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됨이 총명하고 강직하기로 유명했는데 일생에 결혼을 세 번했다. 첫번째는 오씨(吳氏)였으며, 두번째는 대양첨씨(大楊詹氏)였고, 세번째는 소양첨씨(小楊詹氏)였다. 오씨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사했고, 대양첨씨는 출산 도중에 사망했으며 마지막으로 맞이한 아내가 바로 대양첨씨의 여동생으로 사건 당시의 아내로 남편을 구하기 위해 고생하게 된다.
'소백채(小白菜)'는 별명으로 본명이 필생고(畢生姑)였는데 스토리화가 되면서 필수고(畢秀姑)로 개명되었다. 왜 이런 별명이 붙었느냐면 상당한 미인으로 정평이 나 있었던데다 항상 초록색 상의에 하얀색 하의를 입고 다녀서 사람들이 그녀에게
소백채라는 애칭을 붙여주었고, 이것이 굳어졌기 때문이다. 남편은 갈품련(葛品連)으로 부모가 소백채의 이웃이라 결혼적령기가 되자 결혼하였고 가업인
두부를 만들어 파는 일을 하였다.
양내무가 집을 하나 새로 지어 가지고 있었는데 갈품련과 소백채 신혼부부를 맞이해 방 하나를 세놓아 이들을 살게 해주었다. 갈품련이 일 때문에 집에 잘 찾아오지 않다보니 소백채가 자주 양내무의 신세를 졌다. 거기다 그녀는 불심이 깊어 불경을 읽기를 원했는데, 수재였던 그가 기꺼이 글을 가르쳐 줬고, 심지어 한 가족 수준으로 생활하였다. 이때는 양내무도 부인이 멀쩡히 살아있을 때라 사람들도 그다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동치 11년(1872년) 가을에 양내무의 부인이 아이를 낳다가 죽고 말았다. 그 후에도 소백채와의 만남은 계속 이어졌는데, 이때부터 사람들 사이에 둘이서 간통한다는 루머가 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양내무와 소백채와의 관계도 조금씩 금이 가는데, 방세 문제로 인해 결국 소백채가 이사를 가게 되었고, 양내무는 전 부인의 여동생인 첨채봉(詹彩鳳)과 결혼했으며, 이듬해인 동치 12년(1873년) 8월 향시에 합격하여
거인이 되었다.
같은 해인 10월경에 소백채의 남편인 갈품련이 갑자기 병으로 몸져 누웠으며, 여러 차례 구토했다. 그는 전염병에 걸린 것으로 믿고 아내 소백채를 시켜 약방에서 약 한첩을 타오도록 하여 그것을 복용했지만 병이 악화되었고, 다음날 새벽에 죽었는데 입과 코에서 피가 쏟아졌다. 시신을 거둔 갈품련의 계모가 며느리인 소백채가 독약을 먹여 아들을 살해했다 지레짐작하고 이를 고발하여 사건이 시작되었다.
당시 여항 지현인 유석동(劉錫彤)은 수재였던 진죽산(陳竹山)과 친한 사이였는데, 진죽산이 갈품련의 죽음에는 양내무와 소백채가 관계되어 있다는 항간에 떠돌던 소문들을 곧이곧대로 유석동에게 찔러댔다. 그 말을 들은 유석동은 무릎을 치면서 검시 결과가 오자마자 소백채를 붙잡아 심문했다. 이 심문이라는 게 독약을 구하여 남편을 살해한 경위만을 집요하게 따졌으니 당연히 소백채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유석동은자기에게
유리한 결과를 얻기 위해 고문을 가했고, 결국 혹독한 고문을 못이긴 그녀는 양내무와 간통을 해 남편을 살해했다는 억지 자백을 하게 된다.
