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박(淄博, Zibo)

 

 치박은 역사가 유구하며 관광문화자원이 풍부하다. 동부의 임치는 춘추 5패의 으뜸으로 뽑히는 제나라의 수도이다. 임치는 18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제문화의 발원지로서 역사문화 명성이다.

 여기는 문물고적이 많아 지하박물관의 칭호를 가지고 있다. 동주순마갱, 고차박물관, 강태공사, 관중묘, 안영묘 등이 유명하다. 중부이치천은 <요재지의>에서 나오는 포송령의 고향으로서 포송령 옛집, 요재원 등이 있다. 도자기, 유리, 실크는 치박의 특산물이다.

 동주순마갱에는 순장된 말이 600필이나 된다. 이는 서안 진시황 병마용보다 100여년이나 더 오래되었다. 현재 순마갱은 관광객들에게 개방되었다.

 

 

 관광 명소

춘추제국의 강성함을 상징하는 순마갱(殉馬坑 : 쉰마컹)

 제남에서 동쪽으로 약 110km 떨어진 곳에 있는 인구 120만의 작은 도시인 치박시(淄博市)에 있는 춘추제국 국군(國君)의 묘지다. 이곳은 중국역사문화도시 중의 한 곳이면서 중국고대문명의 중요한 발양지 중 한 곳인 치박시를 대표하는 중요한 유적지이기도 하다.

 치박시를 흐르는 치구하(淄區河)에 인접해 있는 순장터다. 1964년부터 1972년까지 약 84m를 발굴했는데, 양쪽으로 늘어서서 매장된 228필의 순장된 말을 발견했다.

 이 터의 길이와 깊이 등을 따져 계산해 볼 때, 약 600필의 말들이 순장된 것으로 보인다.

 <좌전·노양공이십오년>이라는 기록에 의거해 볼 때, 이곳은 춘추시대의 최씨라는 왕의 묘지터로 추정되는데 순마갱의 규모를 통해 당시 세력의 규모와 동시에 제국국력의 강성을 알 수가 있다.

 

 

고차박물관(古車博物館)

 임치중국고차박물관은 후이문화 유적지에 자리잡고 부지면적이 13000㎡, 건축면적이 3600㎡, 중국 최초의 가장 체계적이며 온전한 마차 유적지와 문물 진열을 일체로 하는 고대마차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은 춘추시기 순차마 전람실과 중국고차전람실 두 부분을 포함한다. 고차진열실에는 시대의 순서대로 대량의 실물, 모형, 고차 복제품, 사진 및 글로 중국 고대 마차의 발전사, 그리고 고대 전쟁, 교통, 운송, 생산 및 생활에서 마차의 역할을 구체적이며 생동하게 보여 주고 있다.

 후이춘추순차마 전람실은 1호갱과 2호갱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1호갱은 길이가 32m, 너비가 5m, 순장된 마차가 10대, 말 32필이며, 2호갱은 길이가 8m, 너비가 3m, 순장된 말이 6필이나 된다. 2호갱은 1호갱과 달리 마차는 밑에 있고 말이 그 위에 있는 것이다. 후이춘추순차마는 그 규모가 크고 말의 장식이 정교롭고 아름다워 현재 전국에서 으뜸이고 전국 10대 고고 발견 중의 하나로 된다.

 임치중국고차박물관은 중국고차의 연구 성과 및 중국 역대 마차의 진품을 집대성하여 중국 마차의 유구한 역사, 훌륭한 제작 기술 및 세계 차량 발전사에서의 앞선 지위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임치중국고차박물관 동쪽 150m에 대형 전용 주차장이 설치되어 있으며 교통이 아주 편리하다.

 

 

강태공사당(姜太公祠堂)

 위치는 유성구의 장가장, 태공의 관총 북측에 있으며, 태공여상(太公呂常), 자는 자아, 호는 태공망(太公望), 동해인이며, 여씨강씨(呂氏姜氏), 세칭(世稱)은 강태공이라고 한다.

 1992년에 임치구(臨淄區)는 태공의 관총 북측에다 강태공공사(姜太公 公祠)를 건립했다.

 공은 기원전 11세기 BC 1027년 주나라의 개국공신으로 제나라 제일대 국군으로 봉했으며 재임기간내 상공(商工)을 통달하여, 어민염전의 이익을 나게 했으며, 많은 백성들이 제나라로 귀화를 했고 제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다.

