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道家)의 창시자 - 노자(老子, Laozi, BC 571?~BC 471? (약 100세))

도덕경(道德經) · 도가사상(道家思想)

 

도가(道家)의 창시자 - 노자(老子, Laozi, BC 571?~BC 471? (약 100세))

 BC 6세기경에 활동한 중국 제자백가 가운데 하나인 도가(道家)의 창시자.

 

 성()은 이(), 이름은 이(), 자는 백양(伯陽), 또는 담().

 노군(老君) 또는 태상노군(太上老君)으로 신성화되었다.

 

 도교경전인 '도덕경(道德經)'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현대 학자들은 '도덕경(道德經)'이 한 사람의 손에 의해 저술되었을 가능성은 받아들이지 않으나, 도교가 불교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통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노자(老子)는 유가에서는 철학자로, 일부 평민들 사이에서는 성인 또는 신으로, (唐: 618~907)에서는 황실의 조상으로 숭배되었다.

 

 노자(老子)는 그 역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신원이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생애에 대한 주된 정보원은 사마천(司馬遷)이 쓴 '사기(史記)'의 노자전(老子傳)이다. 그러나 BC 100년경에 '사기(史記)'를 저술한 이 역사가도 노자에 대한 확실한 정보는 제공하지 못했다.

 '사기(史記)'에 따르면, 노자는 초()나라 고현(古縣) 여향(術鄕) 곡인리(曲仁里: 지금의 허난 성(河南省) 루이 현(鹿邑縣)) 사람으로 주(周: BC 1111~BC 255) 수장실(守藏室)의 사관(史官)이었다.

 

 사관은 오늘날 '역사가'를 의미하지만, 고대 중국에서는 천문(天文점성(占星성전(聖典)을 전담하는 학자였다. 사마천은 노자의 벼슬에 대해 언급하고 난 뒤, 늙은 노자와 젊은 공자(孔子, BC 551~BC 479)와의 유명한 만남에 대해 말했다. 이 만남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많은 논의가 있어왔다. 이 만남은 다른 문헌에서도 언급되어 있으나, 일관성이 없고 모순되는 점이 많아 단지 전설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다. 노자와 공자가 만났을 때 노자는 공자의 오만과 야망을 질책했고, 공자는 그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아 그를 구름과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용에 비유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 못지않게 유명한 전설은 노자가 서쪽으로 사라진 이야기이다.

 

 그는 주가 쇠망해가는 것을 보고는 주를 떠나 진()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함곡관(函谷關)에 이르렀다. 관문지기 윤희(尹喜)가 노자에게 책을 하나 써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노자는 5,000()으로 이루어진 상편· 하편의 저서를 남겼는데 그것이 도()와 덕()의 뜻을 말한 '도덕경(道德經)'이다. 그리고 나서 노자는 그곳을 훌쩍 떠났고, "아무도 그뒤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라고 사마천은 기술하고 있다.

 

 노자(老子)가 서쪽으로 간 사실과 '도덕경(道德經)'을 저술한 점을 언급한 뒤에 사마천은 가끔 노자와 동일시되는 다른 인물들에 대해 말했다.

 "()에 노래자(老萊子)라는 사람이 있어서 책 15권을 저술하여 도가의 정신에 대해 서술한 바 있는데 공자와 같은 때의 사람이다."

 "주나라의 태사(太史)이며 위대한 점성술가인 담()이 진(秦: BC 900?~BC 206)의 헌공(秦獻公, BC 424~BC 362, 진나라의 제24대 군주, 재위: BC 384~BC 362)을 만났다는 기록이 있는데, 어떤 이는 그가 곧 노자라고 하고 어떤 이는 아니라고 한다."

 

 사마천은 또 이렇게 덧붙였다.

 "노자는 150년의 수명을 누렸다고 하는데 어떤 사람은 200년 이상 살았을 것이라고 한다."

