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llet11_redspot.gif 구시가

 

bullet11_redspot.gif 소지구     bullet11_redspot.gif 프라하성과 흐라드차니     bullet11_redspot.gif 유대인 지구     bullet11_redspot.gif 신시가     bullet11_redspot.gif 프라하 근교

 

 역사적인 건축물들로 둘러싸인 프라하의 구시가 광장(Staromestske namesti)은 어느 도시의 것과 비교해도 매우 훌륭한 공공 장소다. 첼레트나 거리나 오보크니트르거리는 보행자 전용 거리다. 여름철이 되면 이 지역의 카페들은 테이블을 바깥으로 낸다. 관광객들이 수천 명씩 몰려오는 지역인데도 그 독특한 분위기를 그대로 지니고 있다. 프라하의 굴곡 많은 역사 중의 일부가 구시가 광장 주변의 건축물에 보존되어 있다. 광장 북쪽에는 바로크 양식의 성 니콜라스 교회의 흰색 정면이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며, 동쪽에는 당대 최고의 건축물 2개가 뽐내며 서있다. 고딕 양식의 시궁을 개조한 '석종이 달린 집' 과 로코코 양식의 골즈 킨스키 궁전이 그것이다. 이 밖에 파스텔 색조의 건물들이 줄지어 광장을 메우고 있다. 또한 로마네스크나 바로크 양식의 기원이 되는 화려한 집들이 구시가 광장 남부를 아름답게 수놓고 있다. 첼레트나 거리와 체레즈나 거리 사이의 구역이 특히 아름다우며, 언제나 분주해 보이는 광장은 여러 개의 레스토랑과 카페, 상점, 화랑 들이 들어서 있는 프라하의 요지이다. 카를 교 근처의 좁은 거리들은 중세 프라하의 도로 계획에 따라 닦인 것인데 수세기 동안 카를 거리(Karlova)는 구시가를 가로지르는 주요 도로였다. 아름답고 구불구불한 이 길에는 르네상스, 바로크양식의 상점과 가옥들이 늘어서 있다.

 

 

화약탑(Powder Tower)

 구시가로 통하는 13개의 출입문 가운데 하나였던 이 문은 11세기에 세워져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1475년에는 블라디슬라프 2세(Vladislav Ⅱ)가 초석을 놓았다. 시 의회가 대관식 선물로 바친 이 문은 1세기 먼저 세워진 페터 파를러(Peter Parler)의 구시가 교탑(Old town bridge Tower)위에 조성되었다.

 이 문의 화려한 조각장식은 왕정에 인접한 궁전에 권위를 더해 주기 위한 것이며, 방어적 가치는 거의 없다. 폭동으로 왕이 시를 빠져나가 있던 8년 동안에는 공사가 중단되었다. 1485년에 재입성한 왕은 성의 안전 쪽을 선택했으며, 이후로 왕들은 왕정에 기거하지 않았다. 이 문의 이름은 17세기에 이 곳에 화약을 저장했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건물 외부의 조각장식은 1757년 프러시아 점령 당시 심하게 손상되었으며, 이후 대부분 철거되었다가 1876년에 와서 복구되었다. 17세기에는 화약 창고로서 사용되었고 높이 65m, 폭 9 m의 탑 내부는 현재 갤러리로 이용되고 있다.

 

 

시청

 프라하에서 가장 눈에 띄는 아르누보식 건축물인 시청이 1383년에서 1485년 사이에 왕이 거주했던 전 왕정 궁궐 자리에 서 있다. 지금은 건물은 수세기 동안 방치되어 있다가 신학교로, 그후엔 군사 학교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1900년대 초에 헐어 내고 그 자리에 현재의 문화센터(1905-1911)를 지었다. 이 문화센터는 오스발드 폴리브카(Osvald-Polivka)와 안토닌 발샤네크(Antonin Balsanek)가 설계한 것으로 전시실과 큰 강당을 갖추고 있다. 시청은 19181028일 체코슬로바키아가 새로이 독립을 선언한 중요한 장소이기도 하다.

 건물의 외부는 치장벽토와 상징적인 조각상들로 꾸며져 있다. 정문 위에는 '프라하에 충성을'이라는 제목이 붙은 거대한 반원형 모자이크가 있다. 이는 카렐 슈필라(Karel spillar)의 작품이다.

