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武則天(무칙천, 624~705) - 중국사의 유일한 여성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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則天武后(측천무후)의 무자비(無字碑) · 韋皇后(위황후) · 안락공주(安乐公主)

당 제3대 황제 高宗(고종, 李治) · 태평공주(太平公主) · 천재적인 여류 시인 상관완아(上官婉兒) · 적인걸(狄仁傑)

 

◈ 중국사의 유일한 여성황제- 武則天(무칙천, 624~705)

 武则天(唐朝至武周时政治家,武周皇帝)

 출생-사망 : 624~705.12.16 (81세)

 국적/왕조 : 중국 당(唐)

 재위기간 : 690~705 (15년)

 본명 : 무조(武曌). 아명(兒名)은 무미랑(武媚娘)

 별칭 : 무후, 무측천, 측천후, 시호(諡號) 측천순성황후(則天順聖皇后)

 출생지 : 중국 산시성

 

 성은 무(武), 이름[諱]은 조(曌), 시호(諡號)는 측천순성황후(則天順聖皇后)이다.

 중국에서 여성으로 유일하게 황제(皇帝)가 되었던 인물로 무후(武后), 무측천(武則天), 측천후(則天后), 측천제(則天帝), 측천여제(則天女帝), 측천여황(則天女皇) 등으로도 불린다.

  

 

 측천무후(測天武后)는 본명은 무조(武曌), 무후(武后), 무측천(武則天)이라고도 한다.

 그녀의 본명인 조(曌(비칠 조))는 그녀 스스로가 만들었다. 태양을 가리키는 '일(日)'과 달을 지칭하는 '월(月)', 그리고 하늘을 의미하는 공(空)세 글자가 합쳐 이루어진 것으로 하늘에 해와 달이 동시에 떠있어 세상을 비춘다는 뜻이다.

 

 당(唐)나라 고종(高宗, 李治, 628~683, 재위: 649~683)의 비로 들어와 황후에까지 올랐으며 40년 이상 중국을 실제적으로 통치했다. 생애 마지막 15년(690~705) 동안은 스스로 황제가 되어 국호를 당에서 주(周)로 변경하고 천수(天授)라는 연호를 썼다. 고대의 주(周)나라와 구분하기 위하여 무주(武周)라 일컽는다. 무후(武后)는 당조의 기반을 튼튼하게 해 제국을 통일했다.

 

 무후(武后)는 638년 13세에 당 태종(太宗)의 후궁으로 궁중에 입궐했다.

 

 이때는 당조가 태종(太宗)의 노력으로 중국을 막 재통일한 시기였다. 태종의 후궁으로 어떠한 생활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지만 649년 태종이 죽을 무렵 이미 태자(후의 고종)와 깊은 관계에 있었다고 한다. 태종이 죽자 관습대로 비구니가 되어 불사(佛寺)에 은거하고 있던 중 신임황제인 고종이 그곳을 자주 방문했다. 고종은 마침내 무후를 궁중으로 데려와 소의(昭儀)라는 비의 지위를 주었다. 무후는 먼저 궁중 내의 비빈들을 제거하고, 마침내 황후를 폐위시키고 655년에는 자신이 황후가 되었다.

 

 무후와 고종 사이에 4남 2녀가 태어났다. 무후는 자신의 세력을 이용하여, 태종 때부터 봉직해온 중신들을 차례로 숙청했다. 이들은 무후가 황후에 봉해지는 것을 반대했던 대신들이었다. 그들이 반대한 주된 이유는 무후가 고관(高官)의 딸이기는 하지만 귀족가문의 태생이 아니라는 점 때문이었다. 이들은 또한 무후가 선제(先帝)인 태종의 후궁이었다는 점을 들어 무후와 고종의 관계는 근친상간이 되므로 그 관계를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660년이 되어 무후는 반대파를 파직· 추방· 처형시킴으로써 모두 제거했다. 황족인 고종의 숙부마저 주살했고 그의 일가도 모두 유배당하거나 몰락했다.

