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고도(九朝古都) 낙양(洛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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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고도(九朝古都) 낙양(洛陽)

 낙양(洛陽)은 현재 중국인들에게는 모란꽃으로 유명한데, 중국인들은 모란을 「꽃중의 꽃」으로 꼽는다. 수나라 때부터 모란의 재배가 시작되어 당나라 때 급속하게 확산되어 유명해졌다고 한다. 송나라의 문인 구양순(歐陽詢)는 '洛陽牧丹記(낙양목단기)'에서 '낙양의 흙은 꽃에 가장 어울려 모란이 세상에 제일이다'라고 극찬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낙양의 별칭은 목단성(牧丹城)이다.

 

 하남성의 서쪽, 황하의 남쪽 해안과 낙하의 북쪽해안에 위치한 낙양은 중국 6대 고도의 하나인 유서 깊은 도시로서, 기원전 770년 주(周)나라의 수도가 된 이래로 동주(東周), 동한(東漢), 조위(曹魏), 서진(西晉), 북위(北魏), 수(隨), 당(唐), 후량(後梁), 후당(後唐) 등 9개 왕조가 도읍을 정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아홉 왕조의 도읍(九朝古都)'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20년의 중국을 이해하려면 선전(深圳, 심천), 200년은 상하이(上海, 상해), 500년은 베이징(北京, 북경), 1.000년은 카이펑(開封, 개봉), 3.000년은 시안(西安, 서안)으로 가봐야 한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장구한 5,000년 역사의 중국을 알려면 단연 뤄양(洛陽, 낙양)행을 꼽는다.

 

 또 1세기 이후 불교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낙양에는 한(漢), 위(魏), 당(唐) 등 여러 왕조의 유적과 중국 3개 석굴의 하나인 용문석굴, 백마사등 불교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이러한 낙양이 가장 번영했던 것은 장안이 도읍으로 정했던 당나라 때이다. 서안이 정치의 도시였다면 낙양은 예술의 도시로 전국시대의 노자, 당나라의 두보, 이백, 백낙천 등 많은 문인과 예술인이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예술의 꽃을 피웠다.

 

 특히 후한에서 당대까지의 사이에 정치중심지 서안에 비해서 경제·학술·문화의 국제적 중심지로서 번영했으며, 한국인들에게도 유명한 '삼국지(三國志)'이야기도 후한말기의 낙양이 무대가 되었다. 그러나 이곳 낙양의 지리적 위치가 3면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있는 천연적인 요세이다. 또한 하남성(河南省) 서부 지역을 지배하려면 반드시 낙양을 점령하여야 하므로 낙양에서는 수 많은 전쟁들이 일어났다. 이 때 낙양사람들은 약탁을 피하기 위하여 많은 보물들을 땅속에 뭍어 두었다. 더욱이 당나라가 멸망한 후부터는 전란이 끊이지 않아 많은 문화 유적들이 소실되거나 없어졌다. 지금은 용문석굴과 중국 최초의 절이라는 백마사를 보기 위한 관광객이 많이 몰려들고 있으며, 비단이 싸기 때문에 비단을 사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든다.

 

 또한, 그 역사만큼 수공업제품의 수준 역시 매우 뛰어난데 당삼채(唐三彩), 궁등(宮燈), 방청동(傍靑銅) 등의 제품이 매우 유명하다.

 

 

중화의 요람 뤄양(洛陽)

 뤄양(洛陽)은 뤄허(洛河, 낙하)의 북쪽에 위치한 도시라는 뜻이다.

 뤄양시 남쪽에는 석굴로 유명한 룽먼산(龍門山, 용문산)이, 북쪽에는 '살아서는 쑤저우· 항저우, 죽어서는 북망(生在蘇杭(생재소항), 葬在北邙(장제북망))'으로 잘 알려진 베이망산(北邙山)이 자리 잡고 있다.

 멀리 서쪽으로는 관중평원(关中平原)과 시안(西安, 서안)으로 통하는 한구관(函谷關), 동쪽으로는 소림사로 유명한 오악(五嶽)의 하나인 쑹산(嵩山, 숭산)이 나온다. 뤄양 북쪽으로는 중화문명의 젖줄 황허(黃河, 황하)가 가로지른다. 뤄양이 위치한 황허와 뤄허 사이의 땅을 허뤄(河洛, 하락) 지역이라 부른다.

 고대 화(華)와 하(夏)라는 이름의 씨족부락이 있던 곳이다. 화하(華夏)는 중화(中華)로 이어져 13억 중국인을 묶는 정신적 구심이 되고 있다.

 

 허뤄(洛河) 지역은 한족(漢族)의 요람이다. 부계(父系) 사회가 진화해 내려온 역사의 기록인 성씨(姓氏)가 그 증거다. 지금까지 알려진 한족의 성씨는 총 4,820개다. 그 가운데 120개 대성(大姓)이 한족 인구의 90.2%(11억 7,000만 명)를 차지한다. 허뤄 일대에 뿌리를 둔 성씨는 120개 성씨 중 52개(李·張·陳 등), 허뤄에 일부 뿌리를 둔 성씨는 45개(王·劉·趙 등)라고 한다. 뤄양 일대가 전 한족 인구 79.49% DNA의 뿌리인 셈이다. 멀리 대만인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뤄양시 왕청(王城) 공원에 '뿌리는 허뤄에 있다(根在河洛)'는 대형 비석을 세운 이유도 뿌리를 찾고자 한 수구초심(首丘初心) 때문이었다.

 

 뤄양(洛陽)은 9조고도(九朝古都)다. BC 771년 동주(東周)의 수도가 된 이래 후한(後漢), 조조(曹操)의 위(魏) 등을 거쳐 오대(五代)시대 후당(後唐)까지 아홉 왕조의 수도였다. 하지만 현재 과거의 궁궐터나 성벽은 남아있지 않다. 단지 뤄양 동쪽 교외의 백마사(白馬寺)가 후한시대 중국에서 최초로 건립된 절로 불린다. 그러나 지금 건물은 16세기 명(明) 왕조 때의 것일 뿐이다.

 

 뤄양(洛陽)은 흥미진진한 '동주열국지(東周列國志)'의 중심지였다. 하(夏)· 은(殷)이 모계씨족사회에서 부계씨족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면, 주(周)는 종법(宗法)제도를 내세워 부계 중심의 위계질서를 확립한 시기였다. 공자(孔子) 이래 중국의 이상은 주나라 정치제도의 회복이었다. 뤄양시는 2003년 주왕성(周王城) 광장을 조성하던 중 대규모 마차갱(坑)을 발굴했다. 여섯 마리 말이 끄는 마차 '천자가륙(天子駕六)'이 출토되자 대형 동상과 함께 박물관을 세웠다. 뤄양 일대에서는 지금도 주나라 시기 제사유적지를 발굴 중이다. 유물 가운데 산 채로 제물로 바쳐진 사람의 유골도 적지 않다. 유교에서 칭송하는 주나라 예악(禮樂)제도의 실상이다.

 

 주대에 확립된 위계질서의 나라 중국에는 묘지에도 등급이 있다. 백성의 묘는 분(墳), 귀족은 총(塚), 황제는 능(陵)이다. 황제의 스승 격인 성인의 묘는 임(林)이다. 무덤가에 빼곡하게 나무를 심기 때문이다. 죽어서도 나무 그늘에서 시원하게 지내기를 바라는 중국인의 정성을 담았다. 임은 두 개에 불과하다. 문성(文聖)인 공자의 무덤 공림(孔林)은 산둥(山東)성 취푸(曲阜, 곡부)에 있다. 무성(武聖)으로 추앙 받는 '삼국연의' 관우(關羽)의 목을 묻었다는 관림(關林)이 뤄양에 있다.

