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화호특(呼和浩特, Hūhéhàotè, 후허하오터)

 

끝없는 초원의 나라 호화호특(呼和浩特:후허하오터)

◇ 중국의 것이 되버린 칭기스칸의 땅, 내몽고자치구

 중국 북부의 변방성으로, 중국에서 가장 먼저 성을 형성한 민족자치구다. 내몽고자치구는 북쪽으로 몽골, 러시아와 접하고 있는 1947년 5월에 자치구로 승격한 성으로서 3개 자치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몽고족, 한족, 회족, 만족, 조선족 등이 살고 있으며 인구는 2178만명에 이른다.

 성도는 호화호특시로서 국가가 지정한 민족특수품 생산지이다. 또 해발 1000m로 끝이 보이지 않는 대초원이 펼쳐져 있는데, 내몽고 고원이라 불리는 이곳의 넓게 펼쳐진 초원의 풍부한 자연자원은 내몽고를 중국에서 가장 큰 오대 목장 중 하나로 만들었고, 동부의 대흥안령산지의 빽빽한 산림은 중국 전지역에 목재를 대는 중요한 자원 중 하나다. 내몽고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온대계절풍이 부는 내륙기후의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겨울에는 건조한랭하고, 6월~9월의 여름에는 강우량이 많고 기온이 온량하여 이때가 작물과 목초가 성장하는 시기가 된다. 거대한 방목외에도 내몽고에서 재배되는 작물에는 옥수수, 밀, 사탕무우 등이 있다.

 

 또 현재는 피혁공업, 육류가공, 유제품공업등도 상당수의 규모에 달하고 있으며, 철로교통도 발전해 경포선을 새로 개설했으며, 호화호특을 중심으로 민항사업도 많은 발전을 하고 있다.

 

 13세기부터 몽고족은 역사무대에 등장하여 자원에 못지 않은 풍부한 문화유산을 남겼다. 지금은 이미 한단계 성장해 대외에 개방하여 중국북구변방의 경제를 가속화하는 개방지로 새롭게 등장했고, 풍부한 자원과 문화유산 덕택에 관광지로서도 매우 유명하다. 파란 하늘과, 그 하늘을 가득 채운 흰 구름, 초원, 초원위의 말, 짙게 배인 민족색은 해외의 많은 여행객들을 유혹하고 있다.

 

◇ 내몽고의 수도, 호화호특

 인구 197만 명의 내몽고 수도로, 구이쑤이(歸綏)라는 옛이름이 있다. 인산산맥(陰山山脈)의 남쪽 기슭에 있는 호화호특평원에 위치하며, 남동쪽으로 황하강의 지류인 대해하(大黑河)가 흐른다.

 

 지금의 호화호특이라 불리는 지역은 예전부터 두 지역으로 나뉘어 구성(久城)으로 불리는 곳은 명대(明代)에 완성되었는데, '푸른 도시'라는 뜻의 후허하오터로 불렀다가 후에 귀화성(歸化城)이라 칭하였고, 신성(新城)은 청대(淸代)에 축성하여 쑤이위안성(綏遠城)이라 불렀다. 또 이 두 성을 합한 구이쑤이는 청나라의 몽골 지배의 거점이 되었고, 일본군이 점령하였을 때에는 후화(厚和)라 불렸다.

 

 경포선 철도의 개통 이래에 구성을 중심으로 상업이 번창하였고, 공산정권 성립 후에 지금의 호화호특이라는 이름으로 개칭되었으며, 1952년에 내몽고의 정치·경제의 중심을 이루어 몽고대학을 비롯한 교육기관, 축산관계의 연구소 등이 설치되었다.