 

 고종이 오랫동안 중병이 들어 정사를 돌볼 수 없게 되자 무후가 전권을 장악하여 고종의 병약함을 핑계로 통치를 해나갔다.

 

 천성이 나약했던 고종은 무후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게 되었고, 고종이 죽기까지 23년 동안 무후가 중국의 실질적인 통치자 역할을 했다. 무후는 모반의 가능성이 있는 정적들을 계속 제거해나갔고 그 정적이 자신의 피붙이일 때도 숙청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고, 도전세력이 있을 때 자신을 지원한 사람들 중 인재들을 중용하여 제국의 행정을 효율적으로 운영해나갔다. 무후는 뛰어난 행정수완, 용기, 과단성 및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태도 등으로 인하여 궁중 내의 사람들로부터 사랑은 받지 못했으나 존경은 받았다.

 

 655~675년에 당제국은 무후가 중용하여 승진시킨 군사 지도자들의 노력으로 신라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했다. 683년 고종이 죽자 태자인 철(哲)이 즉위하여 중종(中宗, 당나라 제4대 황제, 이현(李顯), 656~710, 재위: 705~710)이 되었다. 중종은 위씨(韋氏) 가문의 여자를 황후로 삼았는데 위황후(韋皇后, 660?~710)는 중종이 선제인 고종만큼이나 나약하고 무능하다는 것을 알고 자신을 무후와 같은 지위로 격상시키려 했다.

 

 한 달 뒤 무후는 중종을 폐위시켜 추방해버리고 둘째 아들인 예왕단(豫王旦)을 즉위시키니 이가 곧 예종(睿宗, 당나라 제5대 황제, 이단(李旦), 662~716, 재위: 710~712)이다. 예종은 명목상의 황제에 불과했고 실권은 모두 무후의 손에 있었다. 중국 남부지역에서 당조 지지세력과 야심만만한 젊은 관리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몇 주 지나지 않아 황실을 지키는 충성스런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무후가 관군을 동원하여 손쉽게 반란을 진압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의 규모를 과시하자 무후의 정치적 기반은 요지부동인 것처럼 보였다.

 

 6년 뒤인 690년 65세의 무후는 왕위를 찬탈하여 스스로 황제가 되었으며,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15년 동안 황제로서 통치했다.

 

 이 시기에 황위계승의 문제가 가장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다. 무후의 친정인 무가(武家)의 조카들은 무후가 이미 국호를 주로 바꾸었으니 이가(李家)의 당조 후계자들을 제치고 무씨의 조카들 중 한 사람에게 황위를 물려주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무씨 조카들이나 그 아들 중에는 대중적 인기가 있거나 탁월한 재능을 가진 인물이 없었다. 한편 무후의 친아들인 전 황제 중종과 예종은 지지세력이 없었고, 능력은 더욱 형편없었다.

 

 그러나 무후의 충성스런 측근들 사이에서도 당조를 세운 이가를 무시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이 점점 커져갔다. 698년 무후는 충성스런 측근들의 간언을 받아들여 유배된 중종을 궁중으로 불러들여 태자로 책봉했다. 이같은 결단을 내린 것을 보면 무후가 대단한 성품을 가진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무후는 황위계승에 있어서 자신의 가문을 내세우지도 않았고 조카를 후계자로 지목하지도 않았다.

 

 무후는 자신의 가문을 흥성하게 하겠다는 야망은 없이 단지 임종시까지 자신의 권력을 놓지 않겠다는 결심을 가진 듯했다. 699년경 말년의 무후는 장역지(張易之)와 장창종(張昌宗)의 장씨 형제에게 총애를 베풀었다. 이들은 기예(技藝)를 가진 간신들로서 기발한 연회와 수단 좋은 아첨으로 무후의 총애를 받았다.

