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李伯(이백)과 杜甫(두보) - 唐(당)문화의 다양성과 창조성

 

 모두 5만여 수에 달하는 唐詩(당시)는 기원전의 周(주)대부터 남북조시내까지의 1600여년 동안 생산된 시가 보다 양적으로 두세배가 될 뿐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다양성과 창조성이 그 어느 시대보다 풍부했다. 이렇듯 화려한 唐代(당대)에 활약했던 이백과 두보야말로 각기 개성과 업적을 남긴 중국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꼽을 수 있다.

 

 이백의 자는 太白(태백)으로, 701년 중앙아시아에서 한족 출신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西川(서천)으로 옮겼으나, 25세에 집을 떠나 세상을 홀로 떠다니던 그는 40여세에 즈음하여 잠시 관직에 발을 들여 놓았다가 다시 방랑길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당의 역사는 물론 중국사의 향방을 바꾸어 놓은 安綠山(안록산)의 난(755~763)에 관여하여 형벌을 받게 되는 처지에 이르렀다. 이때 그는 다시 유랑의 길에 올라, 마침내 762년 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詩仙(시선)'이라 불리는 이백은 생애를 거의 방랑길에서 보냈으며, 주로 낭만적인 성향의 시를 1천 수 이상 남겼다. 그의 시는 대개 시풍이 호방하고 상상력이 풍부하고 언어 사용이 명쾌했으며, 그 사상적인 기반은 도교였다. 비록 낭만적인 색채가 강하지만, 당시의 귀족정치에 대한 신랄한 비판도 짙게 담겨져 있다.

 

 두보는 712년 河南(한남)에서 당대의 시인이었던 杜審言(두심언, 648?~708)의 손자로 태어났다. 그는 거의 관직에 기웃거리지 않고 일생을 가난과 방랑 속에서 보냈다. 약 1천4백수에 달하는 그의 시는 강한 사회성을 띠고 있었다. 즉 부패한 사회와 비참한 현실, 불합리한 윤리 등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국가와 민중에 대한 열렬한 애정을 그대로 노출시겼던 것이다. 특히 그는 시를 통해 안록산의 난 동안 전화 속에서 고통받는 민중의 고통을 대변했다.

 

 이백이 시선이라는 별명을 가진 반면 두보가 '詩史(시사)'라고 불리게 된 것도 바로 그러한 사회성 때문이다. 또한 이백이 현실보다는 일상을 벗어난 환상의 세계를 묘사하는데 주력했다면, 두보는 보다 현실적인 소재를 보다 현실적인 기법으로 표현했다. 이러한 대조적인 성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두 시인은 서로 끈끈한 교분을 지니면서 지냈다.

 

  

◈ 시선(詩仙) 이백(李白: 701~762)

좀 더 자세히

 당(唐)나라 시인.

 자는 태백(太白),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

 농서군 성기현(成紀縣: 지금의 甘肅省 秦安縣 부근) 출신.

 

 두보(杜甫)와 함께 '이두(李杜)'라고 일컬어진다.

두보를 '시성(詩聖)', 왕유(王維)를 '시불(詩佛)', 이백은 '시선(詩仙)'이라고 한다.

 이밖에 적선인(謫仙人) 또는 벼슬이름을 따서 이한림(李翰林)이라고도 한다.

 25세 때 촉(蜀)나라를 떠나 양쯔강[楊子江(양자강)]을 따라 나와 평생 유랑생활을 했다. 이백은 어려서부터 시문(詩文)에 천재성을 발휘하는 한편 검술을 좋아했다. 젊었을 때 도교(道敎)에 심취하여 선계(仙界)에 대한 동경심을 가졌으며 산 속에서 지내기도 했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환상성(幻想性)은 대부분 도교적 발상에서 나온 것이며, 산은 그의 시세계의 주요 무대의 하나였다.