 

 또, 이곳은 겨울이 길고 여름이 짧은데, 여름에도 서늘해 호화호특을 여행차 방문하려면 시원한 여름에 가는 것이 좋다. 왕소군묘, 오탑사 등의 명승고적외에 1박 2일 여정의 초원투어도 즐길 수 있어서 호화호특은 몽고의 수도로서 관광도시로의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몽고족의 전통축제인 나다모(那達幕) 대회

 매년 7, 8월 가축이 살찌고 날씨가 쾌청할 때 열리는 축제로 내몽고, 감숙성, 청해성, 신강 등지에 거주하는 몽고족의 전통적인 명절이다.

 

 "나다모(那達幕)"라는 말은 몽골어로 오락, 유희, 연예라는 의미로, 추운 겨울을 지낸 목축민들이 쾌청한 여름이 되면 한데 모여 신령께 제사를 지내고 마음껏 놀면서 풍작을 경축한 것이 매년 이어져 전통축제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또 해방후에는 기(旗)쑤무를 단위로 하여 매년 여름과 가을 사이에 10일가량 거행하는 행사로 되었다가, 나다무초원관광제라는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이때는 몽고족뿐만 아니라 부근의 다른 여러 민족들이 다 함께 명절 옷차림을 하고 하얀색의 몽골포와 형형색색의 막들이 늘어서 있는 나다모대회가 열리는 장소로 모여든다. 이날은 경마, 활쏘기, 씨름, 말씌우기, 달리기, 줄다리기, 축구 등의 경기와 마니회, 원(元)대 궁정연, 징기스칸릉제전과 온천산림, 몽고족풍습관광 및 경제무역, 물자교류, 전통가무 등 공식행사가 있다.

 

 그 중에서 씨름은 몽고족에게 가장 사랑받는 보편적인 운동으로서 민족 특성을 잘 나타내는 경기이다. 이긴 사람에게는 "색음포화(色音布和 - 용감한 씨름선수)"라고 씌어진 휘장을 둘러준다.

 

 또 말타기 시합은 이미 몽고적의 것으로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경기로 몽고족 스스로도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전통이다. 시합이 시작되면 기수(騎手)들은 한 줄로 늘어서 채색의 허리띠와 두건을 동여 매고 출전한다. 이 말타기 시합은 보통의 승마와 달리, 기수들이 전속력으로 달리는 말위에서 여러 동작을 하며 자신의 솜씨를 한껏 뽐낸다. 이렇게 시합하여 제일 먼저 결승점에 도착한 우승자에게는 "초원의 건아(草原健兒)"라는 칭호가 내려진다.

 

 이 밖에 포로던지기, 활쏘기 등도 전통경기로서 유명한데, 이렇게 볼때 몽골족의 전통적인 놀이문화는 우리나라와 매우 비슷하다. 그들의 놀이문화도 우리처럼 씩씩한 기상을 뽐내는 것들로, 과거 광활한 대제국을 건설하고 호령했던 명예와 영광을 그대로 나타내주고 있다.

 

 

징기스칸의 후예 몽골족

 몽골과 중국의 내몽고(內蒙古), 신장(新疆), 청해(靑海), 감소(甘肅), 흑룡강(黑龍江), 길림(吉林)등에 거주하는 몽골인이다. 그 중 몽골인민공화국의 명칭이 있는 외몽골에 약 80만, 중국 내몽고자치구의 약 150만이 그 주류를 이룬다.

 

 총인구가 약 400만으로 외형은 전형적인 몽골로이드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신장은 비교적 작고 단두(短頭)로 얼굴폭이 넓다. 또 쇠고기와 양고기와 우유를 주식으로 하고 있다. 그들은 목축 지대에서는 운반에 편리한 몽고포(蒙古包)에 거주하고, 농촌에서는 한족과 다름없는 단층주택에 살고 있다.

 

 그들은 원래 고원 북동부의 초원과 삼림이 상접한 지대에 살면서 반목반렵(半牧半獵)생활을 하였으나, 9세기 중엽에는 점차 남하하여 전형적인 기마유목민(騎馬遊牧民)이 되어 부족국가를 세웠다. 그 뒤 13세기 초 칭기즈칸이 모든 부족을 통합하여 몽골제국을 건설하였으나, 원나라 붕괴 후 많은 봉건적 제후국(諸侯國)으로 분열하였다.