 

 장씨 형제들은 궁중 사람들과 대신들에게 많은 원성을 사게 되었고, 이들은 무후에게 장씨 형제의 해악을 경고했다. 무후는 이들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중병에 걸려 전보다 더 장씨 형제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705년 2월 대신들과 장수들이 모반을 일으켜 궁중을 장악하고 장씨 형제를 처형한 뒤, 늙고 병든 무후에게 양위를 강요했다. 무후는 중종에게 양위한 뒤 다른 궁으로 옮겨가 살다가 705년 12월에 죽었다.

 

 무후는 사회적 지위와 관계 없이 유능한 사람들을 직접 골라서 쓴 탁월한 통치자였다.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것이 주된 동기였지만 무후가 시행한 정책은 중국 역사상 매우 중대한 의의를 갖는다. 당대의 중국사회가 군사적·정치적 귀족계층에 의해 통치되던 사회에서 사대부 가문출신의 문인 관료계층이 주도하는 사회로 바뀌게 된 것은, 무후가 추진했던 정책의 결과였다. 무후의 통치정책 중 이러한 측면이 갖는 중대한 의미는 오랫동안 중국사가들의 편견에 의해 가려져왔다. 이들은 무후가 왕위를 찬탈했을 뿐만 아니라 반대파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했다는 점을 들어 무후의 치적을 과소평가해왔다.

 

 무후는 확고한 기반 위에 새로운 통일제국을 확립했고 필요한 사회개혁을 단행했다. 이로 인해 당조의 안정은 공고하게 되었고 중국 문화사상 가장 결실이 많은 한 시대를 가져왔다.

 

()나라 - 고조, 태종, 고종, 측천무후

대수

지위

성명

생몰

재위기간

제1대

고조(高祖)

이연(李淵)

566~635 (69세)

618~626 (8년간)

제2대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

598~649 (51세)

626~649 (23년간)

제3대

고종(高宗)

이치(李治)

628~683 (55세)

649~683 (34년간)

 

주(周)

(무주(武周))

측천무후

(則天武后)

무조(武曌)

624~705 (81세)

690~705 (15년간)

- 638년 13세에 당태종의 후궁으로 궁중에 입궐

- 649년 태종이 죽을 무렵 이미 태자(후의 고종)와 깊은 관계

- 654년 황후가 됨

- 고종이 오랫동안 중병이 들어 정사를 돌볼 수 없게 되자 무후가 전권을 장악

- 690년 65세에 왕위를 찬탈하여 스스로 황제가 됨

- 705년 2월 대신들과 장수들이 모반을 일으킴. 중종에게 양위

- 705년 12월 82세에 병사

- 660년부터 약 30년간 실질적으로 통치

  

 

 여태후(呂太后, BC 241~BC 180)에 대한 엇갈린 평가는 그녀보다 약 900년 후에 태어난 측천무후(測天武后)와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측천무후에 대해서 '중국 역사 속에서 가장 걸출한 여성 정치인'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이것은 조금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이다. 그렇지만 그녀가 중국 역사상 가장 크게 출세했던 여인이라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중국 역사 속에는 무려 550명 정도의 황제가 존재하는 데, 이들 중에서 여성은 측천무후 단 한 사람뿐이다.

 

 그녀는 당나라 개국공신 무사확(武士彠, 576~635)의 둘째 딸로 원래 이름은 조(照)였다. 무조의 탄생과 관련해서도 어김없이 원천강(袁天綱, 당(唐)나라 성도(成都) 사람으로 관상을 아주 잘 보았다고 함)이라는 신비한 관상가의 이야기가 등장하지만,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다. 무사확은 개국공신이라고는 하지만 원래는 목재상이었다가 수 양제 시절에 실시된 대규모 운하공사로 돈을 많이 벌어 관직을 샀던 사람이다. 그는 당 고조(高組) 이연(李淵) 휘하에서 무기를 보급하고 관리하는 상당히 중요한 직책을 수행했다.

