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유태인들 역시 바빌론의 느브가네쟈(NEBUCHADNEZZAR) 왕의 이스라엘 정복으로 피난나온 난민들이 아스완 남쪽 엘레판틴(ELEPHANTINE)등 이집트에 정착하여 여러대를 살아온 사람들로서 유태인들도 희랍어나 이집트어만을 일상 용어로 사용하고 있었다. 331년 이집트의 아몬 신전들 중 가장 멀리 신비속에 쌓여있는 시와(SIWA) 오아시스에 찾아가서 아몬(AMON) 승려들로 부터 이집트 파라오(PHARAOH)왕의 후예 즉 신의 아들임을 인지받은 알렉산더 대왕은 라코티스(RHAKOTIS)에 자기의 도시를 건설하여 지중해 연안을 장악하으로써 아세아 대륙 진출에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판단 자신이 계획한 도시를 건설하도록 그의 건축가 디노크라테스에게 명령하였는데 이 도시가 알렉산드리아이다.
그리고 훗일 이 섬에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였던 알렉산드리아는 지중해 연안국과 세계의 무역 중심지가 되어 문화와 예술의 전당이 되어 찬란하게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대에 수학자, 천문학자, 지리학자, 철학자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석학들이 새로운 학문을 터득하여 세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포톨레미 3세는 도서관을 만들어 백롤이 넘는 파피루스를 소장하도록 하여 학문적 발전에 크게 도움이 되도록 하였는데 이렇게 많은 학문들 중에 신학도 상당히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때에 예루살렘의 엘이자 제사장은 히브리어나 당시 팔레스티나에서 일상 용어로 사용되었던 아라마익(ARAMAIC)을 전연 모르는 이집트 유태인들을 위하여 보낸 72인의 히브리어 번역사들은 피로스섬에 들어가서 모세 오경(PENTATEUCH)을 72일만에 완성했다고 하며 이어서 구약성서의 원본인 셉두아기트도 이곳에서 완성되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의(270 B.C)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는 유태인수가 예루살렘보다 많았다고 하는데 이런 현상은 이집트 사람들과 유태인들과 희랍 사람들간에 항상 반복하는 종교 이론의 현장이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화려하게 번영하던 알렉산드리아는 기원전 30년 클레오파트라 7세의 코브라독에의한 자살로 로마의 아우그스트는 이집트를 로마의 주(PROVINCE)로 삼아서 로마 제국의 식량 공급원으로 확보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유태인들에 대한 아우그스트 황제의 지나친 편역을 결국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는 그리스인과 유태인간의 분쟁과 폭동으로 발전했고 이 폭동은 포톨레미 3세가 세운 도서관에 화재를 유발하여 이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던 많은 귀중한 자료들 중 약 49만질이 불타 버렸다. 알렉산드리아의 주인이 바뀌면서 새로운 시대가 열렸고 이 새로운 시대에 따라서 기독교가 들어 왔는데 AD64-68 로마의 네로(NERO)황제 시대에 성 마가(ST. MARK)가 알렉산드리아에 들어와 유태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였는데 이것이 소위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시작이라 한다. 중부 이집트의 바하나사(BAHANASA)에서 발견된 200년경의 콥틱 문자로된 복음서들은 마가 사도의 이집트 여행을 증명하고 있다. 기원 180년경 신학자 판타내우가 설립한 알렉산드리아 카테체티칼 학교는 클레멘트나 오리겐과 같은 기독교 초기의 큰 학자들을 배출한 곳이다. 이렇게 알렉산드리아는 초기 이집트나 주변의 기독교 교육 중심지로서 중요한 곳이었었다. 이를 뒷 받침하는 중요한 자료가 1945년 이집트의 남부 지방인 나그 함마디에서 발견된 것으로 12나그 함마디 코딕스 또는 나그 함마디 도서라고 부르는 것인데 당시의 일상 용어였던 콥틱 문자로 기록되여 있는 신구약의 복음을 비롯하여 그레코 - 로만의 신비 문화, 희랍 철학과 신화, 페르시아의 배화교, 마니교, 기독교 그노스틱(GNOSTIC)과 고대 이집트의 토속 종교, 협약서,교육서, 그리고 아직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은 문서들을 막라한 것들인데 당시의 애굽 정교나 정립되지 않은 혼란한 기독교관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기원 249-251년 로마의 데시우스 황제는 전 이집트 국민들에게 로마군 입회하에 이단교인파간을 신봉토록하고 신봉 증명서를 발부하였는데 이것이 이집트 기독교사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를 내었고 또한 운둔자들도 점차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은둔 수사들 중 안토니난 바울같은 이는 홍해 주변의 성지를 찾아 은둔하면서 수많은 은둔자들의 신앙적 지도자가 되었다. 