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康有爲(강유위:1858~1927)와 梁啓超(양계초:1873~1929) - 혁명보다는 개혁을

 

 아편전쟁을 전후로 중국사회에 몰아닥친 변화는 전제왕정의 위기로 발전했다.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태평천국운동으로 대표되는 밑으로부터의 혁명과, 강유위 등이 주도하는 위로부터의 개혁이 각각 별도의 흐름을 형성했다. 양자 모두 그 자체로서는 실패했지만, 궁극적으로 중국이 2천년의 전제왕정을 마감하고 새로운 공화제 사회로 나가는데 큰 몫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단순한 실패로 기록될 수는 없을 것이다.

 강유위는 1858년 廣東(광동)의 사대부 집안데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신동이라는 소문이 났을 정도로 학문적 자질이 뛰어났다. 그는 1888년 수도 북경에서 과거를 치르는 기회를 이용하여 수도 북경에서 과거를 치르는 기회를 이용하여, 이른바 「變法(변법)」등 근본적 개혁을 주장하는 상소문을 황제에 올렸다. 물론 그의 상소는 황제에게 전달되지 못한 채 중도에서 사라졌지만 그 사회적 파장은 대단히 컸다. 이후 그는 廣州(광주)에 정착하여 개혁을 위한 교육활동을 전개했다.

 갑오년(1894년)의 청일전쟁에서 패배하자 그 여파가 중국사회를 강타했다. 무엇보다고 조공국에 불과하다고 믿어왔던 일본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충격에서 강유위를 중심으로하여 1895년 북경에 과거를 응시하러 올라온 선비들이 연명으로 「변법」을 주장하는 상소문을 다시 올렸다. 모두 1만7,8천자에 이르는 상소문에 응시자 1천3백여명이 연서하여 집단으로 상소문을 제출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公車上書(공차상서)」였으며 변법자강운동의 첫 출발이었다.

 이때 강유위와 함께 개혁을 주장한 인물중 하나가 양계초였다. 그는 1873년 광동의 하층 지식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과거에 응시했던 그는 강유위가 운영하던 학당에서 개혁사상을 키웠다. 이로서 강유위는 양계초라는 든든한 협력자를 구할 수 있게 됐다.

 

 양계초는 약관 23세로 개혁사상의 전도지인 「時務報(시무보)」를 1896년 上海(상해)에서 창간했다. 이 잡지를 통해 『변화하고자 해도 변하고, 변화하고자 하지 않더라도 변한다』는 논리로 변화의 필연성을 강조하고, 인도 등의 식민지로 전락한 것은 모두 「옛것을 지킬 뿐 변화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이전의 1860년대와 1870년대의 李鴻章(이홍장: 1823~1901)등이 추진했던 洋務(양무)운동과 같은 개혁으로는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던 중국의 지식인들은 아주 빠른 속도로 강유위와 양계초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마침내 1898년 황제는 이들 두 사람이 주축이 된 변법파의 주장을 타당하다고 인정하고 그들을 대폭 기용했다. 이것은 이른바 「百日維新(백일유신)」의 시작이다.

 백일유신은 정확히 103일만에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좌절의 가장 큰 요인은 위로부터의 개혁을 지지할 세력이 지배층 내부에서조차 확고하게 자리잡지 못한 채, 오직 황제 한 사람만의 후원으로 급진적인 개혁을 밀고 나가기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개혁파는 반대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력을 전혀 갖추지 못했다. 결국 西太后(서태후)등 개혁반대세력의 병력동원에 백일유신은 어이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때 많은 개혁가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지만, 강유위와 양계초는 일본으로 도망갈 수 있었다. 이들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노선을 밟으면서 끈질기게 변혁운동을 추진하지만 끝내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李鴻章(이홍장, Lǐ Hóngzhāng : 1823년 2월 15일 ~ 1901년 11월 7일)

 청 말기의 한족계 중신으로 청의 부국강병을 위한 양무운동 등을 주도한 사람이다. 태평천국의 난 이후 정계의 실력자로 등장하였으나, 청일 전쟁을 계기로 실각하였다.

 이홍장은 본래 청나라 말기 나라의 혼란에 즈음하여 발생한 여러 한족계 민병단을 이끌고 있었다. 이홍장의 군대는 본래 '회군'이라 이름지어졌는데, 태평천국의 난에서 스승인 증국번과 함께 난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하여 조정에 등용되었다.

 증국번 사후, 이홍장은 청나라의 한족계 대신이 되어, 북양대신의 자리에 오른다. 북양대신은 본래 남양대신과 함께 청나라의 군권을 쥐고 있는 자리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조정 유일의 실력자의 위치이다. 이홍장이 북양대신이 된 것과 더불어 그의 회군은 북양군(北洋軍)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이홍장은 일본과 영국 등 밀려드는 외세에 대항하여 洋務運動(양무운동)을 펼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양무운동은 청나라 본래의 정치체계는 유지한 채, 군사, 과학 등의 분야에서는 서구화를 추진하여 외세에 당당히 맞서려는 운동이었다.

 양무운동은 청나라의 만주족 지배층에게도 지지를 받았다. 조정의 실권자인 서태후(西太后)가 그를 후원하였으며, 이홍장 역시 한족이기는 하나, 청나라의 유지를 위해 노력했기 때문에, 양무운동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독일, 영국 등 외국에서 파견된 장교들이 이홍장의 북양군을 훈련시켰으며, 서양에서 들어온 무기와 기술을 이용하여 이홍장은 강력한 군사력을 자기의 손에 쥐게 된다.

 이홍장의 북양군은 북양함대를 구성하고, 청나라의 수도인 베이징톈진 주위에 포대를 설치하였다.

 

 이홍장의 북양군이 청일 전쟁에서 대패한 후, 북양군은 몰락했으며, 이홍장 및 양무운동을 주장한 세력들의 발언권은 크게 쇠퇴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나라의 광서제와 함께 청나라의 정치체제 자체를 개혁하려는 세력들이 변법자강운동(變法自彊運動)을 펼친다. 그러나 서태후를 비롯한 청나라 귀족들에게 쫓겨난 후, 이홍장은 다시 기용된다. 그러나 이미 70살이 넘은 이홍장은 예전처럼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대신이 아닌, 외교관 역할을 수행하며 일본과 서구 열강과의 평화를 정착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1901년 사망한다.

 

 이홍장의 유산은 회군과 북양군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은 장교들에게 계승되었다. 그들은 청나라의 멸망 이후 각종 군벌을 형성하였으며, 장개석에게 토벌되기 전까지 중국의 북방을 장악하였다. 이홍장의 후계자 중 가장 강력한 사람은 원세개(袁世凱: 1859~1916)로, 그는 손문(孫文: 1866~1925)과 함께 중화민국을 창설하였지만, 곧 손문을 배신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고 병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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