 고대 중국인들은 초인(超人)의 장수를 믿었기 때문에 도교 신자들은 그들의 스승이 매우 오래 살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훨씬 뒤에 생겨난 전통으로 여겨지는데, 그 근거로는 BC 4세기경에 활약했던 장자(莊子, BC 369?~BC 286)가 노자의 죽음에 대해 얘기할 때 그가 아주 오래 살았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노자(老子)의 생애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이유로 사마천은 그가 은군자였음을 들었다. 은군자인 노자는 작위(作爲)함이 없이 저절로 교화되게 하고, 맑고 고요하게 있으면서 저절로 바르게 되는 것을 가르쳤다. 실제로 중국 역사상 속세를 떠난 은자는 늘 있어왔다. '도덕경(道德經)'의 저자(또는 저자들)는 생애의 흔적을 남기지 않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노자(老子)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인가 하는 의문은 많은 학자들이 제기해온 것이지만, 그같은 의문은 별 의미가 없다.

 

 현존하는 '도덕경(道德經)'1명의 저작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 내용 가운데는 공자 시대의 것도 있지만 다른 내용은 훨씬 후대의 것임이 분명하므로, 이 책은 전체적으로 보아 BC 300년경에 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같은 사실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도덕경(道德經)'의 저자가 태사 담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학자들은 '사기(史記)'에 나오는 노자의 후손들에 대한 기술이 신빙성있다고 보고 노자의 생애가 BC 4세기말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노자(老子)의 가계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간주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사마천이 살았던 시대에 이()라는 가문이 스스로 도교의 성현인 노자의 후예라고 주장했다는 사실이 있었음을 증명해줄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노자가 실제로 존재했었는가를 조사하는 출발점이 될 수 없다. 노자라는 이름은 어떤 개인보다 특정형태의 성인집단(聖人集團)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성인으로서의 전설

 '사기(史記)'의 노자전(老子傳)과 기타 오래된 문헌에서 이따금씩 나오는 기술을 제외하고도 2세기 이후부터는 노자에 대한 성인전(聖人傳)이 여러 편 저술되었다.

 

 이같은 전기는 도교의 형성사에서 흥미로운 것이다. 후한(後漢: 25~220)시대에 노자는 이미 신화적인 인물이 되어 사람들의 숭배를 받았고 때로는 황제도 그를 숭배했다. 그뒤 종교계에서 성전(聖典)의 계시자이며 인류의 구세주인 노군(老君)으로 추앙되었다. 노자의 출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그 가운데 부처의 기적적인 탄생신화에 영향을 받은 것이 있다. 노자의 어머니는 노자를 72년간 임신하고 있었고, 노자는 어머니의 옆구리를 통해 이세상에 나왔다고 한다.

 

 또다른 신화는 노자의 성()이 생겨난 유래를 설명한다. 노자는 오얏나무(李木) 아래에서 탄생했기 때문에 오얏을 의미하는 이()가 성이 되었다고 한다. 이 두 신화는 도교신앙에서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첫번째 신화에 따르면 노자는 역사상 여러 명의 다른 인물이 되어 지상에 내려와 통치자들에게 도교의 교리를 가르친 것으로 해석된다.

 

 두번째 신화는 노자의 서행(西行: 함곡관으로 간 것) 이야기에서 발달된 것으로 이 신화 속에서 부처는 바로 노자라고 간주된다. 3세기경 불교의 포교활동을 방해할 목적으로 이같은 이야기를 조작하여 위경서(僞經書)가 씌여졌다. '노자화호경(老子化胡經)'이 바로 그것인데, 이 책에서 불교는 도교의 아류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중국의 역대 정부는 빈번히 이 책을 금서로 지정했다.

 

 노자(老子)라는 인물은 모든 계층에게 일반적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어왔다.

 

 유생들에게는 존경받는 철학자였고, 평민들에게는 성현이나 신으로, 도교 추종자들에게는 도()의 화신이자 도교의 가장 위대한 신들 가운데 하나로 숭배되어왔다.

 

사상

 도교의 모든 이론은 노자에 의해 마련되었다.