기원 284년 디오크레티안 황제는 새법을 개정하여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284년 8월 29일로서 순교자들을 기념하기 위한 콥틱 순교 달력의 원년이 된 이집트 박해 최악의 시기였다고 한다. 기원 312년에 콘스탄틴 황제가 입회한 최초의 교회 집회인 니케아 집회가 열렸을 때 동방교착의 대표들은 이집트, 시리아, 앗시리아, 소아시아, 그리스와 안티옥, 예루살렘, 알멘니아등이었고, 이 중 이집트 대표단은 알렉산더 주교를 대표로 그의 부제 아타나시우와 아리우스 장로와 그의 지지자들과 은둔 수사들, 포타몬(아몬숭배자들),마그나 그리고 여타의 모든 종파를 총막라 하였다. 그리고 서방을 대표해서 로마와 고트였는데 이 집회에는 총 318명의 신학자나 기타의 관계자가 모였다. 당시의 이 모임에서 가장 큰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은 알렉산드리아의 대표 알렉산더 대주교의 부재인 아테나시우의 주교였었는데 니케아 신조안이 인증 되었다. 그러나 신학적 분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동서로 나누어진 이론 분쟁은 로마의 정치적 혼란과 더불어 점차로 종교내에 정치적 힘이 작용하기 시작하였다. 기원 375-395년 데유도시우 황제는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로마는 호노리우스 황제와 콘스탄티노플의 아카디우스 황제간의 정치적 분리가 생겼고 이후 알렉산드리아의 이론분쟁은 그리스의 아테네와 함께 콘스탄티노플의 정치적 영향하에 들어 가게 되어 알렉산드리아의 교황으로 데오필루스가 부임하였고, 그리고 그는 고대 이집트와 포톨레마익 왕조의 유산들인 고대 종교의 신전들을 부수기 시작하였다. 이 와중에 동서방 교회의 이론 분쟁은 계속되여서 기원 451년에 마지막 이론 통일 노력인 칼세돈 집회가 실패로 돌아가자 이집트는 아주 굳어 버린 동서방의 양립 교회의 어느쪽에도 합류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알렉산드리아 교회를 운영해 나아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때에 생겨난 콥틱 교황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전례로 함께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기원 639년 아랍의 이집트 침공으로 수도를 현재의 카이로로 정하자 알렉산드리아의 찬란한 영광은 서서히 퇴락하다가 12세기 십자군에 의하여 멸망 위기에 처했다.
그리고 다시 1869년 스에즈 운하가 개설되면서 지중해에 연해있는 항구로서 유럽과의 교역 중개소로 그 중요성을 확인 시켰고 지금은 이집트의 최대 항구도시이며, 인구가 약 200만이나 되는 이집트 제 2의 도시로서 중공업을 꿈꾸는 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알렉산드리아는 지중해 연안에 면해 있는 유럽쪽의 여러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지중해 연안의 아름다운 5대 미항 중의 하나이다. 이집트의 마지막 왕이었던 파룩왕은 아름다운 몬타자궁(MANTAZA PALACE)을 지었는데 이집트 혁명으로 왕위에서 물러나고 파룩왕의 궁전은 현재 호텔과 공원으로 바뀌었다. 또한 알렉산드리아는 고대 이집트의 유산과는 다른 문화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그중에 그레코-로만 박물관의 소장품들은 아름다운 새로운 문화와 이집트 종교의 발전상을 보여주고 있는데 희랍-로마-콥틱으로 연결되는 약 4만점의 유산들은 카이로의 콥틱 박물관과 회교 박물관등과 연관성을 보여주고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1~2세기 경의 카타콤은 이집트에서는 유일한 로마 시대의 부유한 개인의(가족) 무덤으로서 암반을 깍아 만든 수직 무덤인데 내부는 삼층으로 되어 있고 실내 장치는 고대 이집트의 종교 문화의 영향으로 인한 혼돈된 특이한 무덤 장치가 당시의 종교관을 짐작케하는 아주 이채로운 유산이다. 이 지하 무덤은 훗일 로마의 기독교도 박해를 피하여 이집트 기독교도들이 은신처로 사용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성 마가가 이집트에 들어와서 최초의 복음을 전파하여 개종케한 유태인 신발수선공의 옛 집터에 세워진 마가 기념교회와 그 지하에 있는 성 마가의 머리가 묻혀 있는 지하 무덤은 현재 애굽 정교에서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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