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거이(白居易, 772~846 (74세))

 

백거이(白居易, 772~846 (74세))

 출생~사망: 772~846

 자: 낙천(樂天)

 호: 취음선생(醉吟先生향산거사(香山居士)

 시대: ()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중국 뤄양(洛陽) 부근 신정(新鄭)

 주요저서: '장한가(長恨歌)', '비파행(琵琶行)'(816)

 

 백거이(白居易)의 자()는 낙천(樂天), 호는 향산거사(香山居士)인데, 보통 백낙천(白樂天)으로 불리워진다.

 

 그는 40세 이전에는 '시(詩)로서 부패한 사회를 정화시켜야 한다'는 취지를 내세우며 원진(元稹) 등과 더불어 신악부운동(新樂府運動)을 주도했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장안에서 4000여리 떨어진 시골인 강주사마(江州司馬)로 폄적(貶謫)당한 이후에는 정쟁에 휩싸이는 것을 피하여, 지방관 등 한직(閒職)을 자원하면서 좋아하는 시작(詩作)에만 전념하는 등 유유자적(悠悠自適)한 생활을 했기 때문인지, 당시의 유명시인으로는 드물게 고위관직까지 지내며 75세까지 장수하였고, 3,800여수(餘首)의 많은 시(詩)를 남겼다.

 

 그는 원래 보잘 것 없는 하급 지방관리의 집안에 태어났으나, 문재(文才)가 뛰어난데다가 '안사의 난(安史之亂)'으로 중앙의 기득권층이 대폭 몰락했던 시운(時運)도 따랐기 때문에 중앙 정계에 진출할 수 있었는데,그는 전국의 젊은 문인지망생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장한가는 그가 35세 때 주지현위(周厔縣尉)로 있을 때 썼다. 그곳은 수도 장안(長安)에서 가까운 별읍(別邑)같은 곳으로, 조정의 교서랑(校書郞), 한림박사(翰林學士) 등 직책도 겸하고 있었다.

 

 '현위(縣尉)'라는 직책상 그는 관내를 순시하며, 서민들의 생활 등 세상 물정을 살피곤 하였는데. 관내에는 종남산(終南山), 선유사(仙遊寺) 등 명승고적(名勝古跡)이 많아서, 천재시인의 시심(詩心)을 키우는 데 안성마춤의 고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역시 지방의 은자(隱者)이던 왕질부(王質夫), 진홍(陳鴻) 등과 선유사(仙遊寺)에 가 묵으며 음주 담소(飮酒 談笑)하다가, 화제가 근처인 마외파(馬嵬坡)에서 50년 전에 원통하게 죽어 간 양귀비(楊貴妃)에 미치게 되었다.

 

 왕질부(王質夫)가 그때까지 지방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오던 양귀비(楊貴妃)의 일화를 자세히 소개하고,기막힌 사연의 역사적인 사건이 흐르는 세월과 함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릴 것을 애석해하면서, 천재시인으로 알려진 백낙천에게 시를 지어 세상 사람들이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도록 해졸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다.

 

 백낙천도 이에 감동하여 심신을 가다듬은 후, 밤을 새워 840자에 달하는 장문의 시를 써냈는데,그것이 이후 동양의 러브스토리에는 약방의 감초처럼 인용되고 있는 천고(千古)의 명시(名詩) '장한가(長恨歌)'가 된 것이다.

 

 장한가(長恨歌)가 세상에 나오자마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켜서, 전국 어디를 가나 신분이나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장한가(長恨歌) 몇 구절씩은 암송하고 다닐 정도로 널리 유행하였다 한다. 특히, 기녀(妓女)들에게 인기가 있어 장한가를 모르는 기녀가 없을 정도였기 때문에 한층 더 유행의 바람을 탈 수 있었다 한다.