 내부 장식중에서는 유리 돔으로 된 천장이 가장 인상적이다. 이 건물은 프라하의 주요 연주회장 가운데 하나이며, 건물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스메타나 홀은 무도회장으로 쓰이기도 한다.

 건물의 내부는 알폰스 무하(Alfons Mucha)를 비롯해 1910년대에 활동한 체크 미술가들의 작품으로 장식되어 있다. 회의실, 사무실 등으로 쓰이는 작은 홀은 수없이 많다. 방문객들은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쉬면서 화려한 아르누보 양식을 즐길 수 있다.

 

 

첼레트나 거리(Celetna)

 프라하에서 가장 오래된 거리중의 하나인 첼레트나는 동부 보헤미아로 이어지는 오랜 교역로이다. 이 거리의 이름은 중세 때 처음 구워진 주름진 롤빵에서 유래되었다. 14세기에는 대관식을 올릴 때 '왕의 길'의 일부로 명성을 얻기도 했다. 로마네스크와 고딕식 건축의 토대는 몇몇 지하실에서 볼 수 있다. 아름다운 간판이 붙은 대부분의 집은 바로크양식으로 개축된 것이다.

 어둡고 바람부는 밤이면 첼레트나에는 전설속의 유령들이 나타난다고 한다. 이 유령들 중에는 무시무시한 도끼를 든 도살업자와 목사에게 제 가슴을 드러낸 창녀도 있다.

CZECHO-PRAGUE-Celetna.JPG

 목사는 몹시 격앙되어 십자가로 창녀의 머리를 쳐서 죽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에스타테스 극장

 1783년 노스티츠(Nostitz) 백작에 의해 지어진 이 극장은 신고전주의적인 우아함이 프라하의 건축물 중 단연 으뜸이다. 17871029일 모차르트가 피아노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가운데 그의 오페라 돈 조반니가 이 곳에서 초연되었다. 1834년에는 피들로바츠카(Fidlovacka)라 불리는 뮤지컬 코미디의 초연이 있었다. 이 극에 나오는 노래 중 '나의 고향은 어디인가?'라는 노래가 체크 국가로 지정되었다.

 

 

카롤리눔

 1348년 카를 4세가 건립한 대학의 중심부에 카롤리눔이 있다. 본래 건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돌출 창문만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15, 16세기에는 대학이 교회 개혁운동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백산전투(Battle of the White Mountain)이후 대학은 예수교파로 넘어갔다.

 

 

틴 성당(The Church of Our Lady before Tyn)

 구시가 광장의 동쪽에 서 있는 고딕양식의 건물(쌍둥이 탑)로 1365년에 착공되어 15세기 후반 현재와 같이 80m 높이의 건물과 탑이 완성되었다. 두개의 탑은 오른쪽, 왼쪽, 각각 아담과 이브로 불리며, 오른쪽 탑이 약간 넓고 높다. 이 성당은 후스파 운동이 일어난후 후스파의 주성당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성당 내부에는 덴마크의 유명한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Tycho de Brahe 1546-1601)의 묘석이 안치되어 있는데, 그의 오른쪽 뺨을 치면 치통이 달아난다는 재미있는 미신이 있다.

 티코 브라헤는 1599년부터 프라하에서 연구활동을 하며 남은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성당 앞에 있는 건물은 구시가지 광장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건물인 틴 학교는 고딕양식의 아케이드와 르네상스 양식의 지붕으로 되어 있다.

 

 

골즈 킨스키 궁전(Palace Golz-Kinskych)

 킬리안 이그나즈 디엔첸호퍼가 설계한 이 로코코 궁전의 정면은 예쁜 분홍색과 흰색의 벽토로 장식되어 있으며, 위에는 이그나즈 프란츠 플라처의 조각작품인 '4요소'가 있다. 이것은 왕실 외교관이던 스테판 킨스키가 1768년에 골즈가에서 가져온 것이다. 1948년 공산주의 지도자였던 클레멘트 고트발트가 이 궁전의 발코니에서 군집한 공산당원들을 향해 연설을 했는데, 이는 그를 쿠데타로 이끈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오늘날 국립 미술관은 이 궁전을 현대 미술 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얀 후스(Jan Hus 약 1372-1415)동상

 종교 개혁자이자 체코의 영웅인 얀 후스를 위한 거대한 기념비가 구시가 광장의 한 모퉁이를 장식하고 있다. 1415년 이교도적인 발언을 한 후 그는 콘스탄스 위원회에 의해 화형에 처해졌다. 라디슬라프 샬로운(Ladislav saloun)이 제작한 이 기념비는 1915년 후스 서거 500주년 기념일에 제막되었다. 기념비는 두 그룹의 사람들-하나는 승리를 거둔 후스파 전사들이고, 다른 하나는 200년 후 추방당하는 프로테스탄트-과 체크의 재탄생을 상징하는 한 젊은 어머니의 모습을 담고 있다.

