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➀
마지막 프제미슬리드 통치자들
시대의 프라하 성
13세기 전반까지 프라하성은 소비예슬라프대공 (Prince Sobeslav)에 의해 건축된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보헤미아에는 1340년대 이후에야 적용되기 시작했던 고딕양식이 그때까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1248년 귀족들은 바츨라프 1세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을
주도한 것은 후에 프제미슬 오타카르 2세가 되는 그의 아들이었는데 그는 성을 본거지로 삼고 있었지만 결국 성이 포위되자 식수의 부족으로 항복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다행히도 분쟁은 화해로 매듭지어졌고 1253년 프제미슬 오타카르 2세는 ( 바츨라프 1세의 공동 통치자로서) 왕궁의
재건에 착수하게 된다. 일년 후, 보헤미아의 유일한 통치자가 된 그는 성벽을 재건, 확장하는 대대적인 작업을 시작했는데 성벽의 남쪽 부분은
새롭게 건설된 소지구와 연결되었다.
프제미슬 오타카르 2세 이후 1278년에서 1283년 까지
보헤미아는 프제미슬 왕조의 계승자인 바츨라프 2세 (Vaclav 2) 대신에 그의 후견인인 브란덴부르크의 오타(the Margrave Ota
of Brandenburg)의 통치를 받았다. - 사실상 통치라기 보다는 착취에 가까왔다. 1280년에 성은 폭풍과 홍수로 인한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되었는데 탑의 지붕 목재들이 쓸려 나갔고 북쪽 성벽과 성 조지 수녀원, 그리고 성 비트성당의 참사회의장이 큰 손상을 입었다. 바츨라프
2세의 평화롭고 오랜 통치기간동안에 성은 다시 보수되었고 그 문화적 가치의 절정기를 맞았다. 하지만 바츨라프 2세의 통치 말년인 1303년에
일어난 화재는 왕궁에 큰 피해를 입혔다. 이 화재는 그 후 이어질 불길한 시대에 대한 전조였는지도 모른다. 1305년 왕은 숨을 거두었고 1년
후에는 왕권을 계승받았던 그의 아들 바츨라프 3세가 올로모우츠 Olomouc 에서 암살당했기 때문이다. 프제미슬리드왕조는 결국 부계의 맥이
끊겨버린 셈이었다.
➁ 룩셈부르크왕조 통치시대의
프라하 성 : 마지막 프제미슬리드왕조의 통치자였던 바츨라프 3세 (Vaclav 3)의 암살 이후 프라하성은 쇠락해갔고 몇
차례의 위험을 겪게된다. 1306년에 케르텐의 헨리(Henry of Karten )가 왕권을 이어받았으나 같은 해 합스부르크가의 루돌프
(Rudolf of Hapsburg)가 통치권을 다가 그가 죽고 난 뒤, 1307년에 케르텐의 헨리가 다시 왕권을 쥐게되었다. 그 후
1310년에 헨리 7세 황제의 아들인 룩셈부르크가의 얀 (John of Luxemburg) 이 왕위를 잇게 된다. 얀 왕의 통치시대에도 성은
계속 쇠락해 갔다.
그는 기사적이었고 또한 탁월한 외교적 수완을 가지고 수많은 원정에서
보헤미아의 명성을 날리기도 했지만 그가 집으로 귀환하는 것은 주로 더 큰 사업을 위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14세기의 처음
30년 동안에 있었던 유일한 변화는 1321년에 있었던 성 지역(Hracany)의 건설이었다. 흐랏챠니의 성벽은 프라하 성과 소지구의 방어
시스템과 연결되었다. 1333년 10월에 얀 왕과 프제미슬리드가문의 공주 엘리슈까 (Eliska)의 아들, 즉 후에 까렐 4세 황제가되는
까렐대공이 프라하에 왔을 때 그는 성이 매우 황폐해져 있는 것을 보았고 그래서 당분간 구시가에서 머물러야 했다. 하지만 곧 성으로 거처를 옮기고
왕궁을 확장, 재건하기 시작했다. 1344년 그의 아버지 얀왕이 참석한 가운데 성 비트 대성당의 초석이 놓였는데 이 성당이 건축되면서 그 자리에
있던 옛 로마네스크 바실리카는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아라스의 마티아스 (Master Mathias of Arras) 와 뻬뜨르 빠를레슈
(Petr Parler) 에 의해 만들어진 이 성당은 프라하 성과 전도시를 특징지우는 대표적인 건축물이 될 것이었다. 또한 로마네스크 왕궁
채플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모든 성인들의 교회역시 훌륭한 고딕 건축물이었다. 이러한 건축물들과 그 외의 몇 가지 첨가 부분들로 까렐 4세의
프라하 성은 위엄 있는 황제의 거처가 될 수 있었다. 그는 방어벽에 대해서는 비교적 적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소지구 반대편인 성의 남쪽에 새로운
해자와 해자 벽을 만들었을 뿐이었다.