 

 지금의 관림은 명 만력제(萬曆帝)가 이곳에 사당을 세우면서 조성됐다. 청(淸) 건륭제(乾隆帝)는 지금의 규모로 확장했다. 관림의 주요 건축물은 중축선을 따라 현판 '천추감(千秋鑒)'을 건 무루(舞樓)를 시작으로, 대문(大門), 의문(儀門), 용도(甬道·벽돌길), 배전(拜殿), 대전(大殿), 이전(二殿), 삼전(三殿), 석방(石坊), 팔각정(八角亭), 관총(關塚)이 일렬로 이어진다. 의문을 지나면 황제 전용도로인 용도 좌우로 돌사자 104개가 관운장의 묘를 지키고 있다. 청 강희제(康熙帝)가 세운 화려한 팔각정에는 '충의신무영우인용위현관성대제림(忠義神武靈佑仁勇威顯關聖大帝林)'이란 어마어마한 칭호가 새겨진 비석이 있다. 청 도광제(道光帝)가 관우에게 바친 최고의 타이틀이다.

 

 하지만 관우는 중국인에게 더 이상 무신이 아니다. 돈을 가장 많이 잘 벌게 해주는 재신(財神)으로 변했다. 전문가들은 그 이유를 소금에서 찾는다. 관우의 고향인 산시(山西)성 셰저우(解州, 해주)는 유명한 내륙의 소금산지였다. 전국을 누비던 셰저우 소금상들은 향토 영웅 관우상을 들고 다니며 재운을 빌었다. 평생 돈과 관계 없었던 관우가 재신이 된 이유다. 지금도 매년 9월 29일이면 관림에서 국제행사가 열린다. 국내외 수많은 관제묘 관계자와 종친 조직이 모여 성대한 제사를 지낸다.

 

 중국은 지금 수출에서 내수로 경제발전 방식의 '주안비엔(轉變, 전변: 형세나 국면 따위가 종전과는 다르게 바뀜)'을 외치고 있다. 뤄양은 역사적으로 변화의 현장이었다. 우선 주인이 바뀌었다. 위(魏)· 촉(蜀)· 오(吳) 삼국시대가 끝나자 북방의 유목민들이 화북으로 밀려 내려왔다. 한족은 고향 중원을 등지고 남으로 향했다. 전쟁과 분열의 시기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시대가 시작됐다.

 

 뤄양(洛陽)은 선비(鮮卑)족이 세운 북위(北魏)의 두 번째 수도다. 북위는 도무제(道武帝) 탁발규(拓跋珪)가 지금의 산시(山西)성 다퉁(大同)인 평성(平城)에서 건국했다. 제7대 효문제(孝文帝, 467~449, 재위: 471~499)가 뤄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할머니 문명태후(文明太后)의 '치마폭'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었다. 북위에는 '자귀모사(子貴母死)'라는 악습이 있었다. 황태자를 정하면 곧 생모를 죽여 외척의 정치 개입을 차단시켰다. 하지만 여권(女權)은 강했다. 제5대 문성제(文成帝)의 부인 풍씨(馮氏· 문명황후(文明皇后), 441~490)는 친자식을 낳지 않아 살아남았다. 465년 문성제가 죽자 태후로 승격됐다. 그녀는 490년 죽을 때까지 권력의 화신이었다. 여황제 측천무후(武則天(무칙천, 624~705))의 선배와 같았다. 제위에 있던 헌문제(獻文帝)와 효문제(孝文帝)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헌문제가 문명태후에 반기를 들자 퇴위를 당할 정도였다. 영리한 효문제는 은인자중했다. 태후가 죽자 효문제는 남제(南齊) 정벌을 기치로 뤄양으로 진군한 뒤 뤄양에 주저앉았다. 명목은 천도였지만 속내는 문명태후의 영향력으로부터 탈출이었다.

 

 천도 직후 효문제는 한족을 대거 등용하는 개혁을 단행한다. 더불어 호족(胡族)의 옷과 언어를 금지시키고 선비족의 성씨를 바꿨다. 탁발을 원(元)씨, 독고(獨孤)는 류(劉)씨로 바꾸고 호적은 모두 뤄양으로 정했다. 황태자마저 아버지의 개혁에 반대했다. 그는 선비족 원로들과 평성으로 돌아가 쿠데타를 시도했다. 반란은 사전에 발각됐고 효문제는 친아들마저 극형으로 다스렸다.

 

 효문제의 뤄양은 보편적인 한족의 도성과 달랐다. 궁궐과 민가가 뒤섞이고, 시장이 궁성의 뒤편에 자리잡지 않았다. 궁궐을 내성 최북단으로 배치했고 궁궐 뒤에는 대형 공터를 정원처럼 조성했다. 유사시 탈출을 위해서였다. 뤄양에서 시작된 '북궁후정(北宮後庭)'으로 불리는 도시구조는 당(唐)나라 장안성(長安城)에서 완성된다. 성곽 없이 천막에서 지내던 유목민족의 습성이 도시 구조에 투영된 셈이다. 중국의 역사를 북방의 유목민족(胡·호)과 중원의 농경민족(漢·한)이 대결하고 융합하는 과정으로 보는 '호한체제(胡漢體制)'의 하나가 효문제의 뤄양성이다. 유목민 선비족이 한족으로의 '주안비엔(轉變)'이 뤄양에서 이뤄졌던 것이다.

 

 뤄양(洛陽)에서는 종교의 '주안비엔(轉變)'도 이뤄졌다. 북위는 유교가 아닌 불교를 신봉했다. 탈유입불(脫儒入佛)이 이뤄졌다. 북위는 전국적으로 승려가 300만 명, 사원은 2만여 곳에 이를 정도로 불교의 전성기였다. 뤄양의 룽먼석굴은 그 정수다. 둔황(敦煌), 윈강(雲崗)과 함께 3대 석굴로 불린다. 시작은 효문제의 뤄양 천도였다. 10세기 초까지 뤄양 남쪽 이수(伊水) 강가의 돌산에 대규모 조성사업이 이뤄졌다. 80만 명이 동원됐다. 석굴 전체의 길이가 1㎞, 부처를 새긴 굴이 1352개에 이른다. 정수는 675년 세워진 봉선사(奉先寺)다. 17.14m 높이의 거대한 노사나불(盧舍那佛)의 단아한 모습은 당나라 여황제 측천무후를 본떴다는 설이 전한다. 왼쪽의 천왕역사(天王力士)는 소원을 비는 이들의 손때로 정강이 아래는 새까맣게 변했다. 천왕역사는 멀리서 보면 몸의 비례가 맞지 않는 가분수다. 바로 밑으로 다가가 올려보면 완전한 비례를 이룬다. 흥미로운 조각술이다.

 

 

낙양 모란꽃 축제(洛陽 牧丹花會)

 중국인들사이에서 '낙양모란은 천하제일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모란은 옛부터 만화일품이라 칭송되어 왔다.

 특히 당대에는 모란이 그 어느때보다도 가장 왕성하게 피었는데, 그때부터 모란을 즐기는 축제가 풍습처럼 되었다고 한다. 현재 이곳에서 재배되는 모란의 품종이 350여종에 이르고, 그 중에서도 '요황'과 '위자'는 모란의 왕과 왕후로 불리는 가장 뛰어난 품종이다.

 또한 모란(牧丹)은 전통적으로도 유명한 꽃이며, 또한 그 꽃을 감상하는 것은 낙양 사람들의 오랜 취미였다.