 

 촉나라에서 나온 뒤 둥팅호(洞庭湖(동정호)) 주변에서 오(吳)· 월(越)나라(지금의 南京· 杭州 일대) 등을 주유했고 안육(安陸: 지금의 湖北省)에서 원(元)나라 재상 허어사의 손녀딸과 혼인하여 10년간의 세월을 보냈으나, 그 사이에도 가정에 정착하지 못하고 맹호연(孟浩然)· 원단구(元丹丘) 등의 시인· 도사와 전국을 여행했다.

 

 그 뒤 임성(任城: 지금의 山東省)과 남릉(南陵: 지금의 安徽省)에 집을 장만했다. 임성에서는 공소부(孔巢父) 등과 추라이산에 은거하면서 '죽계(竹溪)의 육일(六逸)'이라고 하였다.

 

 아내 허씨(許氏)가 죽은 뒤 유씨(劉氏)· 송씨(宋氏)와 혼인했으며, 딸 평양(平陽)과 아들 백금(伯禽)을 두었다.

 

 이백은 과거를 보지 않았으나, 현종(玄宗)의 부름을 받아 장안(長安)에 가서 환대를 받고 한림공봉(翰林供奉)이 되었다. 이 1∼2년 동안이 그의 생애 가운데 유일한 영광의 시절이었다.

 

 도사() 오균()의 천거로 궁정에 들어간 그는 자신의 정치적 포부의 실현을 기대하였으나, 한낱 궁정시인으로서 지위를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청평조사(調)' 3수는 궁정시인으로서의 그가 현종· 양귀비의 모란 향연에서 지은 시이다. 이것으로 그의 시명()은 장안을 떨쳤으나, 그의 분방한 성격은 결국 궁정 분위기와는 맞지 않았다. 이백은 그를 '적선인()'이라 평한 하지장() 등과 술에 빠져 '술 속의 팔선()'으로 불렸고, 방약무인(傍若無人: 곁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여긴다는 뜻으로, 주위(周圍)에 있는 다른 사람을 전혀 의식(意識)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行動)하는 것을 이르는 말)한 태도 때문에 현종의 총신 고력사(高力士, 684~762. 당(唐)나라 현종(玄宗)의 사랑을 독차지한 환관(宦官))의 미움을 받아 마침내 궁정을 쫓겨나 장안을 떠났다.

 

 장안을 떠난 그는 허난(南)으로 향하여 뤄양(陽)· 카이펑(封) 사이를 유력(遊歷: 여러 고장을 두루 돌아다님)하고, 뤄양에서는 두보와, 카이펑에서는 고적(高適, 702~765)과 지란지교(芝蘭之交: 지초와 난초의 사귐이라는 뜻으로, 벗 사이의 높고 맑은 사귐을 이르는 말)를 맺었다.

 

 

<청평조사(淸平調詞)>-이백(李白)

雲想衣裳花想容 (운상의상화상용)

구름 같은 옷자락, 꽃다운 자태로다

春風拂檻露華濃 (춘풍불함노화농)

봄바람은 난간 스치고 이슬 함초롬한데

若非群玉山頭見 (야비군옥산두견)

군옥산(羣玉山) 위에서 만날 수 없다면

會向瑤臺月下逢 (회향요대월하봉)

요대(瑤臺) 달 아래서나 만날 수 있으리라

 

 

一枝濃艶露凝香 (일지농염노응향)

한 가지 붉은 꽃이 이슬 맺혀 향기롭다

雲雨巫山枉斷腸 (운우무산왕단장)

무산(巫山)의 선녀, 공연히 애끊난다

借問漢宮誰得似 (차문한궁수득사)

묻노니, 한궁(漢宮)의 누구와 닮았는가

可憐飛燕倚新粧 (가련비연의신장)

가녀린 비연(飛燕)이가 새 단장하고 섰구나

 

 

名花傾國兩相歡 (명화경국량상환)

이름난 꽃과 미인 모두 다 즐거우니

長得君王帶笑看 (장득군왕대소간)