 

 그때에 티베트에서 황교파(黃敎派) 라마교가 전해져 사회의 상하에 깊이 침투하여 사원은 영지와 영민(領民)을 가지게 되고, 고위(高位)의 라마는 세속영주와 더불어 지배계급을 형성하였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몽골은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21년에는 몽골인민공화국을 세워 농목업을 영위하고 있다.

 

 

호화호특(呼和浩特) 기후(°C)

도시명

구분/월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호화호특

(呼和浩特)

최고평균

-5.3

-1.0

7.0

15.7

22.8

27.2

28.3

26.3

21.3

14.3

4.1

-3.6

최저평균

-18.7

-14.8

-6.4

0.6

7.2

12.6

16.0

14.2

7.5

0.4

-8.2

-16.1

평 균

-12.7

-8.4

0.0

8.0

15.3

20.2

22.5

20.6

14.4

7.1

-2.2

-10.7

강우량mm

2.4

5.5

7.8

14.7

27.9

47.6

100.5

120.6

51.5

20.7

5.9

1.8

 

 

camera.gif

 관광 명소

비운의 미녀 왕소군(王昭君) - 청총(靑塚)

 왕소군(王昭君)의 무덤 청총(靑塚)은 내몽고자치구(內蒙古自治區) 수도 후허하오터(呼和浩特)시 남쪽 9㎞ 지점에 있다.

 

면적이 약 3만㎡

높이 33m

 

 묘역 입구에는 흉노박물관이 조성되어 있고,  왕소군의 생가와 마을 재현햄두었다.

 진입로 양족에 동물들의 석상이 즐비하게 서 있다.

 진입로 끝부분에는 1987년에 주조된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와 왕소군의 말을 탄 청동 거상(소군상)이 다정하게 서 있다.

 무덤앞에는 좌우로 2개의 비각이 세워져 있고 앞에는 비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산같은 무덤위로 올라 갈 수 있고, 정상에는 '대덕(大德)'이라 세겨진 비석이 정자 안에 서 있다. 뒷면에는 왕소군이 조각되어 있.다

 

 이렇게 유명한 왕소군의 묘는 사실 어이없게도 말만 무덤이지, 그 규모가 너무 커 작은 동산만 하고 무덤 위에는 정자가 세워져 있어 정말 그의 무덤인지 의심이 생긴다.

 또 어떤 사람은 중국 내에 왕소군 무덤이 여러 군데에 있다고 해서 이 묘의 정당성도 믿을 수가 없다. 그러나 가을이 되어 모든 풀들이 누렇게 변해도 이 무덤의 풀만은 파랗게 그대로 있어서 '청총(靑塚)'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두보(杜甫)가 후일 "푸른 묘만 홀로 남아 황혼을 바라고 있네"(獨留靑塚向黃昏)라는 시구를 남겼다.

 

▲ 거장의 일본화(巨匠の日本畵) 야스다 유키비코(安田靫彦) - 영원의 여성상(永遠の女性像) 왕소군(王昭君)

 야스다 유키비코는 역사적인 중국 여성도 그렸는데 왕소군이 대표적이다. 왕소군(王昭君: BC 54?~BC 19 (약 36세))이 누군가. 중국 역대 4대 미녀에 들어가는 절색, 오죽하면 낙안(落雁)이란 단어가 생겼을까. 날아가던 기러기가 그녀의 미색을 보고 놀라 땅으로 떨어졌다는 그 왕소군이다.

 

 왕소군(王昭君)이 궁녀로 발탁되었다. 용모도 아름답고 행동도 단정했으나 궁에 들어온 지 3년이 지나도록 황제 눈에 띄지 못하였다. 궁중 화가 모연수(毛延壽)는 황제가 후궁 간택 자료로 활용하도록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뇌물을 주면 예쁘게 그리고 그렇지 않으면 밉게 그렸다.