 사람들의 생활 수준이 향상되고 관광산업이 날로 발전할수록 낙양 사람들은 꽃을 심고 감상하는 열정이 증가되었다.

 낙양의 모란꽃 축제는 1983년에 처음으로 개최되어 그 후로 일 년에 한번씩 개최되었다. 매년 4월 모란꽃 축제가 개최될 때면 국내는 물론 해외의 많은 관광객들이 낙양으로 몰려들고, 낙양의 대외 개방에도 좋은 계기가 마련된다. 축제 기간에는 대형 문예공연, 꽃놀이, 서화, 사진전, 무역 상담회 등이 개최된다.

 

 

낙양기후(℃)

도시명

구분/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낙 양

(洛陽)

최고평균

6.2

8.6

14.6

21.8

27.8

32.7

32.4

30.9

26.8

21.6

14.2

8.1

최저평균

-3.9

-1.8

3.3

9.7

15.0

20.3

23.1

22.1

16.5

10.3

3.6

-2.1

평 균

-0.2

1.2

6.0

13.1

17.4

21.2

23.5

22.6

17.6

12.9

6.9

1.6

강수량mm

7.5

10.9

25.0

40.1

47.2

66.6

148.6

117.9

80.2

41.5

30.6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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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명소

용문석굴(龍門石窟)

 용문석굴은 돈황의 막고굴, 대동의 운강석굴과 함께 중국의 3대 석굴로 꼽힌다. 용문석굴 안에는 자그만치 10만여개의 불상이 있다. 493년 북위(北魏)가 대동으로부터  낙양으로 천도한 다음부터 석굴을 만들기 시작, 동위(東魏), 서위(西魏), 북제(北齊), 북주(北周), 수(隨), 당(唐)에 이르는 4세기에 걸쳐 용문석굴을 완성했다.

 

 이하(伊河)의  양안에 있는 용문산(龍門山)과 향산(香山)의 암벽에는 1천3백52개의 석굴이 1km나 뻗어 있고 그속에 2800여 개의 비문, 50여 개의 불탑, 약 10만개에 이르는 불상이 있다.

 

 이것을 모두 관람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므로 이 가운데에서 가장 오래된 고양동(古陽洞)과 당나라 초엽의 것으로 보이는 잠계사(潛溪寺)를 보고나서 북위 때 24년에 걸쳐 석공과 인부 80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다는 빈양동(賓陽洞)을 보는게 좋다.

 

 용문석굴은 현존하는 종교, 미술, 서예, 음악, 의료, 건축 등 방면의 살아있는 역사 자료이다. 따라서 '대형 돌조각 예술 박물관'이라고도 칭해진다.

 

 용문석굴은 주로 북위시기와 당대 무측천(武則天, 624~705, 재위: 690~705) 시기에 많이 만들어졌는데 그중 규모가 가장 크고, 유명한 굴은 당대 측천무후 시기에 만들어진 봉선사(奉先寺) 석굴이다. 이곳의 불상조각은 온화하면서 우아한 미를 자랑한다. 이외에 용문석굴의 대표적인 동굴로는 고양동(古陽洞), 빈양동(賓陽洞), 연화동(蓮花洞), 약방동(葯方洞), 간경사(看經寺), 만불동(萬佛洞), 잠계사(潛溪寺), 대만오불동(大萬伍佛洞) 등이다.

 

 용문석굴 건너편 향산의 백원(白園)에는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 772~846)의 묘가 있다. 그는 근처에 있는 향산사에서 죽었는데 묘소 뒤에 있는 조그만 야산에 올라가면 날씨가 좋은 날에는 동쪽으로 숭악(嵩岳)이 보인다.

 

북위 시대 대표 석굴

* 고양동(古阳洞)

 가장 먼저 조성된 석굴로 역사가 1500년이 넘는다. 493년 북위가 뤄양으로 천도하고 처음으로 축조하기 시작했다. 황실과 귀족들이 봉헌해서 만든 불상이 수백여 개에 달한다. 커다란 석굴 벽면에 빈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감실과 불상을 조각했다. 마모된 조각이 많지만 북위 왕조가 숭불 정책을 적극 펼쳤던 것을 입증하는 석굴로 의미가 깊다.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고양동은 '제기의 보물창고'로 유명하다. 조각한 불상에 만든 장인의 이름과 연도, 제작 이유를 상세히 기록한 것이 바로 제기이다. 용문20품(龙门二十品)이 북위시대 제기를 대표하는데, 그중 19품이 이곳에 있다. 나머지 한 개는 자향굴(慈香窟)에 있다.

 

* 빈양동(宾阳洞)

 북위 시대를 대표하는 불상이 이곳에 있다. 석굴이 빈양남동, 빈양중동, 빈양북동 3개로 나뉘어 있어서 '빈양삼동(宾阳三洞)'이라고도 부른다. 그중 500년부터 523년까지 총 24년에 걸쳐 조성한 빈양중동에 주목하자. 룽먼 석굴 중 축조에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린 굴로 꼽힌다. 윈강 석굴보다 한결 섬세하고 온화해진 불상이 등장한다. 석굴 안 11존의 대불(大佛)을 보면 그 노고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중앙에 8.4m 높이의 석가모니 상이 가부좌를 틀고 앉았고, 좌우에 제자와 보살이 서 있다. 석굴 앞에 있는 거대 비석은 당나라 때 저명한 서예가 저수량(褚遂良)이 쓴 것이다.

 

이궐불감비(伊闕佛龕碑, Yique Fokanbei)

 빈양 중동 남쪽벽에 있는 마애비.

 위나라 왕태가 생모 문덕왕후를 위하여 빈양삼동을 보수, 재불동(齎祓洞)을 신조한 것이 기록되어 있음. 잠문본 찬(), 저수량 필()의 예서를 닮은 해서. 정관15년(641)에 새김.

 

* 연화동(莲花洞)

 먼저 천장에 활짝 핀 대형 연꽃 조각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중앙에는 5.1m에 달하는 석가모니 불상이 가부좌가 아니라 허리를 꼿꼿이 펴고 서 있는 모습이 특이하다. 연화동의 하이라이트는 남쪽 벽면 상단에 2cm 크기로 정교 하게 조각한 불상들이다. 그러나 육안으로 확인하긴 어렵고 사진을 찍어서 확대해야 보인다. 이는 룽먼 석굴에서 가장 작은 크기로 조각된 불상으로 꼽힌다.

 

당나라 시대 대표 석굴

* 만불동(万佛洞)

 룽먼 석굴에서 조각이 가장 완벽하다고 평가받은 석굴이다. 당나라 고종과 측천무후가 부처에게 소원을 빌기 위해서 조성한 것으로, 전실과 후실로 나뉜다. 전실에 힘이 아주 세게 생긴 역사(力士)와 사자 두 마리가 조각돼 있고, 후실에 석가모니와 제자 및 보살이 있다.

 석가모니가 앉아 있는 좌우 벽면에 불상 15,000여 개를 매우 규칙적으로 새겨서 만불동이라 부른다. 불상들 표정이 제각기 달라서 관찰하는 재미가 있다고 알려졌지만, 불상 크기가 4cm에 불과해서 육안으로 확인하긴 어렵다. 천장에 예쁜 연꽃이 조각되어 있고, 연꽃을 빙 둘러싸고 제기가 새겨져 있다.