 

 무사확은 14인의 개국공신에 이름을 올렸으나 출신이 미천해서 다른 공신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 고조 이연은 이 사실을 안타깝게 생각해서 그가 상처를 하자 수나라의 재상을 지냈던 양달(楊達)의 딸을 그의 후처로 중매했다. 무사확은 사천 지역의 절도사로 있을 때 문제의 둘째 딸 조를 낳았으며, 그녀에게는 언니 이외에도 원상(元爽)과 원경(元慶)이라는 전처 소생의 두 이복 오빠가 있었다.

 

 무조는 나이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출중한 미모와 총명함으로 소문이 났다. 아버지 무사확은 그녀에게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공부를 시켜 말 타기와 활쏘기, 춤과 노래에 이르기까지 못하는 것이 없을 정도였으며, 특히 시를 짓고 글을 쓰는 데 대단히 능했다고 한다. 당시는 당 태종 이세민이 통치하던 '정관의 치(貞觀之治)' 말엽으로 황제는 진정으로 사랑하던 황후 장손(長孫) 씨를 잃고 그 후유증으로 어린 소녀들을 탐닉하던 때였다.

 

 아름답고 총명하다는 무조의 소문이 황제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리 없었다. 그녀는 열네 살의 나이로 황궁에 들어가야 했다. 그것도 비빈이 아니라 아주 품계가 낮은 단순한 재인(才人)의 지위였다. 공신임에도 불구하고 명문귀족에 끼지 못하는 서민 출신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황궁에서 미랑(媚娘)이라고 불리게 된 무조가 다른 소녀들과는 달리 책읽기를 좋아하고 시와 서에 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황제 이세민은 그녀를 황실의 서가를 관리하는 직책에 임명하였다. 이는 그녀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직책이었다. 이로써 무미랑은 독서와 학문을 즐길 수는 있었지만 황제의 총애를 얻는 데는 실패했다. 12년 동안이나 곁에서 시중을 들었는데도 아이를 얻지 못했으며, 품계도 궁에 들어올 때의 재인 그대로였다.

 

 이에 관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나는 무(武)씨 여인이 이씨 자손을 시해하고 천하를 얻는다는 예언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예언설에 대한 신빙성은 별로 없다.

 

 다른 하나는 천리마 사자두(獅子頭)에 얽힌 이야기이다. 이세민은 서역에서 이 말을 공물로 받았는데 성질이 하도 사나워서 감히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그러자 무미랑이 나섰다.

 "이 말을 길들이기 위해서는 세 가지 물건만 있으면 된다. 억센 채찍과 쇠망치와 날카로운 검이 그것이다. 우선 채찍으로 가죽이 벗겨질 때까지 내리친다. 그렇게 해서 굴복하지 않으면 쇠망치로 머리통을 내리친다. 그래도 굴복하지 않으면 검으로 목구멍을 가르면 된다."

 

 이러한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이세민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기겁을 했겠지만, 이것 역시 그녀의 사악한 심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후일 첨가된 기록일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서술보다 무미랑이 이세민에게 사랑받지 못한 이유로 가장 그럴듯한 기록은 '대단히 아름답고 총명하기는 했지만 애교가 부족했다'라는 것이다. 자고로 예쁘고 똑똑하지만 뻣뻣한 여성은 그리 큰 매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특히 당시의 이세민처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남자들에게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황제 이세민의 건강이 악화되자 무미랑은 절망적인 상황에 빠졌다. 황제가 죽으면 아이를 낳지 못한 궁녀들은 모두 출가해서 평생을 수절하며 살아야만 하는 것이 당시 황실의 법이었다. 그런데 절망 속에서 아주 조그만 가능성이 보였다. 그녀에게 두 번째의 남자가 나타난 것이다. 바로 태자인 이치(李治)였다. 당시 이세민은 고구려 원정을 감행했다 처참하게 실패한 후 깊은 병에 들었다. 무미랑은 병석에 누운 이세민을 간호하고 있었는데, 아버지에게 문안을 드리러 온 태자가 무미랑에게 반한 것 같은 태도를 보였다.

