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秦始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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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시황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괴물(怪物)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하지 않았다면 중국은 현재의 유럽처럼 여러 나라로 나뉘어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대륙을 통일하기 이전에는 중국(中國)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이전의 역사서에 나타나는 중국이라는 단어는 단지 '나라의 중앙' 또는 '수도'라는 뜻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대륙 통일 이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같은 나라의 사람'이라는 인식이 대륙의 사람들에게 생겨났다.

 

 그로 인해 삼국(三國) 분립시대나 남북조((南北) 분열시대의 중국인들은 '이것은 이상사태(異常事態)다. 언젠가 하나로 통일되는 것이 본래의 모습이다'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가졌던 것이다. 창작으로 가공할 괴물이 아니었다면 이러한 대사업을 이룩하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으로 황제(皇帝)의 칭호를 쓰다

 '황제'라는 말은 영어로 엠페로(emperor)라고 한다. 엠페로(emperor)는 로마 제국의 황제(emperialt)에서 유래된 말이나 '皇帝'라는 두 개의 한자로 칭호를 최초로 쓴 사람은 진시황제(秦始皇帝)였다.

 

 시황제의 시대, '전국칠웅(戰國七雄; 중국 전국시대의 일곱 제후)'이라고 해서 중국에는 일곱 개의 강국이 있었고, 진(秦)은 그 중의 한 나라였다. 시황제는 나머지 여섯 개 나라를 잇따라 멸망시켰는데 BC 221년에 최후까지 남아 있던 산동(山東) 반도의 제(齊)나라를 멸망시킴으로써 비로소 천하통일을 이룩하였다. 진시황은 태황의 태(泰)를 떼어내고 황(皇)만을 취하고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오제(五帝)에서 제(帝)를 택해서 '황제'로 칭하기로 했던 것이다.

 

 삼황오제(三皇五帝)란 중국 고대 전설에 나오는 것으로 삼황(三皇)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대체로 복희(伏羲)씨, 여와(女蝸)씨, 신농(神農)씨 세 사람의 지도자를 말한다. 이들은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친 왕으로 전해진다. 오제(五帝)는 황제, 전욱, 곡, 요, 순이라는 다섯 사람의 성군을 가리킨다. 따라서 '황제'라는 말에는 진시황 자신이 3황 5제의 덕을 겸비한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동문(同文)-문자의 통일

 진시황은 여러 가지 새로운 제도를 제정했는데, 그 중에서도 누구의 생각에나 쉽게 떠오르는 것은 '동문(同文: 문(文)을 같이 하는 것)' 즉 문자를 하나로 통일시킨 것이다. 전국시대의 7웅은 각 나라마다 글자의 형태가 달랐었다. 그 근본은 은(殷)나라의 갑골문자(甲骨文字)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지역에 따라서 약간씩 자체(字體)가 달랐고 제각기 다른 문자가 있었던 것이다.

 

 시황제는 진나라의 소전(小篆)이란 글자의 형태를 천하의 문자로 정하고, 나머지 문자들을 폐지시켰다. 그 폐지된 문자를 육국문자(六國文字)라고 부른다. 이 육국문자는 분서(焚書: 죽간(竹簡)등의 책을 불태운 사건)으로 소멸되었다. 진시황제의 사후에 항우(項羽)가 함양(咸陽)으로 들어왔을 때 문서들을 버렸기 때문에 사료(史料)는 그다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가끔 지하에서 특히 사막에서 출토되는 인장에서 이 육국문자를 찾아 볼 수가 있다. 인장이 돌로 만들어지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며, 그 당시는 모두 금속을 썼다. 훌륭한 사람은 금, 그 다음 사람은 은이나 구리를 썼다. 이것을 끈으로 매서 목에 걸었다. 전생시에는 이것이 인식표(認識票) 역할을 했다. 전사한 유체(遺體)를 판별할 수 없을 때에는 목에 걸었거나, 혹은 어딘가에 지니고 있는 금속의 인장에 의해서 그가 누구인가를 알 수 있었다. 이 인장에는 읽을 수 없는 문자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것이 육국문자 즉 진시황제에 의해서 폐지되었던 문자였던 것이다. 같은 문자가 전국에서 통용된다는 것은 전국적으로 의사소통을 도모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단순히 국토통일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참된 뜻으로의 천하통일을 이루게 된 것이다.