 

* 봉선사(奉先寺)

 룽먼 석굴을 통틀어 최고 하이라이트다. 규모가 가장 큰 것은 물론이고, 최고의 예술적 가치를 지녔다. 노천에 드러난 9개 불상 제작에만 4년이 걸렸고, 학자들 고증에 따르면 전체 석굴을 만드는 데는 15년 이상 소요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봉선사로 난 계단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한가운데 위치한 노사나불(盧舍那佛)에 이목이 집중된다. 길이 17.14m의 초대형 불상으로 머리 크기만 4m, 귀 길이가 1.9m에 달한다. 무척 거대한데도 전체적인 조형미가 세련되고 여성스럽다. 얼굴은 보름달처럼 둥글고, 눈썹은 초승달처럼 가늘며, 온몸에서 위엄이 느껴지지만, 전체적으론 온화한 분위기가 감돈다.

 전해 오는 바에 따르면 노사나불은 측천무후를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조정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황후 자리에 오른 측천무후는 불교를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수단으로 삼아, 석굴 제작에도 깊이 관여했다. '사서(史书)'에는 '측천무후가 화장품 살 돈 20,000관을 헌납했다.'라는 기록이 전해온다. 당시 1관이 엽전 1,000개를 꿴 것이라고 하니 엄청난 기부금이었다. 측천무후 시대가 룽먼 석굴 조성의 최전성기였다. 현종 때에 이르러 점차 불상을 조각하는 일이 드물어졌다.

 

o 개관시간 : (여름) 06:30~19:00, (겨울) 07:00~18:00

o 가는방법 : 낙양 기차역 앞에서 1일 관광전용버스를 탈 수 있으며 81번, 53번, 60번 버스를 타고 갈 수 있다. 자동차로 시내에서 약 40분 정도 소요된다.

o 입장료 : 용문석굴, 백거이묘, 향산사 세개의 관광지를 80위안짜리 한 장의 표로 관람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표는 엽서형식으로 되어 있어 표 부분만 절취해서 내고 나면 엽서부분은 보관할 수 있다. 5위안을 추가로 내면 음성 가이드 기계로 설명을 들으며 구경할 수 있다.

 

 

재불동(齎祓洞, Zhaifudong)

 제1동. 잠계사동(潛溪寺洞)이라고도 함.

 초당∙ 정관15년(641), 태종의 넷째아들인 위왕 태(魏王 泰)의 발원으로 조영되었다.

 폭 9.4m, 안길이 6.7m, 거의 타원형인 평면, 원형 천정으로 높이는 10.6m. 본존의 좌불상과 좌우에는 협시의 나한 ∙ 보살 ∙ 신왕이 있다.

 

경선사동(敬善寺洞Jingshansidong

 제5동. 당초 ∙ 정관18~현경3년(644~658)의 건조.

 폭∙ 안길이 모두 약 3.2m인 방형평면.

 본존좌불과 좌우에 소보살, 좌우벽에 나한 ∙ 공양자 ∙ 보살 ∙ 신왕과 연꽃 가지 위의 소보살을 배치했다.

 

사자동(獅子洞, Shizidong)

 제10동. 바깥벽에 불탑의 석각이 있고 '탑동'이라고도 함.

 초당∙ 상원2년(675)의 각명(刻銘)이 있다. 폭 2.4m, 안길이 2m의 사각형 평면.

 본존은 네모난 좌대 위에 앉아 있고, 두발(頭髮)은 와권상(渦巻狀). 좌우에 보살, 전좌우에 사자가 있다.

 

혜간동(惠簡洞, Huijiandong)

 제11동. 남벽 동쪽 구석에 초당∙ 함형4년(673) 서경법해사(西京法海寺)의 승() 혜간(惠簡) 발원의 각명(刻銘)이 있다.

 폭 3.8m, 안길이 3m. 미륵의 상(倚像)을 중존으로 하는 5존상이 있다.

 

위자동(魏字洞, Weizidong)

 제17동. 북위 말의 정광~효창(520~527)경에 만들어졌다.

 폭 3.9m, 안길이 3.2m. 보단 위에 5존상이 있고, 천정에는 비천부조가 있다. 좌우벽에도 5존상의 불감이 있고 그 주위와 앞벽에 걸쳐서는 석가 ∙ 미륵 ∙ 관음의 상감(像龕)이 정연하게 늘어섰다.

 

당자동(唐字洞, Tangzidong)

 제18동. 초당경에 만들었으나 내부는 미완성 상태.

 외벽에 목조건물을 흉내낸 처마()가 조각되고, 그 밑 입구 좌우에는 많은 초당명()의 상감(像龕)이 있다. 동굴 내부는 폭 4.5m, 안길이 3.5m인 방형평면.

 

약방동(薬方洞, Yaofangdong)

 제20동. 문양측에 북제의 도읍사(都邑師) 도흥(道興)의 '치질방(治疾方, 약방)' 석조가, 외벽 좌우에는 대비천과 역사(力士)를 배치한 북제시대의 부조가 있다.

 동굴내는 폭 3m, 안길이 3m의 방형평면. 본존은 보단(寶壇) 위에 좌불과 환조의 협시 보살∙ 나한으로 된 수나라 양식의 5존상. 좌우벽에도 수나라 식의 5존상을 봉납하는 불감이 있으며, 주위의 소상감(小像龕)에는 북위 말(北魏末)부터 당초(唐初)까지의 조상명(造像銘)이 있다.

 

고양동(古陽洞, Guyangdong)

 제21동. 속칭 노군동(老君洞)이라고도 함. 용문 최고()의 석굴. 태화18년(494) 경에 착공. 선무제(재위 499~515) 말년에 대충 완성하였다.

 동굴내는 폭 6.75m, 안길이 13m의 마제형(馬蹄形)평면, 원형천정이며 높이는 약 11m. 정면의 2단 보단상(寶壇上)에 본존좌불, 후벽 좌우구석에 양협시보살의 입상, 앞쪽 좌우에 사자상이 있다. 주위벽의 상감(像龕) 감(龕) 중에 북위의 것은 석가좌상 24, 미륵교각상(交脚像) 29, 관음입상 11, 그외에 이불병좌상(二佛並坐像) 등이 있고 조상명(造像銘)은 『용문20품』을 비롯 당대(唐代)의 것을 포함하면 100여개에 달한다.

 

극남동(極南洞, Jinandong)

 제28동. 서산 최남단에 있고 입구는 동남쪽으로 열려 있다.

 정토동(浄土洞, 제26동, 본존불은 아미타불의상)과 같이 측천무후기(690~705)의 건조. 동굴내는 폭 4.7m, 안길이 3.45m. 본존은 5존상이다.

 

간경사동(看經寺洞, Kanjingsidong)

 동산의 만불구(萬佛溝) 북쪽에 있다. 성당(盛唐) 초기(700년경)의 조영(造營). 한변 약 11m의 방형평면.

 높이 약 6m인 평천정(平天井)에는 대연화를 둘러싼 6비천의 부조가 있다. 본존은 통견(通肩)의 좌불이며 8각대좌 위에 앉아 있음. 좌벽의 4주요벽(四周腰璧)에는 거의 등신대의 행렬하는 나한 29체가 부조되어 있다.

 

뇌고대삼동(擂鼓坮三Leigutai Sandong

 동산 만불구 남쪽에 있다.

 남· 중· 북동굴 모두 남서로 면해 열려 있으며, 원래에는 성당 초기의 조영.

 남동은 폭 7.7m, 안길이 5.8m, 본존은 편단우견(偏袒右肩)인 좌불상이며, 방형(方形)대좌에 앉아 있고 4벽의 연지상 천불체의 부조는 천정에까지 이른다.