 후스의 위풍 당당한 모습은 신념을 위해 생명을 포기한 자의 도덕적 권위를 역설해 준다. 동상의 대좌에는 '진실을 사랑하고, 진실을 말하고, 진실을 행하라'는 얀 후스의 유명한 말이 새겨져 있다.

 

개혁가 얀 후스

 보헤미아 소읍의 가난한 가정에서 출생한 얀 후스는 당대 최고의 종교 사상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독일의 마틴 루터보다 100년 앞서 종교 개혁 운동을 시작했다. 면죄부 판매나 카톨릭 교회의 부정한 관례나 사치스러운 형식, 그리고 부유함에 대한 그의 반발은 귀족이나 농민 할 것 없이 수많은 체크인의 공감을 얻었다. 프라하의 베들레헴 교회에서 행한 개혁주의적인 설교는 더욱 많은 추종자들을 생겨나게 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로마 교황은 그를 파문했고, 1412년에 바츨라프 4세는 그에게 프라하를 떠나도록 요청했다. 141410월, 후스는 콘스탄스 회의에서 자신의 주장을 변호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투옥되었고, 다음해 이단으로 판결을 받아 화형에 처해졌다. 현재까지 체크 전민족의 순교자로 존경받고 있으며 순교일인 76일은 공휴일로까지 지정하였다.

 

 

18세기의 바로크식 건축물 성 미쿨라셰 교회(Sv. Mikulase Chram; 영어로는 성 니콜라스 성당(Saint Nicolas Church)

 소지구(Mala Strana)에서 까렐다리 쪽으로 내려오면 프라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로크 양식 성당을 볼 수 있는데, 둥근 청동 지붕이 웅장한 성 니콜라스 성당으로, 18세기 크리스토퍼 디엔젠호퍼(Christopher Dientzenhofer)와 그의 아들 길리안 이그나쯔(Kilian Kgnac)에 의해 건축(1702-1752) 되었다. 1771년까지도 완성되지 않았다는 성당의 내부 치장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은 무엇보다 본당 천정의 성 니콜라스의 찬미를 나타내는 프레스코화 라고 할 수 있다. Jan Luka Kracker의 작품인 이 프레스코화는 넓이 1500㎡로 체코에서 가장 큰 프레스코화 라고 한다.

 80m나 되는 성당의 종탑은 1755년 길리안 이그나쯔 디엔젠호퍼의 사위인 Anselm Lurag에 의해 완성되었는데, 이 종탑은 1891년까지 전망대로 쓰이기도 했다.

 니콜라스 성당을 사랑했던 모짜르트는 자주 이 성당에서 오르간 연주를 하기도 했으며, 1791년 그가 사망했을 때에는 추모미사가 바로 이 성당에서 열렸고, 4천여명의 프라하 시민이 모여 함께 미사를 드렸다고 한다. 니콜라스 성당은 미사 외에도 다양한 음악공연이 열리는 곳으로 매일 관광객들에게 개방이 되어 있다.

 

 

구시가 광장

 프라하의 심장부인 구시청사 광장주변에는 아케이드가 따린 유서 깊은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건물을 보존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이일대는 시가 전차의 통행이 금지되어 있다. 이 광장은 후스의 상을 중심으로 프라하 시민들의 휴식처로 이용 되고 있으며 길게 늘어서 있는 밴치에 앉아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 이곳 시민들의 모습에서 체코 공화국이 과거 사회주의 국가 였다는 사실, 40여년 동안 내전을 겪어 난 시민이였다는 점을 조금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평안 하기만하다.