 

 강태공사당 본전 안 가운데에는 강태공상을, 양쪽에는 제나라 2대왕 제정공(제정공)과 16대왕 제환공(제환공) 상을 모셨다. 일흔을 넘겨서 정치에 나선 강태공의 머리카락과 수염은 하얗게 센 노인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

 사당의 앞마당에는 5현전(五賢殿)과 오조전(五祖殿)이 있다. 서쪽의 5현전에는 제나라의 정치가와 병법가인 관중(管仲), 손무(孫武), 손빈(孫臏), 사마양저(司馬穰苴), 전단(田單) 등 다섯분을 모셨다. 동쪽의 5조전에는 동화제군(東華帝君), 여동빈(呂洞賓), 장천사(張天師), 왕중양(王重陽), 구장춘(邱長春)등 도교의 신선을 모셨다.

 강태공사당은 정치가 및 병법가로서의 강태공과 신선으로 신비화한 강태공의 양면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공간인 듯하다.

 사당 내부에는 강태공의 일생을 벽화로 그려 놓았다. 강태공의 가난한 생애(貧困生涯), 무예를 익히고 책을 씀(習武著書), 은 주왕과의 전투인 목야대전(牧野大戰), 제나라의 후로 봉해짐(封齊就國), 제나라를 다스림(太公治國), 파래쟁구(破萊爭丘), 주왕수권(周王受權) 등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사당임에도 벽화외에 서하를 전시하고 있어 특이하다는 느낌이 든다.

 사당 뛰쪽으로 나가면 강태공의 의관총(衣冠塚)이 있다.

 전하는 바로는 강태공은 10년 동안 주 성왕을 도왔다. 그리고 제후의 지위를 아들 강습, 제정공에게 물려 주었고, 제정공 35년인 BC 1072년 139세의 나이 죽었다고 한다. 주나라의 의식에 따라 장례를 치렀고 주 문왕의 묘지 옆에 매장하였는데 그의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래서 강태공의 덕을 잊지 못하던 제나라 사람들은 영구 남산의 북쪽에 그가 썼던 모자와 옷을 묻었다. 그래서 의관총(衣冠塚)이라고 한다.

 의관총은 높이 28m이고, 남북 길이 50m, 동서 넓이 55m.

 비석 앞에는 제나라 문화의 창시자에 대한 존경과 추모의 정을 담은 "주사제조(周師齊祖-주나라의 스승이요 제나라의 시조)"라는 글씨가 전서체로 새겨져있다. 그리고 비석에는 강태공 일생의 업적을 기록해 놓았다.

 비석 머릿돌에는 "강(姜)"이라는 성씨가 새겨져 있고, 빗돌에는 예서체로 "무서왕강태공의관묘(武成王姜太公衣冠墓)"라고 적어 놓았다.

 강태공이 무성왕으로 불리게 된 것은 당나라 숙종 때이다. 당 숙종은 강태공을 문성왕 공자와 비겨 무성왕으로 봉하고 도성과 각 주에 태공묘(太公廟)를 세우게 하였다. 그리고 태공묘는 문성왕 공자의 문묘와 대칭되는 명칭으로 무묘(武廟)라고 불렀다. 이때부터 강태공은 전국적인 신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

 강태공 사당의 동쪽에는 구모공(丘穆公) 사당이 있다. 1995년 구목공의 100대 손인 대만의 구씨 종친회장이 건립하였다. 구목공은 강태공의 셋째 아들로 제나라 수도인 영구(營丘)의 '구(丘)'를 따서 성씨로 삼아 창씨를 했다고 한다.

 구목공 사당이 동쪽 전각에는 강(姜)씨 성의 기원과 족보를 전시해 놓았다. 강씨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 중의 하나로, 강씨 성은 현재 103개의 성으로 나눠어졌다고 한다.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

 엎지른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는 말로, 일단 저지른 일은 다시 되돌릴 수 없거나 한번 떠난 아내는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뜻.

