으로 알려진 게릴라군이 결성되어 아일랜드 독립 전쟁을 시작하였으며 1919년 더블린에서 아일랜드 독립 의회를 구성하였다. 이에 따라 1919~1921년 동안 영국과 아일랜드 간에 전쟁이 계속되었고 1921년 휴전 조약이 체결되어 아일랜드 북부의 얼스터 지방의 6개 주는 영국에 잔류하고 남부 아일랜드의 26개 주는 독립하게 되었다.

 19세기 전반기에 차티스트 운동(노동자층을 주체로 전개된 민중 운동)과 반곡물법 운동이 일어났다. 차티스트들은 의회의 개혁과 선거법 개정을 주장했으며, 반곡물법 동맹은 수입 곡물에 대한 관세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운동은 여러 가지 중요한 입법 조치를 가져오게 했다. 1832년에 선거권을 확대하는 제1차 선거법 개정이 이루어졌고, 1833년에는 제국 내 전 지역에서 노예제가 폐지되었다. 선거법 개정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지만 국민 전체의 의사를 반영하기보다는 중산층이 정부에 참여할 기회를 부여하는 데 그쳤다.

 1837~1901년까지 통치한 빅토리아의 시대는 비교적 평온을 유지했는데, 각 가정이 사회의 핵심 조직으로 인식되었으며 개인의 창조력이 강조되었다. 품격, 의지, 성실, 근면 그리고 검약 등 이른바 `빅토리아주의'가 윤리적 덕목으로 대표되었다.

 1867년에 제2차 선거법이 제정되었다. 이 개정안을 제안한 사람은 자유당의 지도자 글래드스톤이었고 통과시킨 사람은 보수당의 디즈레일리였다. 이 두 사람은 휘그파가 자유당으로 그리고 토리파가 보수당으로 변하는 과정을 이끌어 낸 인물들이다. 글래드스톤의 자유당은 1869년에 아일랜드 국교회를 폐지하였고, 아일랜드 토지법, 교육법(1870), 그리고 노동 조합법(1871)을 통과시켰다. 보수당의 디즈레일리 역시 사회 입법을 추진하여 공중 보건법(1875)을 제정하고 주당 노동 시간을 56시간으로 줄이는 데 이바지했다. 글래드스톤과 디즈레일리는 모두 대영 제국의 팽창에 힘썼다. 1890년대의 제국주의는 원료와 상품 시장을 찾는 기업가들의 경제적 이해 관계, 제국주의적 모험에 들뜬 군중의 열광 그리고 왕실의 영광과도 관련이 있었다. 이 시기에 아프리카, 아시아, 태평양 등지에서 식민지 정복은 계속되었다.

 19세기 말에 이르면서 빅토리아식 사회 구조가 흔들리기 시작했는데, 그 가운데서도 경제적 상황 변화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국내의 경제적 어려움은 주로 국제 금융면에서의 영국 경제력에 의해서 극복될 수 있었으나, 노동자들의 불만은 커져 갔고 조직화되었다. 1900년에 런던에서 열린 노동자 대표 회의에서는 노동 조합 운동가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의회에 노동자 출신의 의원을 보내기 위한 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이것은 20세기 노동당의 시작이었으며, 노동당은 마침내 자유당 대신 제2당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피쉬 앤 칩스(Fish and Chips)으로 대변되는 영국의 음식문화

 소설 <다빈치 코드>에 등장하는 레이 티빙 경은 영국의 음식 맛이 대륙보다 형편없다고 표현한다. 맞는 말이다. 화려한 음식 종류와 맛을 자랑하는 프랑스나 이탈리아에 비해 영국은 음식쪽으로는 크게 내세울게 없는 나라일 수 있다.

 영국의 음식문화를 말할 때 대표적인 것이 피쉬 앤 칩스(Fish and Chips)다. 피쉬 앤 칩스 요리의 주재료는 생선(보통 대구살)과 감자튀김이다. 피쉬 앤 칩스는 밀가루를 묻혀 튀긴 흰살생선에 길게 썬 감자튀김을 곁들인 음식이다.

 여기서 주의해야할 것은 영국에서 chips 라고 하면 미국에서 말하는 French Fried를 이야기 한다. 포테이토칩은 crisp 라고 한다. 고로, Fish 'N' chips 는 생선튀김에 감자튀김을 곁들인 요리라고 할 수 있다.

 피쉬 앤 칩스는 영국에서밖에 못먹는 진귀한 음식도 아니라, 생선 튀기고 감자튀기면 그만인 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박하고 단순한 음식이 영국에서는 가장 보편화된 주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피쉬 앤 칩스가 영국에서 사랑받는 이유는? 이유는 조리도 간편할 뿐더라 먹기도 간편한 음식이기 때문이다. 피쉬 앤 칩스는 호주 멜버른 같은 도시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음식이다.

 

 

축 제

 1) 1월 1일 설날(New year's day)

 2) 1월 보트쇼, 럭비승자전

 3) 2월 영국 포크댄스와 노래 단체 페스티벌

 4) 3월 옥스퍼드 & 캠브리지 보트 대항전

 5) 4월 중순 성 금요일(Good Friday): 부활절 전 금요일

 6) 4월 중순 성 월요일(East Monday): 부활절 후 월요일

 7) 4월 런던 마라톤 대회

 8) 5월 1일 노동절

 9) 5월 첼시(Chelsea) 꽃 전시회

10) 5월 마지막 월요일 스프링 뱅크 홀리데이(Spring Bank Holiday)

11) 6월 로열 아카데미 여름 전시회, 야외 연극제, 전 영국 챔피온쉽

12) 7월 야외 콘서트, 런던시 페스티벌

13) 8월 야외 연극제

14) 8월 마지막 월요일 서머 맹크 홀리데이(Summer Bank Holiday)

15) 9월 템즈강 축제

16) 12월 25일 크리스마스

17) 12월 26일 복싱데이(Boxing Day)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으며, 스코틀랜드에서는 3월 17일 St. Patrick's Day로 공휴일이다.

 

 

 관광 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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