 광장에 접해 있는 구시청사는 14세기에 고딕양식으로 세워진 건축물로서 중심부에 높이 70m의 첨탑이 있다.1945년 나치에 의하여 많은 부분이 파괴 되었지만 구시청사의 도로 쪽에 접해 있는 높이 30m의 시계탑은 그대로 보존 되어 있다. 이 광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명물은 구시청사에 걸려 있는 천문 시계탑이다.

 시계탑은 매시 정각에 작은 창이 열리고 종소리와 함께 12제자 인형이 하나씩 나타났다가는 사라진다. 이 시계탑은 15세기 프라하 대학의 수학 교수 하스주가 만들었는데 이시계를 만든 이후 시계가 너무 아름다워 유럽의 각국에서 똑같은 시계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 쇄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프라하 시청에서는 시계탑을 독점하고자 더이상 시계를 만들수 없도록 하스즈 교수의 눈을 장님으로 만들게 한다. 후에 하스즈 교수는 자신이 만든 시계탑을 볼 수 없자 만저나 보겠다는 생각으로 시계탑에 올라가 시계를 만지게 된다. 그러나 이때부터 시계는 이후 400동안이나 작동을 하지 않게 된다. 시계가 다시 운직이기 시작한 것은 1860년부터이며 지금도 프라하에서 가장 사랑 받는 관광 명소로 자리잡고 있다. 시청사의 타워에 올라 구시가 광장의 빨간 지붕 꼭대기에서 주위의 뛰어난 풍경을 전망할 수 있다.

 

o 입장료 : 타워(어른 10Kc, 학생 5Kc) 개관 : 5~10월(화~일 09:00~18:00),11~4월(화~일 09:00~17:00) 

o 위치 : Staromestske namesti(구시가 광장) 메트로: A선(Staromestska)

 

 

구시가 청사

 구시가 청사는 프라하에서 특히 인상적인 건물 중 하나다. 룩셈부르크 가의 존 왕이 시의회 설립에 찬성한 후인 1338년에 지어졌다. 이후 수세기를 거치면서 구시가 청사 확장 공사에 따라 여러 채의 건물이 함께 지어져 오늘날 화려한 고딕,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술을 보여주는 구역이 되었다. 대부분의 건물들이 1945년 프라하 봉기 당시 나치에 의해 크게 훼손되었으나 이후 세심하게 복원되어 오고 있다. 69.5m높이의 탑에 올라가면 프라하의 멋진 전경을 볼 수 있다.

 

시청시계

 시청에 처음 시계가 부착된 것은 15세기 초엽의 일이다. 1490년 이 시계는 하누슈(Hanus)라는 이름의 거장 시계공에 의해 고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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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시의회 의원들은 그 시계공이 다른 곳에서도 그러한 걸작을 만들 것을 염려하여 그 가련한 노인의 눈을 멀게 했다고 한다. 이후로 여러 차례에 걸쳐 수리되었으며, 오늘날 시계의 기본 장치는 1552년에서 1572년 사이에 얀 타보르스키가 만든 것이다.

 

열두 제자상

 이 시계가 시간을 알리는 종을 울릴 때마다 12사도의 재미난 움직임이 많은 구경꾼들을 끌어모은다. 우선 시계 오른쪽에 설치된,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이 자기의 오른손에 감긴 줄을 잡아당긴 다음 왼손으로는 모래 시계를 들어올려 뒤집는다.

 그러면 두 개의 창문이 열리고 시계 태엽에 해당하는 12사도(정확히 말하면 11명의 사도와 성 바울)가 성베드로를 따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 행렬이 끝날 무렵에 수탉이 홰를 치는데, 이 때 시계는 벨을 울려 시간을 알리게 된다.

 이 밖에도 움직이는 부속들이 또 있다. 거울을 보고 있는 '허영심', '탐욕'을 상징하는 투르크인 등이 그것이다.

 

천문 시계(Astronomical Clock)

 카를 다리에서 화약탑 까지의 블타바 강 오른쪽 지구인 '구시가광장'에 있는 구시청사는 전형적인 고딕양식의 건물로, 건물벽에 붙어 있는 천문시계가 유명하다. 1437년에 제작된 이 천문시계는천동설에 기초한 두개의 원이 나란히 돌아간다.

