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llet11_redspot.gif 프라하성과 흐라드차니

 

bullet11_redspot.gif 구시가     bullet11_redspot.gif 소지구     bullet11_redspot.gif 유대인 지구     bullet11_redspot.gif 신시가     bullet11_redspot.gif 프라하 근교

 

프라하 성(Prazsky Hrad)

 프라하 구시가에서 카렐 다리를 건너 블타바 강의 맞은 편 언덕 구릉 위에 위풍 당당하게 자리하고 있다. 프라하 성은 프라하의 상징이라 할 수 있으며 로마네스크 양식에서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그리고 네오고딕에 이르는 천년 이상의 건축사를 웅변하고 있다. 프라하 성은 체코 통치자들의 궁전으로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고 있다. 성벽 안에 시대나 양식이 다른 다양한 건축물이 세워져 있다.

 

CZECHO-PRAGUE-Prazsky Hrad-02.JPG

마지막 프제미슬리드 통치자들 시대의 프라하 성

 13세기 전반까지 프라하성은 소비예슬라프대공 (Prince Sobeslav)에 의해 건축된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보헤미아에는 1340년대 이후에야 적용되기 시작했던 고딕양식이 그때까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1248년 귀족들은 바츨라프 1세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을 주도한 것은 후에 프제미슬 오타카르 2세가 되는 그의 아들이었는데 그는 성을 본거지로 삼고 있었지만 결국 성이 포위되자 식수의 부족으로 항복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다행히도 분쟁은 화해로 매듭지어졌고 1253년 프제미슬 오타카르 2세는 ( 바츨라프 1세의 공동 통치자로서) 왕궁의 재건에 착수하게 된다.  일년 후, 보헤미아의 유일한 통치자가 된 그는 성벽을 재건, 확장하는 대대적인 작업을 시작했는데 성벽의 남쪽 부분은 새롭게 건설된 소지구와 연결되었다.

 프제미슬 오타카르 2세 이후 1278년에서 1283년 까지 보헤미아는 프제미슬 왕조의 계승자인 바츨라프 2세 (Vaclav 2) 대신에 그의 후견인인 브란덴부르크의 오타(the Margrave Ota of Brandenburg)의 통치를 받았다. - 사실상 통치라기 보다는 착취에 가까왔다. 1280년에 성은 폭풍과 홍수로 인한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되었는데 탑의 지붕 목재들이 쓸려 나갔고 북쪽 성벽과 성 조지 수녀원, 그리고 성 비트성당의 참사회의장이 큰 손상을 입었다. 바츨라프 2세의 평화롭고 오랜 통치기간동안에 성은 다시 보수되었고 그 문화적 가치의 절정기를 맞았다. 하지만 바츨라프 2세의 통치 말년인 1303년에 일어난 화재는 왕궁에 큰 피해를 입혔다. 이 화재는 그 후 이어질 불길한 시대에 대한 전조였는지도 모른다. 1305년 왕은 숨을 거두었고 1년 후에는 왕권을 계승받았던 그의 아들 바츨라프 3세가 올로모우츠 Olomouc 에서 암살당했기 때문이다. 프제미슬리드왕조는 결국 부계의 맥이 끊겨버린 셈이었다.

 

 룩셈부르크왕조 통치시대의 프라하 성 :

 마지막 프제미슬리드왕조의 통치자였던 바츨라프 3세 (Vaclav 3)의 암살 이후 프라하성은 쇠락해갔고 몇 차례의 위험을 겪게된다. 1306년에 케르텐의 헨리(Henry of Karten )가 왕권을 이어받았으나 같은 해 합스부르크가의 루돌프 (Rudolf of Hapsburg)가 통치권을  다가 그가 죽고 난 뒤, 1307년에 케르텐의 헨리가 다시 왕권을 쥐게되었다. 그 후 1310년에 헨리 7세 황제의 아들인 룩셈부르크가의 얀 (John of Luxemburg) 이 왕위를 잇게 된다. 얀 왕의 통치시대에도 성은 계속 쇠락해 갔다.