 

 장한가(長恨歌)에 대한 열풍은 당나라 국내뿐 아니라. 신라(新羅)나 일번(日本) 등 외국에까지 이어져서 당시의 사신이나 무역상들이 이를 구해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장한가(長恨歌)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는 이유는, 천하절색 양귀비(楊貴妃)와 현종(玄宗) 황제 간의 애정 실화인데다가, 묘사가 그림같이 세밀하고 절묘하여, 한편의 드라마를 보고 있는 것처럼 쓰여 졌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문인들이 쓰던 어려운 문어적(文語的) 표현을 피하고, 서민층 부녀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구어체(口語體) 표현을 골라 썼기 때문이기도 하다.

 

 장한가(長恨歌) 등 백낙천(白樂天)의 시(詩)를 평함에 있어서, 옛날에는 저속한 언어로 황실(皇室)을 모독했다느니, 내용이 경박하고 품위가 없다는 등으로 폄하(貶下)하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오늘날의 중국에서는 서민들이 쓰던 구어체(口語體) 언어로 시를 쓴 점을 오히려 높이 평가하여 어문일치(語文一致), 백화문학(白話文學)의 비조(鼻祖)로 꼽으며, 하층서민(下層庶民)들의 애환(哀歡)과 탐관오리(貪官汚吏)들의 비리(非理)를 고발하는 시를 쓰면서, 시(詩)를 통한 사회개혁운동 즉 신악부운동(新樂府運動)을 주도한 위대한 사회시인(社會詩人), 인미시인(人民詩人) 등으로 높이 추앙(推仰)하고 있다.

 

 현재 전하는 것은 '백씨장경집' 75권 가운데 71권이 있고, '백향산시집' 40권도 있다. 현존하는 작품수는 3,800여 수이고, 그 중에서 '비파행(琵琶行)', '장한가(長恨歌)', '유오진사시(遊悟眞寺詩)'는 불멸의 걸작이다.

 

 

장한가(長恨歌)

 제재는 현종(玄宗) 황제와 양귀비(楊貴妃)의 비련(悲戀)에 관한 것이며, 4장으로 되었다.

 제1장은, 권력의 정상에 있는 황제와 절세가인 양귀비의 만남과, 양귀비에게 쏟는 현종황제의 지극한 애정 등을 노래하였다.

 제2장에서는, 안녹산(安祿山)의 난으로 몽진하는 길에, 양귀비를 어쩌다 죽게 한 뉘우침과 외로움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황제의 모습을 그렸다.

 제3장은, 환도 후 양귀비의 생각만으로 지새는 황제를 묘사한다.

 제4장에서는, 도사의 환술(幻術)로 양귀비의 영혼을 찾아, 미래에서의 사랑의 맹세를 확인하게 되었으나, 천상(天上)과 인계(人界)의 단절 때문에 살아 있는 한 되씹어야 할 뼈저린 한탄이 길게 여운을 끈다.

 

 이 작품에서는 변화무쌍한 서사(敍事)의 사이사이로 사랑의 기쁨, 외로움, 괴로움 등의 서정(敍情)이 섬광처럼 번쩍이며, 외길 사랑으로 탄식만 해야 하는 현종이 새로이 창조되어 인간으로서의 사랑의 비중을 역력히 상징한다.

 노래의 형식도 칠언(七言)이어서 유창하고 아름다운 가락이 감겨들며, 행마다 리듬이 박동하고 때로는 각운(脚韻)을 바꾸어 가면서 장장 120행에 걸쳐 선율이 흐른다.

 

 '동자해음장한곡(童子解吟長恨曲)'이라는 말이 있듯 무수한 사람들이 이를 애창하였으며, 시가와 소설과 희곡으로 취급되어 중국 근세문학사상 무한한 제재를 제공하였다. 특히 '장한가전(長恨歌)'은 이 시의 내용을 이야기체로 바꾸어 보라는 백거이의 권유로 진홍(陳鴻)이 지은 전기(傳奇)소설이며, 양귀비의 입궐에서부터, 그녀가 죽은 후 현종의 명을 받은 방사(方士)가 그녀의 영혼을 만날 때까지를 '장한가(長恨歌)'에 그대로 답습하였다.

 

 

장한가(長恨歌) 전문(全文)

 

漢皇重色思傾國 (한황중색사경국) 한 황제 사랑 그리워함에 나라는 기울어가네

御宇多年求不得 (어우다년구부득) 오랜 세월 세상을 살펴도 구할 수 없구려.

