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康有爲(강유위:1858~1927)와 梁啓超(양계초:1873~1929) - 혁명보다는 개혁을

 

강유위(康有爲)가 추진한 정치 운동 무술변법(戊戌變法)

 아편전쟁을 전후로 중국사회에 몰아닥친 변화는 전제왕정의 위기로 발전했다.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태평천국운동으로 대표되는 밑으로부터의 혁명과, 강유위 등이 주도하는 위로부터의 개혁이 각각 별도의 흐름을 형성했다. 양자 모두 그 자체로서는 실패했지만, 궁극적으로 중국이 2천년의 전제왕정을 마감하고 새로운 공화제 사회로 나가는데 큰 몫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단순한 실패로 기록될 수는 없을 것이다.

 

 강유위는 1858년 廣東(광동)의 사대부 집안데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신동이라는 소문이 났을 정도로 학문적 자질이 뛰어났다. 그는 1888년 수도 북경에서 과거를 치르는 기회를 이용하여 수도 북경에서 과거를 치르는 기회를 이용하여, 이른바 '變法(변법)'등 근본적 개혁을 주장하는 상소문을 황제에 올렸다. 물론 그의 상소는 황제에게 전달되지 못한 채 중도에서 사라졌지만 그 사회적 파장은 대단히 컸다. 이후 그는 廣州(광주)에 정착하여 개혁을 위한 교육활동을 전개했다.

 

 갑오년(1894년)의 청일전쟁에서 패배하자 그 여파가 중국사회를 강타했다. 무엇보다고 조공국에 불과하다고 믿어왔던 일본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충격에서 강유위를 중심으로하여 1895년 북경에 과거를 응시하러 올라온 선비들이 연명으로 '변법'을 주장하는 상소문을 다시 올렸다. 모두 1만7,8천자에 이르는 상소문에 응시자 1천3백여명이 연서하여 집단으로 상소문을 제출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公車上書(공차상서)'였으며 변법자강운동의 첫 출발이었다.

 

 이때 강유위와 함께 개혁을 주장한 인물중 하나가 양계초였다. 그는 1873년 광동의 하층 지식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과거에 응시했던 그는 강유위가 운영하던 학당에서 개혁사상을 키웠다. 이로서 강유위는 양계초라는 든든한 협력자를 구할 수 있게 됐다.

 

 양계초는 약관 23세로 개혁사상의 전도지인 '時務報(시무보)'를 1896년 上海(상해)에서 창간했다. 이 잡지를 통해 "변화하고자 해도 변하고, 변화하고자 하지 않더라도 변한다"는 논리로 변화의 필연성을 강조하고, 인도 등의 식민지로 전락한 것은 모두 '옛것을 지킬 뿐 변화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이전의 1860년대와 1870년대의 李鴻章(이홍장: 1823~1901)등이 추진했던 洋務(양무)운동과 같은 개혁으로는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던 중국의 지식인들은 아주 빠른 속도로 강유위와 양계초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마침내 1898년 황제는 이들 두 사람이 주축이 된 변법파의 주장을 타당하다고 인정하고 그들을 대폭 기용했다. 이것은 이른바 '百日維新(백일유신)'의 시작이다.

 

 백일유신은 정확히 103일만에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좌절의 가장 큰 요인은 위로부터의 개혁을 지지할 세력이 지배층 내부에서조차 확고하게 자리잡지 못한 채, 오직 황제 한 사람만의 후원으로 급진적인 개혁을 밀고 나가기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개혁파는 반대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력을 전혀 갖추지 못했다. 결국 西太后(서태후)등 개혁반대세력의 병력동원에 백일유신은 어이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때 많은 개혁가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지만, 강유위와 양계초는 일본으로 도망갈 수 있었다. 이들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노선을 밟으면서 끈질기게 변혁운동을 추진하지만 끝내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무술변법(戊戌變法)을 추진한 강유위(康有爲, 캉유웨이, 1858~1927)

 캉유웨이(康有爲, 강유위, 1858년 3월 19일 ~ 1927년 3월 31일)는 중국 청나라 때부터 중화민국 때까지의 사상가이자 정치가이다.

 본명은 강조이(康祖詒), 자(字)는 광하(廣廈), 호는 장소(長素), 명이(明夷), 경생(更生), 서초산인(西樵山人), 유존수(游存叟), 천유화인(天游化人)이다.

 량치차오(양계초)와 함께 중국 근대 정치사상가로 분류된다.