 중동굴은 폭 6m, 안길이 5m. 3기의 삼성보단(三成寶壇)에 본존인 수각(垂脚)미륵과 양보살을 안치함. 좌우벽과 천정에 천체불(千體佛), 4주(四周)요벽에 '25조사'를 부조하였다. 북동은 한변 3m인 방형평면이며 둥근천정. 중앙과 좌우벽에 방좌상(方座上)의 좌불을 안치함. 앞벽 우측의 11면4비관음, 좌측의 6비보살은 용문에 있어서 다면다비상의 한 예이다.

 

 

용문석굴(龍門石窟)- 대불의 미소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굴 10중 세번째인 용문석굴(龍門石窟)은 4대 중국석굴로 사라져간 5세기부터 10세기까지의 문명을 돌에 새겨 오늘날까지 보존하고 있다.

 

 493년에 북위(北魏) 황제 효문제(孝文帝)가 도읍을 낙양(洛陽)으로 옮긴 후 축조를 시작한 용문석굴은 그 뒤로 서위(西魏), 북제(北齊), 수(隨)조, 당(唐)조, 송(宋)조, 명(明)조 등 역대에 걸쳐 장장 500여년동안 조성을 계속했다.

 

 그 중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석굴은 주로 북위와 당조 두 시대에 조성한 것이다. 전한데 의하면 당조때는 풍요롭고 즐거운 생활속에서 사람들의 마음이 평화로워 그 때 조성한 보살은 자애로운 얼굴에 즐거운 미소를 띈 "퇴근후의 보살"이라고 한다.

 

 그런 조각들속에 서면 옛날 번화한 당조의 모습이 엿보인다. 온 세상 사람들이 찾아드는 중심의 나라 번화한 당조가 조각물에 구현되어 있다. 용문석굴을 대표하는 루사나(盧舍那) 대불도 당조의 여황제 무측천(武則天, 624~705, 재위: 690~705)의 모양을 본땄다고 한다.

 

 동서 양쪽에 두 산이 마주하고 그 사이로 이수(伊水)강이 흐르는 이 곳은 멀리서 보면 천연적으로 형성된 문을 방불케 한다. 그래서 지명도 이궐(伊闕)로 불리웠는데 수양제(隨煬帝, 569~618, 재위: 604~617 (13년간))가 용문(龍門)으로 개명했다.

 

 용문(龍門)은 마침 수나라 도읍인 낙양의 남쪽에 위치해 낙양성의 성문인 정정문(定鼎門)이 용문과 가까이 있었다. 따라서 수양제는 정정문을 나와 용문으로 향한다는 의미로 이궐이라는 지명을 용문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이수강가의 청석을 밟으며 걷노라면 벼랑에 크고 작은 불단이 즐비한 것이 보인다. 반천년의 세월을 거쳐 용문석굴에는 불단 2100여개, 불상은 10만여기, 비석조각은 3,600여점에 달한다.

 

 불상은 혹은 입상이거나 와상이며 심지어 걷거나 하늘을 나는 모양도 하고 있다. 사람들은 생동한 불상을 보면서 장인들의 기법에 감탄하는 동시에 세월속에서 스러져 가는 불상에 안타까움도 느낀다.

 

 연화동(蓮花洞)에는 머리부분이 없어진 관음상이 있다. 전한데 의하면 이 관음상은 용문석굴에서 모양이 가장 이쁜 불상이라고 한다. 경극(京劇)의 비조 매란방(梅蘭芳)은 보살의 어여쁜 모양을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고 한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보살은 왼손에 정병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총채를 잡아 어깨에 메고 단정한 몸매로 사뿐사뿐 걷는데 바람에 날리는 옷깃이 우아한 품위를 잘 보여준다.

 

 루사나 대불앞의 광장에서는 은은한 고악이 울리는 가운데 화려한 단장의 궁녀들이 나풀나풀 춤을 춘다. 머리를 높이 틀어올린 당조의 여황제 무측천역을 한 배우가 관객들에게 미소를 보낸다.

 

 천여 년전 여황제가 용문석굴에 와서 예불하던 과정을 펼쳐보이는 무황예불(武皇禮佛)공연이다.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여황제는 수차 용문석굴을 찾았고 자신의 화장품 비용을 잘라서 석굴에 돈을 기부하기도 했다고 한다.

 

 고양동(古陽洞)에서는 위나라 비석체의 대표로 공인되는 '용문십이품(龍門十二品)'이 명물이다. 서예에 관심이 있으면 비석에 새겨진 힘있는 필치의 글자를 배울 수도 있다.

 

 그리고 2005년에는 80여년동안 타향의 이 곳 저 곳을 떠돌아다니던 용문석굴의 불상 7점이 용문석굴로 돌아오는 경사스러운 일도 있었다. 그 중 한 불상이 고양동의 불상으로 불상의 몸과 머리가 다시 합쳐 감회를 자아내기도 한다.

 

 용문석굴을 볼때는 오전에 가는 것이 좋다. 그래야 햇빛이 서쪽의 석굴을 비추어 촬영하기 좋다. 용문석굴을 보는 순서는 먼저 서쪽의 석굴을 본 다음 동쪽 산에 올라 석굴전경을 조망하고 동쪽의 석굴을 본 다음 그 산의 향산사를 보는 것이다.

 

 용문석굴은 중국 하남(河南)성 낙양(洛陽)시에 위치해 있다. 이곳으로 가려면 다양한 교통편으로 낙양에 이른 다음 도심 곳곳에서 용문석굴역을 둔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택시를 사용할 경우에는 인민페로 2,30원 정도가 필요하며 택시기사와 가격을 흥정할 수도 있다.

 

 

향산사(香山寺)

 향산사는 용문석굴의 맞은편에 위치, 북위시대인 516년 건립하기 시작하여 이후, 계속 보수와 증축을 하였다. 향산사에는 이하(伊河)를 굽어보는 아름다운 풍광이 있고 옛 향산사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먼저 왼팔을 잘라 달마대사의 제자가 된 그 혜가(慧可)대사가 신광이라는 법명으로 바로 이 절에서 출가한 이야기가 있으며, 무측천이 낙양에서 황제로 등극했을때 주위의 풍경이 아름다운 이곳을 자주 찾아 군신들에게 시를 짓게 하고 가장 먼저 지은 사람에게 금포를 내리기도 하였다는 이야기 등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곳 향산사와 인연이 깊은 사람은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인 백거이(白居易)다. 백거이는 58세가 되던 829년에 낙양(洛陽)에 영주(永住)하기로 결심한 후, 태자보도관(太子補導官)이라는 명목(名目)만의 직책(職責)에 자족(自足)하면서 시(詩)와 술과 거문고를 삼우(三友)로 삼아 지내고 있을 때였다.

 그는 당시 돌보는 이 없어 퇴락한 향산사(香山寺)를 자신의 사재와 주위의 도움을 얻어 증수를 한뒤, 친구인 여만선사(如滿禪師)가 향산사 주지가 되도록 도왔다. 그 후 백거이는 여만선사 등과 함께 승속(僧俗)의 9명이 향산구로시사(香山九老詩社)를 결사하고 그들과 함께 이곳에서 시를 읊조리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다.

 그는 자신의 호를 향산거사(香山居士)로 지었을 만큼 향산사를 좋아했는데,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18년간 문필생활을 하였다.

 원나라 말기에 소실되었다가, 청나라 건륭황제에 의해 중건되었다.

 이전 장개석과 송경령의 피서별장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향산사 아래쪽에 백거이의 무덤이 있다.