군왕께선 흐뭇이 웃음 띠고 보시누나

解釋春風無限恨 (해석춘풍무한한)

봄바람의 끝없는 한을 풀어버리며

沈香亭北倚欄干 (심향정배의난간)

침향정(沉香亭) 북쪽 난간에 기대어 섰어라

 

 

 743년 침향정 못가에서 현종(玄宗)이 양귀비(楊貴妃)를 데리고 목단을 보며 즐기던 중, 이백을 불러 명창 이귀년(李龜)이 그 자리에서 부를 새 노래의 가사를 지으라고 명했다. 이때 이백은 술에 만취되었으나 즉석에서 귀비의 아름다움을 칭송한 시 세 수를 지었다.

 

 그러나 전에 술에 취해 환관 고력사에게 신발을 벗기게 한 일로 고깝게 생각해오던 고력사가 위 싯귀 중 양귀비를 한(漢)나라의 성제(成帝)를 유혹한 조비연(趙飛燕)과 비유한 대목을 들어 양귀비를 부추겨 참소함으로써 이백이 추방되었다고 한다.

 

 

 두보와 석문(: 西)에서 헤어진 그는 산시(西)· 허베이(北)의 각지를 방랑하고, 더 남하하여 광릉(: 현재의 )· 금릉(: )에서 노닐고, 다시 회계(: )를 찾았으며, 55세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쉬안청(宣城: 安徽)에 있었다.

 

 적군에 쫓긴 현종이 촉나라로 도망하고 그의 황자(皇子) 영왕(永王) ()이 거병, 동쪽으로 향하자 그의 막료로 발탁되었으나 새로 즉위한 황자 숙종과 대립하여 싸움에 패하였으므로 그도 심양(尋陽: 江西省九江縣)의 옥중에 갇히었다. 뒤이어 야랑(夜郞: 貴州)으로 유배되었으나 도중에서 곽자의(郭子義)에 의하여 구명, 사면되었다(59). 그 후 그는 금릉· 쉬안청 사이를 방랑하였으나 노쇠한 탓으로 당도현(當塗縣: 지금의 安徽省)의 친척 이양빙(李陽氷)에게 몸을 의지하다가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이백의 시는 두보의 시가 조탁(彫琢)이 극에 이르는 데 대하여, 흘러나오는 말이 그대로 시가 되는 시풍이며 두보의 오언율시(五言律詩)에 반하여 악부(樂府)와 칠언절구(七言絶句)에 능했다. 예를 들어 <양인대작산화개(兩人對酌山花開) 일배일배부일배(一杯一杯復一杯)> 등은 규범에 관계없이 자유스러운 발상과 리듬을 구사한 좋은 보기이다.

 

 또 성당(盛唐)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의 이백은 인간· 시대· 자기에 대한 큰 기개· 자부심을 시로 노래했다. 가령 '고풍(古風)' 가운데의 한 구절인 '대아(大雅) 오래 생기지 아니하고 내가 쇠하면 마침내는 누가 말할 것이다', '장진주(將進酒)' 가운데 한 구절인 '하늘이 나에게 재능을 준 것은 반드시 유용하게 쓰라고 그랬을 것이다.' 등이 있다. 그러나 그 기개와 자부심의 시대는 개원(開元)에서 천보(天寶)로 이행되어감에 따라 전제 독재 밑에서 심해지는 부패한 현실로 인해서 깨졌다.

 

 그는 '장진주(將進酒)'에서 '인생에서 뜻을 얻으려면 반드시 기쁜 마음으로 힘을 다하여야 하느니'라고 했듯이 산다는 기쁨에 정면으로 대결하였으며, 동시에 그가 말하는 '만고지수(萬古之愁)', 즉 살기 위해 생기는 걱정을 항상 마음에 지니고 살았다.

 

 또한 즐겨 술·달·산을 노래했고, 여정(旅情)· 이별· 규정(閨情)을 노래했으며, 수심을 격조높게, 때로는 잔잔하게 펼쳐보였다.