 

覆 : 엎어질 복

水 : 물 수

不 : 아닐 불

返 : 돌아올 반

盆 : 동이 분

 

《습유기(拾遺記》와《사기(史記)》의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에 나오는, 태공망(太公望:태공이 학수고대하던 인물이라는 뜻) 여상(呂尙)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이다. 주(周)나라의 문왕(文王)이 사냥을 갔다가 웨이수이강[渭水]에서 낚시하고 있는 한 노인을 만나 대화를 나누어 보니 학식이 보통 이상이었다. 이 노인이야말로 주나라를 일으켜 세울 큰 인물이라고 여겨 스승이 되어 달라고 청하였다. 이 사람이 바로 보통 강태공이라 알려진 태공망 여상이었다.

 여상은 문왕의 청을 받아들여 문왕의 스승이 되었다가 후에 제(齊)나라의 제후에 봉해졌다. 사실 여상은 입신출세하기 전에는 끼니조차 제대로 마련하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였지만 날마다 집에서 책과 씨름하면서 세월을 보내고 살림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여상의 부인 마씨는 결혼 초부터 시작된 생활고를 참다 못해 그만 보따리를 싸고 친정으로 도망가 버렸다.

 이후 여상이 제나라의 제후에 봉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돌아와 여상에게 "그때는 너무나도 가난하여 떠났지만 이제는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다시 돌아왔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여상은 잠자코 있다가 다음과 같이 응하였다고 한다. 아내에게 물 한 동이를 떠오라고 해서 그것을 땅에 쏟은 다음 다시 그릇에 담아 보라고 하였다. 아내는 담으려 하였으나 진흙만 손에 잡힐 뿐이었다. 그제서야 태공망은 "한번 엎지른 물은 다시 그릇에 담을 수 없고[覆水不返盆] 한번 떠난 아내는 돌아올 수 없는 것이오."라고 말하였다.

 복수불반분은 한번 헤어진 부부는 재결합할 수 없다는 뜻이며, 또한 어떤 일이든 한번 저지른 일은 다시 원상복구할 수 없다는 뜻도 있다.

 

 

임치족구박물관(臨淄足球博物館 : Linzi football museum)

 이곳은 중국체육박물관의 임치분관(臨淄分館)인 족구박물관이다. 

 중국은 족구 즉 축구의 기원국(起源國)이다. 1층에는 족구의 기원과 고대 축구운동에 관한 내용이 전시되어 있다. 한나라 때의 축구를 하는 모습의 석상, 긴 옷을 입고 실내에서 공을 차는 모습, 축구를 하기 전에 승리를 기원하는 고사를 올리는 모습 등을 볼 수 있다. 2층 전시실의 현대족구전시청(現代足球展示廳)은 70년대 이래 중국의 근현대(近現代) 축구 현황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세계적인 족구 현황, 각종 우승컵, 각종 축구공의 전시 등 다양한 축구의 발전 모습을 볼 수 있게 잘 전시되어 있다.

 제4전시실에는 제노미술관장품(濟魯美術館藏品)인 각종 서예작품이 족자로 만들어져 사방의 벽이 꽉 차게 걸려있다. 현관에는 긴 옷을 입고 공을 다루는 모습의 그림과 공이 움직이는 모습 등을 전시해 두고 있다.

 

 

◈ 치박시의 명산, 담계산(潭溪山)

 담계산 관광지는 산동성 치박시에 위치한다. 카르스트지형이어서 동굴이 많고 암석절벽 등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으며, 계곡에는 작은 담들이 이어져 있어서 여름철이나 연휴기간에 많은 여행자가 찾아오고 있다.

 

 최고봉은 867m이고 삼림율이 80% 이상으로 수목이 울창하여 공기 속의 음이온 함량이 높아 '천연의 산소방'으로 불리운다. 특히 4계절이 아름다운 산으로, 봄에는 꽃구경, 여름에는 계곡에서 물놀이, 가을에는 단풍, 겨울에는 눈꽃의 절경을 즐길 수 있다. 더불어 자연의 경치 뿐만 아니라, 문화관광도 풍부하여 100여개의 명승지를 둘러보려면 7시간이나 소요된다.

 

 산행을 시작하면 담계산 폭포가 맞이해주며, 담계산(潭溪山)이라는 이름처럼 산행 내내 작은 담과 시냇물이 연이어져 있는 계곡을 오르면 동굴이 많고 전망 또한 좋아 시원한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

 

 총 트레킹 시간은 5~7시간이 소요된다. 또한, 담계산 관광지에는 호수를 바라보며 지어진 3성급 홀리데이인 호텔과 여행자에게 맞춰진 정갈한 식당이 잘 준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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