 

 

백마사(白馬寺)

 낙양에서 동쪽으로 10km 되는 곳에 있는 중국 최초의 불교사원. 후한시대인 서기 68년에 세운 절이라고 한다.

 중국으로 불교가 전래된 후 최초의 사원이다. 다시말해 백마사로 인해 중국에서 불교가 처음으로 인정받았다고 할 수 있다.

 절의 이름인 백마는 인도에 파견한 일행이 백마(白馬)에 경전을 싣고 돌아온 것에서 유래되었는데, 그것을 뜻하는 듯 절 입구 양쪽에는 송(宋)나라 때 만들어진 두 마리의 백마상(白馬像)이 서 있다.

 입구를 들어서면 정면에는 천왕전(天王殿)이 서 있고, 그 뒤로 대불전, 대웅전 등의 건축물이 늘어서 있다.

 대불전에는 무게 1.25t의 대철종(大鐵鍾)이 있고, 대웅전에는 원(元)대에 조각된 십팔나한상이 안치되어 있다. 또 절의 동쪽에는 13층 정도 되는 약 24m의 제운탑(濟雲塔)이 있는데, 이 탑은 금(金)나라 1175년에 세워진 석탑으로 탑의 앞에서 손뼉을 치면 개구리 울음소리를 닮은 메아리가 되돌아온다고 한다. 산문(山門) 양쪽에는 인도에서 온 두 고승 섭마등(攝摩騰), 축법란(竺法蘭)의 묘가 있다. 절의 동쪽으로 가면 제운탑(齊雲塔)이라는 13층 석탑이 있다. 성당(盛唐)시절에는 1천명이 넘는 승려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텅비어 있다.

 또 봄이 되면 백마사 경내에 모란꽃이 활짝 펴서 이때 이곳을 방문하는 것도 좋다.

 

 

삼국지 관우의 머리가 묻힌 곳 관림당(關林堂)

 관림(關林)은 삼국시대 촉한의 명장 관우(關羽, 관운장(關雲長), 161~219)의 수급(首級: 머리)가 묻혀 있는 곳으로, '관제가'라고도 한다. 마치 작은 언덕처럼 생겼으며 주위의 나무가 무성하여 언뜻 보면 작은 숲처럼 보인다.

 낙양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용문석굴로 가는 도중관림당(關林堂)이 있다. 삼국지의 유비의 명장 관우가 번성에서 오나라 장군 여몽에게 패하여 살해된 후,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

 관왕묘(關王廟), 관림묘(關林廟), 관제묘(關帝廟), 무묘(武廟), 무성묘(武聖廟), 문형묘(文衡廟), 행천궁(行天宮), 협천궁(協天宮), 천존묘(天尊廟), 은주공묘(恩主公廟) 등의 명칭으로 불리며, 주로 한국은 관왕묘(關王廟), 중일은 관제묘(關林廟)가 쓰이고 대만은 행천궁(行天宮)이 주로 쓰인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손권이 관우를 죽인 이후에 유비의 후환이 두려워 목갑에 넣어 낙양의 조조에게 보냈다. 조조는 그 계획을 알아차리고, 예를 다하여 성 남쪽에서 장례를 치뤄 주었다.

 의를 존중하여 희생이 된 관우는 사후 신앙의 대상이 되어 최초로 관제묘가 창건되었다. 관림당에는 장대한 관우상 외에 역대 묘지의 비석 등이 전시되어 있는 전시실이 있고, 건물의 벽면에는 삼국지의 명장면이 묘사되어 있으며 관우가 사용하였다고 하는 3m 정도 되는 칼도 있다.

 삼전의 뒤에는 팔각의 붉은 담으로 둘러싸인 관우의 머리를 묻었다는 무덤이 아직도 남아 있다.

 관우의 묘를 부르는 관제묘는 '관림(關林)'이라고도 하는데, '림(林)' 자는 오직 성인의 무덤에만 붙였던 글자다. 중국 역사상 '림(林)'자가 붙는 무덤은 단 두 개뿐으로, 바로 유학의 시조 공자의 무덤인 '공림(孔林)'과 관우의 무덤인 '관림(關林)'이다.

 관림은 모두 세 곳으로 관우의 목이 안장된 낙양관림(洛陽關林), 그의 시신이 묻힌 당양관림(當陽關林), 그의 고향에 세워진 운성관림(運城關林)이다.

 관우는 중국 역사상 수많은 무장 중에서 순수한 충성심, 의리, 뛰어난 용맹, 기묘한 무예, 당당한 성품 등이 두드러져 사람들에게 신으로 숭배되었으며 공자와 함께 '문무이성(文武二聖)'으로 일컬어진다.

o 개방시간: 08:00 - 17:00

o 입장료: 20위안

o 교통: 53번, 60번 버스 이용

 

 

하남성(河南省) 숭산(嵩山 -1,492m) 소림사(少林沙)

 초조 보리달마가 9년간 면벽 참선한 전설로 유명.

 중국 사찰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곳을 꼽으라면 누구나 소림사를 든다. 전설적이고 신비로운 '소림무술'로 유명세를 세계에 떨치고 있다. 중국의 오악(五嶽) 가운데 중악(中嶽)에 위치 해 있다. 불교 역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1500여 년 전, 북위(北魏) 효문제(孝文帝)가 서역의 고승 불타야사(佛陀耶舍)를 위하여 창건하였다. 소실산(少室山) 산림 속에 있어 소림사(少林寺)라 이름 하게 되었다.

 선종(禪宗) 초조(初祖) 보리달마(菩提達摩)가 중국 건강(建康, 현재의 南京)에서 갈대를 타고 장강(長江)을 건너 숭산(嵩山) 소림사에 도착하여 9년간 면벽 좌선했다는 전설로 유명하다. 달마대사(보리달마(菩提達磨))는 소림사에서 법을 제자 혜가(慧可)에게 전수하면서 중국 선종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

 

 소림사(少林寺)는 중국에서 오악 중 중악이라 불리는 하남성(河南省)의 덩펑 부근 숭산(嵩山 - 1,493m)에 위치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절이다. 무술로 유명하며, 이 때문에 무협소설에서 자주 등장하고 중요하게 다뤄진다. 중국인으로 무술을 사용하는 대머리 캐릭터는 다 소림사 출신이거나 소림사 스님이라고 할 만큼 무술의 대명사이다. 중국 100대 명사중 하나이다.

 

 495년 천축(인도)에서 온 발타선사가 창건하였으며, 이후 서기 527년 천축에서 온 달마대사가 소림사에서 수련하여 돈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달마는 이후 중국 선불교의 아버지로 간주되며, 소림사는 선불교의 본거지로 알려지게 된다. 중국 선종(禪宗)의 대표적인 사찰로 유명하다. 실제로 도교의 중심 도관 중 하나인 무당파(武當派)와 마찬가지의 케이스인데, 스케일 면에서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거대하다. 북송 대에는 이미 승려가 7천 명이 넘어서 이미 숭산에 수많은 말사나 암자를 두어서 공부와 수련 등을 행했고, 소림사 자체는 중앙 총괄본부 정도의 위치로 모여서 회의하는 기능밖에 없었다고 한다.

 

 설화에 의하면 소림 무술이 처음 창시된 시기는 당나라 때로 전설에 따르면 수나라 말기에 이세민이 왕세충과 싸울 때 13명의 소림사 승려들의 도움을 받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이후 이세민은 당나라의 황제가 된 뒤 소림사에 크게 보답했다고 한다. 이후 명나라 초기 사료에 따르면 원나라 말기에 소림사를 홍건적들이 습격해서 불상의 금박을 벗기고, 복장유물을 찾기 위해서 불상을 파괴해서 승려들이 다 도망가고 홍건적의 난이 진압될 때까지 한 명도 못 돌아왔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이때 불목하니로 있던 긴나라왕이 불쏘시개 들고 홍건적을 다 때려잡았다고 하는데 전설은 전설일 뿐.

