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朱熹(주희:1130~1200) - 新儒學(신유학)의 등장

 

 중국 송대(宋代)의 유학자. 자 원회(元晦)·중회(仲晦). 호 회암(晦庵)·회옹(晦翁)·운곡산인(雲谷山人)·창주병수(滄洲病)·둔옹(遯翁). 이름 희(熹). 복건성(福建省) 우계(尤溪) 출생. 주자학(朱子學)을 구축하였으며 주자(朱子)는 그의 존칭이다. 시호는 문공(文公).

 남송의 유교 사상가로서 처음에는 노장사상과 불교에 흥미를 가졌으나 24세에 이연평(李延平)에게 유교를 배워 그 후 죽을 때까지 북송 이후의 특히 정이천(程伊川)의 이기설(理氣說)을 계승하여 육상산(育象山)이나, 공리주의(功利主義 :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자들과 논쟁을 벌이면서 소위 주자학을 완성하였다.

 또한 경서의 문헌 비판이나 훈고명물(訓詁名物)의 고증이나 자연 지식의 개척 등은 가히 청조 고증학의 선구라고 말할 수 있다. 사회적으로도 민간 학교를 설립하고 사창법(社倉法)이나 향약의 제정에 노력하였다. 누차 시정(時政)을 비판하여 권신들에게 배척을 받았으며 그의 학문도 말년까지 '위학(僞學)'이라고 하여 금지되었다.

 

 송대 개혁사상의 뿌리는 결국 유교였으며, 이때 유교는 唐(당) 중기 이전의 유교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새로운 유학, 이른바 신유학이 송대부터 본격적으로 발전했고, 그 집대성은 주희에 의해 이루어졌다.

 외래사상인 불교가 지배적인 위치를 굳혀가고 있을 무렵, 이에 대한 전통 지식인의 반발도 적지 않았다. 이들 반발세력의 관점은 당연히 전통적 유가의 입장이었으며, 불교에 대한 공격은 동시에 유교의 질적 변화를 촉구하는 계기도 됐다. 마침내 당의 韓愈(한유)(768-824)로부터 시작된 새로운 학풍의 유가가 송대에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신유학의 집대성자로 불리는 주희는 1130년 江西(강서)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대부분 福建(복건)에서 진행됐기 때문에, 그곳의 고유명칭인  (민)자를 붙여 그의 학파를  學(민학)이라고 부른다.

 대부분의 지식인과 같이 그는 과거제에 응시, 진사로 관직에 올랐다. 그는 일찍이 여진족의 金(금)에 대항하여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했지만, 항전을 위한 장기적 준비도 또한 강조했다. 그는 강서의 지방관리로 임명되자 그 지역의 白鹿洞(백록동) 서원을 다시 재건했는데, 이 서원은 송대의 4대 서원중 하나로 꼽힌다. 송대부터 서원은 본격적인 교육기관으로 자리잡았다.

 朱喜(주희), 張橫渠(장횡거), 邵康節(소강절), 程明道(정명도), 程伊川(정이천)등의 관념론을 적절히 조화시켜 이를 집대성한 것으로 평가되는 주희의 性理學(성리학)은 理(이)와 氣(기)의 관계를 집의 구조와 자재와의 관계로 설명하여 理學(이학)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유학의 형이상학적 측면을 더욱 심화시켰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신유학이 불교의 영향으로 인해 도덕적이고 현세적이며 형이하학적인 원시유학과는 대조적임을 알 수 있다. 그는 또한 맹자를 유교의 정통으로 삼아 孔孟(공맹)사상의 뿌리를 선명하게 부각시켰다. 특히 맹자의 성선설에 입각하여 교육의 가치를 강조했으며, 그 구체적인 지침으로 三綱五常(삼강오상)을 강조했다.

 주희는 1200년에 사망했지만, 유학에 대한 그의 입장은 이후 정통적인 것으로 확립됐다. 마침내 1313년 경에 이르러 유교경전에 대한 그의 해설, 즉 朱子學(주자학)이 모든 과거시험의 기준이 됨으로써 그의 입장은 더욱 확고 부동해졌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중국문화의 경직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는 부작용도 낳았다.

 저작으로는〈사서장구집주 四書章句集注〉·〈주역본의 周易本義〉·〈서명해 西銘解〉·〈태극도설해 太極圖說解〉·〈시집전 詩集傳〉·〈초사집주 楚辭集注〉, 그밖에 후인이 편찬한 〈주문공문집 朱文公文集〉·〈주자어류 朱子語類〉 등이 있다.