 그는 기사적이었고 또한 탁월한 외교적 수완을 가지고 수많은 원정에서 보헤미아의 명성을 날리기도 했지만 그가 집으로 귀환하는 것은 주로 더 큰 사업을 위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14세기의 처음 30년 동안에 있었던 유일한 변화는 1321년에 있었던 성 지역(Hracany)의 건설이었다. 흐랏챠니의 성벽은 프라하 성과 소지구의 방어 시스템과 연결되었다.  1333년 10월에 얀 왕과 프제미슬리드가문의 공주 엘리슈까 (Eliska)의 아들, 즉 후에 까렐 4세 황제가되는 까렐대공이 프라하에 왔을 때 그는 성이 매우 황폐해져 있는 것을 보았고 그래서 당분간 구시가에서 머물러야 했다. 하지만 곧 성으로 거처를 옮기고 왕궁을 확장, 재건하기 시작했다. 1344년 그의 아버지 얀왕이 참석한 가운데 성 비트 대성당의 초석이 놓였는데 이 성당이 건축되면서 그 자리에 있던 옛 로마네스크 바실리카는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아라스의 마티아스 (Master Mathias of Arras) 와 뻬뜨르 빠를레슈 (Petr Parler) 에 의해 만들어진 이 성당은 프라하 성과 전도시를 특징지우는 대표적인 건축물이 될 것이었다. 또한 로마네스크 왕궁 채플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모든 성인들의 교회역시 훌륭한 고딕 건축물이었다.  이러한 건축물들과 그 외의 몇 가지 첨가 부분들로 까렐 4세의 프라하 성은 위엄 있는 황제의 거처가 될 수 있었다. 그는 방어벽에 대해서는 비교적 적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소지구 반대편인 성의 남쪽에 새로운 해자와 해자 벽을 만들었을 뿐이었다.

 다소 더디게 진행되긴 했지만 바츨라프 4세의 통치기간 중에도 작업은 계속되었다. 대성당의 건축이 계속되었고 왕궁이 증축되었다.

 1419년 왕이 죽은 후, 그리고 후스전쟁이 일어난 1420년 이후에 공사는 중단되었다. 1421년부터 전쟁이 끝난 1434년 까지 성은 프라하의 후스파의 수중에 있었다. 후스파와 대립하고 있었던 바출라프 4세의 동생 지그문트 (Zikmund) 는 비뜨꼬프 (Vitkov)전투에서 패배한 후 스스로 왕위에 오르고 계속 보헤미아의 지배권을 주장했으나 1425년에서 1427년 사이 잠시 지그문트의 군대에게 접수되었던 때를 제외하고는 후스파에게 성을 내어줄 수 밖에 없었다.

 

고딕시대의 프라하 성 :

 후스전쟁이 끝난 이후 체코의 통치자들인 황제 지그문트 (Emperor Zikmund of Luxemburg), 합스부르크가의 알브레히트 2세 (King Albrecht 2 of Hapsburg), 포스트후무스가의 라디슬라브 (Ladislav the Posthumous) , 뽀졔브라디가의 이지 (Jiri of Podebrady), 야겔론가의 블라디슬라프 (Vladislav Jagellon)는 구시가의 왕궁(지금의 시민회관 - 오베쯔니 둠 Obecni dum - 자리에 있었던 )에서 거주해야 했고 성은 버려진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1483년 프라하 시내에 전염병이 돌자 블라디슬라프왕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성으로 거처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그는 성을 후기 고딕스타일로 재건했는데 그것은 건물의 사무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왕의 거주지로서의 편의성도 강조하는 건축방식이었다. 당시 유능한 건축가였던 베네딕트 라이트 (Benedikt Reid)가 공사를 담당했는데 그의 첫번째 임무는 성벽을 재건하는 것이었다. 라이드의 작업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 한 것은 왕궁의 개축이었다.

 특히 로마네스크 양식의 까를 4세의 방 위에 건축한 블라디슬라프 홀 (Vladislav Hall)은 당시 중부 유럽에서 교회건축물이 아닌 일반 건축물로서는 가장 큰 홀을 가진 것이기도 했다. 또한 홀과 연결되어 있는 `기수의 계단`은 후기 고딕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블라디슬라프 홀의 창문들과 왕궁 벽날개부분 ('루드빅-Ludvík'이라고 불리우는)의 르네상스식 건축기법들이 라이트의 작업을 통해 나타나기 시작한 것들이며 그것은 보헤미아에 처음으로 소개된 새로운 스타일의 건축양식이기도 했다. 이 시기의 프라하성의 모습은 주변의 건물들이 지어짐으로써 완성된다. 이 건물들은 대개 귀족들 소유의 궁전들이거나 교회의 부속 건물들, 관공서와 같은 것들이었다.

