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洪秀全(홍수전: 1814.1.1~1864.6.1) - 전제왕조의 치명타, 太平天國(태평천국) 운동

 

 중국 태평천국운동(太平天國運動)의 지도자.

 광동성(廣東省) 화현(花縣) 출생.

 중국은 19세기 중반 아편전쟁을 통해 서구세력에게 무기력한 종이 호랑이로 비쳐쳤다. 사실상 한 때 탄력성을 자랑하던 전제왕조사회는 내부로부터 붕괴하고 있었다. 이렇듯 안팎으로 체제위기가 연출되는 상황에서 홍수전이 이끄는 태평천국운동은 2천년 전제왕정에 치명타를 가했다.

 홍수전은 1814년 廣東(광동)의 농민가정에서 태어났다. 당시의 모든 야망에 찬 젊은이처럼, 그도 일찍부터 과거시험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16살 무렵 집안이 어려워 공부를 잠시 중단하고 농사에 전념할 수 밖에 없었으며, 18세부터 네 차례에 걸쳐 과거시험에 응시했지만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

 과거를 보기 위해 그가 갔던 곳은 다름아닌 廣州(광주)였다. 중국은 밀려오는 서양세력에 대해 폐쇄적인 입장을 취해 왔지만, 광주등 몇몇 지방은 대외창구로서 개방하고 있었다. 따라서 광주는 이미 서양문물이 어느 정도 깊숙이 침투했던 곳으로, 그는 이곳을 통해 서구세계에 대한 지식을 비교적 일찍부터 얻을 수 있었다.

 네 번째 과거를 치르고 고향에 돌아온 후 홍수전은 7년전 광주에서 구했던 작은 책자를 다시 들춰 보았다. 이때가 1843년경으로, 중국이 이미 영국과의 아편전쟁(1840~1842)에서 비참한 패배를 경험한 뒤였다.

 

 아편전쟁은 林則徐(임칙서, 1785~1850)라는 인물이 영국의 아편을 소각함으로써 영국이 도발한 침략전쟁이다. 그러나 전쟁의 뿌리는 보다 멀리에서 찾을 수 있다. 다름아닌 세계 자본주의 경제의 팽창과 그에 따른 서양세력의 동양진출이었던 것이다. 이미 17세기를 전후하여 서구세력이 동아시아, 특히 중국을 향해 밀려들기 시작했지만, 중국은 『땅이 넓기에 없는 물자가 없다』는 식으로 그들과의 교역에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중국으로부터 많은 茶(차)를 수입했던 영국의 입장은 조급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욕상의 우위를 점유하기 위해 중국에 아편수출을 개시했다.

 영국이 중국인에게 공급했던 아편은 식민지 인도에서 생산된 것이었다. 아편은 오랫동안 중국인에게 사용돼 왔다. 그러나 18세기말 영국이 중국으로 아편을 수출하자 흡연자의 숫자가 순식간에 늘어났다. 결국 중국의 재정사정이 악화되는 한편, 흡연자의 증가로 중국사회의 근간이 뒤흔들렸다. 특히 정부관리들 사이에 아편이 유행하여 행정능력이 현저히 퇴조하기 시작했다.

 아편 문제로부터 국가적 위기를 느낀 조정은 적극적인 아편금지정책을 채택했다. 그리고 임칙서를 광주로 파견하여 아편수입을 금지시켰다. 임칙서의 등장은 영국인을 비롯한 외국상인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이로인해 영국과 중국간의 긴장은 팽팽해졌다. 마침내 사소한 사건을 빌미로 영국은 선전포고와 함께 중국을 공격했다.

 

 중국의 패배로 끝난 아편전쟁을 계기로 영국등 서구세력은 물밀 듯 밀려들었다. 이 물결을 타고 서양 선교사들도 전도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광주등의 도시에서 서양 선교사가 포교하는 모습은 점차 자연스러워졌다. 홍수전이 펼쳐본 책자도 다름아닌 기독교 전도서인 『勤世良言(근세양언)』이었다.

 홍수전은 기독교에 관심을 갖고부터 上帝(상제)인 예수만이 유일신이며, 그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하다는 믿음을 품게 됐다. 더욱이 어느 날 꿈속에서 계시를 받고 자신을 예수의 동생이라 믿었다. 이제 그에게는 한가지 길만이 남았다. 즉 반란의 길을 통해 세상을 구제하는 것이었다.

 

 중국인들 사이에는 일찍부터 비밀결사가 발달해 왔다. 그 조직과 방법을 이용하여 홍수전은 세력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일반 중국인들에게 멸시받던 객가출신이었기 때문에 주위에서 불만세력을 쉽게 끌어 모을 수 있었다. 그 중에는 유민 실업자 광부 빈농 등이 있었으며, 그들의 조직은 매우 빠르게 확산됐다.

 그가 조직한 上帝會(상제회)는 1851년 청조 타도의 깃발을 들고 기병했다. 기독교 교리의 일부와 『주례』와 같은 중국의 전통사성서에서 추출한 논리를 결합시켜 자신들의 반란을 정당화시켰다. 토지의 평균적 분배를 통한 빈부차별의 제거, 여성차별의 상징인 전족의 폐지를 주장하는 등 혁신적인 정책을 내놓았다.