 

 

동궤(同軌)-차륜(車輪) 폭의 통일

 진시황의 통일정책으로 또하나 유명한 것은 '동궤(同軌: 궤(軌)를 같이 한다)' 즉 바퀴 폭의 통일이다. 당시 각국은 제각기 다른 나라의 수레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퀴의 폭을 달리 하고 있었다. 수레는 대부분 전차(戰車)였다. 말이 끄는 전차는 도로에 깊은 바퀴자국을 만들고 그것이 레일같이 되어 있었다. 그 레일에 차륜을 넣어서 수레를 달리게 했던 것이다.

 

 전차는 싸움을 위한 것이므로 타국의 전차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퀴자국의 폭을 다르게 해 두면 적의 침입을 막는데 효과가 컸다. 그런데 이제는 천하가 통일된 것이다. 바퀴자국의 차이는 전국적인 교통의 흐름을 저해시킨다고 여긴 시황제는 전국에 '치도(馳道)'라는 도로를 만들고 차륜의 폭을 통일시켰다.

 

 

치도(馳道)의 건설

 치도에 대해서는 진(秦)나라가 멸망하고 30년이 채 되지 않은 무렵 한(漢)나라의 문제(文帝) 시대의 가산(賈山)이란 사람이 글을 남겼다. 그것이 도폭은 50보(步)였다고 한다. '보(步)란 길이의 단위이며, 1보는 지금의 1.35m 정도이며, 50보의 폭이면 67m 정도이다. 그리고 3장(丈)마다(당시의 1장은 2.25m이며, 3장은 6~7m) 수목이 심어져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성들이 동원되어 도로가 만들어지고, 그 도로가 비에 의해 유실되면 보수를 해야 했다. 그리고 백성들은 관리가 파견되어 오면 그 관리의 식량이나 주거의 뒷바라지도 해야 했다. 역(驛)에는 말을 비치하여 그 말을 사육하는 것도 모두 그 지역 백성들의 일이었다. 따라서 백성들의 고통이 대단했다고 한다. 

 

 한(漢)나라 때 다시 길을 만들자는 제안이 나왔으나 이것을 간(諫)한 사람이 가산(賈山)이다. 가산은 진나라의 시황제가 길을 개척했으니 다시 만들 필요가 없으며 진나라는 그 때문에 멸망한 것이라고 말했다. 시황제가 죽자 갑자기 나라가 멸망한 것은 도로 건설로 시달렸던 백성들의 원한이 컸기 때문이며 한나라는 그것을 모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진나라가 멸망한 지 30년이 지난 때였으므로 그 당시는 시황제가 만들었던 길이 남아 있었다.

 

 치도는 정말 훌륭한 도로였다. 폭이 67m, 그리고 6m마다 큰 가로수가 심어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북쪽으로는 구원(九原), 만리장성 근처에서부터, 동쪽으로는 황해 연안까지, 남쪽은 양자강(揚子江)에 이르기까지 길이 뚫려 있었다. 그래서 어느곳이든지 하나의 수레로 갈 수 있게 길이 연결되어 있었다. 

 

 진시황 이전에는 강소성(江蘇省)이나 절강성(浙江省)까지 가려면, 한(韓)나라에서 수레를 바꾸어 타고, 위(魏)나라에서도 바꾸어 타야만 했다. 그외에도 곳곳에서 바꾸어 타야 했지만 진시황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번거로움이 없어졌고 한 대의 수레로 전국 방방곡곡을 갈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도로로 인해 각지의 교역(交易)이 번창하게 되었고 산업경제가 활성화되는 데도 큰 힘이 되었다.

 

 

도량형(度量衡)의 통일

 진시황은 도량형을 통일시켰다는 점도 아주 중요하다. 한 홉[合], 한 되[升], 한 말[斗]이라든가, 길이의 단위인 보(步), 장(丈) 등이 각국에서 약간씩 달랐다. 되나 말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한 말이 어느 나라에서는 한 말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생겼다.

