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王守仁(왕수인) - 陽明學(양명학)의 뿌리

 

 왕수인(王守仁:1472∼1528)은 주자학 중심의 신유학 흐름에 제동을 건 明(명)중기에 성행했던 양명학을 창시한 인물이다. 그의 양명학은 현실적 이슈를 소홀히 한다는 비판도 받았지만, 유학을 다양하게 발전기키는데 크게 공헌했다. 특히 그에 대한 비판세력으로 東林學派(동림학파)가 탄생되기도 했다.

 왕수인의 호는 陽明(양명), 시호는 문성(文成). 1472년 浙江(절강)의 대관료지주 집안에서 출생했다. 당연히 그는 관계진출을 위해 유학에 몰두했으며, 당시에 풍미했던 주자학에 심취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주자학은 그의 학문적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한때 도교의 신선술에 빠지는등 지적 방황을 거듭하다 37세에 이르러 다시 유학으로 돌아왔다.

 그는 주자학에 대한 대안을 송대 陸九淵(육구연)(1129-1192)의 心學(심학)에서 찾았다. 특히 육구연의 「心則理(심칙리)」(마음이 바로 이치)라는 주장에 흥미를 가졌다. 그는 마침내 理(리)는 본원적인 것으로 밖에 있지 않고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견해는 다시 知行合一說(지행합일설)로 발전했다. 인식과 실천은 마음의 두 측면으로서 분리될 수 없으며, 따라서 지식은 단순히 인식으로 끝나서는 안되고 반드시 행동으로 옮겨져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학문의 궁극적 목표로「良知(양지)」의 체득과 실천을 제시했다. 「양지」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소유하고 있는 본성으로, 이를 통해 선악과 시비를 판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致良知(치양지)의 주장은「심즉리」,「지행합일」과 함께 왕수인의 학설의 세가지 뼈대를 이루었다. 왕수인의 학설, 즉 양명학은 아주 빠른 속도로 중국 지식인 세계에 퍼져갔다. 특히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인 강남에서 그의 학설이 유행, 이를 강론하는 서원들이 곳곳에 세워졌다.

 왕수인은 관료로서도 성공했다. 소수민족의 봉기에 대한 진압을 성공시키는 등의 공적을 인정한 조정은 마내 그에게 백작의 작위를 내렸다. 그의 학설은 점차 단순한 유심론적 주관주의로 받아들여져, 원시유가나 주자학이 가졌던 현실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유학자들이 멀어지게 되는 동기를 마련해주었다. 즉 양명학의 입장에서 내적 자유와 자율만을 극단적으로 강조하여 수양과 현실을 도외시하는 결과를 초래했던 셈이다.

 

 그의 경력은 대략 다음의 3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37세까지)

 주자학에서 출발하여 누량(婁諒)에게 사사하였으나 점점 회의하게 되었고, 회시(會試)에도 실패하여 임협(責俠)·기마(騎馬)·문사(文辭)·신선(神仙)·불교 등에 빠졌다. 이를 양명의 오닉(五溺)이라 한다. 28세 때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관계(官界)로 나갔으나, 35세 때 환관 유근(劉瑾)의 미움을 사서 귀주(貴州)의 용장역(龍場驛)으로 유배당하였다. 37세 때 이곳에서 <심즉리(心卽理)>라는 근본입장을 확립하였다. 그리하여 외물(外物)에서 이(理)를 구하는 주자학적 격물론(格物論)에서 탈피하여, 마음 속의 부정(不正)을 없애고 양심을 발휘한다고 하는 새로운 격물치지(格物致知)의 해석을 제시하였다.

 

제2기(38∼49세)

 39세 때 유근이 실각하자 여릉현(廬陵縣:西省 吉安)의 지현(知縣)이 되었다. 이듬해 이부험봉청리사주사(吏部驗封淸吏司主事)가 되어 중앙으로 들어갔다. 이후 남경태복시소경(南京太僕寺少卿)·남경홍려시경을 거쳐 45세 때 도찰원좌첨도어사(都察院左僉都御史)에 임명되어 강서(江西)·복건(福建) 등 여러 성의 농민반란을 진압하였다. 이 시기에 지행합일론(知行合一論)을 제창하였다. 주자에 맞서는 육상산(陸象山)의 공적을 드러내고《대학고본(大學古本)》을 간행하였기 때문에 주자학자의 비난을 샀다.《전습록(傳習錄)》을 간행하는 한편,《주자만년정론(朱子晩年定論)》을 편집하여 주자 만년의 설(說)이 자기의 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밝혀 주자와의 조화를 꾀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주자학자 나흠순(羅欽順)과의 논쟁이 시작되었다. 48세 때 영왕(寧王) 신호(宸濠)가 반란을 일으키자 의병을 일으켜 신호를 생포하는 공을 세웠으나 모반을 꾀한다는 모함을 당하여 위기에 빠졌다. 49세 때 이러한 위기 속에서 치양지설(致良知說)을 제창하여 주자학을 완전히 벗어나 새로운 학설을 전개하였다.

 

제3기(50∼57세)

 50세 때 세종(世宗)이 즉위하자 남경병부상서(南京兵部尙書)에 임명되고, 다시 신건백(新建伯)에 봉하여졌다.《발본색원론(拔本塞源論)》《존경각기(尊經閣記)》등을 저술하여 만년의 원숙한 경지를 보여주었다. 57세 때 도찰원좌도어사(都察院左都御史)로서 광서(廣西)의 사은(思恩)·전주(田州)의 난을 평정하고 돌아오던 중 죽었다. 저작은《왕문성공전서(王文成公全書, 38권, 1572)》로 정리, 간행되었다.

 

 

 

스타투어(Star Tour)

☎:(02)723-6360

http://www.startour.pe.kr

블로그 : 스타투어

E-mail: startour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