 

 한편 이백의 시로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된 것이 많다.

 '백발삼천장(白髮三千丈) 걱정으로 이처럼 길어지고(秋浦歌)',

 '장안일편월(長安一片月) 집집마다 다듬이질 소리(子夜吳歌)',

 '고인(故人) 황학루(黃鶴樓)를 떠나 연화삼월(煙花三月) 양주(揚州)로 내려간다(황학루에서 맹호연을 보내고)',

 '촉도(蜀道)는 하늘에 오르기보다 어렵고(蜀道雖)',

 '왜 벽산(碧山)에서 사느냐고 나에게 묻는데, 웃기만 하고 대답을 아니하니 마음은 절로 한가롭다(山中問答)',

 '칼을 뽑아 물을 베어도 물은 여전히 그냥 흐르고 술잔을 들어 걱정을 지우지만 걱정은 여전히 걱정으로 남아 있다(宣州 謝眺樓에서 校書 叔雲과 전별하며)' 등은 잘 알려진 명구들이다.

 

 이밖에 '월하독작(月下獨酌)', '독좌경정산(獨坐敬亭山)', '조발백제성(早發白帝城)', '증왕륜(贈王倫)', '파릉행(灞陵行)', '청평조사(淸平調詞)'등 걸작이 많다.

 

 이백에 대한 전설과 삽화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많은데 어머니가 태백성(太白星: 금성)이 품에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다고 해서 그 이름이 생겼다는 출생 이야기부터, 흐르는 물에 비친 달 그림자를 떠내려고 하다 물에 빠져 죽었다는 전설에 이르기까지, 그가 장안에 있을 때 현종이 불렀는데 정자에 오를 때 환관 고력사(高力士)에게 자신의 신을 벗기게 호령한 취태등의 일화는 유명하다.

 

 이백 시문의 원문으로는 당나라 위호(魏顥)가 편찬한 '이한림집(李翰林集)'과 이양빙(李陽氷)의 '초당집(草堂集)'이 있으나 지금은 없다. 현존하는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북송(北宋)시대 악사(樂史)가 편찬한 '이한림집(李翰林集, 30권)'과 북송의 송민구(宋敏求)가 편찬한 '이태백집(30권)'이 있다. 주석본(註釋本)으로는 남송의 양제현주(楊齊賢註), 원(元)나라의 소사빈(蕭士贇) 보주(補註) 외 '분류보주이태백집(分類補註李太白集)'과 청(淸)나라 왕기주(王琦註)의 '이태백문집(李太白文集)'이 있다.

 

 

<장진주(將進酒)-이백>

君不見 (군불견)

그대는 보지 않는가?   

黃河之水天上來 (황하천상래)

하늘에서 내린 황하의 물이 

奔流到海不復廻 (분류도해불복회)

바다에 들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又不見 (우불견)

그댄 또 보지 않는가?

高堂明鏡悲白髮 (고당명경비백발)

고당의 거울에 비친 서글픈 백발 

朝如靑絲暮成雪 (조여청사모성설)

아침엔 청사같은 머리 저녁엔 백발이되었네  

人生得意須盡歡 (인생득의수진환)

인생이란 기쁠 때 기뻐할 것이니

莫使金樽空對月 (막사금준공대월)

달빛 아래 금술단지를 헛되이 마라

天生我材必有用 (천생아재필유용)

하늘은 쓸데 있어 우릴 낳으니  

天今散盡還復來 (천금산진환복래)

돈이야 써 버려도 다시 오는 것

熟羔宰牛且爲樂 (숙고재우차위락)

양 삶고 소 잡아 한바탕 즐기세

會須一飮三百杯 (회수일음삼백배)

마신다면 모름지기 삼백 잔이지

岑夫子 丹丘生 (잠부자 단구생)

잠부자여 단구생아 

將進酒 君莫停 (장진주 군막정)

잔 권하노니 멈추지 마오

與君歌一曲 (여군가일곡)