 왕궁을 따라 성벽의 남동쪽 부분에 지어진 궁전들은 슈밤베르끄가 (Svamberk)와 로즈미딸가 (Rozmital), 그리고 로즘베르끄가 (Rozmberk)에서 소유했던 건물들이었고 백탑 옆의 서쪽 출구쪽에는 성 수비대장의 저택이 건축되었다.   

 

프라하 성의 회화관

 1965년에 오래된 마사를 개조하여 만든 이 전시관은 루돌프 2세 치하 때부터 모은 미술품을 소장할 목적으로 지어졌다. 1648년에 스웨덴의 침공으로 멋진 작품들을 대부분 약탈당했으나 아직도 흥미로운 그림들이 많이 남아 있다. 16세기에서 18세기에 제작된 회화작품이 대부분이며, 조각품도 약간 있다. 조각 중에는 아드리앤 드 브리에스(Adriaen de Vries)가 만든 루돌프 2세의 흉상 모작이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티티안(Titian)의 '젊은 부인의 몸단장', 루벤스(Rubens)의 '올림픽 신들의 회합', 귀도 레니의 '데이아네이라를 유괴하는 반인마 네수스'등이 있다. 이 밖에 마스터 테오도록(Master Theodoric), 파올로 베로니스(Paolo Veronese), 틴토레토(Tintoretto), 체크의 바로크 예술가인 얀 쿠페키(Jan Kupecky)와 페트르 브란들(Petr Brandl) 등이 대표적인 화가들이다. 국립 미술관에는 루돌프의 멋진 그림들이 많이 소장되어 있다. 프라하 성에는 최초로 지어진 교회인 9세기 성모 마리아 교회의 유적지도 볼 수 있다. 이 교회는 프레미슬리드 가의 왕자로는 최초로 기독교 세례를 받은 보리보위왕자가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유적지는 마사 개축 중에 발견되었다.

 17세기에 금세공인들이 이 지역에 살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짧고 좁은 이 길은 프라하에서 특히 아름다운 거리 중 하나다. 길 한편에는 자그마하고 밝은 색조의 집들이 줄지어 서 있다. 성벽의 아치에 붙박이로 지어진 이 집들은 1500년대 후반에 24명의 성 수비대원의 숙소로 쓰였다. 1세기 후에는 금세공인들이 이주해 와 건물을 개축했다. 그 후 프라하의 빈민들과 범죄자들이 모여 사는 빈민가로 전락했다. 1950년대까지 이 지역에 남아 있던 세입자들이 모두 이사간 이후부터 본래의 상태를 어느 정도 회복해갔다. 지금은 대부분의 집들이 책이나 보헤미아의 유리 제품, 그리고 몰려드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기념품을 파는 상점으로 바뀌었다. 황금길은 노벨상 수상 시인인 야로슬라프 세이페르트(Jaroslav Seifert)를 비롯한 몇몇 유명 작가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1916년에서 1917년 사이에 그의 누이와 함께 22번지에서 살았다. '황금길'이라는 거리이름 때문에 루돌프 2세를 위해 금을 만들려는 연금술사들이 몰려들었다는 전설이 널리 퍼져 있다. 실제로 연금술사들은 성 비투스 성당과 화약탑 사이의 작은 길은 비카르스카(Vikarska)에 연구실을 가지고 있었다. 황금소로가 끝나는 23번지에는 성곽 수비길로 통하는 계단이 있다. 계단에서는 예쁜 기념품, 엽서, 안내책자를 팔고 있다. 이 계단을 내려가면 메트로 A선 말로스트란스카(Malostranska)역으로 이어지며, 구시가로 가는 트램을 탈 수 있다.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

