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沈括(심괄: 1031~1095) - 중세 과학혁명

 

 중국  북송(北宋)의 천문학자ㆍ수학자. 자 존중(存中). 호 몽계옹(夢溪翁)

 과학기술의 낙후로 19세기에 서구 열강에게 무릎을 꿇는 치욕을 경험했지만, 중국의 과학문명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왔다. 특히 宋代(송대)에는「중세과학혁명」이라 불리울 정도로 과학과 기술에서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이러한 도약은 심괄과 같은 탁월한 과학자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심괄은 1031년 浙江(절강)의 抗州(항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심주(沈周)는 진사출신으로 여러 곳에서 지방수령을 역심했다. 아버지의 부임지를 따라, 그는 西川(서천), 福建(복건), 江蘇(강소) 등지를 전전했다. 따라서 사회현실을 직접 목도할 기회를 가졌을 뿐 아니라, 중국 각지의 산천, 풍속 및 산물을 직접 관찰할 수 있었다. 그는 시간이 나는대로 자연현상에 대한 직접 관찰도 하고 나름대로 실험도 해보았다.

 

 이러한 광범위한 지식의 축적으로 말리암아, 그는 훗날 박학다능한 인믈로서 중국인들에게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다.

 진사로 급제한 심괄은 王安石(왕안석)(1021-1086)이 주도한 개혁정치에 가담했다.「신법당」이라 불리웠던 이들 개혁세력은 이른바「변법」을 통해 근본적인 제도개혁에 손댔다. 그들은 청묘봅, 면역법, 농전수리법, 방전균세법, 보갑법 및 보마법등 새로운 제도를 통해 관료 대지주의 정치 경제적 특권을 제거하고, 국가의 제정수입을 증대시키며, 군사와 통치조직을 재정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개혁정치는 완고한 기득세력의 저항으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개혁실패후 그는 왕안석등과 함께 보수파로부터 정치적 탄압을 받았다.

 

 실패로 끝난 개혁 프로그램 중에서, 심괄은 농업발전에 한층 더 주의를 기울였다. 특히 그중 수리시설의 개선에 주력했다. 그의『打田五說(타전오살)』이야말로 중국 농업 수리의 발전에 괄목할 만한 업적이었다.

 

 8세기부터 본격화된 강남지역 개발에 중심적 역할을 수행했던 농지개발 방식이 바로 이 우전의 건설이다. 저습지인 강남지역에 제방, 수로, 수문을 대대덕으로 건설하여 관개와 배수문제를 동시에 해결한 독특한 형태의 수리방식으로, 강남지역의 벼농사 발전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이러한 우전을 중심으로 한 수리체계에 대해 그는 매우 체계적인 이론을 제기했던 것이다.

 

  정치가로서 심괄은 북방정책에도 관여했다. 1081년 조정에 의해 서북변방으로 파견되어 거란족이 세운 西夏(서하)의 10만 병력을 물리쳤다. 이때 그는 거란족에 의해 자행된 파괴상을 목도하고, 군사학, 물리학, 수학, 지리학, 지도학 등을 집대성한『邊洲陣法(변주진법)』이란 군사과학 저서를 남겼다.

 

 그는 정치가이자 군사전략가로 다방면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곳을 여행할 기회를 가졌다. 이러한 배경에서 그는 지도작성에 몰두, 자그만치 12년간의 노고 끝에 중국전역을 망라한 『天下州縣圖(천하주현도)』를 만들었다.

 

 정치적 몰락과 함께 그는 본격적으로 과학탐구를 착수하기 시작했다. 나이 58세에 완전히 정계에서 물러나, 江蘇(강소)의 鎭江(진강)에 있는 夢溪園(몽계원)이란 곳에서 은거하면서부터 그는 자신이 과학연구를 통해 얻은 지식을 모두 집결시킨『夢溪筆談(몽계필담)』의 저술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30권의 분량으로 중국 과학문명 발전에 일대 획을 긋는 대저가 나왔다.

 

 책의 전체 분량 중 3분의 1을 차지하는 자연과학에 대한 그의 지식은 수학 천문 역법 기상 지질 지리 물리 과학 생물 농업 수리 건축 등을 망라하는 등 그야말로 광범위하다. 물론 이 책은 그 자신의 발견 뿐 아니라, 당시의 중국 자체의 과학기술 수준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리학의 경우, 그는 4종의 자석을 실험하여 지장의 편각이 존재함을 찾아냈다. 이는 유럽에 비해 4백년이나 앞선 발견이다. 또한 오목거울의 원리를 새로이 파악했으며, 소리에 있어서 공명에 대한 여러 가지 원리를 규명해내는 데 성공했다.