 

 '도덕경'을 통해 볼 때, 노장사상의 핵심은 '무위자연(無僞自然)'에 있으며, 그것이 ''()라는 개념으로 집약된다. 여기서 '무위'는 우주론적 정향을 지향하는 것, 즉 부자연스런 행위를 조금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무위자연의 구체적인 의미를 말한다면 '사실 자체의 바탕 위에서 떠나지 말라'는 것이다. 사실 자체란 다름아니라 노자(老子)에게 있어서는 자연이요, (), (), 변화이다.

 

 그리고 무위(無僞)란 그 바탕 위에 서서 떠나지 않음을 의미한다.

 

 

 

도덕경(道德經)

 도가철학의 시조인 노자(老子)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도가서.

 

 '노자(老子)' 또는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이라고도 한다. 약 5,000자, 81장으로 되어 있으며, 상편 37장의 내용을 '도경(道經)', 하편 44장의 내용을 '덕경(德經)'이라고 한다.

 

 노자(老子)가 지었다고 하나 한 사람이 쓴 것이라고는 볼 수 없고, 여러 차례에 걸쳐 편집된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랜 기간 동안 많은 변형 과정을 거쳐 BC 4세기경 지금과 같은 형태로 고정되었다고 여겨진다.

 

 여러 가지 판본이 전해 오고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한()나라 문제(文帝) 때 하상공(河上公)이 주석한 것으로 알려진 하상공본(河上公本), ()나라 왕필(王弼, 226~249)이 주석하였다는 왕필본(王弼本)의 두 가지가 있다.

 

 그리고 전문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지만, 둔황(敦煌)에서 발견된 당사본(唐寫本)과 육조인사본(六朝人寫本)이 있고, 여러 곳에 도덕경비(道德經碑)가 아직도 흩어져 있어 노자의 경문을 살펴보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근년에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의 한묘(漢墓)에서 출토된 백서노자(帛書老子)와 색담사본도덕경(索紞寫本道德經)은 '도덕경(道德經)'의 옛 형태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원래 '도덕경(道德經)'은 상· 하로만 나누어졌을 뿐이지만, 장구지학(章句之學)이 성행한 한대(漢代)에 들어와서 장·절로 나누어졌다고 보인다.

 

 

 '도덕경(道德經)'의 구성 체재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학자들간에 의견이 분분하였고, 성립 연대 및 실질 저자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았는데, 한 사람이 한꺼번에 저술하였다는 관점과 도가학파의 손에 의하여 오랜 기간에 걸쳐 당시의 여러 사상을 융합시켜 만들어진 것이라는 관점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한 사람의 전작물임을 주장하는 관점은 노자를 공자(孔子)와 같은 시대의 실존인물로 보아 '도덕경(道德經)'을 그의 작품으로 인정하는 것이고, 부정하는 관점은 노자가 가공인물이라는 점과, 또한 비록 실존인물이라 하여도 '도덕경(道德經)'과는 상관이 없다는 관점에서 현존하는 '도덕경(道德經)'은 여러 사람에 의하여 오랜 기간 동안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도덕경(道德經)'을 둘러싸고 제기되는 많은 문제점과 상반된 처지에도 불구하고, '도덕경(道德經)'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 기본 사상이 변함없이 계속해서 일관성을 유지해 오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 '도덕경(道德經)'의 사상은 한마디로 무위자연(無爲自然: 인공(人工)을 가()하지 않은 그대로의 자연(自然) 또는 그런 이상적(理想的)인 경지(境地))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무위(無爲)는 '도는 언제나 무위이지만 하지 않는 일이 없다(道常無爲而無不爲).'의 무위이고, 자연은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天法道道法自然).'의 자연을 의미하는 것으로, 결국 '도덕경(道德經)'의 사상은 모든 거짓됨과 인위적인 것에서 벗어나려는 사상이다.

 

 좋다· 나쁘다, 크다· 작다, 높다· 낮다 등의 판단들은 인간들이 인위적으로 비교하여 만들어낸 상대적 개념이며, 이런 개념들로는 도()를 밝혀낼 수 없다는 것이다. 언어라는 것은 상대적 개념들의 집합체이므로 '도덕경(道德經)'에서는 언어에 대한 부정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이 점에서 유가사상과 현격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유가사상에서는 인위적 설정이 강조되는 예학(禮學)이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으며 언어에 의한 규정이 강력하게 요청되기 때문이다.