 매시각마다 한번도 틀림없이 정확하게 시간을 알리는 이 시계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언제나 끊이지 않고 몰리는데, 두개의 원반위에 있는 천사의 조각상 양 옆으로 창문이 열리고, 죽음의 신이 울리는 종소리와 함께 그리스도의 12제자가 창 안쪽으로 천천히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마지막으로 시계의 위쪽에 있는 닭이 운다. 이 시계의 제작자에 대해서는 시계 제작의 거장이었던 미쿨라슈가 만들었다는 것과 15세기경 프라하의 천문학자이자 수학교수였던 하누슈가 만들었다는 두가지 설이 있다.

 하누슈가 만들었다는 설에 대해서는 또 슬픈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그의 손재주를 시샘한 누군가가 그의 한쪽눈을 멀게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계를 지키다 쓸쓸히 병에 걸려 죽었다는 것이다. 그의 죽음과 함께 한때 이 시계도 움직임을 멈췄는데, 이후 몇번의 수리와 1948년에 설치된 전동장치에 의해 지금까지 그 아름답고 신기한 장면을 연출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두 마리 황금 곰의 집

 좁은 멜란트리코바 거리를 통해 구시가 광장을 빠져나가다 보면 왼쪽 첫번째 샛길에서 '두 마리 황금 곰'이라고 부리는 집 정문을 보게 될 것이다. 현재 우리가 보는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은 1576년에 지어진 원래의 집을 토대로 건축된 것이다. 1590년 로렌츠 슈토르크(Lorenc stork)라는 한 부유한 상인이 성 비투스 성당의 첨탑을 설계한 궁정 건축가 보니파즈 월무트(Bonifaz Wohlmut)에게 일임하여 정문이 세워졌다. 두 마리 곰이 부조되어 있는 이 화려한 정문은 프라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르네상스 양식의 문으로 꼽힌다. 역시 16세기에 지어진 장엄한 아케이드가 안뜰에 보존되어 있다. '사나운 기자'로 알려진 에곤 어윈 키스크(Egon Erwin Kisch)가 1885년에 이 곳에서 태어났다. 독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키스크는 좌익성향의 글을 많이 썼다.

 

 

성 갈 교회

 1280년경에 지어진 이 교회는 갈스 타운으로 알려진 독일 자치 지구를 위해 지어졌다. 이 지역은 14세기 때 구시가에 합병되었다. 18세기에는 조반니 산티니 아이켈에 의해 대대적인 개축작업이 이루어졌다. 그는 건물정면에 과감한 물결 무늬를 넣고 페르디난트 브로코프의 성인 조각상을 장식했다. 내부의 많은 비품들 가운데에는 화가 카렐 슈크레타의 그림 몇 점도 포함되어 있으며, 그는 이 교회에 묻혔다. 한때 프라하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유명한 야외시장이 이 곳에 장을 벌였다. 하벨스카 거리에는 아직도 꽃, 채소, 장난감 등을 파는 노점상들이 늘어서 있다.

 

 

클람 갈라스 궁전

 시의 문서 보관소로 사용되면서 이 장엄한 바로크 궁전은 안타깝게도 다소 시련을 겪고 있다. 빈의 궁정 건축가인 요한 베른하르트 피셔 폰 에를라흐가 설계한 이 궁전은 보헤미아의 최고 사령관인 얀 갈라스 드 캄포(Jan Gallas de Campo)를 위해 1730년에 지어졌다. 이 궁전의 웅장한 문들 옆에는 마티아스 브라운이 조각한 두 쌍의 헤라쿨르스가 지키고 서있다. 누구라도 이 문을 보면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이다. 궁전에는 극장이 하나 있는데, 이 곳에서 베토벤이 자신의 작품을 공연했다.

 

 

카를 거리

 12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좁고 구불구불한 거리는 왕의 지나는 길의 일부였다. 옛날에는 이 길을 따라 프라하성까지 대관식 행렬이 지나갔다. 지금까지도 본래의 고딕, 르네상스 양식의 집들이 다수 남아 있으나, 이 집들의 대부분은 상점으로 바뀌어 구시가 광장과 카를 교를 찾는 관광객들을 유혹하고 있다. '황금 뱀의 집(18번지)'은 프라하에서 가장 오래된 까페이다. '황금연못'(3번지)도 찾아가 볼 만한 곳이다. 치장 벽토를 사용하여 제작한 부조로 장식되어 있는 이 건물의 정면은 웅장한 바로크 양식으로 꾸며져 있다. 부조 장식은 역병을 퇴치했다는 성인 성 로크와 성 세바스티안(St Sebastian)의 모습을 담고 있다.