楊家有女初長成 (양가유녀초장성) 양씨 가문에 갓 장성한 딸이 있었으나

養在深閨人未識 (양재심규인미식) 깊숙한 규방에서 자라니 누구도 알지 못하나

天生麗質難自棄 (천생려질난자기) 타고난 아름다움 그대로 묻힐 리 없어

一朝選在君王側 (일조선재군왕측) 하루아침 뽑혀 군왕 곁에 있도다.

回眸一笑百媚生 (회모일소백미생) 눈웃음 한 번에 모든 애교가 나오니

六宮粉黛無顔色 (륙궁분대무안색) 육궁에 단장한 미녀들의 안색을 가렸다오.

春寒賜浴華淸池 (춘한사욕화청지) 봄 추위에 화청지에서 목욕함을 허락하여

溫泉水滑洗凝脂 (온천수골세응지) 매끄러운 온천물에 기름진 때를 씻으니

侍兒扶起嬌無力 (시아부기교무력) 시녀들 부축하여 일어나니 아름다움에 당할 힘이 없도다.

始是新承恩澤時 (시시신승은택시) 그 때부터 황제 사랑 받기 시작하였네

雲鬢花顔金步搖 (운빈화안김보요) 구름같은 귀밑머리, 꽃 같은 얼굴, 흔들거리는 금장식

芙蓉帳暖度春宵 (부용장난도춘소) 부용휘장 안은 따뜻하여 봄 깊은 밤을 헤아리니

春宵苦短日高起 (춘소고단일고기) 짧은 밤을 한탄하며 해 높아서 일어나니

從此君王不早朝 (종차군왕불조조) 이를 좇는 군왕은 이른 조회를 보지 않았고

承歡侍宴無閑暇 (승환시연무한가) 총애로 연회에 매이니 한가할 틈 없어

春從春游夜專夜 (춘종춘유야전야) 봄을 좇는 춘정을 즐겨 온밤을 지새우니

後宮佳麗三千人 (후궁가려삼천인) 빼어난 후궁에 미녀 삼천 있었지만

三千寵愛在一身 (삼천총애재일신) 삼천의 총애가 그녀에 있으니

金屋粧成嬌侍夜 (김옥장성교시야) 금 같은 방 단장하고 교태로 밤 시중들어

玉樓宴罷醉和春 (옥루연파취화춘) 옥루 잔치 끝나면 춘정을 이루니

姉妹弟兄皆列士 (자매제형개렬사) 자매와 형제 모두가 열사라.

可憐光彩生門戶 (가련광채생문호) 예쁘게 여기 가문에 광채가 나니

遂令天下父母心 (수령천하부모심) 이로 하여금 세상 모든 부모들의 마음이

不重生男重生女 (부중생남중생녀) 아들보다 딸 낳기를 중히 여기도다.

驪宮高處入靑雲 (려궁고처입청운) 화청궁 높이 솟아 구름속에 들어 있고

仙樂風飄處處聞 (선낙풍표처처문) 신선의 풍악은 바람 타고 어디서나 들려오네

緩歌慢舞凝絲竹 (완가만무응사죽) 느린 노래 오만한 춤이 비단결과 피리에 맺히니

盡日君王看不足 (진일군왕간부족) 군왕은 종일 넋 잃고 보아도 부족하도다.

 

漁陽瞽鼓動地來 (어양고고동지내) 돌연 어양 쪽 땅을 울리는 악관의 북소리 들려오니

驚破霓裳羽衣曲 (경파예상우의곡) 예상우의곡에 깜짝 놀라도다.