 

 반면, '도덕경(道德經)'에서는 규정성의 파기와 언어에 대한 부정을 강조하는데, 유가사상이 중국 북방의 황하유역에서 형성된 것인 반면, 이런 무위자연의 사상은 중국 남방의 장강유역에서 형성되었다는 기질적인 차이로 설명되기도 한다.

 

 즉, 북방은 생존조건이 열악하기 때문에 살아가기 위해서는 현실적이고 투쟁적이어야 하지만, 남방은 날씨가 온화하고 자연 조건이 순조로워 평화적이고 낭만적이었는데, 이런 분위기의 차이가 사상 형성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유가사상이 인((() ·()의 덕목을 설정하여 예교(禮敎)를 강조하면서 현실적인 상쟁대립이 전제된 반면, '도덕경(道德經)'의 사상은 상쟁의 대립이 인위적인 것으로 말미암아 생긴다고 보고, ()와 자연의 불상쟁(不相爭) 논리를 펴나간 것이다.

 

 이러한 내용의 '도덕경(道德經)'의 사상은 학문적인 진리 탐구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지만, · , 남북조시대처럼 사회가 혼란과 역경에 빠져 있을 때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지혜를 밝혀 주는 수양서로서도 받아 들여졌으며, 민간신앙과 융합되면서 피지배계급에게 호소력을 지닌 사상 및 세계관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우리 나라 자료에는 '삼국사기(三國史紀)' 권24 백제본기2 근구수왕(近仇首王, 백제의 제14대 왕, 재위: 375~384) 즉위년조에 근구수왕이 태자로 있을 때 침입해 온 고구려군을 패퇴시키고 계속 추격하려 하는 순간, 휘하의 장수 막고해(莫古解, ?~?)가 다음과 같이 간언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듣기로는 도가의 말에, 족함을 알면 치욕을 당하지 않고, 멈출 줄 알면 위태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제 얻은 것이 많은데 더 욕심을 내어서 무엇합니까"

 이 말을 듣고 추격이 중지되었다고 하는데, 이 구절은 '도덕경(道德經)' 44장에 나오는 말이다.

 

 '도덕경(道德經)'의 구절이 장수의 입에까지 오를 정도였다면 당시 사회에서는 상당히 광범위한 영향력을 가졌던 것임에 틀림이 없고, 나중의 일이지만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도 비슷한 내용의 시를 수나라 장수에게 보낸 것이 '삼국사기(三國史紀)'에 나타나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보장봉로조(寶藏奉老條)에는 당나라 고조(高祖)가 고구려인의 오두미교 신봉 이야기를 듣고 624년 천존상과 함께 도사를 보내어 '도덕경(道德經)'을 강론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이듬해 영류왕은 당나라로 사신을 보내어 불(()를 배우고자 하였고, 고조는 이를 허락하였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보장왕이 연개소문(淵蓋蘇文)의 건의에 따라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도교를 배우도록 하였는데, 당나라 태종(太宗)이 도사 8명과 '도덕경(道德經)'을 보내 주자 왕은 기뻐하며 승사(僧寺)를 지어 도사를 거처하도록 하였다는 내용이 나타난다.

 

