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징기스칸(成吉思汗, Činggis Qaγan, Чингис Хаан)- 유목민족의 정복과 중국제국의 팽창

 

 징기스칸(1162∼1227)의 본명은 테무진(한자로는 鐵木眞(철목진)으로 표기)으로, 116년 몽고의 초원지대에서 태어났다. 그가 성장기를 보낸 초원지대는 강수량이 적어 농업이 불가능했으며, 이동을 거듭하는 유목생활이 영위됐다.

 

 초원의 유목민족은 농경민족과 달리 자급자족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남방의 선진민족인 한족과의 교역을 열어 놓으려고 항상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유목민족과 농경민족 간의 교역은 전쟁으로 발전할 소지가 많았다.

 

 비록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열등한 위치에 있었지만, 몽고족을 위시한 주변의 유목민족들은 군사적으로 결코 한족에 뒤지지 않았다. 총이 전투의 주무기가 되기 이전까지, 중국대륙에서 기마병의 위력은 가히 가공할만 했다.

 유목민족의 일상생활은 바로 기마병의 운련과정이었으며, 그들은 언제든지 기마병으로서 중원을 침략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중국역사에서 오랑캐 즉, 胡族(호족)이라 멸시해왔던 유목민족은 송대에 급격히 성장했다. 물론 이전에도 터키어 계통의 흉노족이 기원전 3세기 중국대륙을 침략했으며, 이후에도 몽고어 계통의 선비족이나 토바족 등이 꾸준히 한족사회를 위협했다. 그러나 송대에 이르러, 북방의 유목민족들은 새로운 팽창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우선 거란족(한자로 契丹族(계단족)으로 표기)이 만주, 몽고 및 화북의 일부를 장악하여 遼(요)(947-1125)를 세웠다. 하지만 몽고어 계통의 거란족이 건립한 요제국은 만주어족인 여진족에 의해 무너졌다. 송을 압박하여 1126년에는 송의 수도인 開封(개봉)을 함락했으며 이에 송왕조는 남부로 피신했다. 그 이후의 역사시기를 남송시대라 부른다.

 

 한편 화북의 甘肅(갑숙) 등지를 중심으로 티벳어족인 탕구트족(黨項族(당항족))이 일어났다. 이들은 西夏(서하)(1038-1227)를 건립하고, 요 또는 금 송과 경쟁하는 세력판도를 형성했다. 한족왕조인 송은 이들 유목민족에게 조공을 바치거나 그들간의 분쟁을 조작하여 현상유지를 도모했다.

 

 징기스칸이 출생했을 때, 몽고족은 사회적 대전환을 경험했다. 텐트생활을 통해 늘 계절적으로 이동하는 그들은 원래 씨족중심의 가부장적 사회를 구성하고 있었다, 가족을 기본다누이로 씨족을, 다시 씨족들이 뭉쳐 부족을 형성하여, 분권적이며 인적유대를 강조하는 사회체계에 중국식의 관료제를 도입하여, 몽고족은 보다 중앙집권적 사회로 전환하고 있었다.

 

 징기스칸, 즉 테무진은 그의 씨족을 중심으로 1만명의 정예부대를 구축했다. 그는 1206년 몽고족을 완전히 장악한 후, 스스로 징기스칸의 칭호를 취했다. 징기스칸(成吉思汗(성길사한)이란 「황제 중의 황제」라는 뜻이다.

 

 징기스칸이 1227년에 사망했을 때, 몽고족의 총병력은 고작 12만9천명에 불과 했다. 유목민족의 관점에서는 대병력이었지만 중국의 한족에 비해서는 미미한 숫자였다. 또한 몽고족 전체는 약 1백만에서 2백만 가량으로 추정됐던 반면, 한족의 인구는 2천만명에 이르렀다. 이러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징기스칸이 이끄는 몽고병은 군사적으로 압도적인 역량을 과시했다.

 

 드디어 몽고족은 중원으로 이르는 길목에 위치했던 西夏(서하)를 제거하고 곧이어 북방을 장악했던 金(금)의 세력을 크게 위축시켰다. 이렇게 남진을 계속하면서, 징기스칸은 소쪽으로도 영토를 넓혔다. 그는 중앙아시아지역을 공략하여 마침내 거대한 몽고제국을 건설했다.