 결국 홍수전이 이끄는 농민군은 만주족에 대한 불만감, 기득세력의 지배에 대한 저항감 등이 결합된 혁명군으로 탈바꿈하게 됐다. 농민군의 진격은 신속했다. 홍수전은 1853년 남경을 점령하고 그곳을 도읍으로 삼았다. 그리고 국호를 태평천국이라 정하고, 본격적인 농민정권으로서 청조에 대항했다.

 

 그러나 태평천국운동은 남경을 장악하면서 팽창속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우선 북경 점령을 목표로 북진하던 병력이 정부군의 방어로 제동이 걸렸다. 그러나 더욱 큰 장애물은 내부분란이었다. 태평천국 수립후, 天王(천왕) 홍수전은 교리에 몰두하고 군사와 행정은 다른 지도자들에게 일임했다. 그는 비록 신과 같이 추앙됐지만, 점차 실권을 잃었다. 자연히 상실한 권력을 되찾기 위해 반대파의 제거에 착수했다.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은 결국 태평천국운동의 급속한 퇴조를 가져왔다.

 뿐만 아니라 태평천국이 제시한 개혁안은 철저하게 실천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홍수전의「天朝田畝制(천조전무제)」는 토지의 평균주의적 분배를 약속했지만, 농민정권은 지주 세력과의 타협을 통해 토지개혁을 뒤로 미루었다. 물론 이러한 타협안은 당장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상황논리에 근거하여 토지로부터 확고한 재정기반을 마련해야된다고 합리화시킬 수 있었다. 그렇지만 토지를 갈망하여 태평천국운동에 뛰어든 농민들에게는 그러한 타협이 실망을 안겨주지 않을 수 없었다.

 

 태평천국운동이 안에서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상대적으로 적대세력의 움직임은 더욱 활발해졌다. 우선 지배세력인 지주와 사대부들이 표면에 나서서 농민군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이미 청조가 한계를 드러냄에 따라, 정부군이 반란군 앞에서 속수무책이었기 때문이다.

 지배세력은 각지에서 의병의 형태로 무장화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보다 효과적으로 농민반란에 대처하기 위해, 사대부간의 사제관계를 이용하여 조직을 확대했다. 이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예는 曾國藩(증국번, 1811~1872)이 이끄는 湘軍(상군)과 李鴻章(이홍장, 1823~1901)이 지휘하는 淮軍(회군)이었다. 이들 두 부대는 태평천국을 격파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한편 외세는 처음에 내정 중립이란 애매한 위치에 섰다. 우선 제국주의 세력은 태평천국과 같은 내란이 청조를 무기력화시키는 절호의 기회로 인식했으며, 그들이 내세우는 구호가 기독교와 맥락이 일치한다는 점에서 반대입장을 취할 수 없었다. 그러나 태평천국이 반외세투쟁으로서의 성격을 점차 분명히 하자, 당초의 중립적 입장을 포기하게 됐다.

 드디어 외인부대인「常勝軍(상승군)」이 등장했다. 서양인 지휘관 아래, 서양식 무기와 훈련을 갖춘 상승군은 上海(상해)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군사활동을 펼쳤다. 가는 곳마다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으므로 상승군이라는 호칭을 얻게 됐던 것이다.

 마침내 1864년 수도 남경이 적에게 완전히 포위됐다. 홍수전은 주위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최후의 항전을 고집했다. 고립과 절망에서 분투하던 그는 6월 1일, 51세의 나이로 병사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14년 동안 진행된 태평천국운동은 종지부를 찍었다.

 

 중국 역사상 최대 규모였으며, 가장 장기적인 농민운동이었던 태평천국운동은 이전의 농민운동과는 다른 성격을 지녔다. 19세기 말의 농민운동은 단순히 내부적 요인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전개됐다. 즉 외세의 출현이란 새로운 요소가 작용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내부적으로 시작된 전제왕정의 위기가 외부적인 압박에 의해 더욱 심화됐던 셈이다.

 태평천국은 결국 전제왕정 자체에 대해 결정적인 치명타를 가했다. 이후 반세계만에 청조는 새로운 혁명운동에 의해 타도되고, 1911년 신해혁명을 통해 2천년 역사의 전제왕정은 막을 내렸다. 물론 그 사이에 변혁의 움직임이 황실에 의해, 또한 지배층에 의해 각가 시도됐지만 대세는 거스를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태평천국이 제시했던 혁신적 정책은 상당 부분 20세기의 공산혁명에 의해 계승됐다. 무엇보다도 천조전무제와 같은 토지재분배정책은 공산당의 토지개혁으로 이어졌다. 태평천국을 지지했던 다수 추종자들이 땅을 열렬히 갈망하던 가난한 농민들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공산혁명에 적극 참여했던 지지자들도 역시 땅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였던 것이다.

 

 태평천국의 발생은 훗날 군벌세력이 등장하는 배경도 됐다. 앞서 지적했듯이 농민군의 진압은 정부군보다 지방의 민병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런데 탸평천국이 실패하고도 각지에서 농민운동이 끊이지 않자 기득세력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방어할 私的(사적) 무장조직을 존속시킬 수 밖에 없었고, 이러한 무장화는 결국 중국이 몇 개의 군벌세력에 의해 분열되는 상황을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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