 신라에서는 575년 화랑도를 만들고 그 정신을 현묘지도(玄妙之道)라 칭하였는데, ‘현묘라는 말은 '도덕경(道德經)' 1장에 나오는 현지우현 중묘지문(玄之又玄衆妙之門)’을 연상시키는 용어로 도가의 영향을 받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통일신라 말기의 혼란한 상황에서 도술연구에 골몰하였던 김가기(金可紀, ?~859)에 대해서는 홍만종(洪萬宗, 1643~1725)의 '해동이적(海東異蹟)'에 나타나 있는데, 그는 '도덕경(道德經)'을 비롯하여 여러 선경(仙經)을 계속해서 낭송하고 수련을 계속한 끝에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고려 때는 왕 중에서도 도교신앙이 제일 돈독하고 재위 당시 도교가 융성하였던 예종이 청연각(淸燕閣)에서 한안인(韓安仁, ?~1122)에게 명하여 '도덕경(道德經)'을 강론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고려사(高麗史)'에 보인다. 유교경전과 대등하게 다루어서 강론시켰을 정도이므로, 당시 '도덕경(道德經)'을 연구하던 사람의 숫자도 많았고 수준도 높았으리라 짐작된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엄격한 주자학적 사상(朱子學的思想)과 그 배타적 성격 때문에 '도덕경(道德經)'에 대한 연구가 위축되었지만, 유학자들 가운데서 주석서를 펴내어 끊임없는 관심을 보여 주던 사람들이 있었다.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은 '신주도덕경(新註道德經)'을 저술하였고, 이이(李珥, 1536~1584)는 '도덕경(道德經)' 81장을 40여 장으로 줄여 '순언(醇言)'이라는 주석서를 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도덕경(道德經)'에 관한 관심은 희박하였는데, 그 이유는 자신 이외는 모든 사상을 이단으로 보는 성리학의 성격 때문이었다. 그러나 '도덕경(道德經)'의 기본 흐름은 일찍부터 도교신앙과 접합되어 오면서 민중의식 속에 깊이 뿌리박혀 기층의 민간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도가사상(道家思想)

 노장사상(老莊思想)을 계승, 발전시킨 철학사상.

 

 도교(道敎)와 도가사상(道家思想)은 엄밀한 의미에서 구분된다. 그것은 전자가 종교사상이요, 후자가 철학사상이라는 점도 있지만, 두 사상은 애당초 다른 진리관에서 출발하여 전연 별개의 사상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도교(道敎)는 고대의 민간신앙을 기초로 노장사상· 역리(易理)· 음양· 오행· 참위(讖緯)· 의술· 점성, 그리고 불교와 유교사상까지 받아들여, 심신의 수련을 통한 불로장생의 탐구와 기복(祈福)을 통한 현세이익을 추구하여 나가는 종교현상이다. 이를 크게 수련도교(修鍊道敎)와 기복도교(祈福道敎) 또는 과의도교(科儀道敎)로 나누어 보기도 한다.

 

 그러나 도가사상(道家思想)은 이와는 달리 노장사상(老莊思想)을 계승, 발전시킨 철학사상으로 인간의 현실적 타락과 무지의 근거를 찾아 그것을 척결해 내고, 자연의 실상을 깨달은 참지혜를 통하여 무위(無爲)의 삶을 추구하는 사상 경향을 말한다. 이를 보통 무위자연사상(無爲自然思想)이라고도 한다.

 

 우리 나라에 도가사상이 전래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에는 624(영류왕 7)에 들어왔고, 신라와 백제에도 그 무렵을 전후하여 유입되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도가사상이 신도사상(神道思想) 내지는 선도사상(仙道思想)으로 대표되는 민족고유사상과 자연풍류사상의 바탕 위에서 도교와 분명한 구분 없이 혼합된 형태로 받아 들여 이해되어 왔다.

 

 이와 같은 경향은 수용 초기 삼국시대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어왔으니, 우리 나라의 도가사상을 굳이 도교와 구별해서 논할 필요가 없다는 견해도 있다.

 

 그렇지만 여말 선초 성리학의 학문적 구명과 더불어 노장학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새로이 일어난 사실은 주목해야 한다. 도교의식이나 연단법(煉丹法)과는 다른 차원의 도가사상에 주목하게 되었던 것이다. 예컨대, 도교와 구별되는 우리 나라의 도가사상은 원칙적으로 여말선초에 성리학을 부각시키기 위해 이단(異端)의 사유를 구명하고자 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그 이전까지 도가사상(道家思想)은 유교나 불교처럼 뚜렷한 자기 모습의 사상성을 드러내지 못한 채 민간신앙에 근거를 둔 미신적 종교현상으로만 존속해왔을 뿐, 한번도 학문 대상으로서 심각한 문제거리로 대두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 말은 그 이전 고려시대까지의 사상 속에서 도가사상의 실마리를 전혀 찾을 수 없다거나, 도가의 체계적인 이해와 정립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도교(道敎)와 도가사상(道家思想)이 함유된 다양한 종교현상 속에서, 풍수· 도참 사상 특히 단학파(丹學派)의 도맥(道脈)을 형성한 수련도교(修鍊道敎)의 인물과 사상 가운데서 도가철학의 요소를 찾아 새롭게 이해할 가능성은 열려 있다. 그 구체적인 작업은 앞으로 새롭게 정립해야 할 우리 나라 철학계의 과제이다.