소백채가 억지 자백을 함으로서 양내무도 끌려와 심문을 받았으나 자신의 결백함만을 주장할뿐 심문에는 조금도 답하지 않는다. 게다가 유석동이 고문을 통해 소백채로부터 얻어낸 자백인 '5일에 약을 양내무로부터 받았다.'는 것에 대한 반박으로 처가에 도움을 받아 그날 집을 떠나 제사를 드리고 다음날 6일 귀가했다는 알리바이를 대었다. 이렇게 되자 유석동도 그를 고문해야 했는데 거인 신분이라 고문을 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항주 지사에게 양내무의 거짓 악행을 알린 뒤 거인 신분을 박탈할 것을 탄원하는 글을 보내었다. 항주 지사 진로(陳魯)가 절강 순무사 양창준(楊昌濬)을 통해 북경의 조정에 상소를 올린 뒤 동치제는 성지를 내려 양내무의 신분을 박탈하고, 그가 범행을 저지른 근거를 엄중히 조사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따라 유석동은 항주부로 재판을 넘겼고, 양내무의 알리바이만 쏙 빼놓고 상고했으며, 자기와 면식이 있는 약방 주인 하나를 억지로 매수해 양내무가 독약인
비상(砒霜)을 쥐약 명목으로 구매했다는 거짓 증언을 하도록 사주했다. 그리고 이와 덧붙여 양내무와 소백채는 항주부에서 혹독한 고문에 시달리다 결국 인사불성 상태에서 억지 자백을 하게 되었고, 거짓 증거가 어우러져 판결이 나오게 되었다. 남편을 살해한 소백채는
능지형으로, 간통 뿐만 아니라 살해까지 사주한 양내무는 참입결(斬立決), 즉 즉결 참수형(斬首刑)을 선고하여 사건을 마무리지은 뒤 진로는 절강 안무사 괴하손(蒯賀蓀)에게 보고해 하루빨리 사형 집행을 허가해 주십사 하고 요청했다.
그런데 괴하손이 이 사건의 경위를 미심쩍어하여 거인 신분인 양내무가 어찌 그런 천인공노할 범죄를 자행했는가에 대해 의문을 품고, 최초로 사건을 맡은 유석동에게 찾아가서 사정을 듣자 유석동은 천연덕스럽게 통곡하면서 저를 믿지 않으십니까 하고 연기를 했고, 그에 홀딱 넘어가버려 결국 괴하손은 자신이 무혐의로 정리할 수 있었던 사건을 양창준에게 맡기게 되었다. 한편 양내무는 옥중에서, 부인인 첨채봉은 친정집의 도움을 얻어 항주의 각 아문에 그의 억울함을 탄원하는 탄원서를 써서 보냈지만 묵살되었다.
이듬해인 동치 12년(1873년) 양내무의 누나 양숙영(楊淑英)은 당시 형부시랑 하동선(夏同善)의 집에 의탁해 그의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는데 마침 동생의 사건을 듣고 이를 탄원하여 재심할 것을 요청하여 재심이 이루어졌지만,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람에 의해 재판이 진행되었으니 결과는 같았다. 양내무의 부인인 첨채봉이 계속해서 진실을 알리기 위해 일상생활도 포기하고, 항주 일대를 분주히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퍼지자 절강성에서는 이 사건이 한창 화제였다. 이 화제에 관심을 보인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청나라 당시에 유명한 어용상인이었던
호설암(胡雪巖)이 그녀의 사연을 듣고, 억울함을 푸는 경비로 쓰라고 은자 3,000냥의 거금을 기꺼이 내주었다. 한편 북경의 하동선은 양숙영으로부터 이 사건을 해결해 달라는 애원을 듣고 중앙 고위 인사들에게 사건을 적극 해명하기 시작했으며 마침 첨채봉도 호설암의 자금을 얻어 북경으로 상경한 후 상고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사건은 당대 거물급 권신이었던 옹동화(翁同龢)에게 알려졌고, 그는 마침내 서태후에게 상소하여 진실을 가려줄 것을 요청했다. 서태후는 이 사건을 신중히 심리할 것을 명령하여 절강 순무사 양창준을 통해 재심하게 되는데 감찰사인 왕흔(王昕)도 곁들여서 고문을 쓰지 말 것을 명했다. 그래서 독약을 구했다는 증거는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내긴 했어도 양창준의 체면을 위해 간통살인이라는 결론은 뒤집지 않았다. 또 사건이 결론이 나지 않자 호서란(胡瑞瀾)을 흠차대신으로 임명해 사건을 심리하게 되지만, 호서란은 재판경험이 없는데다가 양창준과는 동향관계일 뿐만 아니라 양창준과 유석동의
뇌물까지 받아먹은 상태라서 판결을 번복하는 건 불가능이나 다름없었다. 그리하여 호서란 역시 지독한 고문을 다시 가해 결국 원심을 확정하지만, 감찰어사인 변보천(邊寶泉)이 호서란이 뇌물수수를 했다는 증거를 잡아 북경의 옹동화에게 보고했다.
