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朱元璋(주원장 : 1328∼1398) - 땡땡이 중에서 황제로

 

 이미 춘추전국시대에 상인이 재상이 되는 등 중국사회는 비교적 일찍부터 사회적 이동이 활발했다. 그러나 가장 빠른 계층 상승의 기회는 농민운동이었다. 원말에 농민운동을 일으켜 명제국을 세운 주원장의 생애야말로 그러한 「헬리콥터」식 출세의 경우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 주었다.

 주원장은 1368년 10월 21일 안훼이(安徽)성 南京(남경)의 북부에 있는 淮(회)강 유역 가난한 집안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중팔(重八)이었으며 17살에 전염병과 기근으로 부모 형제를 잃고 황각사(皇覺寺)라는 절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절에서 청소와 심부름을 하던 주원장에게 가장 힘든 일이 사천왕상의 다리 사이 먼지를 청소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황제가 되고 난 후 주원장은 모든 절의 사천왕상은 청소하기 좋도록 반드시 한 발을 들도록 명령했다고 하니 이는 사천왕상의 역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중이 된 후, 그는 유랑생활을 계속하는 땡땡이 중으로 전락했다. 그러다 농민세력인 남방계 홍건군이 난을 일으키자 이에 합류했다. 이때 그는 28세로, 농민군의 우두머리인 郭子興(곽자흥)이 사망한 후 부장에서 일약 최고 지도자로 떠 올랐다.

 주원장이 농민운동에 참여할 때, 중국전역은 농민들의 반란으로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원대사회의 두가지 모순인 계급문제와 민족문제가 더 이상 억제할 수 없을 만큼 비등점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때 일부 농민 사이에서 미륵불사상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어둠과 밝음, 선과 악의 싸움에서 결국 미륵불이 하강하여 태평천하가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급속하게 퍼졌던 것이다. 이러한 천년왕국 사상은 농민들의 사회적 불만과 결합되어, 농민운동을 자극했다.

 마침내 송의 재건을 내세운 농민운동이 발생했으니, 이들이 바로 북방계 홍건군이었다. 남부지방에서도 홍건군이 등장했다. 이들은 북방계의 홍건군과 통일적인 조직 체제를 구성하지 못한 채 독자적으로 난을 일으켰으며, 『부자의 재산을 빼앗아 가난한 자를 이롭게 하자』는 구호를 내걸었다.

 주원장에 의해 장악된 남방계 홍건군은 급속히 커갔다. 마침내 1356년 남경을, 1368년에는 원제국의 수도 북경을 손안에 넣었다. 이렇게 하여 다시 한번 중국사에서 농민운동이 왕조의 교체를 가져오는 사태가 벌어졌다.

 한낱 땡땡이중에 불과했던 주원장은 대중국을 통치하는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스스로를 太祖(태조)라고 칭하고, 수도를 南京(남경)으로 정했다. 훗날 수도는 다시 북경으로 옮겨졌지만 곡창지대이며 상업경제가 발전한 강남의 요지인 남경에 도읍함으로써 태조는 확실한 통치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농민에 의한 농민의 정권을 세운 주원장은 곧 농민의 이익을 배반했다. 이미 반란기간중 상당수의 지주 사대부들이 그의 측근으로 등용되기 시작했으며, 왕조 건립후 그의 정책은 농민의 이익보다는 지주세력을 옹호하는 쪽으로 전개됐다. 이들 지배세력이 그의 농민정권과 협력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민족모순을 전면에 내세워 계급문제를 흡수, 용해시켰기 때문이었다.

 주원장의 명제국은 역대 어느 왕조보다 강력한 황제권을 성립시키는데 성공했다. 황제의 직접 통치를 위한 전제왕정을 확립하기 위해 우선 총리격인 승상의 자리를 제거해버렸다. 그리고 비서기관인 대학사제도를 확대하고, 친위세력인 환관의 권한을 강화시켰다. 그러나 환관의 득세는 훗날 명조의 멸망을 가져오는 원인이 됐다.