 

 그래서 전국의 도량형을 엄격히 통일시켰던 것이다. 이것은 천하를 통일했던 바로 그 해에 실시되었다. 한 홉이라는 표준 용기를 제작하여, 전국에 그것을 따르도록 명령했다. 중앙에서 보내온 한 홉짜리 용기가 동북 지방 근처에서 출토(出土)된 것으로 보아 사실상 전국에 배당되었던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산업과 경제가 발달했다. 이제까지는 각지에서 다시 하나하나 환산해야만 했던 것이 그러한 수고를 면하게 되었다. 화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진(秦)의 화폐가 전국에서 통용되었다.

 

 

절대자 시황제(始皇帝)

 시황제는 현실주의자였다. 현실주의자가 아니었다면 천하통일 같은 것은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누구나 신선을 믿고 있었다. 시황제도 믿고 있었다. 그는 천하를 통일하여 황제가 되었으며 '황제'라는 말 그자체가 그가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칭호였다. 또 그때까지 누구나 다 쓰고 있던 '짐(朕)'이라는 말을 황제 외에는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등 황제의 절대화를 도모했다. 황제의 절대화는 국가를 운영해 가는데 필요한 것이었지만 시황제는 스스로 절대적인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천하통일의 대사업을 완수한 자신은 보통인간이 아니며 절대자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절대자란 구체적으로 말하면 불로불사의 인간, 즉 신이나 선인과 같은 존재이다. 스스로를 절대자라고 자임했던 시황제는 이제 자기 자신이 선인(仙人)이 되겠다, 신선(神仙) 되겠다고 원하게 되었다. 신선이 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은가. 시황제는 여러 사람에게 물어 보았는데 도사(당시는 방사(方士)라고 불렀다)가 여러 가지로 수상한 짓을 가르쳐 주었다. 예컨대 신선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모습을 너무 보여 주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인주(人主)는 미행(微行)하여 체중(體中)의 사기(邪氣)를 피(避)하라.'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의 사기(邪氣)가 몸에 들어와서 신기(神氣: 몸 속에 있는 신의 기운)에 해가 된다고 해서 시황제에게 당분간 사람을 만나지 않도록 말했다. 더구나 자신이 있는 곳을 아무에게도 가르쳐 주지 않도록 하고 있었는데, 우연한 계기로 거처가 알려지고 말았다. 시황제는 매우 노하여 누가 알렸느냐고 조사했지만 알 수 없었다. 그러자 그 때 곁에 있던 자들을 모조리 죽였다고 한다.

 

 그리고 '사기(史記)'에는 아니지만 다른 사료 등에 나와 있는 이야기에 의하면 금릉(金陵: 지금의 남경)에 갔을 때 역시 방사(方士)였겠지만 '이 근방에는 왕의 기운이 감돌고 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왕기' 즉 왕의 기운이 감돌고 있다는 것은 그 지방에서 왕이 나온다는 것이다. 왕은 나 혼자면 충분하지 않는가. 그런데도 왕이 나온다는 것은 자기를 대신하는 자가 이 지방에서 나올 것 같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지방의 기맥에 의한 것이므로 기맥을 단절해야겠다고 시황제는 산을 파서 무너뜨렸다. '연강굴단(連岡掘斷: 연속되어 있는 언덕을 잘라 버림)'해 버리면 왕기가 없어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장소는 진회(秦淮)라고 일컬어지며 지금도 남아 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진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수로라고 전해지고 있다. 지리학자의 관찰에 의하면 그것은 인공의 하천이 아니고 자연의 하천이라고도 하지만 이런 에피소드가 생긴 것은 역시 시황제의 인품에 의한 것이리라. 

 

 소주(蘇州)에 호구(虎丘)라는 산이 있는데 그곳에는 춘추시대 오(吳)나라 왕의 무덤이 있다. 오(吳)나라와 월(越)나라는 명검이 많이 나왔던 곳으로 왕이 사망하면 검을 무덤 속에 넣었다. 그런 명검이 몇 천 개나 있다고 들은 시황제가 그곳을 파헤치게 했다는 것이다. 파헤친 자리가 검지(劍池)라는 곳이다. 파 보았지만 범이 나타나서 그만 두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파헤치려 했던 곳에 범이 있어서 검으로 바위를 쳤던 그 자리가 지금도 남아 있다고 설명서에 쓰여 있기도 한다. 검을 차지하려 했던 것 역시 검이 갖는 영력이 탐이 나서 그랬을 것으로 생각된다.