사건이 시간을 끌면서 이제 영향력이 전국에 미치는 지경에 이르렀고, 특히 사건이 일어난 절강 일대에서는 이 사건에 대한 갑론을박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당대 최고의 화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정도였다. 절강의 지방관들도 계속 심리를 했지만 동치제가 사망하고, 그 뒤 과거 시험이 실시되는 바람에 재판도 다시 연기되었다. 한편 동치 13년(1874년) 양숙영과 첨채봉은 자신들을 지지하는 절강성 출신 관원 30여명의 서류를 모아 도찰원에 꾸준히 심사하도록 노력했고, 하동선과 왕흔에 의해 드디어 형부에서 재판 과정이 고문으로 점철되어 있고, 검시 자체도 허술했다는 점을 밝혀냈지만, 양내무와 소백채의 억울함을 해결할 결정적인 증거가 절실했다. 그래야만 기존 심판 결과를 뒤집을 수 있었으니까.
옹동화는 하동선, 변보천, 왕흔 등과 함께 북경에서 꾸준히 사건을 심사해 최종 판결을 내릴 것을 11차례나 상소하여 결국 이것이 받아들여졌고, 형부의 주관으로 북경에서 사건을 심리하기로 결정되었다. 이윽고 광서 2년(1876년) 양내무와 소백채는 피고 신분으로 북경으로 호송되었고, 추가로 사망한 갈품련의 무덤을 파내 영구를 꺼내서 증거물로 함께 가져오게 된다. 마침내 형부상서 상춘영(桑春榮)은 형부에서 60년 경력의 근속을 자랑하는 중국, 아니 세계 최고 수준의 검시관을 대동하여 북경 조양문 해회사(海會寺)라는 절에서 갈품련의 영구를 개봉하여 유골을 조사하게 되었다. 당시 최고의 화제가 되던 사건이라 해회사와 그 주변 일대는 구경꾼들로 미어터져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한다.
유골을 검사하자 유골의 색상이 황백색을 띄고 있었다. 독살이라면 유골이 검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았으므로 결국 독살이 아닌 전염병에 의한 사망, 즉 자연사로 결론이 내려져 기존의 판결이 모조리 뒤집어졌다. 이듬해 2월 형부에서 주관하는 최종 재판에서 양내무와 소백채 이 두 사람에게 드디어 무혐의가 선고되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무려 4년이라는 시간을 끌어 온 것인데다 중요한 두 사람의 명예회복은 끝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양내무는 여항으로 돌아와 '신보'의 주필로 잠깐 지내다가 가업인 양잠업을 하며 조용히 여생을 보냈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절름발이가 되어버렸고 거인 신분을 되찾지 못했다.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일어난 이후인 1914년에 향년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소백채는 고문 후유증으로 미모를 잃었으며, 친정집은 풍비박산이 나고 시댁으로부터 살인자라고 고발당하는 바람에 가족까지 잃었으므로 결국 의지할 사람이 없어 출가하여 여승이 되어 여생을 보냈고, 1930년 향년 75세로 입적했다. 법명은 혜정(慧定)이었다.
재판 경위부터가 답정너(정답은 이미 나와 있다. 너는 그 답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나 다름없던 데다가, 일이 커지면서 중앙정부 고관들의 진영논리로까지 번져나가는 바람에 사실상 두 남녀의 억울한 누명이 정치적 문제로까지 번져나갔던 사례로 사건이 해결되자 당초 재판을 했던 유석동, 양창준 등은 모조리 삭탈관직 처분되어 유배되었다. 이는 사실 상군에 대한 조정의 견제 목적도 있는 정치적인 일이었지만 양창준 등의 경우, 처벌 1년만에 복직하였다. 변보천이 고발했던 이들의 뇌물수수 혐의도 자연히 뭍혀졌다. 그리고 <신보>라는 영국계 자본으로 설립된 중국 최초의 신문에서 사건을 적극적으로 중점 보도하여 언론의 힘으로 사건의 억울함을 알리는데 한 몫 거들었다.
이 사건은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누명 재판 사건으로 비참한 사연이 담긴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다 정치적인 암투가 배배꼬인 실타래처럼 도사리고 있었던 사연이라서 미디어화하기 딱 좋은 환경인지 자마안처럼 예로부터 훌륭한 소재가 되어왔고, 지금도 중화권에서 매우 인기있는 소재이기도 하다.
여담으로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당시 여항현(현재의 저장성 항저우시 위항구)에 있던 양내무와 소백채의 묘소가 홍위병(红卫兵)들에 의해 변을 당해 훼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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