 

 도가철학 내지 도가사상은 그저 막연히 도교라고 할 때와는 달리 노장사상에 대한 철학적 이론을 학문적으로 문제삼아 다룬 것만을 의미한다. 도교와 도가사상의 실질적인 구분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겠다.

 

 도가사상(道家思想), 즉 노장철학에 대한 학문적 관심은 조선 건국의 주도적 인물인 정도전(鄭道傳)의 '심기리편(心氣理篇)'이라는 짤막한 논문과 그 논문에 대한 상세한 주석을 달고 서(발문을 붙인 권근(權近, 1352~1409)의 해설에서 처음 찾아볼 수 있다.

 

 이 논문의 내용은 '불씨잡변(佛氏雜辨)'과 더불어 이단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분석인데, 참다운 진리탐구의 학문이 무엇인가를 천명함으로써 고려 말에 전래되기 시작한 '송학', 즉 성리학의 학문적 기반을 공고히 하는 데 목적을 둔 저술이었다. 여기서 이단은 노(()을 의미한다. 도가에 대한 학문적 관심은 이단사상으로 비판받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비판은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확실한 이해와 연구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 비판이 비록 '이단(異端)'임을 증명하여 뿌리 뽑기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일단 그 사유형태를 학문 영역 안으로 끌어 들여야 하는 것이다. 학문적 이해와 연구가 이루어진 바탕 위에서라야만 그 비판은 합리적 설득력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이단을 막고 올바른 학문’, 즉 정학(正學)인 유학을 천명하려는 확실한 목적의식에서 쓰인 것이기는 하지만, 정도전(鄭道傳, 1337~1398)의 '심기리편(心氣理篇)'은 유(儒)· 불(佛)· 도(道) 삼가(三家)의 사상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비교, 검토한 뛰어난 저작이다. 일관성 있는 논리와 이해의 깊이는 유학의 분명한 자기 위치를 확보하고 있으며, 도가사상에 대한 이해의 깊이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정도전은 삼가사상의 핵심적인 문제를 불가(佛家)는 심(), 유가는 이(), 도가는 기()로 파악하였다. 다시 말해 불가는 심학(心學)으로, 유가는 이학(理學)으로, 도가는 기학(氣學)으로 규정한 것이다. 우리 나라 도가사상의 학문적 출발은 이렇게 기철학(氣哲學)으로 성격이 규정되는 데서 시작되었다.

 

 그 '기()'는 성리학에서 말하는 '이기(理氣)'에서의 '기()'와 비슷한 개념으로 형이하의 현상적 존재 일체를 의미하였다. 성리학에서 '이()'는 그러한 현상적 존재의 본질이자 원리로 '기()'보다 한 차원 높은 실재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도가는 우주와 인간의 여러 현상이 '이(理)'에 의해 존속되는 것임을 알지 못하고 '기()'만을 알고 논하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정도전은 비판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도가철학을 유가의 이기구조에서의 '기()', 즉 형이하의 현상적 존재만을 전부인 것으로 인식하는 철학이라고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도가에서 다루는 '기()'가 과연 그러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다. 도가의 '기()'는 '이(理)'와 상대가 되는 '기()'의 의미를 지닌다기보다는 오히려 유가의 '이(理)' 이상으로 모든 것의 근원인 형이상적 실체이며 본질인 동시에 '현상 그 자체'인 궁극적 실재이다.