 

 뇌물을 바치지 않아 미운 얼굴로 그려져 성은을 입을 수 없었던 왕소군 마침내 팔자 바꿀 기회를 잡는다. 예나 지금이나 중국은 서북쪽 변방 이민족을 머리 위 화로로 여긴다. 당시 효원 황제(孝元皇帝, 한 고종 효원황제 유석(漢 高宗 孝元皇帝 劉奭), BC 76~BC 33 (43세), 전한 제11대 황제, 재위: BC 48~BC 33 (15년간))가 흉노를 제압해나가자 마지막 남은 강자 후한예(呼韓耶) 겁먹고 한나라 수도 장안(長安)으로 달려왔다. 황제에게 엎드려 앞으로는 덤비지 않고 말 잘 듣겠으니 한나라 여자를 아내로 삼게 해달라고 청한다.

 

 황제는 기분 좋았다. 변방의 골칫거리가 해결됐고 여자는 많았으니까.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한 왕소군이 내가 시집가겠노라고 손을 들었다. 얼굴도 성도 모르던 궁녀가 손을 들었으니 가상한 일이었다. 떠나기 전 환송회를 열고 술 한잔하며 왕소군의 하직 인사를 받은 황제는 거의 기절할 뻔했다. 이런 절색이 어째서 내 눈에 안 띄었단 말인가?

 

 이 그림이 바로 열아홉 살 처녀 왕소군이 떠나기 전 성장을 하고 황제 앞에 선 모습이다. 그 시선에 화공에게 뇌물을 주지 않는 꼿꼿함, 내 인생은 내가 개척하겠다는 결기, 미래에 대한 두려움 등등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어떤 화가는 살아있는 사람의 초상화를 그리기 전 대상의 성격, 습관 등을 알아내기 위해 몇 달씩 같이 지내기도 한다는데 사진도 없고 본적도 없는 사람을 그리기는 얼마나 어려울까. 결정적인 순간의 포착이 중요할 터인데 야스다는 시집가기 전 잘 차려입은 모습을 생각해낸 것이다. 여자의 일생 중 가장 멋있고 예쁠 때가 바로 그 순간이다.

 

 왕소군(王昭君)을 떠나보낸 황제, 모연수를 족쳐 전말을 파악하고는 그를 능지처참하였다. 그 충격이었는지 효원 황제는 15년간 재위한 43세 황제는 그해에 세상을 떠났다.

 

 왕소군(王昭君)은 시집간 지 삼 년 만에 호안야선우(呼韓邪單于: ?~ BC 31, 재위: BC 58~BC 31)가 죽은 후 왕소군(아들 1명, 24세)은 한나라로 가려했으나 한 성제(孝帝, 한 통종 효성황제 유오(漢 統宗 孝成皇帝 劉驁), BC 51~BC 7, 전한의 제12대 황제, 재위: BC 33~BC 7)는 흉노 풍습을 따르라고 거절했다. 흉노의 풍습은 왕이 죽으면 그 본처의 자식인 다음 후계자가 될 왕과 결혼하는 풍습에 따라 왕소군은 호한야의 배다른 큰아들 복주루약제선우(復株累若鞮單于: ?~BC 20) 왕과 결혼하여 다시 딸 둘을 낳았으며, 60여년 동안 한나라와 평화가 유지되었다.

 

 그녀가 낳은 아들 이도지아사(伊屠智牙師)는 나중에 흉노의 우일축왕(右日逐王)이 되었다.

 

 이후 흉노의 문화가 발달하고 한나라와 교류가 확대되면서 태평성대가 지속되었다. 왕소군의 덕이었다. 이러한 스토리가 있는 왕소군을 중국의 시인 묵객들이 그냥 놔 둘리 없다. 그중 시선(詩仙)으로 불리는 이태백이 쓴 시 한 편을 감상해보자. '왕소군2수(王昭君二首)' 중 첫째 편이다.