 

 청나라 말기의 정치학자로 광서제의 원조를 바탕으로 입헌군주제를 기조로 하는 변법 개혁을 추진했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통해 청나라의 개혁 방향을 설정하고 무술변법(戊戌變法)을 지도했으나 위안스카이(袁世凱 원세개, 1859~1916)의 배신으로 실패했다.

 주요 저서로는 '신학위경고(新學僞經考)',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 등이 있다.

 

 

 1898년 6월 11일 청나라의 제11대 황제 광서제(光緖帝, 1871~1908 (37세), 재위: 1875~1908 (33년))는 '명정국시(明定國是)' 조서를 발표했다. 서구 열강들의 침탈 속에 위기감을 느낀 광서제가 '서양의 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부국강병을 꾀한다'는 변법을 실행한다는 조서였다. 이 '무술변법'의 중심은 바로 강유위(康有爲, 캉유웨이)였다. 그러나 보수파의 반발과 개혁파 내부의 분란으로 인해 이 개혁은 103일 만에 좌절되고 만다.

 

 강유위는 1858년 남해현(南海縣) 일대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자는 광하(廣夏), 호는 장소(長素)다. 그는 장서가였던 큰할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수많은 책을 접했다.

 당나라 시대의 시 수백 수를 암송하고 여섯 살 때부터 유가 경전을 배울 정도로 총명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종조부 강의수(康懿修)의 영향으로 유가(儒家) 경전(經典) 외에도 '자치통감(資治通鑑)', '삼국지(三國志)', '명사(明史)' 등 다양한 서적들을 섭렵했다. 1876년 열아홉 살에 그는 조부의 강요로 과거에 응시했으나 팔고문(八股文, 8개의 짝으로 이루어진 한시) 문체에 취약했기 때문에 낙방하고 말았다. 그는 이해 세 살 연상의 장운주(張雲珠)와 결혼했다. 이후 그는 정부인 외에도 양수각(梁隨覺), 하전리(何旃理), 이치오카 쓰루코(市岡鶴子), 요정징(廖定徵), 장광(張光) 등 5명의 첩을 들여 평생 6명의 부인을 두었다.

 

 1879년 강유위는 홍콩을 방문했다가 처음으로 서양의 사상을 접하고 그 후 2년간 위원(魏源)의 '해국도지(海國圖志)'를 보며 서양에 대해 공부했다. 하지만 그가 과거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1882년에 그는 향시에 응시하기 위해 북경으로 향했고, 돌아오는 길에 상해에 들렀다. 그곳에서 그는 서양 서적을 대량 구입하여 서학 연구에 몰두했으며, 1883년에는 미국인 선교사들이 간행했던 잡지인 '만국공보(萬國公報)'를 구독하며 세계 정세를 연구했다.

 

 1884년에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같은 해 8월 베트남의 종주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청불 전쟁의 패배 원인을 분석한 '인류공리(人類公理)', '강자내외편(康子內外篇)' 등을 저술했다. 또한 그는 장흥학사를 열어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이때 양계초(梁啓超, 량치차오), 진천추(陳千秋) 같은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이 시절 '신학위경고(新學僞經考)'를 집필해 서한 말에 발견된 '고문상서'가 공자의 경전이 아니고 왕망의 찬탈을 합리화한 유흠(劉歆)이 위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는 않지만, 신성불가침으로 여겨져 왔던 유가의 경전을 위경이라고 선포한 그의 대담성만은 인정할 만하다. 당시 '신학위경고'는 청나라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고, 그는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의 유명세를 타고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 장흥학사가 문전성시를 이루자, 그는 자리를 옮기고 만목초당이라고 이름 붙였다. 1892년 그는 제자 양계초와 진천추의 도움을 받아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의 집필을 시작했다.

 

 강유위가 고향에서 제자를 가르치고 저술에 힘쓸 무렵 조선에 대한 영향권을 놓고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메이지 유신으로 성공적인 근대화를 이룬 일본이 승리함에 따라 청나라는 2억 냥의 배상금과 요동 반도, 타이완, 팽호 열도 할양, 통상상의 특권 부여 등 굴욕적인 내용의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했다. 이 일이 알려지면서 청나라의 지식인들은 분노했고, 마침 1895년 5월 2일 과거가 열리자 강유위와 양계초는 조약 거부와 서안 천도를 통한 항일 투쟁, 군대 양성, 변법을 통한 부국강병책, 전면적인 국정 개혁을 골자로 하는 상소문을 작성해 과거 응시자들에게 서명을 촉구했다. 이를 '공거상서(公車上書)'라고 부른다. 공거상서 사건은 출사하지 않은 선비는 정치에 참여할 수 없다는 청나라의 관례를 깬 것으로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공거상서는 상서를 담당하는 도찰원(都察院)의 거절로 광서제에게는 전달되지 못했다.