 

 유가의 입장에서 보면 '기()'에 대한 의미분석은 형이하적인 '기()', 경험 가능한 것의 요소 이상일 수 없는 한계를 지닌다. '기()'는 '기()'요 '이(理)'일 수 없는 이상, 유가적 사념 속에서는 '기()'가 근원적·본질적일 수 없으며 보편적 존재일 수도 없었다. '기(氣)'는 특수이고 개체적이며 형이하의 존재로 인식되었다. 바로 여기에 '기(氣)' 개념에 대한 유가적 이해의 한계가 있다.

 

 도가의 '기()' 개념과 유가의 개념구조 내에서의 그것은 동일한 것이 아님을 미처 생각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理)' 없는 '기()'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유가의 굳건한 입장이다. 예컨대, 도가에 대한 비판은 "노장이 '기()'만을 말하고 '이(理)를 말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가해졌다.

 

 정도전 이후 조선시대의 사상적 풍토는 표면적으로는 계속 도가사상을 배척의 대상으로 삼아 왔으나, 도가의 기론(氣論)을 어떤 형태로든 받아 들여야 하는 운명에 처하여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기()' 없는 '이(理)'만을 문제삼을 수 없는 것이 성리학이고 보면, 기론은 유가철학이 다루어야만 하는 자기 운명을 동시에 지녔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 도가철학의 실재는 '부정되는 동시에 긍정의 소지를 항상 보유하면서', 때로는 적극적인 수용의 양상으로, 때로는 유가적인 '기()'와는 다른 새로운 '기()'의 의미를 탐색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철학적 수용이라 함은 막연한 사상성의 침투가 아니라 이론적인 학문적 이해로 들어와 문제가 된 경우를 의미한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도가사상은 표면적으로는 성리학과 아무런 관련도 맺지 못하고 부정적으로만 평가되어 뿌리째 뽑혀 나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도가의 '기()'를 '이기(理氣)'와 연결된 '기()'의 의미로 파악하는 것부터가 자기수용의 터전을 마련하고 있었던 셈이라고 할 수 있다.

 

 권근은 "하늘이 음양오행으로 만물을 화생(化生)하는 질료가 '기()'이다. 인간도 기를 받아 생()하는데 이 '기()'는 형이하의 것이다."라는 주희(朱熹)의 말을 이용하면서, 도가철학은 바로 이 '기()'를 문제삼아 나간 철학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 기는 반드시 '이(理)'가 있어야 존립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유가에서 인지된 '이(理)'의 개념이다.

 

 '기()'의 운동을 규정하는 본원은 '이(理)'에 있다는 것이다. 이 '이(理)'에 근거를 둔 현상은 질서를 보유하며, 이 규범이 생의 의미인 자기질서(道德)라는 가치의 영역을 이룬다. 현상적 존재의 의미는 '이(理)'가 부여한다. 그것이 다름아닌 의(), ()이요, (), ()이요, ()이요, ()이다.

 

 그러나 '기()'만을 문제삼는 도가에서는 현상적 실상이 무엇이며, 존재성이냐 비존재성이냐가 문제이지, 현상적 존재의 '가치론적인 의미', 즉 선악과 시비를 깊이 따지지 않았다. '기()'는 그 자체로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다. 그저 '현상 자체'일 따름이다. 의미는 부여하는 바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 가치의 절대적인 표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여 문제삼지 않았다.

 

 그런데 유가에서는 바로 '존재의 의미'를 묻고 탐색하여 그것을 행위의 준칙으로 삼고자 한다. 현상적 존재를 기반으로 하여 찾아낸 근거·원리· 규범이 다름아닌 '이(理)'이다. 이때 '이(理)'는 어디까지나 '근거이지, 그것이 그대로 의· · · 선은 아니다. 그러한 가치론적 의미들은 모두 현상적 존재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개념들이니 유가철학은 '이(理)' 못지 않게 '기()'를 중요시 하였다.