 

* 왕소군2수(王昭君二首) - 이백(李白)

 漢家秦地月(한가진지월) 流影照明妃(유영조명비)

 한나라 장안에 뜬 달 흘러 흘러 왕소군을 비추는데

 

 一去玉關道(일거옥관도) 天涯去不歸(천애거불귀)

 옥문관으로 한번 나선 발길 땅끝으로 가더니 돌아오지 못하네

 

 漢月還從東海出(한월환종동해출) 明妃西嫁無來日(명비서가무래일)

 여기 달은 다시 동해에 솟는데 서쪽으로 시집간 당신 올 날이 없구려

 

 燕支長寒雪作花연지장한설작화) 蛾眉憔悴沒胡沙(아미초췌몰호사)

 연지산 추위에 눈꽃은 피었는데 고운 모습 시들어 북방 모래에 묻혔네

 

 生乏黃金枉圖畵(생핍황금왕도서) 死留靑塚使人嗟(사류청총사인차)

 살아선 돈 없어 그림을 망치더니 죽어선 청총에 묻혀 한숨짓게 하는구려

 

왕소군(王昭君)에 대하여...

 왕소군(王昭君)은 중국 전한(前漢)말 원제(元帝)의 궁녀로 이름은 장(嬙), 자는 소군(昭君)이다. 흉노와의 친화정책을 위해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에게 강제로 시집을 갔고, 그가 죽자 흉노의 전통에 따라 그의 아들에게 재가하여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이 이야기는 점차 전설화되어 후세에 널리 퍼졌고 시와 희곡의 소재로 쓰이기도 했다. 그 내용은 서경잡기(西京雜記)에 나와있는데, 억울하게 흉노에게 시집가고 비운의 삶을 산 그녀의 역사적이고도 드라마틱한 슬픈 이야기는 중국이 오랑캐들을 달래기 위한 화친정책 때문에 생긴 비극이라 할 수 있다.

 

왕소군(王昭君, BC 54?~BC 19 (약 35세))의 무덤을 도굴하지 못하는 이유

 BC 33년 정월, 흉노의 왕은 한나라에 와서 한인을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요구했다. 비록 당시 한나라의 후궁에서 삼천 명의 비빈이 있었지만, 누구도 선뜻 흉노에 시집가려고 하지 않았다. 이 일을 책임진 대신은 매우 조급해 하였는데, 마침 한 궁녀가 의연하게 흉노에 화친을 가겠다고 나섰다. 이 궁녀가 바로 왕소군으로 매우 예쁘게 생겼고 아는 것도 많았다. 한원제(漢元帝, 한 고종 효원황제 유석(漢 高宗 孝元皇帝 劉奭), BC 76~BC 33 (43세), 전한 제11대 황제, 재위: BC 48~BC 33 (15년간))는 왕소군을 흉노의 왕에게 주었는데, 왕소군과 고별할 때에야 한원제는 그의 아름다움과 단정함을 깨닫게 되었지만 후회해도 어쩔 수 없었다.

 

 왕소군은 흉노에 시집을 간 후 흉노 백성들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그는 흉노 지역에 많은 중원의 문화를 가져가 보급하여 낙후했던 흉노가 점차 번영하기 시작했다. 왕소군의 화친은 한나라와 흉노가 화목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하였고, 흉노 백성이나 중원의 백성 모두 왕소군을 좋아하였다. 그래서 왕소군이 죽은 후 많은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그의 무덤 앞에 가서 제사를 지냈고, 제사를 지낼 때마다 황토를 쌓아올려 결국 무덤이 매우 크게 되었다. 높이 33m.

 그럼 이렇게 규모가 큰 왕소군의 무덤은 왜 도굴을 당하지 않았을까?