다소 더디게 진행되긴 했지만 바츨라프 4세의 통치기간 중에도
작업은 계속되었다. 대성당의 건축이 계속되었고 왕궁이 증축되었다.
1419년 왕이 죽은 후, 그리고 후스전쟁이 일어난 1420년
이후에 공사는 중단되었다. 1421년부터 전쟁이 끝난 1434년 까지 성은 프라하의 후스파의 수중에 있었다. 후스파와 대립하고 있었던 바출라프
4세의 동생 지그문트 (Zikmund) 는 비뜨꼬프 (Vitkov)전투에서 패배한 후 스스로 왕위에 오르고 계속 보헤미아의 지배권을 주장했으나
1425년에서 1427년 사이 잠시 지그문트의 군대에게 접수되었던 때를 제외하고는 후스파에게 성을 내어줄 수 밖에 없었다.
➂
고딕시대의 프라하 성 :
후스전쟁이 끝난 이후 체코의 통치자들인 황제 지그문트 (Emperor Zikmund of Luxemburg), 합스부르크가의
알브레히트 2세 (King Albrecht 2 of Hapsburg), 포스트후무스가의 라디슬라브 (Ladislav the Posthumous)
, 뽀졔브라디가의 이지 (Jiri of Podebrady), 야겔론가의 블라디슬라프 (Vladislav Jagellon)는 구시가의 왕궁(지금의
시민회관 - 오베쯔니 둠 Obecni dum - 자리에 있었던 )에서 거주해야 했고 성은 버려진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1483년 프라하
시내에 전염병이 돌자 블라디슬라프왕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성으로 거처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그는 성을 후기 고딕스타일로 재건했는데 그것은 건물의
사무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왕의 거주지로서의 편의성도 강조하는 건축방식이었다. 당시 유능한 건축가였던 베네딕트 라이트 (Benedikt
Reid)가 공사를 담당했는데 그의 첫번째 임무는 성벽을 재건하는 것이었다. 라이드의 작업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 한 것은 왕궁의 개축이었다.
특히 로마네스크 양식의 까를 4세의 방 위에 건축한 블라디슬라프 홀
(Vladislav Hall)은 당시 중부 유럽에서 교회건축물이 아닌 일반 건축물로서는 가장 큰 홀을 가진 것이기도 했다. 또한 홀과 연결되어
있는 `기수의 계단`은 후기 고딕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블라디슬라프 홀의 창문들과 왕궁 벽날개부분
('루드빅-Ludvík'이라고 불리우는)의 르네상스식 건축기법들이 라이트의 작업을 통해 나타나기 시작한 것들이며 그것은 보헤미아에 처음으로
소개된 새로운 스타일의 건축양식이기도 했다. 이 시기의 프라하성의 모습은 주변의 건물들이 지어짐으로써 완성된다. 이 건물들은 대개 귀족들 소유의
궁전들이거나 교회의 부속 건물들, 관공서와 같은 것들이었다.
왕궁을 따라 성벽의 남동쪽 부분에 지어진 궁전들은 슈밤베르끄가
(Svamberk)와 로즈미딸가 (Rozmital), 그리고 로즘베르끄가 (Rozmberk)에서 소유했던 건물들이었고 백탑 옆의 서쪽 출구쪽에는
성 수비대장의 저택이 건축되었다.
❋
프라하 성의 회화관
1965년에 오래된 마사를 개조하여 만든 이 전시관은 루돌프 2세 치하 때부터 모은 미술품을 소장할 목적으로 지어졌다. 1648년에 스웨덴의 침공으로 멋진 작품들을 대부분 약탈당했으나 아직도 흥미로운 그림들이 많이 남아 있다.