그대 위해 한 곡조 노래하리니 

請君爲我聽 (청군위아청)

청컨대 나를 위해 들어 주구려

鍾鼎玉帛不足貴 (종정옥백불족귀)

음악과 성찬도 귀할 게 없고

但願長醉不願醒 (단원장취불원성)

원컨데 마냥 취해 깨지 말기를

古來賢達皆寂寞 (고래현달개숙막)

예로부터 성현 모두 적막했고

惟有飮子留其明 (유유음자유기명)

술 마시는 사람만이 이름 남기니

陳王昔日宴平樂 (진왕석일연평락)

진왕(자건)은 평락관에 연회를 벌여

斗酒十千恣歡謔 (두주십천자환학)

한말에 만냥술로 마냥 즐기니

主人何爲言少錢 (주인하위언소전)

주인 되어 내 어찌 돈 없다 하리?

且須沽酒對君酌 (차수고주대군작)

어서 술 사다 그대 잔 채우리

五花馬 千金裘 (오화마 천금구)

꽃무늬 천리마도, 천금 갖옷도

呼兒將出換美酒 (호아장출환미주)

아이 불러 어서 술과 바꿔오시게

與爾同銷萬古愁 (여이동소만고수)

우리 함께 만고의 시름 잊어나 보세

 

 

 

◈ 당대의 대시인, 두보(杜甫, 712∼770)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서 시성(詩聖)이라 불렸던 성당시대(盛唐時代)의 시인.

 널리 인간의 심리, 자연의 사실 가운데 그 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감동을 찾아내어 시를 지었다.

 장편의 고체시(古體詩)는 주로 사회성을 발휘하였으므로 시로 표현된 역사라는 뜻으로 시사(詩史)라 불린다.

 주요 작품에는 '북정(北征)', '추흥(秋興)'등이 있다.

 

 당(唐)나라 시인.

 자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少陵).

 소릉이라고 불리는 것은, 장안(長安) 남쪽 근교의 소릉(小陵)이 선조의 출신지인 데서 유래한다.

 허난성(河南省) 궁현(鞏縣)을 본거지로 하는 소호족(小豪族) 출신.

 이백(李白)과 아울러 일컬을 때는 '이두(李杜)', 당나라 말기의 두목(杜牧)에 견줄 때는 '노두(老杜)· 대두(大杜)'라 불린다.

 먼 조상에 진(晉)나라 초기의 위인 두예(杜預, 222~284)가 있고 당(唐)의 초기 시인 두심언(杜審言, 648?~708))은 조부이다.

 

생애

 소년시절부터 시를 잘 지었지만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했다.

 20대 전반은 장쑤(江蘇저장(浙江)에서, 후반부터 30대 중반까지는 허난(河南산둥(山東)에서 방랑생활을 하고, 이백(李白고적(高適, 707~765)과 친교를 맺었다.

 35세 때 장안으로 가서 현종(玄宗)에게 부()를 바쳤으나, 관직에 오를 기회를 잡지 못해 궁핍하고 불우한 생활을 계속했다.

 75544세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만나 적군(賊軍)에게 잡혀 장안에 연금된 지 1년쯤 뒤 탈출하여 새로 즉위한 숙종(肅宗)이 있던 펑샹(鳳翔: 장안 서쪽) 행재소(行在所)로 급히 달려가, 그 공으로 좌습유(左拾遺) 직책을 받았다. 그러나 임관되자마자 곧 실각된 재상 방관(房琯)의 죄를 변호하다 숙종의 미움을 사서 휴직처분을 받았다.

 관군이 장안을 회복하면서 사면되어 조정에 다시 출사했으나 1년 뒤 화저우(華州: 장안 서쪽) 지방관으로 좌천된 뒤 다음 해에 관직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간쑤(甘肅)의 친저우(秦州: 天水市)로 갔다.