九重城闕煙塵生 (구중성궐연진생) 구중궁궐에 연기 먼지 솟아오르고

千乘萬騎西南行 (천승만기서남항) 수천수만 관군들은 서남으로 가고

翠華搖搖行復止 (취화요요항부지) 천자의 기 흔들리며 가다가 서곤 하며

西出都門百餘里 (서출도문백여리) 도성문 서쪽 백여리 마외역에는

六軍不發無奈何 (육군불발무나하) 육군을 보내지 못해 어찌 할 수 없어

宛轉蛾眉馬前死 (완전아미마전사) 미인의 긴 눈썹이 구부러지며 굴러 군마 앞에 죽었네

花鈿委地無人收 (화전위지무인수) 땅에 떨 군 꽃비녀 거두는 사람 없고

翠翹金雀玉搔頭 (취교김작옥소두) 취교, 금작, 옥소두 땅에 흩어졌네

君王掩面救不得 (군왕엄면구부득) 군왕은 얼굴 가린 채 구하지 못하고

回看血淚相和流 (회간혈루상화류) 차마 돌린 두 눈에 피눈물이 흐르네

黃埃散漫風蕭索 (황애산만풍소삭) 누런 흙먼지 일고 바람 쓸쓸히 부는데

雲棧縈紆登劍閣 (운잔영우등검각) 구름 걸린 굽은 잔도 검각산을 오르네

峨嵋山下少人行 (아미산하소인항) 아미산 아래에는 오가는 이도 드물어

旌旗無光日色薄 (정기무광일색박) 천자 깃발 빛을 잃고 햇빛도 희미하네

蜀江水碧蜀山靑 (촉강수벽촉산청) 촉강 맑게 흐르고 촉산은 푸르건만

聖主朝朝暮暮情 (성주조조모모정) 황제는 아침저녁 양귀비 생각에 잠겨

行宮見月傷心色 (행궁견월상심색) 행궁에서 보는 달에 마음 절로 상하고

夜雨聞鈴腸斷聲 (야우문령장단성) 밤비에 들리는 방울소리는 애간장 끊어지는 소리요

天旋地轉回龍馭 (천선지전회룡어) 천하 정세 변하여 황제 돌아오는 길에

到此躊躇不能去 (도차주저불능거) 마외역에 이르러는 걸음 뗄 수 없었네

馬嵬坡下泥土中 (마외파하니토중) 말 높은 고래아래 진흙더미 속에는

不見玉顔空死處 (불견옥안공사처) 고운 얼굴 어디 가고 죽은 자리만 남아

君臣相顧盡沾衣 (군신상고진첨의) 임금 신하 서로 보며 눈물 옷깃 적시네

 