16세기에서 18세기에 제작된 회화작품이
대부분이며, 조각품도 약간 있다. 조각 중에는 아드리앤 드 브리에스(Adriaen de
Vries)가 만든 루돌프 2세의 흉상 모작이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티티안(Titian)의 '젊은 부인의 몸단장', 루벤스(Rubens)의 '올림픽 신들의 회합', 귀도 레니의 '데이아네이라를 유괴하는 반인마 네수스'등이 있다.
이 밖에 마스터 테오도록(Master Theodoric), 파올로 베로니스(Paolo Veronese), 틴토레토(Tintoretto), 체크의 바로크 예술가인 얀 쿠페키(Jan Kupecky)와 페트르 브란들(Petr
Brandl) 등이 대표적인 화가들이다. 국립 미술관에는 루돌프의 멋진 그림들이 많이 소장되어 있다. 프라하 성에는 최초로 지어진
교회인 9세기 성모 마리아 교회의 유적지도 볼 수 있다. 이 교회는 프레미슬리드 가의 왕자로는
최초로 기독교 세례를 받은 보리보위왕자가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유적지는 마사 개축 중에 발견되었다.
17세기에 금세공인들이 이 지역에 살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짧고 좁은 이 길은 프라하에서 특히 아름다운 거리 중 하나다. 길 한편에는 자그마하고 밝은 색조의 집들이 줄지어 서 있다. 성벽의 아치에
붙박이로 지어진 이 집들은 1500년대 후반에 24명의 성 수비대원의 숙소로 쓰였다. 1세기 후에는
금세공인들이 이주해 와 건물을 개축했다. 그 후 프라하의 빈민들과 범죄자들이 모여 사는 빈민가로 전락했다. 1950년대까지 이 지역에 남아 있던 세입자들이 모두 이사간 이후부터 본래의 상태를 어느 정도 회복해갔다.
지금은 대부분의 집들이 책이나 보헤미아의 유리 제품, 그리고 몰려드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기념품을 파는 상점으로 바뀌었다. 황금길은 노벨상 수상
시인인 야로슬라프 세이페르트(Jaroslav Seifert)를 비롯한 몇몇 유명 작가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도 1916년에서 1917년 사이에 그의 누이와 함께
22번지에서 살았다. '황금길'이라는 거리이름 때문에 루돌프 2세를 위해 금을 만들려는 연금술사들이 몰려들었다는 전설이 널리 퍼져 있다. 실제로 연금술사들은 성 비투스
성당과 화약탑 사이의 작은 길은 비카르스카(Vikarska)에 연구실을 가지고 있었다.
황금소로가 끝나는 23번지에는 성곽 수비길로 통하는 계단이 있다. 계단에서는 예쁜 기념품,
엽서, 안내책자를 팔고 있다. 이 계단을 내려가면 메트로 A선 말로스트란스카(Malostranska)역으로 이어지며, 구시가로 가는 트램을 탈 수 있다.
❋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
유대인으로 체크에 살면서 독일어를 구사했던 카프카. 1883년
부유한 상인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자수성가하여 정열적이고 실제적인 아버지의 성격은 예민하고 연약한 카프카에게 극복 될 수 없는 깊은 아픔과
소외감을 안겨주었다. 문학적 꿈을 뒤로 하고, 아버지의 권유로 근로자상해보험원으로 취직하여 발병하기 전까지(41살에 폐결핵으로 사망)근무한다. 당시 유럽은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카프카는 모순이 가득한
현실에서 자신의 정체성 및 실존의 문제에 부딪힌다. 어디에도 없는 자신과 움직이지 못하는 자신, 두 자아는 그에게 「실종자」, 「변신」,
「심판」같은 작품을 남기게 한다. 한 여인과 세 번이나 약혼과 파혼을 반복하는 등 사람과 원할한 교류를 맺지 못했는데, 어린 여동생 오트라와는
정신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졌으며 대학 친구인 막스 브로트는 평생의 친구가 된다. 카프카는 죽으며 자신의 유고를 모두 태워달라고 브로트에게
유서를 남겼으나 브로트는 차마 태우지 못하고 그의 유고를 모아 출판한다. 「성」, 「소송」과 같은 작품은 하마터면 영원히 사라질 뻔했다.
카프카는 프라하의 여기저기를 옮겨다니며 살았으나, 프라하를 떠난 적이 거의 없다. 그와 같은 시대를 산 사람들은 말한다.
"카프카는
프라하이며 프라하는 카프카이다. 우리는 프라하의 구석구석에서 그의 모든 작품의 파편들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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