 가장 큰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왕소군이 흉노와 중원 백성들에 대한 공헌을 감사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쉽게 도굴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왕소군의 무덤을 파헤쳤다면 백성들의 분노를 자아내기 때문에 누구도 감히 왕소군의 무덤을 도굴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다음 이유는 도굴꾼에 불성문의 규정이 있었다고 하는데, 왕소군이 생전에 좋은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그의 무덤을 도굴한 사람은 후손 대대가 불행할 것이라는 저주이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왕소군의 무덤은 도굴되지 않았는데, 결론은 왕소군이 생전에 좋은 일을 많이 하여 백성들에게 긍정적으로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두보는 '영회고적(咏怀古迹)'에서 왕소군에 대한 시를 썼는데, 제왕이 왕소군을 알아보지 못하여 흉노로 보냈기 때문에 매우 비통하다는 뜻을 나타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보았을 때 왕소군이 흉노로 간 건 한나라의 입장에서 아쉬울 수 있겠지만, 먼 타향으로 가서도 백성을 위해 좋은 일을 한 왕소군의 일생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아름다운 탑신이 있는 사원 오탑사(五塔寺)

 호화호특시의 남서쪽, 왕소군의 묘로 가는 길에 아름다운 모양의 오층탑을 볼 수가 있다. 원래 금강좌사리보탑(金剛座舍利寶塔)이라는 이름의 오탑인데, 이탑이 있는 곳이 오탑사이고, 이곳의 본래 이름은 자등사(慈燈寺)이다.

 지금은 절의 건물이 모두 사라지고, 이 오탑만 남아 있다. 1727년에 세워진 이 탑은 이름 그대로 다섯 개의 탑으로 구성되어 있다. 높이 16.5m인 이 탑의 특징은 탑에 새겨진 부조불상이 1,560 존위나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천불탑(千佛塔)이라는 별명도 있는데, 그 부조불상의 모습이 그 어느 하나 같은 것이 없다.

 또 가까이 보면 새겨진 보살의 자태도 너무나 아름답고 생동감 넘친다. 오탑사의 북쪽으로 벽을 돌아 접하고 있는 곳에는 '몽문천문도석각'이라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몽고어로 새겨진 석각이 있다. 역사적 연구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이것은 북극과, 남극, 별좌, 행성 등 우주의 모습을 새겨 놓았다.

 

 

◈ 라마교 사원, 대소사(大召寺)

 대소사는 내몽고 호화호특의 옛성 내에 위치하고 있다. 몽골어 명칭은 '伊克召(이극소/이크샤오)'로 큰사찰(大廟)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명나라때 처음 지어졌으며, 호화호특에서 가장 큰 라마교사찰이기도 하다.

 몽고에서는 보기 드물게 후오포(活佛-라마교의 수장)가 없는 사찰인데, 청나라때 강희황제가 사찰에 며칠 머무른 적이 있어, 황제에 대한 존경을 나타내기 위해 승려들이 후오포(活佛)의 전승 규정을 없앴다고 한다.

 사원의 건축양식을 살펴보면, 대전(大殿)은 흔히 볼 수있는 장한(藏漢)식 라마사원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이외의 부분은 전통적인 중국 사찰의 양식을 활용하여 지어졌다.

 대전 내에는 은으로 주조한 불상이 모셔져 있어 '은불사(銀佛寺)'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대소사 내에는 많은 문물들이 소장되어 있어 몽고족 역사 연구에 진귀한 자료로 사용되고 있다.

 

 

미대소(美岱召)

 미대소는 라마교가 몽고에 전입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찰로 명나라 경륭(慶隆)년간에 지어졌다. 내몽고의 포두(包頭)시에서 동쪽으로 8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산과 물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주변환경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들인다. 건축양식에서도 독특한 풍격을 보여, 몽골과 신장 지역의 건축양식이 융합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총 면적은 4000㎡로 사원 내에 다량의 벽화가 모셔져 있다. 대웅보전 내에 석가모니 역사벽화와 몽고 귀족의 불상 앞에서 절하는 모습을 묘사한 벽화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이러한 벽화들은 명대 몽고역사와 불교사, 건축사, 미술사 연구에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징기스칸(成吉思汗 陵)

 징기스칸릉은 포두(包頭)에서 남쪽으로 180km 떨어진 곳에 있는 어얼두오치시의 어진호로치 경내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의 릉은 1954년에 지어진 것으로 중국의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중 하나이다. 능묘의 규모는 징기스칸의 인생처럼 매우 웅대하면서 위엄있다.