東望都門信馬歸 (동망도문신마귀) 동쪽 도성문 향해 말에 길을 맡겨 가니

歸來池苑皆依舊 (귀내지원개의구) 돌아와 본 황궁의 정원은 변함 없어

太液芙蓉未央柳 (태액부용미앙류) 태액지의 부용도 미양궁의 버들도

芙蓉如面柳如眉 (부용여면류여미) 부용은 양귀비 얼굴 버들은 눈썹

對此如何不淚垂 (대차여하불누수) 이들을 대하고 어찌 아니 눈물 드리우리

春風桃李花開日 (춘풍도리화개일) 봄바람에 복숭아며 살구꽃이 만발하고

秋雨梧桐葉落時 (추우오동섭낙시) 가을비에 젖어 오동잎이 떨어져도

西宮南內多秋草 (서궁남내다추초) 서궁과 남원에 가을 풀 우거지고

落葉滿階紅不掃 (낙엽만계홍불소) 낙엽이 섬돌을 덮어도 쓸지 않으니

梨園子弟白發新 (이원자제백발신) 이원의 자제들은 백발이 성성하고

椒房阿監靑娥老 (초방아감청아노) 양귀비 시중들던 시녀들도 늙었네

夕殿螢飛思悄然 (석전형비사초연) 반딧불 나는 저녁 궁궐 더욱 처량하여

孤燈挑盡未成眠 (고등도진미성면) 등불 심지 다 타도록 외로이 잠 못 드니

遲遲鍾鼓初長夜 (지지종고초장야) 더딘 종과 북소리에 밤이 길다는 것을 알았네

耿耿星河欲曙天 (경경성하욕서천) 은하수 반짝이며 새벽은 다가오고

鴛鴦瓦冷霜華重 (원앙와냉상화중) 원앙같이 금슬좋은 기와는 차고 서리꽃이 심해지나

翡翠衾寒誰與共 (비취금한수여공) 함께 덮을 이 없는 싸늘한 비취금침

悠悠生死別經年 (유유생사별경년) 생사를 달리한 지 아득하니 몇 년인가

魂魄不曾來入夢 (혼백불증내입몽) 꿈속에 혼백마저 만나볼 수 없네

臨邛道士鴻都客 (임공도사홍도객) 임공의 도인이 도성에서 머무는데

能以精誠致魂魄 (능이정성치혼백) 정성으로 혼백을 불러올 수 있다하니

爲感君王輾轉思 (위감군왕전전사) 양귀비 그려 잠 못 드는 군왕을 위해

遂敎方士殷勤覓 (수교방사은근멱) 방사시켜 양귀비 혼백 찾게 하였네

排空馭氣奔如電 (배공어기분여전) 허공을 가르고 번개처럼 내달아

升天入地求之遍 (승천입지구지편) 하늘 끝에서 땅 속까지 두루 찾아

上窮碧落下黃泉 (상궁벽낙하황천) 위로는 벽락 아래로는 황천까지

兩處茫茫皆不見 (량처망망개불견) 두 곳 모두 망망할 뿐 찾을 길이 없는데

 

忽聞海上有仙山 (홀문해상유선산) 홀연 들리는 소문 "바다 위에 선산 있어

山在虛無縹緲間 (산재허무표묘간) 그 산은 아득한 허공 먼 곳에 있고,

樓閣玲瓏五雲起 (누각령롱오운기) 누각은 영롱하고 오색 구름이 일어

其中綽約多仙子 (기중작약다선자) 그 곳에 아름다운 선녀들이 사는데,

中有一人字玉眞 (중유일인자옥진) 그 중 옥진이라 하는 선녀 하나 있으니

雪膚花貌參差是 (설부화모삼차시) 눈같은 피부와 고운 얼굴 그인 것 같다"하네

金闕西廂叩玉扃 (금궐서상고옥경) 황금 대궐 서쪽 방의 옥문을 두드리고

轉敎小玉報雙成 (전교소옥보쌍성) 소옥시켜 쌍성에게 알리도록 말 전하니

聞道漢家天子使 (문도한가천자사) 한황제의 사자가 왔다는 말 전해 듣고

九華帳里夢魂驚 (구화장리몽혼경) 꿈에 깨어 놀라는 화려한 장막 안의 혼백

攬衣推枕起徘徊 (람의추침기배회) 옷을 들고 베개 밀고 일어나 서성이더니

珠箔銀屛迤邐開 (주박은병이리개) 길게 이어진 구슬발과 은병풍 열리니

雲髻半偏新睡覺 (운계반편신수각) 구름 같은 머리 한쪽으로 드리우고 막 잠에 깬 듯

花冠不整下堂來 (화관부정하당내) 머리장식 안 고친 채 당에서 내려오네.

