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대의 희곡작가· 문학가 탕현조(湯顯祖, 1550~1616 (66세))

 

◈ 명대의 희곡작가· 문학가 탕현조(湯顯祖, 1550~1616 (66세))

 탕현조(湯顯祖, 1550~1616)는 중국 명나라 시대 후기의 문관(文官), 극작가, 시인이다.

 자(字)는 의잉(義仍)이며 호(號)는 옥명(玉茗), 옥명당(玉茗堂), 왕명당(王茗堂), 해약(海若)이다.

 

 영국의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와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로 동양의 셰익스피어로 불리고 있다.

 

 장시성(江西省) 임천(臨川)에서 출생하였고 23세 때 시인으로 첫 입문하였다가 이후 33세 때는 진사시에 급제.

 난징의 태상박사(太常博士)· 예부주사(禮部主事)를 역임했다.

 

 1591년 상소에 의해 탄핵되어, 광둥(廣東) 서문전사(徐聞典史)로 좌천되었으나, 그뒤 저장(浙江) 쑤이창(遂昌)의 지현(知縣)으로 승진했다.

 5년 뒤 권세가의 미움을 사서 면직되었으며, 그뒤 린촨의 '옥명당'(玉茗堂)에서 살면서 희곡 창작에 전념했다.

 

 30세경부터 극작을 시작.

 1587년에 '자차기(荊釵記)', 1598년에 전기(傳奇) '환혼기(還魂記)', 1600년에는 '남가기(南柯記)', 1601년에는 '한단기(邯鄲記)'를 썼다. 이 4전기는 이른바 그의 대표 걸작으로서 '임천사몽(臨川四夢)'이라든가 '왕명당사몽(王茗堂四夢)'이라 칭하여 높이 평가되고 애호받았으며, 염려(艶麗)·농후한 관능적 향기에 넘쳐, 명대 곤곡(崑曲) 전기(傳奇)의 대표작으로서 일세를 풍미했다. 사몽(四夢)이란 4편(四篇), 또는 꿈에 유래된 이야기에 연유된다. 그 문체는 희곡적이라기보다 오히려 문학적이었으므로 상연할 때에는 각색이 필요했다.

 

 일반적으로 명대 극작가는 권력 밖에서 고투한 원대 잡극가와는 달리, 관계에서 뜻을 이룬 현관(顯官)이나, 왕족의 여기적(餘技的) 교양에서 나온 것으로, 그 내용은 황당한 신선담, 풍류 문인의 유락 일사(遊樂逸事), 또는 상투적인 재자 가인(才子佳人) 전기 등 문인 취미의 격식 속에 박혀서 사회를 보는 눈이 예리하지 못하고 생기를 결하고 있다. 그러나 가정(嘉靖) - 만력(萬曆)에서 명말에 걸쳐, 중국의 봉건사회가 새로운 단계(이른바 '자본주의'의 맹아기)에 들어서는 시기에 강남(江南) 극계에 등장하여, 계통적으로도 태주학(泰州學)파나 동림당(東林黨) 등, 당시 진보적 문인 그룹과 유대가 깊었던 탕현조의 희곡 작품에는 그 때까지의 재자 가인 전기의 한계를 넘어 개성(個性) 해방, 봉건제 비판이라는 당시의 시대적 과제와 대결한 면도 엿보인다. 그 점은 특히 그의 대표작 <모란정 환혼기>에 가장 집중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환혼기(還魂記)' 55장(場)은 남송 시대의 이야기다. 두려랑(杜麗娘)이라는 미소녀가 꿈에 이상적인 남편 유몽매(柳夢梅)와 정을 맺어, 꿈에서 깬 뒤부터는 밤낮을 두고 연모한 끝에 죽어버리나, 3년 후 신의 힘으로 부활하여 청년과 떳떳이 맺어진다는 이야기로 작자의 훌륭한 필치에 의해 일대 로망으로 알려져 있다.

 

 탕현조의 문집(文集)으로서는 '옥명당집(玉茗堂集)'이 있다.

 

 

◈ 모란정(牡丹亭)

 모란정(牡丹亭, 1598)은 탕현조의 희곡이다. 환혼기(還魂記), 모란정환혼기(牡丹亭還魂記)라고도 한다.

 

 명나라 남안태수(南安太守)의 딸 두여랑(杜麗娘)은 늦은 봄 어느날, 심창(深窓) 근처의 꽃밭에서 백화난만(百花爛漫: 온갖 꽃이 활짝 피어 아름답게 흐드러진 상태를 이르는 말)하고 농후감미(濃厚甘味: 빛깔이 매우 짙고 달콤함)한 춘경에 접하자, 회춘(懷春)의 정에 못이겨 아직 짝없는 신세를 장탄식하면서 저도 모르게 조는 가운데, 버들가지를 가진 한 서생과 만나 깊은 정을 나누는 순간 꿈에서 깨어난다.

 

 다음날 다시 꽃밭으로 꿈을 본 장소를 찾아간 여랑은 모란정 기슭 한구석에 꿈에서 본 서생의 모습을 닮은 큰 매화나무를 발견하고 통곡한다. 그녀는 이후 몽유병자가 되어 끝내 고민하다 죽었고, 유언에 따라 매화나무 밑에 묻혔다.

 

 한편, 광둥(廣東)의 서생 유몽매(柳夢梅)는 서울인 임안(臨安)으로 과거 보러 가는 길에 병을 얻어 남안에 머무르는 중에, 꿈에 나타난 여랑의 부탁을 받아 묘를 파보니 산 사람과 같은 여랑이 나타나서, 두 사람은 부부가 되어 서울로 향한다. 이후 여랑 부모의 방해로 고민하나, 서생의 과거 합격으로써 모든 것이 해결된다.

 

 봉건 예교(禮敎)를 뛰어넘어서 죽음으로써 살려고 한 여랑의 연애는 같은 봉건적 질곡(桎梏: 옛 형구(刑具)인 차꼬와 수갑을 아울러 이르는 말. 지나친 속박으로 자유를 가질 수 없는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에 시달리고 있던 당시의 여성층에게 개성 해방의 문제를 환기시켜서 심각한 충격을 주었다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곡의 조탁(彫琢: 시문(詩文) 따위를 아름답게 다듬음.)을 극한 감미로운 표현기교와 몽환적(夢幻的)· 낭만적 세계는 명대 희곡사의 새로운 면을 개척한 것으로서, 이후의 명· 청 극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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