 아울러 지난날 황제권의 약화를 가져오는 요인이던 계승분쟁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로서 장자계승의 원칙을 확립하기 위해 주원장은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태자가 일찍이 사망하여 어린 손자가 황제를 계승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이르자, 어린 세자의 삼촌인 아들들을 변방으로 보내 황실의 위기요소를 사전에 제거하려고 했다. 즉 그의 자식들을 국경수배를 빌리로 親王(친왕)으로 책봉하여, 세차례에 걸쳐 변방지대로 보냈던 것이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를 계승한 것은 어린 장손자가 아닌 넷째 아들 永樂帝(영락제)(재위기간 1403-1424년)였다.

 황제로서 주원장이 설치한 제도들은 거의 그대로 청조에 이어졌다. 예를 들어, 법전인 『대명룰』의 내용은 청의 『대청회전』에 별 수정없이 반영됐고, 중앙행정기관인 6부체제도 별 변동없이 계속 유지됐다. 뿐만 아니라 과거제는 그의 손에 의해 더욱 확고한 위치를 굳혔고, 청대에도 계속 인재 등용을 위한 등용문의 구실을 했다.

 

 

※ '문자의 옥(文字之獄)'이란 주원장이 승려생활 때 머리를 깎은 것 때문에 '광(光)', '독(禿)'자를 쓰거나 '승(僧)'과 발음이 비슷한 '생(生)'을 쓰는 행위, 반란군 출신이란 의미의 '적(賊)'과 발음이 비슷한 '칙(則)'자를 쓰는 행위를 무조건 처벌한 것을 말한다.

 어느날 황제의 은혜를 칭송하는 시를 짓는 절기가 있었는데 항주부학(抗州府學)의 교수 서일기(徐一夔)는 "빛이 가득한 천하에 하늘이 성인을 낳아 세상을 위해 법칙을 만들도다(光天之下,天生聖人,爲世作則)"라는 상소문을 올렸는데 대머리의 '광(光)', 스님의 '생(生)', 도적을 나타내는 '칙(則)'이 함께 있었으니 죽음을 면하기 어려웠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당시 관료들은 매일 집을 나서며 가족과 작별 인사를 하고 살아서 집에 돌아가면 껴안고 살아 돌아온 것을 기뻐할 정도였다고 한다.

 

 

청나라의 '문자의 옥(文字之獄)'

 청(淸)나라 강희(康熙)·옹정(雍正)·건륭(乾隆) 연간(1662∼1795)에 일어난 필화(筆禍)사건. 강희(康熙)제 때 대명세()의 남산집안(), 옹정(雍正)제 때 왕경기()의 서정수필안(西), 건륭(乾隆)제 때 호중조() 등의 필화(筆禍)사건.

 강희시대인 1711년 저술한 <남산집()>에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여 일족()이 모두 사형된 대명세()사건.

 청의 3대 황제인 옹정제(雍正帝) 26년 강서성의 향시(試:지방과거) 시험관이던 사사정()은 유민소지(維民所止)라는 문제를 출제하였다가 일족이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유민소지'는 대학의 한 구절로, '백성들이 머물러 사는 곳'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나 옹정제는 유(維)자와 지(止)자가 옹정(雍正)의 머리 획을 고의로 잘라낸 것이라 하여 반역죄로 다스린 것이다.

 청의 4대 황제인 건륭제 때에도 비슷한 필화가 있었다. '일세일월무(一世日月無. 이 세상에는 해와 달이 없다)'와 '일파심장논탁청(一把心腸論濁淸. 나의 한 줌 의기로 청탁을 논하고 싶구나)'라는 두 구절이 모반의 심정을 표현한 것이라 하여 시인 호중조(胡中藻)와 그 가족들이 모두 처형당하였다. 일월(日月)을 명(明)나라로 해석하고 탁청(濁淸)을 탁한 청나라로 해석하여 시집이 반역을 선동하려는 의도로 쓰여진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이처럼 몇몇 글자와 짧은 글귀로 인해 참화가 빚어졌기 때문에 청나라 시대의 지식인 탄압을 '문자의 옥(獄)'이라 한다. 옹정제와 건륭제는 청나라 시대의 명군으로 꼽히는 군주이지만, 이 사건에 대해서 만큼은 엄격한 비판을 피하지 못 하고 있다. 가경(慶: 청나라 인종 가경제의 연호로 1796~1820년까지 25년간 쓰임) 연간 이후에는 고증학()의 융성 등으로 점차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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