 유대인으로 체크에 살면서 독일어를 구사했던 카프카. 1883년 부유한 상인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자수성가하여 정열적이고 실제적인 아버지의 성격은 예민하고 연약한 카프카에게 극복 될 수 없는 깊은 아픔과 소외감을 안겨주었다. 문학적 꿈을 뒤로 하고, 아버지의 권유로 근로자상해보험원으로 취직하여 발병하기 전까지(41살에 폐결핵으로 사망)근무한다. 당시 유럽은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카프카는 모순이 가득한 현실에서 자신의 정체성 및 실존의 문제에 부딪힌다. 어디에도 없는 자신과 움직이지 못하는 자신, 두 자아는 그에게 「실종자」, 「변신」, 「심판」같은 작품을 남기게 한다. 한 여인과 세 번이나 약혼과 파혼을 반복하는 등 사람과 원할한 교류를 맺지 못했는데, 어린 여동생 오트라와는 정신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졌으며 대학 친구인 막스 브로트는 평생의 친구가 된다. 카프카는 죽으며 자신의 유고를 모두 태워달라고 브로트에게 유서를 남겼으나 브로트는 차마 태우지 못하고 그의 유고를 모아 출판한다. 「성」, 「소송」과 같은 작품은 하마터면 영원히 사라질 뻔했다. 카프카는 프라하의 여기저기를 옮겨다니며 살았으나, 프라하를 떠난 적이 거의 없다. 그와 같은 시대를 산 사람들은 말한다.

 "카프카는 프라하이며 프라하는 카프카이다. 우리는 프라하의 구석구석에서 그의 모든 작품의 파편들을 만날 수 있다."

 

 

성 비투스 성당(St Vitus Cathedral)

 총길이 124m, 폭 60m, 천장 높이 33m, 탑높이 100m의 프라하에서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한 건축물중 하나로 현재 대통령궁으로 쓰이고 있는 프라하성곽안에 위치해 있다. 교회의 건축이 시작된 것은 600여년전인 1344년이나 증개축이 계속되어 체코 역사와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29년이다. 또 성당이 완성되었을 때는 초기 비투스 성당의 최초 설립자이자 보헤미아의 수호성인인 웬체슬라스 왕자 사망 1,000년이 되는 날이기도 하다.

 성 비투스 성당은 프라하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지표다. 1344년에 카를 4세의 명에 따라 지어지기 시작했는데, 제일 처음 설계를 맡았던 건축가는 프랑스 인 매티유였다. 매티유가 죽은 뒤에는 슈바벤 사람인 페터 파를러가 인계받았다. 공사는 후스 전쟁때까지 계속되었다. 19세기와 20세기 건축가와 미술가들에 의해 마침내 완공된 이 성당에는 성왕 바츨라프의 왕관 보석과 무덤이 보관되어 있다. 이 성당을 거닐면 천 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기분이 들 것이다. 서쪽 정문을 통해 들어가 현대 또는 신 고딕 양식의 최고 미술품들을 감상하고, 이어 부속 예배당을 지나가면서 종교 유물을 비롯해 르네상스 회화 작품에서 현대 조각에 이르는 다양한 미술품들을 볼 수 있다.

 14세기 황금 문을 통해 성당을 빠져나가기 전에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한 성 바츨라프 예배당이 볼 만하다.

 

알폰스 무하 창문

 이 성당에는 20세기에 제작한 멋진 스테인드 글라스가 많다. 특히 성 치릴과 성 메소디우스를 묘사한 작품이 주목할 만하다.

 

성상 안치소

 이 성단소는 1372년부터 페터 파를러에 의해 지어졌다. 높이 치솟은 둥근 천장과 복잡하게 짜인 고딕 식 격자창으로 유명하다.

 

프레데릭의 패주

 1620년에 있었던 백산전투 장면을 담고 있는 이 목판화는 17세기 프라하의 모습을 매우 상세하게 보여준다.

 

성 존 네포무크의 무덤

 1736년에 은으로 만들어진 이 정교한 무덤은 반개혁 종파의 핵심 인물이었던 존 네포무크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왕의 기도실

 15세기 후기 고딕 양식으로 된 이 기도실의 천장은 나뭇가지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지하 납골당

 초기 로툰다와 바실리카뿐 아니라, 까를 4세와 그의 네 부인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왕릉으로 내려가는 계단이다.

 

왕릉

 페르디난트 1세는 1564년에 죽었다. 그의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막시밀리안 2세가 이 왕릉에 함께 묻혀 있다.

 

성 바츨라프 예배당

 성서의 여러 장면과 성인의 생애를 담은 고딕 식 프레스코가 벽면에 걸려있다. 벽은 빛나는 보석과 화려한 도금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장식물 하나하나가 모두 미술 작품이다.