 

 친저우에서도 겨우 4개월 머물고 다시 남쪽의 퉁쿠(同谷: 成縣)로 옮기고, 그해 말 쓰촨(四川)의 청두(成都)에 정착했는데 이때 나이 48세였다.

 다음해 봄 청두 교외의 환화시(浣花溪) 언저리에 환화초당(浣花草堂)을 짓고 살았다.

 지방 군벌의 반란 때문에 동쪽 쓰촨의 재주(梓州)· 낭주 등에 잠시 피난한 적도 있었으나, 전후 수년에 걸친 초당에서의 생활은 비교적 평화로웠고, 친구 엄무(嚴武)의 막부(幕府)에 절도사 참모로 출사해, 그의 추천으로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郎) 관직을 얻기도 했다. 두공부(杜工部)라고 불리는 것은 이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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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세에 귀향하기 위해 청두를 떠나 장강(長江)을 따라 내려오면서 여러 곳을 전전한 뒤, 쓰촨 동쪽 끝의 쿠이저우(夔州: 奉節縣)에 이르러 강 연안의 서각(西閣)에 거주했는데, 얼마 뒤 도독(都督) 백무림(栢茂林)의 도움으로 교외의 양서· 동둔(東屯)에서 관전(官田)을 빌려 농원을 경영했다.

 

 57세에 처음으로 양쓰강에 배를 띄워 싼샤[三峽]를 따라 내려가면서 2년 동안 후베이(湖北후난(湖南) 등의 물 위를 떠돌다 후난의 뇌양에서 59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쇠고기와 술에 의한 중독이 사인(死因)이라는 것은 후대에 만들어 낸 이야기로 신빙성이 낮다. 또한 일설에 의하면, 둥팅호(洞庭湖)에서 숨졌다고도 한다.

 

시풍의 변화성장

 두보 자신의 말에 따르면, 이미 소년시절에 1000여 편의 시를 썼다고 하나,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는 것은 30세 이후에 쓴 1400여 편의 시와 몇몇 산문뿐이다.

 30세 이후의 시는 뚜렷한 시풍의 변화성장에 따라 4시기로 나뉜다.

 1기는 44세까지로, 이 시기의 두보는 외부세계로 눈을 돌려 대상의 충실한 묘사와 여러 가지 사회악 고발에 열중했다.

 제2기는 48세까지로, 이 시기에는 안녹산의 난 동안 겪었던 여러 가지 경험으로 종래의 외부세계로 향하던 눈길을 내부로 돌려 마음속의 우수(憂愁)를 노래함과 동시에 자신의 우수를 다른 사람들의 우수와 일치시켜 다루었다.

 제3기는 54세까지 청두에 살던 몇 년 동안으로 또 한번의 전환을 이룬다. 이 때 그의 시풍은 자연이 인간에게 보여주는 선의(善意)로 향한다.

 제4기는 죽기 전인 59세까지의 시기로서, 특히 쿠이저우에 머문 2년 동안은 원숙의 경지에 이른 작품을 많이 썼다. '추흥팔수(秋興八首)', '영회고적오수(詠懷古跡五首)' 등 칠언율시의 명작을 남겼다. 이 시기의 시세계는 많은 모순을 포함하면서도 영원히 지속한다는 새로운 철학을 확립한 진지함과 따스함이 스며 있다.

 

두시(杜詩)의 특색

* 후대의 영향

 그의 시를 최초로 발견한 사람은 9세기 당나라 사람 원진으로, 그는 두보를 위해 묘지명을 썼다. 백거이(白居易)도 두보의 숭배자로, 그의 사회비판적 시는 두보에게 배운 것이다.

 두보에 대한 평가가 시단에서 확정된 것은 11세기 북송(北宋)의 왕안석(王安石소식(蘇軾황정견(黃庭堅) 등의 칭송에 의해서이다. 시성(詩聖)이란 말도 이즈음 생긴 듯하며, 그 뒤 계속해서 중국시의 전형으로 평가되었다.