 

 강유위는 1895년 진사에 합격하여 공부주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출사하지 않고 '부국(富國), 양민(養民), 교사(敎士), 연병(練兵)' 등의 자강책(自强策)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렸다.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신문 '만국공보'를 창간하고, 강학회(强學會)를 조직하여 백성과 지식인들을 계몽하고자 했다. '만국공보'는 2년 뒤에 '중외기문(中外紀聞)'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서구의 정치와 풍속 등을 중점적으로 다루게 되었다. 또한 그는 상해에도 강학회를 설립해 서양 서적을 번역하고, '강학보(强學報)'를 창간했으며, 더불어 각지에 학회를 설립하고, 정치학교를 개설하는 등 변법 정신을 전파하고자 했다.

 

 1897년 강유위는 광서제에게 변법의 필요성에 대한 상서와 함께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연구한 '일본변정고(日本變政考)'와 러시아 표트르 대제의 개혁을 다룬 '아피득변정기(俄彼得變政記)'를 바쳤다. 또한 북경에서 '보국(保國, 영토 보존), 보종(保種, 민족 보존), 보교(保敎, 유교 보존)'의 지침을 내세운 보국회(保國會)를 결성했다. 이로 인해 그는 비로소 광서제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그의 변법책이 당시 서태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개혁 정치를 추구하고자 하던 광서제의 의지와 일치한 덕분이었다.

 

 1898년 강유위는 광서제의 명령으로 총리아문에 입시하여 변법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변법의 기본 강령을 제시한 '응조통주전국절(應詔統籌全局折)'과 변법을 국시로 삼을 것을 촉구하는 상서를 연이어 올렸다. 더불어 그는 어사 양심수(楊深秀)와 한림원학사 서치정(徐致靖)에게도 변법 시행을 촉구하는 상서를 올리게 하여 변법의 실행을 서둘렀다. 마침내 1898년 6월 11일 광서제는 명정국시의 조서를 발표하여 변법을 선포했다. 무술변법의 시작이었다.

 

 장경행주에 임명된 강유위는 광서제에게 이상적인 개혁 방안들을 상서로 올렸다. 그는 제도국의 설치, 팔고문 폐지, 개혁파 관리의 등용, 사민(士民)의 상서(上書) 허용, 상업 진흥, 경사대학당(京師大學堂)의 신식학교 설치와 황제의 단발, 자유로운 의복 제도, 연호를 개원(改元)으로 수정할 것,상해 천도 등을 주장했다. 1892년에 편찬을 시작해 막 끝낸 '공자개제고'도 광서제에게 바쳤다. '공자개제고'는 광서제의 과거제 폐지에 대한 결심을 굳게 하고, 신사층(유교적 교양을 소유한 지식인)의 열렬한 지지를 얻었지만, 반대로 보수파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실제로 개혁 운동의 핵심인 제도국 설치는 진전을 보이지 않았다.

 

 무술변법이 시작될 때부터 이를 탐탁지 않아 했던 서태후는 광서제가 자신을 무시하고 변법에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자 그를 폐위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자신의 조카 영록(榮祿)을 직례총독에 임명하여 뒷날을 대비했다. 당시 궁중에서 서태후가 광서제를 폐위시키고 개혁파를 처단하려 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위기를 느낀 강유위는 신건육군이라는 막강한 군대를 지휘하던 위안스카이의 힘을 빌려 서태후와 보수파를 제거하고자 했다. 강유위는 그를 광서제에게 추천했고, 9월 16일과 17일 이틀 동안 광서제는 위안스카이를 독대하여 그에게서 충성을 다짐받았다.