 

 

클레멘티눔

 황제 페르디난트 1세(FerdinandⅠ)는 체크를 다시 카톨릭 국가로 만들기 위해 1556년에 예수교파를 프라하로 불러들였다. 그들은 성 클레멘트의 도미니크 수도원에 본부를 설치하고 클레멘티눔이라 이름했다.

 이는 곧 우트라퀴스트 대학인 카롤리눔(Carolinum)의 라이벌이 되었다. 프라하 최초의 예수 교회인 '구세주의 교회(Kostel sv. Salvatora)가 1601년 이 곳에 지어졌다. 건물 정면에는 얀 벤들이 조각한 7인의 성자상이 있는데, 밤이면 불빛이 눈부시게 밝혀진다. 1618년에 추방된 예수교파들은 2년 후 다시 돌아왔다. 이들은 이교도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한 모습이었고, 1622년에는 두 대학을 합병함으로써 예수교회가 프라하의 고등교육을 독점하도록 했다. 전인구의 70%를 이교도라고 믿었던 예수교파는 체크 전역에 걸쳐 이단 서적을 수색하여 수천권씩 불태웠다. 1653년부터 1723년까지 클레멘티눔은 동쪽으로 확장되어 나갔다. 이 확장 공사로 30여 채의 가옥과 3채의 교회가 철거되었다. 1773년에 로마 교황이 이 교단을 해체하자 예수교파는 프라하를 떠나야 했고, 교육은 세속화됐다. 이후 클레멘티눔은 프라하 대학 도서관이 되었고, 현재는 국립 도서관으로 쓰이고 있다.

 

 

체코 국민주의음악의 아버지 스메타나를 기념하는 스메타나 박물관

 블타바 강변 모래톱에 신 르네상스 양식의 수도 시설이 있었다. 이것이 지금은 체크 음악의 아버지인 베드리히 스메타나를 위한 기념관이 되었다. 이 박물관에는 스메타나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설명해 주는 문서, 편지, 악보, 악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는 열렬한 애국자였으며, 그의 음악은 국가 부흥의 기운을 돋웠다. 말년에는 귀가 먹어 자신의 유명한 교향시 '나의 조국(Ma vlast)'이 연주되는 것을 들을 수 없었다.

 

◐ 스메타나 (Bedrich Smetana, 1824~1884)

 "스메타나의 죽음은 나에게 깊은 슬픔이라고, 나는 감히 당신들에게 말한다. 그는 진정한 천재였다." - 스메타나의 죽음을 듣고 리스트가 체크에 띄운 편지 중에서 - 스메타나는 "체크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체크인의 가슴에 영원히 남아 사랑 받고 있다. 보헤미아 리토미즐에서 맥주 제조 기술자의 아들로 태어난 스메타나는 11세 때 공부를 하기 위해 혼자 프라하로 떠난다. 거기서 베를리오즈, 슈만, 그리고 그의 음악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리스트를 만난다. 리스트를 통해 교향시를 배우고 민족운동에 눈을 떠갈 즈음, 정치적 상황이 더욱 악화되어 스웨덴으로 떠나 5년 동안 머물면서 제1번 교향시 등을 작곡한다. 1859년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가 패배하자 보헤미아에 새로운 희망이 싹텄다. 용기가 생긴 국민들은 곧 국립극장을 설립하여 억누르고 있던 예술욕을 충족시키려 했다. 스메타나는 국민들의 바람에 보답하기 위해 1861년 귀국하여 8개의 애국적 오페라를 만든다.(최초의 작품은 '보헤미아의 브란덴부르크 사람들'이며, 이어 '팔려간 신부'를 작곡한다.) 이 두 오페라 상영 후 스메타나의 이름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고 국립극장의 수석 지휘자 자리에까지 앉게 되었다. 명랑하고 쾌적한 음색은 대중적인 매력으로 사람들의 마음 속에 녹아들어 갔다. 그러나 1870년 난청 증세로 지휘자를 그만 둔 스메타나는 북부의 작은 마을로 들어가 은둔 생활을 하다 3년 후에 정신병원에 수용되며, 결국 1884년 세상을 떠난다. 스메타나를 이야기할 때 빠트릴 수 없는 곡이 바로 6곡으로 된 교향시 「나의 조국」이다. 민족적 제재를 풍부하게 사용, 격정적이면서도 웅숭한 민족의식이 담겨 있다. 비단 체크뿐만이 아니라 국경에 상관없이 듣는 이의 가슴에 조국에 대한 사랑과 자긍심을 심어준다. 특히「나의 조국」가운데 제2곡 '블타바(몰다우)'는 국토를 어루만지듯 곳곳을 누비며 굽이치는 강물과 강변의 정경, 숲속의 사냥, 농부의 혼례, 달빛에 빛나는 '물의 요정'들의 춤을 아름답게 묘사하여 유명하다. 또한 매년 열리는 '프라하의 봄'음악제는 스메타나의 사망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사망일인 512일에 개막한다.