 능묘의 주건축은 몽고식 이동천막인 파오의 형태를 한 대전(大殿)으로, 정전(正殿)내에는 높이가 약 5m 정도의 징기스칸 상이 있으며, 궁전에는 황색단자로 된 지붕덮개가 있는 파오가 있다.

 서전(西殿) 안에는 징기스칸이 당시 사용했던 병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매년 음력 3월 21일에는 정전(正殿)에서 춘제(春祭)의식이 거행되어 이날 하루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손님들에게 흰색이나 황색으로된 비단천을 주고 향을 피우고 제물을 드려 제사를 지낸다. 의식이 끝난 후에는 말경주, 활쏘기, 씨름 등 민속 놀이를 즐긴다.

 

 

거근타라(格根塔拉) 대초원

 거근타라 대초원은 호화호특에서 북쪽으로 약 15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중국 국가여유국으로부터 최고등급의 4A급 풍경구 평가를 받았다.

 '거근타라(格根塔拉)'는 몽고어로써 여름군영(여름에 방목하는 곳)이라는 뜻을 갖고있다. 이곳의 지형은 남고북저(南高北低)로 평탄한 대지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으며 물과 풀이 풍부하여 옛부터 천연목장으로 알려져 왔다. 여행객들은 이곳에서 여유롭게 대초원을 여행하면서, 말경주나 낙타경주, 씨름 등을 구경하거나 직접 말과 낙타를 타고 활을 쏴볼 수 있다.

 

 

고대문명의 발상지 황하(黃河 : 황허)

 전국 총면적의 7.8%를 차지하는 중국에서 두번째로 큰 강으로(전체 길이 : 5,464㎞), 청해성 바얀하르산(巴顔喀喇山) 북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사천성·감숙성·영하회족자치구·내몽고· 산서성·섬서성·하남성·산동성 등의 9개 성과 자치구를 거쳐 마지막에 발해로 유입된다. 중국 지형의 현저한 특징인 서고동저의 형태로 서에서 동으로 4000m 이상의 청장고원·내몽고고원· 황토고원· 황준해평원이 가로놓여 있다. 동부지역의 평원은 수로가 지면보다 높에 매년 홍수의 위험속에 있다.

 

 그러나 이곳의 토지가 비옥해 풍부한 지하자원이 매장되어 있어서 중국 고대문명이 이곳에서 발상되었으며 중화민족의 요람이라고 불린다.

 

 황하유역은 연평균 경류량이 580억㎥로 물이 적고 토사가 많으며, 물과 토사의 근원지가 다르고 지형의 차이가 극심하다. 황하는 일반적으로 세 개의 구간으로 나뉘는데, 서쪽의 발원지로부터 하구진(河口鎭)까지를 상류, 하구진에서 도화욕(桃花欲)까지를 중류, 도화욕 이하를 하류라 한다. 상류는 총길이가 1,368km로 지금의 내몽고 퉈커퉈현(托克托縣)까지이며 또한 발원지구간·협곡구간·충적평원의 3개 부분으로 나뉜다. 황하 중류는 하구진(河口鎭)에서 하남성 정주(鄭州)의 도화욕까지로, 진섬(晋陝)협곡 사이를 북에서 남으로 흐른다. 이곳은 황하 홍수와 토사의 주요 발생지로 수심이 깊고 하폭이 좁아 파도가 센 것이 특징이다. 반면 하류는 강폭이 넓고 평탄하며 수로가 지면보다 높은 지상하(地上河)를 이룬다.