 

 광서제와의 독대를 마친 위안스카이는 며칠 동안 자신에게 어떤 편이 유리한지 면밀히 따져 본 후 결국 서태후의 보수파에 서기로 결심했다. 위안스카이는 크게 망설이지 않고 9월 20일 모든 사실을 서태후의 측근 영록에게 밀고했다. 9월 21일 사태를 보고받은 서태후는 정변을 일으켜 광서제를 중남해(中南海)의 영대(瀛臺)에 구금한 뒤 훈정을 선포했다. 이를 '무술정변(戊戌政變)'이라 일컬으며, 이로써 무술변법은 103일 만에 막을 내렸다. 담사동(譚嗣同), 양예(楊銳), 유광제(劉光弟), 임욱(林旭), 강광인(康廣仁), 양심수 등 '무술 6군자(戊戌六君子)'는 체포되어 참수당했다. 강유위는 제자 양계초와 함께 영국과 일본 공사관의 도움으로 해외로 도피했다. 무술변법은 약 100일 만에 끝났다고 하여 '백일유신(百日维新)'이라고도 불린다.

 

 영국 공사관의 도움으로 영국 함대를 타고 홍콩으로 피신한 강유위는 1898년 10월 27일 영국의 여객선을 타고 일본으로 망명했다. 일본에 입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쑨원(孫文)과 절친한 미야자키 도라조(宮畸寅)와 히라야마 슈(平山周)로부터 혁명파와의 연계를 제안받았지만 이를 거부했다. 1899년 그는 보황회(保皇會)를 세운 뒤 화교를 중심으로 보황입헌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는 보황입헌 운동의 일환으로 1901년 신문을 발행하고 학교를 세웠으며, 1902년에는 인도에 머물며 그의 대표작인 '대동서(大同書)'를 편찬했다. 그는 만민이 평등하게 잘살고,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대동 사회(大同社會: 크게 같은 사회. 중국 전국시대에서 한(漢)나라 초 사이에 유가 학파들이 주장한 일종의 이상사회를 말한다.)'를 이룩할 것을 주장했고, 중국은 개화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일단 입헌군주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대동서'에 나타난 그의 주장들은 급진적이고 지극히 관념적인 이상향에 지나지 않아 현실적으로 수용하기는 어려웠다.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청 왕조가 끝나자 강유위는 공화제를 반대하고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복벽 운동(復辟運動)을 전개했다. 하지만 그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중국은 공화제인 중화민국이 되었다.

 

 1913년 노모의 사망으로 귀국한 그는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전통 유교를 국교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공교회(孔敎會)를 설립했다. 그는 끝까지 유교와 입헌군주제를 고수하여 1917년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를 황제로 복위시키려 했으며, 1924년과 1926년에 청 왕조 부활을 도모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1927년 2월에 강유위는 청도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그가 죽었을 때 유족들은 그의 재산이 없어 제자인 양계초가 보내 준 돈으로 겨우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생전에 강유위는 자신의 삶을 함축한 인장을 팠다. 인장에는 "유신 100일, 출망(해외 망명) 16년, 3주 대지(세계일주 3회), 유편사주(遊遍四洲, 4개 대륙 유람), 경 31국(31개국 방문), 행 60만리(합 60만 리)"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梁啓超(량치차오, 양계초, 1873~1929 (56세))

 청나라 말기의 근대 사상가이자, 정치가, 언론가, 개혁가, 철학가, 문학가, 사학가, 교육가이다.

 강유위의 제자로 변법자강 운동을 주도했다.

 '만국공보(萬國公報)', '시무보(時務報)' 등의 잡지에 중국의 구사상을 비판하고 애국주의를 강조한 정치논설을 싣고, 계몽주의에 입각한 잡지를 발행하는 등 중국의 개화에 앞장섰다.

 청나라 말기와 중화민국 초기의 혼란했던 시기에 중국의 전통과 서구의 선진 문명을 화합해 받아들이고자 했던 계몽사상가 양계초.

 그는 1873년 광동성 신회(新會, 신후이)의 하층 지식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자는 탁여(卓如)이고, 호는 임공(任公)이다.

 

 그는 열두 살에 수재(秀才)에 합격하고 열세 살부터 문자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열일곱 살에는 향시에 합격하여 거인(擧人)이 되었다. 1890년 그는 처음으로 번역 서적을 통해 서양의 신지식을 접하게 되었고 이때 당시의 저명한 학자 강유위를 만났다. 그는 강유위를 스승으로 모시고 만목초당을 세워 일반 경사서(經史書), 선진(先秦) 제자백가서와 불교 경전뿐만 아니라 서양의 신학문을 배우고 익혔다.

 

 그가 태어난 광동은 중국 역사에서 문화의 변두리에 해당하는 지역이었으나 아편 전쟁 이후 서양 세계와의 접촉이 빈번하게 이루어져 서양의 지식이나 문물이 유입되는 집결지 같은 곳이었다. 따라서 양계초는 다른 사상이나 이론에 대해 상대적으로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모든 학문을 흡수할 수 있었다.