 

프라하의 봄

 '프라하의 봄'이라고 하면 1960년대 후반의 정치적 자유화 운동을 떠올리는 사람이 대부분이겠지만 여기서 설명하는 것은 음악제이다. 이 음악제는 1946년 체크 필하모니의 결성 50주년을 기념하여 개최된 이래 매년 빠짐없이 열리고 있는 국제적인 행사이다. 전통적으로 5월 12일의 오프닝에서는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이 연주되며 폐막일인 6월 4일에는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이 연주된다.

 오프닝에는 대통령 부처가 참가하여 음악제를 더욱 빛내준다. 1989년의 개혁 이후에는 특별히 외국의 오케스트라나 유명 연주가들을 초청하여 음악회 내용에 더욱 충실을 기하고 있다.

 연주는 드보르작 홀과 스메타나 홀을 비롯하여 시내의 콘서트 회장과 교회 등에서 행해진다. 입장권은 수개월 전부터 판매되는데 오프닝 등의 표는 빨리 매진됨으로 기간중에 표를 구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교회 등에서 열리는 비교적 소규모의 콘서트 표는 당일에도 구입할 수 있다.

 

 

십자가 기사단 광장

 구시가 교탑 앞에 펼쳐진 이 작은 광장에 서면 블타바 강 너머로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다. 광장 북쪽에는 둥근 지붕의 성 프란시스 교회가 있다. 이 교회는 한때 붉은 별을 단 십자가 기사들의 수도원으로 사용되었다. 동쪽 끝에는 거대한 클레멘티눔 건물군의 일부인 '구세주의 교회(Church of the Holy Saviour)가 당당히 버티고 있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신고딕 양식으로 만들어진 카를 4세의 거대한 청동상이 서있다. 이 동상은 그의 카롤리눔 설림 500주년 기념일에 제작된 것이다.

 

 

베들레헴 예배당

 1391년에서 1394년까지 진보적인 설교자인 얀 밀리츠 크로메리체의 추종자들이 공회당을 개축하여 지은 예배당이다. 이 곳은 주로 설교장으로 쓰였는데, 1402년에서 1413년 사이에 얀 후스가 이 교회당에서 설교하여 많은 추종자를 끌어모았다. 영국인 종교 개혁가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의 가르침에 크게 영향을 받은 후스는 교회의 부패한 관행을 비난하여 성서만이 교리의 근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산전투(Battle of the White Mountain)로 프로테스탄트 신앙이 불법으로 규정된 후 이 건물은 예수교파로 넘어갔다. 예수교파는 이를 여섯개의 본당 회중석을 갖춘 건물로 완전 개축했다. 1786년에는 건물이 거의 철거되고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서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후에야 옛 그림에 따라 재건축 사업이 시도되었다.

 

 

벽 안의 성 마틴 교회

 12세기에 지어진 이 교회는 13세기 구시가 요새화 작업 중에 새로 세워진 성벽의 일부다. 지금의 이름은 그 때 지어진 것이다. 보통 때 성직자들을 위해 비축해 두던 포도주가 이 교회에서 처음으로 신도들에게 빵과 함께 제공되었다. 이는 후스온건파의 기본 교리기도 하다. 이들은 'in both knids'란 의미의 라틴어 'Sub Utraque Specie'에서 이름을 따 우트라퀴스트(Utraquist)라 불리운다. 1787년에 교회는 작업실로 바뀌었으나 금세기 초에 본래 형태대로 개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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