風吹仙袂飄飄擧 (풍취선몌표표거) 바람 부는 대로 소맷자락 나부끼니

猶似霓裳羽衣舞 (유사예상우의무) 예상우의무를 추던 그 모습인 듯

玉容寂寞淚欄干 (옥용적막누난간) 옥 같은 얼굴 수심 젖어 눈물이 난간에 흐르니

梨花一枝春帶雨 (이화일지춘대우) 활짝 핀 배꽃 한 가지 봄비에 젖은 듯 하구나

含情凝睇謝君王 (함정응제사군왕) 정어린 눈길 돌려 군왕에게 사뢰니

一別音容兩渺茫 (일별음용량묘망) 헤어진 뒤 옥음, 용안 듣고 뵙지 못하여

昭陽殿里恩愛絶 (소양전리은애절) 소양전에서 받던 은총도 끊어지고

蓬萊宮中日月長 (봉래궁중일월장) 봉래궁에서 보낸 세월이 오래건만

回頭下望人寰處 (회두하망인환처) 머리 돌려 저 아래 인간세상 보아도

不見長安見塵霧 (불견장안견진무) 장안은 보이지 않고 짙은 안개와 먼지 뿐

唯將舊物表深情 (유장구물표심정) 장차오래 지닐 물건으로 깊은 정을 표하려니

鈿合金釵寄將去 (전합금채기장거) 자개 상자와 금비녀를 가지고 가라하네

釵留一股合一扇 (채류일고합일선) 비녀는 반 쪽씩 상자는 한 쪽씩

釵擘黃金合分鈿 (채벽황금합분전) 황금 비녀 토막내고 자개 상자 나눴으니

但敎心似金鈿堅 (단교심사금전견) 두 마음 이처럼 굳고 변치 않는다면

天上人間會相見 (천상인간회상견) 천상에든 세상에든 다시 보게 되리라네

臨別殷勤重寄詞 (임별은근중기사) 헤어질 즈음 간곡히 다시 하는 말이

詞中有誓兩心知 (사중유서량심지) 두 마음 만이 아는 맹세의 말 있었으니

七月七日長生殿 (칠월칠일장생전) 칠월 칠일 장생전에

夜半無人私語時 (야반무인사어시) 인적 없는 깊은 밤 속삭이던 말

在天願作比翼鳥 (재천원작비익조) 하늘을 나는 새가 되면 비익조가 되고

在地願爲連理枝 (재지원위연리지) 땅에 나무로 나면 연리지가 되자고

天長地久有時盡 (천장지구유시진) 천지 영원하다 해도 다할 때가 있겠지만

此恨綿綿無絶期 (차한면면무절기) 이 슬픈 사랑의 한 끊일 때가 없으리

 

* 장한가에 나오는 고사성어 '경국지색' 비익조와 연리지, 천장지구

 

 

 

백거이의 묘(白居易墓) 백원(白園)

 향산, 용문교 왼쪽 산기슭에 자리잡은 백거이의 묘인 백원(白園)은 백거이(白居易, 772~846 (74세)) 생전하던 839년에 중풍으로 고생하면서도 향산에 왕래하며 '취음선생전(醉吟先生傳)' 등의 작품활동을 하던 곳이며, 846년 8월 7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자 무덤을 조성한 곳이다.

 

 이곳에 들어서면 나즈막한 언덕의 비탈길이 나오고, 여기저기에는 정자와 기념관도 서있다. 경내에서 가장 높은 언덕을 돌아가면 평평한 곳에 백거이의 무덤이 있는데, 직경이 10m안팎, 높이 2.5m쯤 되고 밑둥에는 화강암으로 호석을 둘렀다.

낙양-백거이묘.jpg

 무덤 앞에는 일주석문과 거대한 백낙천의 사적비, 일본인 불교신자들이 세운 백거이의 시비들이 서 있다.

 

 백거이는 두보(杜甫, 712∼770), 이백(李白, 701~762)과 함께 당대를 대표하는 3대 시인의 한사람이다.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 ·향산거사(香山居士)이며 이백(李白)이 죽은 지 10년, 두보(杜甫)가 죽은 지 2년 후에 낙양(洛陽) 부근의 신정(新鄭)에서 태어났다. 5살 때부터 시짓는 법을 배웠다. 27세 때 진사시험에 급제하여 한림학사, 좌습유(左拾遺) 등을 지냈으나 그리 순탄한 관직생활은 아니었고, 나이 50이 넘어서야 항주와 소주의 자사(刺使)를 역임하게 되었다. 이후 이곳 향산에 은거하면서 시와 술로 만년을 보냈다.

 

 그의 시는 민중시인, 사회시인, 풍유시인 등으로 불릴 만큼 하층빈민의 입장에서 세상에 대한 불공평을 개탄하는 내용이 많다. 그의 풍유시 170여수와 신악부(新樂府) 50수는 평민들의 비참한 생활과 사회적인 모순과 갈등을 인본주의적인 견지에서 파헤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당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테마로 한 '장한가'를 비롯하여 '비파행(琵琶行)', '진중음(秦中吟)' 등을 들 수 있다.

 

 

 

스타투어(Star Tour)

☎: (02)723-6360

http://www.startour.pe.kr

블로그 : 스타투어

E-mail: startour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