 

 

구왕궁(Královsky Palác)

 11세기에 처음 요새화될 때부터 프라하성은 보헤미아 왕자들의 거처로 쓰였다. 건물은 3개 층으로 되어 있다. 1135년경 소베슬라프 1세에 의해 지어진 로마네스크 궁전은 현재 건물의 지하층을 이루고 있다. 그 위에 프레미슬 오타카르 2세와 카를 4세가 자신들의 궁전을 증축했다. 블라디슬라프 야기엘로를 위해 지어진 꼭대기 층에는 장대한 블라디슬라프 홀이 있다. 합스부르크 통치 기간에는 이 궁전에 정부 청사와 법정, 구 보헤미아 의회가 자리하고 있었으며 1924년에는 대대적인 개축이 이루어졌다.

 안쪽의 후기 고딕 양식의 블라디슬라프 홀은 가로 62m 세로 16m 높이 13m로 건설 당시 유럽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고 한다. 대관식등 국가행사에 자주 이용됐으며 홀의 발코니에서 내려다보는 프라하 시가지의 모습이 무척 아름답니다.

 

창 밖으로 사람들을 내던진 사건(1618)

 1618523일에 투른 백작이 이끄는 100여 명의 신교도 귀족들이 황궁으로 시가 행진을 벌였다. 이는 그들의 교설을 인정하지 않는 합스부르크 대공 페르디난트의 왕위 계승에 대한 항위 시위였다. 페르디난트가 임명한 2명의 카톨릭 지도자 야로슬라프 마르티닉과 빌렘 슬라바타가 신교도 시위대와 대치했다. 한바탕 싸움 끝에 신교도들은 상대편의 지도자와 그의 비서인 필립 파브리시우스를 동쪽 창문 밖으로 내던졌다. 내던져진 두 사람은 약 15m 아래로 떨어졌으나 용케 엉덩방아만 찧고는 살아났다. 카톨릭교 측에서는 천사들의 도움으로 이들이 목숨을 건졌다고 믿었다.

 

 

성 이지 성당(Bazilika sv. Jiří)

 973년경에 보헤미아 최초의 수도원이 왕자 볼레슬라프 2세에 의해 황궁과 가까운 위치에 세워졌다. 볼레슬라프 2세의 누이 밀라다가 최초의 여자 대수녀원장이 되었다. 성 조지 수도원은 수세기를 거치면서 여러 번 개축되었고, 1782년에는 마침내 막사로 개조되었다. 그러다가 1962년에 이르러서는 국립 미술관의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 미술품을 소장하는 전시관으로 재건축되었다. 이 곳에는 보헤미아가 유럽 최고의 문명을 누렸던 14세기에 그려진 종교화들이 전시되어 있다.

CZECHO-PRAGUE-Bazilika sv. Jiri.JPG

 2기의 흰탑은 정면에서 자세히 보면 굵기가 다르다. 오른쪽의 두터운 탑은 아담이라 불리며, 가는 쪽은 이브라 불린다.모두 12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간결함이 돌벽을 유달리 아름답고 돋보이게 한다.

 또한 음향효과가 뛰어나서 콘서트 홀로 자주 이용되는데 5/12~6/4일에는 "프라하의 봄" 음악제가 열린다.

 

 

댈리버 탑

 지붕이 원추형으로 생긴 이 15세기 탑은 블라디슬라프 야기엘로왕이 지은 요새의 일부분이다. 탑의 외벽에 그이 문장이 새겨져 있다. 이 탑은 감옥으로도 쓰였는데 그 첫 수감자인 코조예디의 댈리버(Dalibor of Kozojedy)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 댈리버라는 청년은 불법 노예를 피신시킨 죄로 사형을 선고받은 젊은 기사였다.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지하 토굴감옥에 갇혀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감옥에 있는 동안 그는 바이올린 연주를 배웠다고 한다. 그의 곤경을 동정한 사람들이 바이올린 소리를 듣고 음식을 로프에 묶어서 창문을 통해 내려보내주었다. 이 창문은 굶어 죽은 수감자를 던져 버리는데 쓰이곤 했다. 베드리히 스메타나는 이 이야기를 내용으로 오페라 '댈리버'를 작곡했다. 1781년 이후에는 감옥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오늘날에는 옛 감옥의 일부를 볼 수 있을 뿐이다.