 

 지질학의 경우, 그는 여러 산의 지형을 관찰한 끝에 물릐 침식작용을 알아냈다. 또한 太行山(태행산)의 암석에서 생물의 자취를 발견하여, 충적평원의 형성과정을 추론했다. 흥미롭게도 중국 서북부 지역에 석유의 소재가 있음을 발견했으며, 이때 그는 최초로 석유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그러나『몽계필담』은 단순히 자연과학의 저서만은 아니다. 총 609조에 달하는 대작에는 정치 경제 문화 및 군사등 각 방면에 대한 그의 폭넓은 지식이 담겨져 있었다. 이렇듯 광범위한 지식을 지녔던 심괄은 10권 분량의『良方(양방)』이란 의학서도 저술했다. 따라서 송대역사를 정리한 『송사』에는 그를『문장이 뛰어나고 박학다식하여 천문, 지방지, 율력, 음악, 의약 등 모르는 것이 없으며 이렇듯 광범위한 방면에 저술이 있다』고 평했다.

 

 과학기술 발전에 있어서 심괄의 탁월한 업적은 그 자신이 노력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당시 중국의 과학기술의 수준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송대에는 이른바「중세과학혁명」이라는 획기적인 과학기술의 진보가 이루어졌다. 천문 지리 수학 등의 발달은 물론 인쇄술이 고도로 발전하여, 새로운 과학지식이 신속하게 많은 사람에게 보급됐다.

 

 이러한 과학기술상의 획기적 향상은 송대사회의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가져오는 원동력이 됐다. 우선 농업생산성이 증대했으며, 중국인의 평균수명이 높아졌다. 이는 다시 인구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그리하여 송대 이후 중국의 산업기술은 노동력집중을 통해 발전했으며, 그러한 중국의 발전 패턴은 궁극적으로 노동절약적인 산업발전을 추구했던 서구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아마도 이러한 차이가 결국 서구가 기계화를 통해 산업화를 중국보다 먼저 달성할 수 있었던 원인이 되었던 것 같다.

 

 심괄은 사회개혁자였으며 과학자였다. 직접 실험을 통해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도모한 점에서 그는 매우 선진적인 인물이었다. 결국 그와 같은 인물들의 노력에 의해, 중국의 과학기술은 송대에 이르러 그야말로 비약적인 도약을 이룰 수 있었다.

 

 

 

<참고>

■ 공중누각(空中樓閣)

: 빌 공.   中: 가운데 중.   樓: 다랄 루.   閣: 누각 각.

[유사어] 과대망상(誇大妄想)

[출전]《夢溪筆談》

 

 공중에 떠 있는 누각[蜃氣樓(신기루)]이란 뜻. 곧

① 내용이 없는 문장이나 쓸데없는 의론(議論).

② 진실성이나 현실성이 없는 일.

③ 허무하게 사라지는 근거 없는 가공의 사물.

 

 송(宋)나라의 학자 심괄[沈括:호는 몽계옹(夢溪翁)]이 저술한 일종의 박물지(博物誌)인《몽계필담(夢溪筆談)》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登州四面臨海 春夏時 遙見空際 城市樓臺之狀 土人謂之海市

 (동주사면임해 춘하시 요견공제 성시루대지상 토인위지해시)"

 "등주(登州)는 사면이 바다에 임하여 봄과 여름철에는 저 멀리 하늘가에 성시누대(城市樓臺)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고장 사람들은 이것을 해시(海市)라고 이른다."

 

 훗날 청(淸)나라의 학자 적호(翟灝)는 그의 저서《통속편(通俗篇)》에서 심괄의 이 글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今稱言行虛構者 曰空中樓閣 用此事

 (금칭언행허구자 왈공중누각 용차사)"

 "지금 언행이 허구에 찬 사람을 일컬어 '공중누각'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일을 인용한 것이다."

 

 이처럼 '공중누각'이란 말은 이미 청나라 때부터 쓰여 왔으며, 심괄의 글 가운데 '해시'라는 것은 '신기루'를 가리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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