 

 황하는 강수량의 계절적 분포가 고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경류의 변화도 크므로 유량이 극히 불안정하다. 여름과 가을의 경류량이 연경류량의 70∼80%이고, 겨울은 10%, 봄은 15%를 차지한다. 이때문에 봄과 여름에는 가뭄에 늦여름과 가을에는 홍수의 재해를 입는다. 역사적으로 여러차례 홍수의 피해를 입어왔고, 3년에 두번꼴로 제방이 터지던 상황이었다. 지금은 황화유역의 꾸준한 수리공사를 통해 많이 나아지고 있다.

 

황하 문명

 황하강의 중류와 하류 지역에서 발생한 문명으로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가 나타난 은나라, 철기가 거의 완전히 보급된 전한시대(前漢時代)까지를 지칭한다. 중국의 문명이 큰 강인 양자강이 아닌 황하강에서 발상하게 된 것은 기온이 높고 강수량이 많아 습하며 삼림이 무성한 양자강에 비해 황하는 대륙성 기후로 건조하면서 비옥한 황토가 퇴적하여 황토지대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허강 유역의 신석기 문화는 양소문화와 그로부터 발생한 용산문화 두가지로 구분된다. 양소문화는 칠무늬 토기로 대표되며 황하상류의 하남소 양소 일대에서 비롯된 문화이며, 용산문화는 검은 간 토기가 대표적인 유물로 그 중심지는 산동성의 용산이다. 이어 고대문화는 중국 최초의 왕조인 은(殷)나라로 이어지는데, 이때 발견된 것이 갑골문자와 정교한 청동기이다. 이어 춘추시대에 들어서 철기를 사용하며 농업혁명이 일어났다. 이때부터 우경(牛耕)이 시작되었으며, 수리공사도 이루어지게 되었다. 농업이 발달함에 따라 부가 축적되고 화폐경제가 발달하면서 청동화폐도 발생하게 된다. 경제의 발전은 당연 문화의 발전도 촉진하게 되었고, 발전은 진(秦)과 전한(前漢)시대까지 이어졌다.

 

 

초원투어

 초원투어는 몽고여행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몽고역에 도착하면 어디선가 수많은 여행사의 직원들이 몰려와 초원투어에 대해 설명하며 흥정하기 시작한다. 보통 2박 3일 코스를 기본으로 4명 정도가 한 팀을 이루어 가이드와 운전사, 숙박, 교통비 등을 포함한 패키지 상품을 선택하게 된다.

 

 너무나 넓은 사막과 초원을 가야하므로 이렇게 패키지를 이용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가기란 불가능하다.

 호화호특역에서 초원까지는 보통 봉고차로 4시간 정도가 걸리고, 초원에서 1시간~3시간 정도 말을 타고 본격적으로 초원투어를 한다. 숙박은 몽고의 전통가옥인 빠오에서 하게 되며, 그들의 전통음식인 양고기와 말젓으로 만든 차를 맛볼 수도 있다.

 

 운이 좋으면 저녁에 몽고족들의 전통춤과 노래를 들을 수도 있고, 전통혼례식을 구경할 수도 있다. 초원에서의 투어가 끝나면 초원의 반대쪽 사막으로 6시간 정도를 가게 된다. 역시 파오(包: 몽골인과 북방 유목민이 옛부터 사용해온 원형설계의 조립가옥)에서 머물게 되며, 사막에서는 낙타를 교통수단으로 이용하게 된다.

 

 또 특이하게 사막리프트를 타볼 수도 있고, 사막의 특징인 밤의 추위를 이기기 위해 몽고의 전통술인 몽고왕도 몽고인의 환영의 의미로 맛볼 수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초원, 그 위에 한가롭게 다니는 양떼. 그 초원위에 누워 바라보는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 그리고 고요하고 멀기만한 사막. 이 모든 것들이 몽고를 잊지 못할 곳으로 만들어 주는 특별한 추억거리들이 될 것이다.

 

 

 

스타투어(Star Tour)

☎:(02)723-6360

http://www.startour.pe.kr

블로그 : 스타투어

E-mail: startour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