 

 

남 정원

 이 정원들은 소지구를 내려다보는 프라하 성 아래의 좁고 긴 땅에 자리잡고 있다. 몇 개의 작은 정원들이 연결되어 남 정원을 형성하고 있다. 가장 오래된 정원은 1562년에 마티아스 황제를 위해 지은 원형 정자가 있다.

 조각으로 장식된 나무 천장에는 합스부르크의 39제국의 상징물들이 있다. 누벽 위의 정원(Zahrada Na valech)은 19세기에 지어졌다. 전에 채마밭이었던 이 터는 1618년에 창 밖으로 사람을 내던진 사건으로 유명하다. 당시 2명의 왕실 사무관이 1층 창밖으로 내던져졌다. 훗날 페르디난트 2세는 그들이 떨어진 지점을 표시하기 위해 2개의 방첨탑을 세웠다. 1920년대에는 요시프 플레츄니크에 의해 대대적인 개조작업이 이루어졌다. 그는 낙원정원과 전망대로 가는 황소의 계단을 만들었다. 전 하팅 정원(Harting Garden) 전망대 아래에는 조반니 바티스타 알리프란디(Giovanni Battista Alliprandi)가 설계한 바로크 식 음악당이 있다.

 

 

왕실정원과 벨베데레(Belvedere) 여름궁전

 승마학교인 이즈다르나(Jizdarna)의 맞은편 프라하성의 북쪽에 위치한 왕실정원은 1535년에 체코의 왕을 겸하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페르디난드I세를 위해 지어진 것으로 터어키의 튜울립이 네덜란드로 전해지기까지 처음 유럽대륙의 풍토에 적응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1563년 터키의 이스탄불에 대사로 가있던 Angerius Busbeck에 의해 프라하의 왕실 정원으로 튜울립이 처음 전해졌다. 봄이 되면 수천송이의 튜울립으로 만발하는 왕실정원에는 16세기 페르디난드1세가 사랑하는 그의 부인 앤을 위해 지어준 벨베데레(Belvedere)라는 왕실 여름궁전이 또한 아름답다. 중유럽의 가장 아름다운 르네상스양식 건축물 중의 하나인 이 왕실 여름궁전은 1569년 이태리 Genoa출신의 Paolo della Stella가 건축한 것으로 지붕이 흡사 청동배를 뒤집어 놓은 모양을 하고 있다.

 궁전 앞에는 청동으로 된 '노래하는 분수(Singing Fountain, Zpivajici Fontana)'가 있는데 성 비투스 성당의 Zikmund종을 만들었던 Tomas Jaros가 주조한 것이다. 금속 물받이 밑으로 떨어지는 물소리가 마치 달콤한 멜로디의 음악연주처럼 들린다 하여 노래하는 분수가 되었다. 보니파즈 월무트(Bonifaz Wolmut)에 의해 즈그라피토 양식으로 만들어진 구기장(1563-1568)은 원래 막시밀리안 II세를 위해 만들어진 테니스코트 였었다. 정원 입구는 '사자의 마당(Lion's Court=Lvi Dvur)'이라고 하여16세기 루돌프2세의 개인 동물원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가 좋아했던 사자, 표범, 살쾡이, 곰, 늑대등을 키우던 곳이었다. 현재는 레스토랑이 들어서 있다.

 

 

스테른베르크 궁전

 프란츠 요제프 스테른베르크(Franz Josef Sternberg)는 1769년 보헤미아에서 '미술인 애국동지회'를 결성했다. 귀족 회원들은 자신들이 소장하고 있던 그림과 조각들을 이 회에 빌려 주었다. 애국동지회의 본부는 스테른베르크 궁전 안에 있었다. 이 멋진 바로크식 건물은 1949년 이후 국립미술관의 일부로, 유럽 미술품들을 소장, 전시하고 있다.

 

▣ 스테른베르크 궁전의 소장품

◐ 성화, 고전, 고대 미술

 2층의 한 작은 방에는 나머지 소장품들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그림들 중에 2세기 때 그림인 '젊은 여인의 초상(Portrait of a Young Woman)'이라는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은 19세기 이집트 페이윰(Fayoum)발굴 당시 발견되었다. 이 방에 있는 전시품의 대다수는 정교회의 성화들이다. 이 성화들은 비잔틴이나 이탈리아, 그리스 등 동유럽의 여러 국가에서 가져온 것이다. 크레타에서 가져온 '그리스도의 비탄(The Lomentation of Christ)'과 러시아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Christ's Entry Into Jerusalem)'이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 독일과 오스트리아 미술(1350-1600)