 

 '기()'는 현상적 존재성이다. 도가사상에 대한 비난도 여기에 근거를 두고 체계 내부로 수용하는 것도 이 점에 입각해 있다. 도가에 대한 비난은 생의 의미를 찾아 들어 갈 근거를 설정하지 않았다는 데 있으며, 도가의 관점에서는 생은 생 그대로 용인되어야 할 전부이다. 이렇게 보면 유가의 비판과 부정에도 불구하고 도가를 '생의 철학'으로 수용할 길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생은 현상적 존재의 개체 개체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형이하의 '기()'이다. 의미없는 생은 생이 아니라 할지 모르나 도가에서는 오히려 '자연스러움'을 '기()'의 본 모습으로 보고 목적이나 의도를 위하여 '의미'를 추구하는 것을 위험하게 여겼다. '몸은 죽은 나무같이 해야 하며, 마음은 식은 재처럼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유가는 생을 무조건 용인하지 않고 반성을 통해 그것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 나갔다. 생은 의미가 부여될 때 비로소 가치 있는 것이 된다고 인식하였던 것이다. 도가철학은 그러한 인위적 의미부여를 거두었을 때 비로소 생이 온전해진다고 보았다.

 

 '기()'의 문제가 화생만물(化生萬物)하는 현상적 존재에서 다루어지는 생의 철학이었기에, 도가사상에 대한 기철학적 측면의 연구와 이해, 수용은 기론을 더욱 분명히 하여 '이(理)'의 존재론적 의미를 검토하고 다지는 데 기여하였다.

 

 도가사상의 학문적·이론적 논구는 여말선초에 유자(儒者)들의 이해와 비판에서 비롯되었다. 우리 나라 도가사상은 이를 통하여 성립되었다. 도가에 대한 기철학으로서의 파악은 그 동기가 도가사상에 대한 긍정적·동조적 이해를 위해서가 아니라, 당시 지배이데올로기로 강력하게 요구되었던 성리학의 수용과 정착에 이바지하고자 하였던 비판의식에 있었다.

 

 논박, 배척, 부정하기 위하여 도가를 살펴보고 그 취약점을 찾아내려 애썼던 것이다. 따라서, 그 논구와 이해의 방법은 출발부터 유가적인 사유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해의 자기 한계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를 통해서 우리 나라 도가의 실질적 내용을 비로소 형성하였다는 점에서 사상적· 철학적 의의를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도가(道家)는 '기철학(氣哲學)'이라는 사실로 하여 배척되고 평가 절하되었으나, 뒤집어 보면 바로 그 점이 유가에 수용될 여지가 있었던 곳이다. 도가의 기론이 유가의 '이기구조적 사유'에 끼친 영향을 염두에 두고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다. 이러한 기철학으로서의 이해와 파악이 우리 나라 도가사상의 특질로 지적될 수 있겠다.

 

 서경덕(徐敬德, 1489~1546)에 이르러 양상이 좀 달라진다. 지금까지 이해되어 온 유가적 사유체계 내의 '기()'가 고식성을 탈피하여 전혀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된다. '이(理)'와는 무관하게 독립적· 자율적으로 활동하는 '기()'의 본질과 근원을 다룬 것은 획기적인 전환이었다. 서경덕은 이렇게 도가의 '기()' 개념을 깊이 이해하고, 유가적 '이기(理氣)' 개념을 철저히 검토한 바탕 위에서 자신의 독창적인 체계를 구축해 나갔다.

 

 이이(李珥, 1536~1584)는 노자(老子)를 새롭게 재평가하여 독자적인 주석과 편찬의 성과인 '순언(醇言)'을 남기고 있다. 조선 후기에 민간에 음성적으로 만연하던 도가사상을 깊이 우려한 한원진(韓元震)은 장자(莊子)의 사상이 철저한 오류임을 밝히려고 '장자변해(莊子辨解)'를 지었다.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은 무조건 비판을 일삼거나 유가와 배치되는 부분을 삭제하는 편법을 택하지 않고, 유가적 입장에 튼튼히 서서 '도덕경(道德經)'과 '장자(莊子)'를 차근차근 주석한 희귀한 전통을 수립하였다.

 

 

 

스타투어(Star Tour)

☎: (02)723-6360

http://www.startour.pe.kr

블로그 : 스타투어

E-mail: startour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