 

 

 

분서갱유(焚書坑儒)

 焚: 불사를 분   書: 글 서   坑: 묻을 갱   儒: 선비

 진시황이 학자들의 정치적 비판을 막기 위하여 의약, 점복, 농업에 관한 것을 제외한 민간의 모든 서적을 불태우고, 이듬해 유생들을 생매장한 일.

 

 BC 221년, 제(齊)나라를 끝으로 6국을 평정하고 전국시대를 마감한 것은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 때의 일이다.

 

 시황제(始皇帝)는 천하를 통일하자 주(周)왕조 때의 봉건 제도를 폐지하고 사상 처음으로 중앙 집권(中央執權)의 군현제도(郡縣制度)를 채택했다. 

 

 군현제를 실시한 지 8년이 되는 그 해(BC 213) 어느날, 시황제가 베푼 함양궁(咸陽宮)의 잔치에서 박사(博士)인 순우월(淳于越)이 '현행 군현제도 하에서는 황실의 무궁한 안녕을 기하기가 어렵다'며 봉건제도로 개체(改體)할 것을 진언했다. 

 

 시황제가 신하들에게 순우월의 의견에 대해 가부(可否)를 묻자, 군현제의 입안자(立案者)인 승상 이사(李斯)는 이렇게 대답했다. 

 "봉건시대에는 제후들 간에 침략전이 끊이지 않아 천하가 어지러웠으나 이제는 통일되어 안정을 찾았사오며, 법령도 모두 한 곳에서 발령(發令)되고 있나이다. 하오나 옛 책을 배운 사람들 중에는 그것만을 옳게 여겨 새로운 법령이나 정책에 대해서는 비난하는 선비들이 있사옵니다. 하오니 차제에 그러한 선비들을 엄단하심과 아울러 백성들에게 꼭 필요 한 의약(醫藥) 복서(卜筮) 종수(種樹)에 관한 책과 진(秦)나라 역사책 외에는 모두 수거하여 불태워 없애 버리소서." 

 

 시황제가 이사(李斯)의 의견을 받아들임으로써 관청에 제출된 희귀한 책들이 속속 불태워졌는데, 이 일을 가리켜 '분서(焚書)'라고 한다. 당시는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이므로, 책은 모두 글자를 적은 댓조각을 엮어서 만든 죽간(竹簡)이었다. 그래서 한번 잃으면 복원할 수 없는 것도 많았다. 

 

 이듬해(BC 212) 아방궁(阿房宮)이 완성되자 시황제는 불로장수의 신선술법(神仙術法)을 닦는 방사(方士)들을 불러들여 후대했다. 그들 중에서도 특히 노생(盧生)과 후생(侯生)을 신임했으나 두 방사(方士)는 많은 재물을 사취(詐取)한 뒤, 시황제의 부덕(不德)을 비난하며 종적을 감춰 버렸다.

 

 시황제는 진노했다. 그런데 그 진노가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시중(市中)의 염탐꾼을 감독하는 관리로부터 '폐하를 비방하는 선비들을 잡아 가두어 놓았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시황제의 노여움은 극에 달했다. 엄중히 심문한 결과 연루자는 460명이나 되었다. 시황제는 자기를 비방한 460명의 유생(幼生)들을 모두 산 채로 각각 구덩이에 파묻어 죽였는데, 이 일을 가리켜 '갱유(坑儒)'라고 한다.

[출전] 史記(사기) 秦始皇紀(진시황기) 十八史略 秦篇(십팔사략 진편)

 

 노벽(魯壁) : 분서갱유로 책이 불태워질 때 공자의 제 9대 직계손자 공부(孔鮒)가 벽에 논어· 상서· 예기· 춘주· 효경등 유교경전등을 벽에 감추어 보존한 공로를 기념하기 위하여 건축한 노나라 벽→

공자-노벽.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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