 스테른베르크 궁전에 있는 그림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알브레히트 뒤러의 '로사리축제(The Feast of the Rosary)'이다. 황제 루돌프 2세가 가져온 이 그림은 프라하에 있어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아기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 앞의 두 인물은 막시밀리안 1세(루돌프의 고조부)와 교황 율리우스 2세다. 한스 홀바인(Hans Holbein)과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등 다른 중요한 독일 르네상스 화가들의 작품도 몇 점 있다. 크라나흐의 13개 대표작 중에는 '아담과 이브', 성 크리스틴, 성 바바라와 성 캐서린 등을 묘사한 패널화가 있다.

 

◐ 이탈리아 미술(1300-1500)

 1층 방에 들어서면 근사한 옛 2부작, 3부작 그림들과 화려하게 도금된 패널화를 볼 수 있다. 이 그림들은 토스카나와 북 이탈리아의 교회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것들은 대부분 코노피슈테 성(Konopiste Castle)의 소장품이었다. 이탈리아 미술 가운데 명작으로 꼽히는 것은 14세기 시에나 화가 피에르토 로렌체티(Pietro Lorenzetti)의 3각형 성인 패널화와 로렌초 모나코(Lorenzo Monaco)의 감동적인 그림 '그리스도의 비탄'등이다.

 

◐ 플랑드르와 네덜란드 미술(1400-1700)

 피에터 브뤼겔의 시골 풍경화에서 루벤스와 렘브란트의 초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브뤼겔의 거대한 유화 '건초만들기'는 스테른베르크 궁전이 보유하고 있는 그림 중 최상품에 속한다. 이 작품은 원래 일 년 열두 달을 그린 연속화 가운데 하나였다. 나머지 네 폭은 빈과 뉴욕에 보관되어 있다. 이 밖에 흥미로운 작품으로는 얀 고쟈르(Jan Gossaret, 1515년경)작 '성모를 그리는 성 루크'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분명한 영향을 주었던 네덜란드 그림 가운데 하나다. 17세기 소장품 중에도 걸작이 몇 점이 있다. 그 중 루벤스의 작품이 가장 눈에 띈다. 루벤스는 1693년에 소지구 성 토마스 교회의 아우구스티누스 교단에 그림 2점을 보냈다. 원작이 1896년 전시실에 임대되어 지금은 복사본으로 대처되어 있다. '성 토마스의 순교'라는 작품에 보이는 폭력적인 드라마는 '성어거스틴'의 정신적 평온함과 완벽한 대조를 이룬다. 렘브란트의 1634년 작인 '연구중인 학자'도 아주 훌륭하다.

 

◐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미술(1500-1820)

 이 전시실은 다소 임의적으로 화가들을 분류해 놓았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매우 유쾌한 작품들이 몇 점 있다. 이탈리아 그림으로는 틴토레토작 '성 제롬', 야코프 바사노 작 '그리스도의 채찍질'과 '중년노인의 초상' 등을 비롯해 브론치노가 그린 인상적인 초상화 '톨레도의 엘이노어'가 있다. 엘리노어는 코지모 데 메디치의 아내였다. 프랑스 미술은 17세기 화가인 시몽 부에('루크레티아의 자살'), 세바스티앙 부르동, 샤를 르 브륑 같은 화가에 의해 대표된다. 스페인 그림 중에서는 다음 2점의 작품을 주목할 만하다. 엘 그레코의 작품 '그리스도의 머리'와 반 폭짜리 고야 작품인 정치가 '돈 미후엘 드 라르디자할'의 초상화가 그것이다. 1746년경에 람베스 궁전과 웨스트민스터 다리를 그린 카나레토의 작품 '템즈 강의 전경'도 보면 반가운 그림일 것이다.