 

 실제로 소림 무술이 처음으로 언급되는 시기는 명나라 가정제(嘉靖帝, 명 세종 가정제(明世宗 嘉靖帝, 1507~1567, 명 제11대 황제, 재위: 1521~1567) 때부터로, 이때 유대유의 '정기당집', 하양신의 '진기' 등 일부 사료에 소림 무술이 등장하며, 정기당집에 따르면 유대유가 소림 곤법이 창시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소림사를 방문하니 이미 소림사의 무술이 크게 쇠퇴해 있었기 때문에 승려 2명을 군대로 불러서 3년간 곤법을 가르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즉 소림 무술이 이전에도 존재한 건 사실이나, 이전 사료에는 나오지 않았던 소림 무술에 대한 사료들이 이 시기에 들어와서야 갑작스럽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을 볼 때, 실제로 소림 무술이 본격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바로 가정제(嘉靖帝) 때부터일 가능성이 높으며, 중국 무술의 원류라는 이야기도 명확한 근거는 없고 현대에 들어와서 유명해진 소림사 봉술도 이때 이후 정립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소림사의 대표무술이 곤법이 되었고, 소림사는 외부의 무술들을 받아들여서 양적 성장을 하는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소림사가 총괄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각 말사에서 알아서 수련하기에 적당한 것을 골라잡아서 수련했다. 당연히 소림사 사내에서 수련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무협소설에서 소림사만 72종 절예 운운하면서 양으로 때우는 경향이 보여주는 것도 이런 영향이 있기 때문이다.

 

 소림사가 초창기에 무술로 유명해진 계기는 다음과 같다. 승려들이 자체적으로 무술을 익히고 있는 와중에 무술 실력이 뛰어난 걸인, 맨주먹으로 살인을 하고 현상수배당한 범죄자, 낙오된 도적패, 멸망한 나라의 장수 등 온갖 부류의 무술인들이 숨어 살거나 밥을 얻어먹기 위해 이곳에 유입되었고, 그들의 노하우가 소림사에 점점 쌓이게 되어 오늘날의 소림사 무술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러다가 쇠퇴하고 다시 재건되었다. 이렇게 흘러들어간 사람들 중 유명한 것이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난징군구 사령관을 지낸 쉬스유가 있다. 19281차 장풍전쟁 중에는 장제스 편을 들어 참전했다가 펑위샹의 부하 스여우싼에게 승려들이 학살당한 후 소림사가 불타버린 사건이 있으며, 1960년대에도 문화대혁명으로 큰 타격을 입어서 현재 소림사에서 가르치는 무술은 무당파와 비슷하게 대부분 다른 곳에서 끌어온 무술이라는 말도 있다. 물론 후술되어있듯 소림72예와 심의파, 소림곤법천종처럼 소림의 원류 무술도 있긴 하다.

 

 남소림사 문서도 참고할 것. 이쪽은 아예 전설이라고 보면 된다.

 

 숭산 외에 다른 지역에도 소림사라는 이름이 붙은 절이 있는데, 숭산의 소림사를 따라한 것은 아니고 단지 이름이 같은 것일 뿐이다. 그 중에서도 복건성 천주의 소림사는 숭산의 절만큼이나 역사가 오래되었으며 남소림사라고도 불린다고 하나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는 중국 정부의 공인 체육 교습 기관이자 스님들에게 중국 인민해방군 군종 승려 지원 자격이 주어지는 사찰들 중 하나이다 . 그것도 최고 담당자인 주지스님이 정부와 바로 닿아있는 탓에 생각보다 파워가 세다.

 

소림사 탑림(少林寺 塔林)

 소림사 탑림(少林寺 塔林)은 세계문화유산 중의 하나로 사원 서쪽 300m 되는 곳에 있다.

 소림사의 역대 고승들의 안식처 묘지이다.

 각종 탑류가 수림처럼 많이 분포되어 있다하여 예로부터 탑림(塔林)이라 불렸다.

 소림사 탑림 부지는 약 14,000여㎡이다.

 모두 248개의 불탑이 남아 있어 중국에서 현존하는 수량이 가장 많고, 역사가 가장 오래되었으며, 문물가치가 가장 높은 탑림으로 고대 전석건축, 조각, 서법, 회화예술을 모두 한 곳에 담겨져 있다

 '고대 탑예술 박물관'이라 불리기도 하다. 꽃병 사리탑은 인도 스님들의 것.

 1996년 국무원으로부터 국가급 중점 문물보호업체로 공포되었다.

 

 

왕성공원(王城公園)

 시내 중앙에 걸쳐서 펼쳐지는 왕성공원은 주나라의 왕성 유적이었는데, 본래 노동인민공원이라고 불렀다. 공원 안에는 은나라 때의 구정 복제품이 있다. 정(鼎)이란 천자의 상징물로서 두 개의 손잡이와 발이 셋 달린 솥을 말하는데, 높이 4m, 길이 9m 정도 되는 철로 만든 대형 솥이다. 그리고 공원 내에는 2개의 한(漢)대의 묘가 있는데, 전실과 후실에는 색채가 뛰어나고 예술성이 높은 해, 달, 별과 신선고사가 그려져 있다.

 왕성공원은 또한 모란(牡丹)으로도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데, 일명 '모란화성(牡丹花城)'이라고 불릴 정도로 4월 15∼25일 사이의 11일간은 모란축제가 열려 왕성공원을 중심으로 도시에는 모란꽃이 아름답게 핀다.

 

 

낙양박물관(洛陽博物館)

 시 중심 부근에 세워진 3층 건물의 낙양박물관은 낙양 주변에서 출토된 약 800점의 유물이 시대순으로 전시되어 있다. 전체 박물관의 전시품은 2,000점이며, 소장품은 약 50,000점 정도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 당삼채(唐三彩)로 당나라 때의 독특한 유약 광물이 아름다워 눈길을 끈다. 당삼채는 당나라 때 만들어진 사람이나 낙타, 개, 항아리 등의 도자기를 말하는데, 19세기 말 시내 공사현장에서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낙양 고묘박물관(古墓博物館)

 고묘박물관은 낙양시 북쪽교외 망산총(邙山塚)에 위치하고 있는 중국 유일의 고묘박물관으로 전체면적 3만㎡에 건축면적만 7600㎡를 차지하고 있다.

 관내에는 다량의 옛 생활기구와 장식품 등 부장품과 서한, 위진시기의 토용 그리고 당대의 당삼채 등을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은 크게 지하와 지상 두부분으로 나눠져 지상에는 한대 백옥으로 만든 망루와 서막대전(序幕大殿), 도서자료실, 전시실, 사각루(四角樓), 망경정(望景亭)등이 있으며, 지하에는 박물관의 핵심으로 서한부터 북송에 이르기까지 그 시대의 문화를 반영한 전형적 형태의 웅대한 고묘 25개가 자리잡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벽화묘군이 가장 유명하다.

 낙양의 한묘(漢墓)벽화 역사는 매우 오래되어 현재 모두 10개의 고벽화묘가 참관할 수 있는데, 서한의 "타귀도(打鬼圖)" 벽화묘, 서한귀족 복천추(卜千秋) 벽화묘, 동한의 출행도(出行圖) 벽화묘 등이 그것이다.