 

(주)

송대의 4대 서원 :

①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 江西 廬山),

악록서원(岳麓書院 : 湖南 長沙 岳麓山),

③ 석고서원(石鼓書院 : 湖南 衡陽 石鼓山),

④ 응천부서원(應天府書院 : 河南 商丘)

 

三綱五常(삼강오상) : 삼강(三綱)과 오상(五常). 곧, 군신(君臣)·부자(父子)·부부(夫婦)의 도(道)와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

 

 

 

<주자학(朱子學)>

 중국 남송(南宋)의 주희(朱熹)가 완성한 신유학(新儒學).

 육조시대(六朝時代)부터 수당시대(隋唐時代)의 사상계를 석권한 불교와 도교(道敎)를 극복하고, 번쇄하고 공허한 자구해석(字句解釋)에 빠졌던 장구학(章句學)에서 탈피하여 경서의 참된 정신과 공맹(孔孟)의 근본이 되는 취지를 밝히려는 송대(宋代) 유학의 완성이다. 이 학설은 북송(北宋)의 주돈이·장재(張載)·이정(二程)·소옹(邵雍) 및 그 학통과 관련되는 도학자의 학설을 집대성한 것으로, 특히 정이의 학통을 이어 계승, 발전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정주학(程朱學)이라고도 한다. 주희에 따르면 주장이정(周張二程) 등은 요(堯)·순(舜) 이래 성인에게 전수되어 공자(孔子)에 이르고 또 공자의 가르침을 바르게 조술(祖述)한 맹자(孟子) 이후 단절된 참된 '도(道)'를 다시 부흥시킨 이들로, 자신은 그 계승자라고 자처하였다. 이 도통의 설과 밀접히 관련해서 공자·증자(曾子)·자사(子思)·맹자(孟子)로 이어지는 유학의 전수계통을 인정하고 사서(四書)를 중시하며 여기에 학문의 목적과 그 단계를 고려, 오경(五經)의 입문과 계제(階梯)의 서(書)로 삼았다. 그리고 사서에 주석을 달고 널리 경전을 연구하여 재해석을 시도하였는데 이것을 신주(新註)라고 한다.

 

 주자학의 사상적 특징은 불교와 도교의 영향을 받으면서 이기심성학(理氣心性學)을 수립했다는 사실이다(성리학이라고도 한다). 이(理)와 기(氣)를 두 기둥으로 심고 생성론·존재론으로부터 심성론·수양론에 걸쳐 정연한 이론을 완성시켰다는 사실은 유학사상 전무후무한 일로서, 주희 이후 청(淸)나라 중기에 이르기까지 주자학파에 속한 학자는 물론이고 여기에 반대하는 학자들도 모두 주희의 이론을 그 토대와 출발점으로 삼았다. 특히 이의 사상은 정이, 기의 사상은 장재의 영향이 지대하였다.

 형이하학적(形而下學的)인 기는 물질을 형성하는 근원이고 일기(一氣)의 유행에 따른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의 교감, 그리고 기의 결합에 의해서 만물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이는 소이연지고(所以然之故 : 사물이 존재하는 근거), 소당연지칙(所當然之則 : 사물의 당위(當爲)로서의 법칙) 또는 조리(條理)라고도 설명된다.

 모든 사물은 기에 의해서 형성되고 이가 부여되는 것으로 설명되는데, 사물의 본성은 이의 내재태(內在態)이다(이를 性卽理(성즉리)라고 한다). 인간이 육체를 형성하는 기질의 저해를 제거하고 이 본성의 완전한 발현을 지향하기 위한 공부가 거경(居敬)과 궁리(窮理), 즉 격물치지(格物致知)이다. 또 이기는 원칙적으로 불상리(不相離)·불상잡(不相雜)의 관계에 있으나 이가 존재의 원리로서의 성격을 가졌기 때문에 이기의 선후가 문제되고, 이가 우월하다고 보는 것이다. 즉 이는 선천적인 것으로, 사물의 존재를 규정하는 근본원리이며 더욱이 도덕적 법칙이기 때문에, 인륜을 가르치기 위한 규범으로서 작용한다. 주희 이후 이의 성격과 이기의 관계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의 의견이 속출하였다.

 

 주자학은 주희의 말년에는 위학(僞學)으로 몰려 핍박을 받았으나 사후에 명예가 회복되어 관학(官學)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명(明)나라 성조(成祖) 때<사서대전(四書大全)> <오경대전(五經大全> <성리대전(性理大全)>등이 편집되어 과거(科擧)의 시험교재로 사용되었고, 주자학의 정통적인 지위는 청나라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말기에 전래되어 16세기 후반 이황(李滉)·이이(李珥)에 의해 주자학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으며, 학리상(學理上)의 논쟁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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