 

 그가 죽었을 때, 분할상속의 부족풍속을 따라 몽고제국은 4개의 지역으로 나뉘었다. 각 지역은 왕이란 뜻의 「칸」(汗(한))을 세우고 독자적인 통치권을 형성했다. 이러한 분열상은 거대한 몽고제국이 백년을 넘기지 못하고 해체되는 원인이 됐다. 우선 종교적으로 몽고제국의 칸들은 분열상을 보였다. 예를 들어, 중국의 황실은 불교를 각각 수용했다.

 

 징기스칸에 의해 시작된 중국의 통일과업은 마침내 그의 손자 쿠빌라이(1215-1294)에 의해 완성됐다. 1279년 중국 남부를 장악했던 한족 왕조인 남송을 무찌르고, 몽고제국이 중국을 재통일시켰던 것이다. 몽고족은 남송을 격파하기에 앞서 1271년 元(원)을 세웠다. 지금의 북경에 大都(대도)라는 명칭의 수도를 세우고 본격적인 중국 지배에 들어갔다. 원은 1368년 명에 의해 붕괴될 때까지 중국을 약 1세기에 거쳐 통치했다.

 

 몽고족에 의한 중국의 재통일은 중국사에 몇가지 의미를 부여했다. 우선 끊임없는 이민족 침입으로 야기된 장기간의 전란이 종지부를 찍음으로써 중국의 사회와 경제가 모처럼 안정기로 접어들었다. 둘째, 북으로는 북극해까지, 남으로는 海南島(해남도)까지 중국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계기가 마련됐다.

 

 또한 몽고족은 중국이 다민족국가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한족은 물론 몽고족 거란족 위그르족 장족 여진족등 다양한 민족이 하나의 정치체제에서 더불어 살게 됐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종족이 출현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원대에 탕구스족과  아랍인과의 잦은 접촉으로 새로운 민족인 회족(또는 回回人(회회인)이라 불리움)이 나타났다. 이들은 중국 서북부와 중원지대에 정착했다.

 

 소수민족인 몽고족은 정복을 끝내자마자,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한족과 융합하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때부터 이민족들이 채택한 이중행정구조를 설치했다. 모든 행정기관의 수장은 몽고인이 차지하는 대신, 그 밑의 관직에는 한족 출신을 대폭 등용시켰다. 또한, 유교를 국교로 복귀시키고 과거제를 부활하여 한인 지배층에 대한 회유책을 펼쳤다. 그러나 한인 지배층에 대한 타협안은 그들의 경제적 기반인 지주경제에 대해 정복왕조가 일체 간섭하지 않음으로써 절정에 올랐다.

 

 이러한 몽고족의 융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복왕조 元(원)제국사회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몽고적은 일종의 카스트제도와 같은 인종차별 정책을 고수함으로써 다수민족인 한족의  불만을 크게 샀다. 즉 그들 자신을 최정상에, 주로 서역계통의 이민족인 이른바 「색목인」을 두 번째로, 그리고  몽고제국에 먼저 복속한 북부지방의 한족을 세 번째, 최후까지 저항한 남송지역의 한족을 최하위로 분류했다.

 

 징기스칸의 활약으로 중국제국은 멀리는 동유럽까지 그 위세를 크게 떨쳤다. 뿐만 아니라 중국이 거대한 다민족국가로 발전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나 그는 물론 이후 정복자들도 민족간의 내부적 갈등을 완전히 해소시키지 못했으며, 그 분쟁의 씨앗은 수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국대륙에 존재하고 있다.

 

 

징기스칸(成吉思汗 陵)

 징기스칸릉은 포두(包頭)에서 남쪽으로 180km 떨어진 곳에 있는 어얼두오치시의 어진호로치 경내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의 릉은 1954년에 지어진 것으로 중국의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중 하나이다. 능묘의 규모는 징기스칸의 인생처럼 매우 웅대하면서 위엄있다.

 능묘의 주건축은 몽고식 이동천막인 파오의 형태를 한 대전(大殿)으로, 정전(正殿)내에는 높이가 약 5m 정도의 징기스칸 상이 있으며, 궁전에는 황색단자로 된 지붕덮개가 있는 파오가 있다.

 서전(西殿) 안에는 징기스칸이 당시 사용했던 병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매년 음력 3월 21일에는 정전(正殿)에서 춘제(春祭)의식이 거행되어 이날 하루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손님들에게 흰색이나 황색으로된 비단천을 주고 향을 피우고 제물을 드려 제사를 지낸다. 의식이 끝난 후에는 말경주, 활쏘기, 씨름 등 민속 놀이를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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