 

 1894년 양계초는 과거를 보기 위해 북경으로 향했다. 그해 청 정부는 청일 전쟁에서 일본에게 패하고 그 이듬해 국권을 박탈당하는 수준에 준하는 치욕적인 시모노세키 조약에 조인했다. 이에 온 나라의 지식인들이 분개하며 청 정부에 격렬하게 항의했다. 이러한 충격에서 양계초는 스승과 함께 북경에 과거를 보러 온 약 1,200명의 사람들을 규합하고 서명을 받아 황제에게 ‘강화 거부, 천도, 변법’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것이 바로 '공차상서(公車上書)'다. 이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진보된 사상은 중국 전역에 전파되기 시작했다. 변법자강 운동의 시작이었다.

 

 1895년 양계초는 강유위와 함께 '변법유신(變法维新)'을 주장하는 강학회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이듬해인 1896년에는 상해에 강학회 분회를 설립하여 개혁 사상의 전도지인 '시무보(時務報)'를 창간했다. 그는 주필로서 "변화하고자 해도 변하고, 변화하고자 하지 않더라도 변한다."라는 논리를 내세워 중국의 정치 개혁을 강력히 주장했다. 일 년 후 그는 시무학당의 강사를 지내면서 과거 제도를 폐지하고 학교를 설립하며 입헌 정치를 추진하여 중국의 위기를 극복하자는 내용의 논문들을 썼다. 그의 이런 주장들은 외세의 압력과 부패한 정부로 인해 불안을 느끼던 백성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1898년 황제 광서제가 강유위의 변법유신 주장이 타당하다고 인정하고 양계초를 등용했다. 이것이 백일유신의 시작으로, 양계초는 대학당 역서국의 사무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이 정치 혁명은 서태후와 보수적인 기존 세력의 반대에 부딪혀 정확히 103일 만에 종지부를 찍었다. 게다가 서태후 등 개혁 반대 세력은 광서제를 영대에 감금하고 변법유신을 주장하는 개혁파를 체포하여 처형했다. 개혁 반대 세력의 군사 행동을 사전에 알았던 양계초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일본으로 망명한 양계초는 언론 활동을 통해 계몽사상을 전파하는 데 노력했다. 1901년 그는 '청의보(淸義報)', '신민총보(新民叢報)', '국풍보(國風報)' 등의 잡지를 창간해 계몽사상이 담긴 논설들을 발표하고, 입헌군주제의 도입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또한 그는 언론 활동과 더불어 학자로서 연구 활동도 병행하여 서구의 정치학을 소개하는 등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911년 중국 본토에서는 신해혁명이 성공하여 쑨원을 대총통으로 한 중화민국이 건국되었다. 그리하여 양계초는 일본 망명 생활을 마치고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고, 진보당을 만들어 쑨원, 위안스카이와 행동을 같이했다. 1913년 그는 중화민국 정부의 사법총장에 임명되었다.

 

 1915년 위안스카이가 정권을 찬탈해 황위에 올랐다. 이에 양계초는 '이상하도다! 소위 국체라는 문제는'이라는 글로 위안스카이가 황제에 오르는 것을 반대했다. 위안스카이는 사전에 이를 알아차리고 그를 회유하려고 했지만, 양계초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계획대로 글을 발표했다. 또한 자신의 학생 채악(蔡鍔)을 운남(雲南)으로 보내 무력으로 대항하여 위안스카이를 꺾었다. 그러나 1917년 장훈(張勳)이 선통제를 복위시켜 공화정 체계를 뒤흔들자 양계초는 다시 수구 세력 토벌에 참가했지만 혼란스런 정계 상황은 계속되었다. 이에 양계초는 정계를 떠날 결심을 했다.

 

 1918년 양계초는 고찰단(考察團)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유럽으로 떠났다. 그의 목적은 서양의 장점을 배워 중국의 단점을 보완하려던 것이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이 안고 있던 각종 문제점이 표출되는 모습을 본 양계초는 서양 문명의 우수성과 진보성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렸다.

