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忠賢(위충현) - 황제보다 강한 宦官(환관)

 

 중국사에서 황제의 권력은 막강했다. 明代(명대)에 와서 그 권력은 더욱 비대해졌으며, 그 부산물론 환관의 간헐적 득세가 초래됐다.

 그러나 환관 위충현의 등장 등의 요인으로, 3백년 역사의 명왕조는 하루아침에 멸망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위충현은 1568년 河北(하북)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李進忠(이진충)이었다. 도박으로 인한 빋으로 도망 중에 있던 그는 스스로 관가에 자수하여 궁형, 즉 거세형을 받았다. 남자 구실을 할 수 없게 된 그는 萬曆(만력)(1572-1620) 재위기간중 궁에 입궐했다. 이때 성도 이씨에서 위씨로 바꾸었다.

 궁중에 환관으로 들어간 그는 熹宗(희종)(1620-1627)의 유모와 가까이 지냈으며, 희종이 즉위한 후 그들 두사람은 황제의 총애를 흠뻑 받았다. 이를 계기로 그는 마침내 환관들의 조직인 司禮監(사례감)의 최고위직 乘筆太監(승필태감)에 올랐다. 이 자리는 조정에서 올라온 건의를 받아들여 그것을 황제의 정식명령으로 확정지을 때 붉은 묵으로 비준을 표시하는 직책이었다. 만약 황제가 부재중이거나 정사에 소홀할 때는 환관인 병필태감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벌써 이때만 하더라도 환관은 조정의 내각대신들과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권력이 비대해 있었다. 명초기부터 황제는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환관을 적극 활용했다. 비록 태조 주원자이 환관의 청치참여를 억제하는 여러 가지 조처를 실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들은 중앙정치에 깊숙이 관여하기 시작했다. 태조는 무엇보다도 조정의 문무대신을 감시하는 역할을 측근의 환관에 맡겼던 것이다.

 의종의 총애를 업고 권력을 장악한 그는 황제가 더욱 사치와 방탕에 빠지도록 애썼다. 동시에 그는 주변에 붕당을 결성하고 반대세력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뿐만아니라 자신의 족자적인 군사력을 배양하기도 했다. 거의 모든 상소문은 황제의 손에서 처리되지 않고 위충현에 의해 결재가 이루어졌다. 그가 외출할 때는 사대부들이 길에 배열하여 절했으며, 모두 큰 소리로 『천살까지 사십시요!』를 외쳤다. 심지어 전국 각지에서 살아 있는 위충현을 위해 사당을 짓고, 참배하는 무리가 줄을 이었다. 이떤 학자는 그를 공자에 비유하기조차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624년, 東林黨(동림당)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얼핏 보기에는 위충현이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해 일으켰던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환관과 관료세력 간의 대립으로 야기된 당쟁의 결과로 규정할 수 있다.

 만력황제가 통치한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반까지는 중국사의 일대 전환기였다. 우선 농업과 상업의 발전은 중국사회에 유례없는 경제적 성장을 가져왔다. 여기에 해외무역도 비약적으로 증가하여, 중국의 경제는 한층 더 도약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지배층의 양적 팽창이 이루어져 과거시험을 볼 수 있는 경제학과 학력을 갖춘 인구가 대폭 늘었다.

 그러나 양적 팽창에도 불구하고,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숫자는 여전히 제한됐다. 여기에 일반 평민을 포함한 궁정 밖은 물론 궁정내의 사치가 결정에 달했다. 이른바 과소비의 시대였으며, 사회의 기강은 점점 문란해졌다. 따라서 관직을 얻어 출세하기 위해서는 학력배양보다는 인맥을 찾는 것이 현명했다.

 이러한 시대상을 배경으로, 만력연간이 시작되면서 붕당현상이 심화됐다. 주로 지연을 따라, 재직관료와 예비관료인 사대부들이 자연스럽게 무리를 짓기 시작했다. 그들은 정치인이면서 지식인이었기 때문에, 붕당은 학문적 파벌 형성과 맥을 같이 하고 있었다. 물론 자신들의 학문적 주장이 받아들여지느냐의 여부는 곧바로 권력의 부침을 의미했다.

 마침내 명말의 붕당대립을 촉발시킨 이슈가 나왔다. 황제의 왕위를 누가 계승하느냐를 둘러싸고, 지배층 내부의 의견이 갈리고 그들 사이에 자연스레 붕당이 형성됐다. 약 20여년간 계속된 논쟁에서 정치적 이슈로 시작됐던 왕위계승의 문제는 결국 도덕적 이슈로 전환되기에 이르렀고, 따라서 붕당간의 대립은 도덕적 선명성을 결정짓는 선과 악의 싸음으로 발전했다. 논쟁에서 이긴 당은 선이고 패배한 당은 악이었기 때문에, 타협은 있을 수 없었으며 오직 승리만을 목표로 각 붕당은 총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선명론 경쟁이 결국 피비린내나는 당쟁을 야기시켰던 셈이다.

 동림당의 형성도 같은 배경에서 출발했다. 그들은 경제 선진지역인 강남 無錫(무석)의 동림서원을 중심으로 개혁정치에 목소리를 높였다. 주로 재야학자와 재직 관료로 이루어졌으며, 이들은 이미 형성된 몇 개의 지역당과 대립했다. 그들은 이양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같은 주장은 황제의 비위를 거슬렀다. 그외에도 조세수입을 증기시키기 위해 궁중이 환관을 파견하여 광세, 즉 소금에 대한 세금징수를 독려하자 동림당은 거세게 반대했다.

 동림당의 입장은 당시 풍미했던 양명학적 사고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양명학은 명중기부터 중국 지식인 사회를 압도했으며, 직관적인 사고를 강조하고 유교의 경세적 측면을 경시했다. 따라서 양명학이 지배하는 지식인 사회의 동향으로 말미암아, 유학자인 당시의 정치가들은 대부분 정치의 도덕성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소비문화가 판치는 사회분위기에서 정치인들의 의식도 도덕적 원칙보다는 현실적 이해관계를 중시하게 됐고, 이러한 추세는 양명학의 유행과 맞물려 더욱 정치의 도덕성과 사상의 경세적 효용을 등한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바로 이러한 사상풍조에 동림당은 대항했던 것이다.

 결국 동림당의 뜻대로 장자인 光宗(광종)(1620-1620)이 황제에 올랐지만, 광종이 즉위후 한달만에 급사함으로써 동림당은 다시 수세에 몰렸다. 마침내 광종의 뒤를 이은 희종의 총애를 받은 환관 위충현에 의해 그들은 무참히 제거되기에 이르렀다.

 위충현은 동림당에 대한 대규모 검거와 처형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더욱 강화했디만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게 됨에 따라 하루아침에 몰락을 맛보았다. 명의 마지막 황제인 崇禎(숭정)(1627-1644)은 즉위하자 그를 과감히 파직하고 귀양보냈다. 위충현은 겁에 질려 1627년 스스로 자결했다.

 위충현이 죽은 후 동림당은 명예를 회복했다. 그로나 당쟁은 지속됐고, 특히 환관세력과 동림당 간의 당쟁은 끊이지 않아 마침내 만주족에 의해 명의 수도가 함락되고 그 유신들이 남쪽으로 피신하여 南明(남명)정권을 수립한 뒤에도 당쟁은 여전히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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