 중국에서 문화혁명 이후 직접적인 조술(祖述)은 사라졌으나, 중국 최고 시인으로서의 위치는 문화대혁명 한 시기를 제외하고는 오늘날 중국에서도 확고하다.

 '구당서(舊唐書)'에서 말하는 집() 60권은 전해지지 않고, 후세에 두집(杜集)의 원전이 된 것은 11세기 북송의 왕수(王洙)가 편집한 '두공부집(杜工部集, 20)'으로 그것의 남송간행본이 지금까지 전해진다.

 주석서(註釋書) 가운데 송나라 곽지달(郭知達)'구가집주(九家集註)'는 훈고에 뛰어나고, ()나라 전겸익(錢謙益)'두시전주(杜詩箋註)'는 사실(史實)에 정통하며, 구조오(仇兆鰲)'두시상주(杜詩詳註)'는 집대성된 것으로서 편리하다.

 전집색인으로는 연경(燕京)대학이 편찬한 '두시인득(杜詩引得)'이 있고, 전기로는 타이완 원이둬(聞一多)'두소릉선생연보회전(杜少陵先生年譜會箋)'이 뛰어나다.

 

 <강촌(江村)>

 淸江一曲抱村流 (청강일곡포촌류)   맑은 강 한 굽이 마을을 감싸고 흐르는데

 長夏江村事事幽 (장하강촌사사유)   기나긴 여름 강촌은 만사가 한가롭다

 自去自來梁上燕 (자거자래양상연)   제비는 마음대로 처마를 들고나고

 相親相近水中鷗 (상친상근수중구)   수중의 갈매기는 가까이 가도 날아갈 줄 모른다

 老妻畵紙爲棋局 (노처화지위기국)   늙은 아내는 종이에 바둑판을 그리고

 稚子敲針作釣鉤 (치자고침작조구)   어린 아들은 바늘을 두드려 낚싯바늘을 만드는구나

 多病所須唯藥物 (다병소수유약물)   다병한 몸에 필요한 것이란 오직 약물뿐

 微軀此外更何求 (미구차외갱하구)   미천한 이내 몸이 달리 또 무엇을 바라리오

 

 

◈ 당대의 대시인, 두보가 시를 읊던 두보초당(杜甫草堂 : 두푸차오탕)

 한평생 벼슬할 뜻을 품고서도 저버려야 했던 당대의 대시인 두보가 성도에 있을 때 기거하던 곳으로 성도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759년 겨울, 두보는 안사의 난(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이 정권찬탈을 위해 일으켰던 반란)을 피해 현종(玄宗)을 따라 촉으로 피난을 왔는데, 친한 친구 엄무(嚴武)의 도움으로 서쪽 교외의 경치가 아름다운 호숫가에 초가집을 짓고 살았다. 이듬 해 봄에 초가집이 완공되자 사람들은 성도초당(成都草堂)이라고 불렀다. 또 완화계(浣花溪)에 있기 때문에 완화초당이라고도 한다.

 두보는 이곳에서 4년여 동안 살았는데, 이때 지은 시중에서 현재까지 전해지는 시는 240여 수가 된다.

 

 대표적으로 복거(卜居), 춘야희우(春夜喜雨), 강촌(江村) 등의 시는 초당에서 지내던 그의 시름없는 한가로운 심경을 읽을 수 있다. 현재 보존되고 있는 초당은 1500년과 1811년 두 차례의 확장공사로 인해 넓이가 20ha가 조금 넘으며 경내에는 대해(大懈), 시사당(侍史堂), 공부사(工部祠), 사능초당(沙陵草堂)의 석비 등 건축과 다른 많은 문화재가 있다. 정문에 들어서면 시사당과 두보의 소상(塑像)이 있고, 양쪽의 진열실에는 두보의 시집과 연구서 등이 전시되어 있다.

 

o 위치: 성도시 서쪽 교외 완화계

o 교통: 4번, 17번, 35번 버스 통혜문(通惠門), 초당사 역

o 개방시간: 07시~20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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