 

 유럽에서 돌아온 후 양계초는 정계에서 물러나 오로지 전통 학술 재건을 위해 학술 연구에만 매진했다. 그는 연구 범위를 정하지 않고 시, 사, 희곡, 사학, 제자백가, 불학(佛學) 등 모든 분야를 섭렵했다. 특히 그는 불학과 관련한 논문을 정력적으로 발표했다. 1920년 이후에는 남경에서 중국정치사상사를 강의했고, 1922년에는 칭화(淸華, 청화)대학교, 난카이(南開, 남개)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29년 그는 '중국문화사'라는 책의 목차만 정해놓고 갑자기 신장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양계초는 "오늘 나를 아까워하지 않고, 어제의 나와 싸운다."라는 평소 신념대로 자신의 착오를 인정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개혁하면서 산 활동하는 지식인의 표상으로 남았다.

 

 양계초가 남긴 저서로는 '청대학술개론清代学術概論, 1921', '선진정치사상사(先秦政治思想史. 1922)', '중국역사연구법(中国歴史研究法, 1926)', '중국근삼백년학술사(中国近三百年学術史, 1926)' 등의 선구적 학술 저작과 함께 360여 편의 시가 수록된 '음빙실문집(飲冰室文集- 飲冰室文集類編上, 飲冰室文集類編下)' 등이 있다.

 

 

 

李鴻章(이홍장, Lǐ Hóngzhāng : 1823년 2월 15일 ~ 1901년 11월 7일 (78세))

 청 말기의 한족계 중신으로 청의 부국강병을 위한 양무운동 등을 주도한 사람이다. 태평천국의 난 이후 정계의 실력자로 등장하였으나, 청일 전쟁을 계기로 실각하였다.

 

 이홍장은 본래 청나라 말기 나라의 혼란에 즈음하여 발생한 여러 한족계 민병단을 이끌고 있었다. 이홍장의 군대는 본래 '회군'이라 이름지어졌는데, 태평천국의 난에서 스승인 증국번과 함께 난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하여 조정에 등용되었다.

 

 증국번 사후, 이홍장은 청나라의 한족계 대신이 되어, 북양대신의 자리에 오른다. 북양대신은 본래 남양대신과 함께 청나라의 군권을 쥐고 있는 자리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조정 유일의 실력자의 위치이다. 이홍장이 북양대신이 된 것과 더불어 그의 회군은 북양군(北洋軍)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이홍장은 일본과 영국 등 밀려드는 외세에 대항하여 洋務運動(양무운동)을 펼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양무운동은 청나라 본래의 정치체계는 유지한 채, 군사, 과학 등의 분야에서는 서구화를 추진하여 외세에 당당히 맞서려는 운동이었다.

 

 양무운동은 청나라의 만주족 지배층에게도 지지를 받았다. 조정의 실권자인 서태후(西太后)가 그를 후원하였으며, 이홍장 역시 한족이기는 하나, 청나라의 유지를 위해 노력했기 때문에, 양무운동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독일, 영국 등 외국에서 파견된 장교들이 이홍장의 북양군을 훈련시켰으며, 서양에서 들어온 무기와 기술을 이용하여 이홍장은 강력한 군사력을 자기의 손에 쥐게 된다.

 

 이홍장의 북양군은 북양함대를 구성하고, 청나라의 수도인 베이징톈진 주위에 포대를 설치하였다.

 

 이홍장의 북양군이 청일 전쟁에서 대패한 후, 북양군은 몰락했으며, 이홍장 및 양무운동을 주장한 세력들의 발언권은 크게 쇠퇴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나라의 광서제와 함께 청나라의 정치체제 자체를 개혁하려는 세력들이 변법자강운동(變法自彊運動)을 펼친다. 그러나 서태후를 비롯한 청나라 귀족들에게 쫓겨난 후, 이홍장은 다시 기용된다. 그러나 이미 70살이 넘은 이홍장은 예전처럼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대신이 아닌, 외교관 역할을 수행하며 일본과 서구 열강과의 평화를 정착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1901년 사망한다.

 

 이홍장의 유산은 회군과 북양군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은 장교들에게 계승되었다. 그들은 청나라의 멸망 이후 각종 군벌을 형성하였으며, 장개석에게 토벌되기 전까지 중국의 북방을 장악하였다. 이홍장의 후계자 중 가장 강력한 사람은 원세개(袁世凱, 1859~1916)로, 그는 손문(孫文, 1866~1925)과 함께 중화민국을 창설하였지만, 곧 손문을 배신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고 병사한다.

 

 

 

스타투어(Star Tour)

☎:(02)723-6360

http://www.startour.pe.kr

블로그 : 스타투어

E-mail: startour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