 

 

체르닌 궁전

 1668년에 베니스 주재 제국 대사인 쿠데니스의 체르닌백작을 위해 지어진 체르닌 궁전은 길이가 150m나 된다. 30개의 거대한 코린트 식 반기둥이 위층에 열 지어 있는 이 궁전은 로레토와의 사이에 있는 작고 아름다운 잔디 광장위에 우뚝 서 있다. 프라하에서 제법 높은 축에 드는 언덕에 위치한 탓에 이 거대한 건물은 많은 시련을 겪었다. 1742년에는 프랑스에 의해 약탈당했으며, 1757년 프러시아의 프라하 폭파 당시에도 크게 손상을 입었다. 재력이 약해진 체르닌 가는 1851년에 이 궁전을 국가에 팔았고, 이후 이 곳은 병영으로 쓰였다. 그러다가 1918년에 체코슬로바키아 탄생 후 이 궁전은 본 모습을 되찾았으며, 그 때부터 외무부 청사로 사용되었다.

 1948년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 며칠 후에는 체코슬로바키아 초대 대통령 토마스 마사리크의 아들이 얀 마사리크가 이 궁전의 맨 위층 창문에서 추락사했다. 그는 당시 막 형성되었던 정부의 유일한 비사회주의자로서 국민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얻고 있었다. 정치적인 이유로 누가 떠민 것인지 그가 뛰어내린 것인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애도하고 있다.

 

 

로레토

 1626년에 건설된 이후 지금까지 중요한 순례지로 남아 있다. 카테리나 로브코위츠의 위탁을 받아 지어졌는데, 그녀는 로레토의 산타 카사 전설에 관심이 많은 체크 귀족이었다. 건물의 중심부는 성모 마리아가 살았던 집으로 전해지고 있는 건물을 본떠서 지었다. 1661년에 산타 카사 주변을 회랑으로 둘러쌌으며, 그로부터 60년 뒤에는 크리스토프와 킬리안 이그나즈 디엔첸호퍼에 의해 바로크 식 건물정면이 세워졌다. 웅장한 디자인과 로레토에 대한 기적적인 이야기를 내세워 페르디난트 2세는 체코를 다시 카톨릭 국가로 만들고자 했다.

 

산타 카사의 전설

 원래의 집은 로레토라는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에 있다. 바로 이 집에서 천사장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앞으로 예수가 탄생할 것임을 알려 주었다고 전해진다. 1278년에 이교도의 위협 때문에 천사들이 이 집을 로레토에서 나자렛으로 옮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1620년에 프로테스탄트가 패배한 이후 카톨릭측이 이 전설을 크게 퍼트렸으며,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 로레토를 모방한 집이 50여채나 지어졌다. 그 가운데 이 산타 카사가 가장 웅장하다.

 

 

슈바르젠베르크 궁전

 멀리서 보면 이 르네상스 식 궁전의 표면은 돌출한 피라미드 모양의 석조물로 장식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가까이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평평한 벽면에 무늬를 새긴 즈그라피토임을 알게 된다. 이 궁전은 로브코위츠 가를 위해 건축가 아고스티노 갈리가 1576년에 지은 것이다. 박공벽으로 된 이 궁전은 보헤미아 양식이라기 보다 피렌체 양식에 가깝다. 1719년에 합스부르크 제국의 대표적인 귀족가문인 슈바르젠베르크가의 소유가 되기까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왔지만 내부 장식은 상당 부분 잘 보존되어 있다. 그 가운데 1580년에 만들어진 3층의 채색 천장 4개도 포함되어 있다. 1945년부터는 군대 역사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이 곳에는 슬라브 시대 초기에서 1918년 사이에 일어난 각종 전쟁에 사용되었던 무기, 갑옷, 군복 등이 소장되어 있다. 특히 15세기에 후스파가 고안해서 사용하였던 독창적인 전시물이 관람객의 시선을 끈다.

 

 

스트라호프 수도원

 이 수도원은 1140년에 프리몬스트라텐시안이라는 금욕주의 종교 교단에서 건립했다. 그 때 스트라호프의 크기는 체크국 영토에 필적할 만한 것이었다. 1258년에 일어난 화재로 파괴된 후 고딕 양식으로 재건축되었으며, 나중에 바로크 양식이 첨가되었다. 수도원의 신학, 종교관에는 800여 년 된 유명한 도서관이 있다. 침략군들에 의해 여러 차례 약탈당했음에도 여전히 보헤미아 최고의 도서관으로 남아 있다. 또한 스트라호프는 도서관을 연구소로 바꿈으로써, 1783년에 있었던 요제프 2세의 수도원 해체령을 피할 수 있었다. 지금은 수도원이자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스타투어(Star Tour)

☎:(02)723-6360

http://www.startour.pe.kr

블로그 : 스타투어

E-mail:startour2@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