 

 

당삼채(唐三彩)

 중국 당대에 발달한 도기로 삼채 유약을 사용한 것. 주로 장안, 낙양의 귀족들의 장례용 명기(明器)로 제작되어 묘등에 부장되었다. 도질(陶質)의 소지에 화장을 한 다음 녹, 갈 ,황, 백의 연유로 화려하게 칠하였으며 때로는 코발트의 남유(藍釉)를 칠한 것도 있다. 기형은 용수호, 만년호, 반(盤), 완 외에 각종 인물상과 신상, 진묘수(鎭墓獸), 말, 낙타 등이 다양하게 있다.

 또한 당시의 생활상과 풍속, 서역풍의 의상 등도 당삼채를 통하여 잘 나타내고 있다. 아마도 측천무후 때부터 출현하여 후장(厚葬)의 풍습에 따라 크게 유행했으나, 안록산의 난 이후에는 별로 제작하지 않았던 듯 보인다.

 그리고 당삼채는 발해삼채, 요삼채, 송삼채 등과 페르시아 삼채에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우리나라에도 고려초기에 당삼채와 비슷한 기물이 번조되었으나 성행하지 못하였다.

 

 

백거이의 묘(白居易墓) 백원(白園)

 향산, 용문교 왼쪽 산기슭에 자리잡은 백거이의 묘인 백원은 백거이(白居易, 772~846 (74세))가 생전하던 839년에 중풍으로 고생하면서도 향산에 왕래하며 '취음선생전(醉吟先生傳)' 등의 작품활동을 하던 곳이며, 846년 8월 7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자 무덤을 조성한 곳이다.

 이곳에 들어서면 나즈막한 언덕의 비탈길이 나오고, 여기저기에는 정자와 기념관도 서있다. 경내에서 가장 높은 언덕을 돌아가면 평평한 곳에 백거이의 무덤이 있는데, 직경이 10m안팎, 높이 2.5m쯤 되고 밑둥에는 화강암으로 호석을 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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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덤 앞에는 일주석문과 거대한 백낙천의 사적비, 일본인 불교신자들이 세운 백거이의 시비들이 서 있다.

 백거이는 두보, 이백과 함께 당대를 대표하는 3대 시인의 한사람이다.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 ·향산거사(香山居士)이며 이백(李白)이 죽은 지 10년, 두보(杜甫)가 죽은 지 2년 후에 낙양(洛陽) 부근의 신정(新鄭)에서 태어났다. 5살 때부터 시짓는 법을 배웠다. 27세 때 진사시험에 급제하여 한림학사, 좌습유(左拾遺) 등을 지냈으나 그리 순탄한 관직생활은 아니었고, 나이 50이 넘어서야 항주와 소주의 자사(刺使)를 역임하게 되었다. 이후 이곳 향산에 은거하면서 시와 술로 만년을 보냈다.

 그의 시는 민중시인, 사회시인, 풍유시인 등으로 불릴 만큼 하층빈민의 입장에서 세상에 대한 불공평을 개탄하는 내용이 많다. 그의 풍유시 170여수와 신악부(新樂府) 50수는 평민들의 비참한 생활과 사회적인 모순과 갈등을 인본주의적인 견지에서 파헤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당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테마로 한 '장한가'를 비롯하여 '비파행(琵琶行)', '진중음(秦中吟)' 등을 들 수 있다.

 

백거이의 장한가(長恨歌)

 

 

낙양의 숨겨진 명소

하도락서(河圖洛書) 유적

 신화 속 복희(伏羲)씨가 황허에 떠내려오는 말의 얼굴을 한 악어의 등뼈에서 발견했다는 하도(河圖)가 뤄양에서 출토됐다. 복희씨는 하도를 연구해 주역과 태극, 팔괘를 만들었다. 뤄허에서 락서(洛書)가 적힌 신비로운 거북을 발견한 이는 신화 속 우(禹)임금이다. 우는 락서를 가지고 천하를 다스리는 '홍범(洪範)'을 만들었다. 뤄양시 뤄푸(洛浦)공원에 조성된 하도락서 역사문화광장에 하도락서를 새긴 기념석이 서 있다.

 

이리두(二里頭) 유적

 중국고고연구소가 1959년 발굴한 하(夏)나라 도성의 유적지다.

 

멍진(孟津, 맹진)

 주나라 무왕(武王)이 주지육림(酒池肉林)의 은(殷)을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다는 곳이다. 이곳에서 군사연습을 하고 800여 소국의 제후들을 불러모아 회맹(會盟)을 했다.

 

한광무제(漢光武帝陵)

 보통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황제릉과 다른 유일한 능이다. 황허 쪽으로 머리를 두고 베이망산(北邙山, 북망산)쪽으로 발을 뻗었다. 이유는 지금까지 미스터리다.

 

시위안(西苑, 서원) 공원

 고구려를 침공한 수(隋) 양제(煬帝)의 개인 궁전 현인궁(顯仁宮)의 부속공원. 수양제는 뤄양을 동도(東都)로 삼고 현인궁 서쪽에 정원을 만들었는데 둘레가 200리(약 78km)에 이를 정도로 방대했다. 지금의 시위안 공원은 수나라 당시에 비하면 한 점의 크기에 불과하다.

 

톈진교(天津橋, 천진교)

 수나라 때 세워졌다가 원나라 때 소실된 뤄허의 다리다. 지금의 다리는 1921년 당시 군벌 우페이푸(吳佩孚, 오패부)가 세웠다.

 

 

 

특기사항

 낙양은 현재 중국인들에게는 모란꽃으로 유명한데, 중국인들은 모란을 '꽃중의 꽃'으로 꼽는다.

 수나라 때부터 모란의 재배가 시작되어 당나라 때 급속하게 확산되어 유명해졌다고 한다.

 송나라의 문인 구양순(歐陽詢)는 '洛陽牧丹記(낙양목단기)'에서 '낙양의 흙은 꽃에 가장 어울려 모란이 세상에 제일이다'라고 극찬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낙양의 별칭은 목단성(牧丹城)이다.

 

 

참고

벼슬을 저마다 하면 - 김창업

벼슬을 저마다 하면 農夫(농부)하리 뉘 이시며

醫員(의원)이 病(병) 다 고치면 北邙山(북망산)이 져려 하랴

아히야 盞(잔) 가득 부어라 내 뜻대로 하리라.

 

o 김창업(金昌業,1658~1721)

 숙종 때의 문인으로 호는 노가재(老稼齋)이다.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다가, 정종때 귀양살이를 하다 생애를 마쳤다. 그는 도학(道學)문장을 비롯해 산수화, 인물화에도 능했다.

 

o 북망산(北邙山)

 중국 하남성(河南省) 뤄양(洛陽)시 북쪽에 있는 작은 산 이름이다. 뤄양(洛陽)은 BC 11세기에 주(周)나라 성왕(成王)이 이곳에 왕성을 쌓은 이래 후한(後漢)을 비롯한 서진(西晉) 북위(北魏) 후당(後唐)등 여러 나라의 도읍지로서 역사적으로 번창하였던 곳이다. 그만큼 뤄양에는 많은 귀인명사들이 살았으며, 이들이 죽은 뒤 대개 북망산에 묻히고 있어 이곳에는 한나라 이후의 역대 제왕과 귀인 명사들의 무덤이 많다. 이와 같은 연유로 어느 때부터 인가 북망산이라고 하면 무덤이 많은 곳,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의 대명사처럼 쓰이게 되었고, 지금도 '북망산천(北邙山川)'하면 무덤이 많은 곳,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 '북망산 가는 길'하면 사람의 죽음을 뜻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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