 

 태자 이치는 원래 태자감이 아니었다. 그는 몸이 약하고 성격이 유약했으며 애당초 황제가 되어 천하를 얻겠다는 야심도 없는 인물이었다. 다른 유력한 왕자들을 제치고 그가 후계자로 결정된 데는 개성이 강한 군주를 피하고자 했던 혁명동지들에 대한 이세민의 정치적인 배려가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황제 이세민과 승상이자 처남인 장손무기(長孫無忌)를 중심으로 하는 중신들 사이에 있었던 정치적 타협의 산물로 전혀 황제의 소양을 갖추지 못한 인물이 태자가 되었던 것이다.

 

 심약한 이치는 아버지가 중병에 걸리고 회복 가능성이 거의 없자 몹시 불안해하면서 그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황실에서는 침전 바로 옆에 태자의 방을 마련해 그가 머물 수 있도록 조치했다. 이 시기에 태자와 무미랑은 어느 정도 서로 교감을 나누었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이세민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인해서 쉰한 살이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무미랑은 법에 따라 비구니가 되어 감업사(感業寺)로 출가했다.

 

 태종(太宗)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이세민의 첫 번째 기일이 돌아오자 황제가 된 이치는 예불을 올리기 위해 감업사를 찾았으며, 이곳에서 비구니가 된 무미랑과 일 년 만에 재회했다. 그녀는 이날이 마지막 기회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필사적인 노력으로 마지막 승부수를 던져 이치를 유혹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후 두 사람은 감업사에서 은밀한 관계를 지속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스물일곱 살이었으며, 태자 이치는 그녀보다 세 살 아래였다.

 

 연인과의 밀회를 위한 황제의 감업사 행차가 잦아지자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황실에서는 무미랑의 환속과 재입궁을 추진했다. 당시의 황후인 왕(王)씨는 개국공신 왕인우(王仁佑)의 딸이었는데, 이치의 네 부인 중 하나인 숙비 소(蘇) 씨로 인해서 골치를 썩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입궁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무미랑은 황제와의 밀회 일 년 만에 다시 입궁했다. 이번에는 소의(昭儀)의 직급이었는데, 황제의 공식적인 여인 121명 중에서 여섯 번째 서열이었다.

 

 절망의 끝자락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무 소의(武昭儀)는 노련하게 처신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궁에 들어왔던 총명한 열네 살의 소녀는 험난한 황궁 생활 12년과 고독한 산사에서의 2년이라는 인고의 세월을 보내고 나서 처세에 능수능란한 스물여덟 살의 괴물로 바뀌어 있었다. 무 소의는 자신이 다시 입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황후를 지극정성으로 모시며, 왕 황후와 소 숙비의 암투에서 황후의 편에 섰다. 다른 한편으로는 환관들과 궁녀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황제 이치는 이미 무 소의에게 완전히 빠져 있었다. 입궁해서 바로 다음해에 아들 이홍(李弘)이 태어나자 숙비는 황제의 총애를 잃고 서민으로 강등되었다. 사실 황후의 입장에서는 늑대를 쫓아내기 위해 호랑이를 불러들인 형상이었지만, 무 소의가 워낙 노련하게 처신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무 소의가 얻고자 한 것은 황제의 은총이 아니라 무한한 권력이었으며, 그것을 위해서는 황후의 자리가 꼭 필요했던 것이다.

 

 황제와 황후는 태자 시절 일찌감치 결혼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오랫동안 아이가 없었다. 무 소의가 황후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작은 희생이 필요했다. 무 소의가 낳은 두 번째 아이는 딸이었다. 이 어린 공주는 매우 예쁘고 귀여워서 황후를 비롯한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황후가 이 아이를 보고 간 다음 갑자기 이 아이가 죽은 채 발견되었다.

 

 황후가 조금 전에 다녀갔음을 알게 된 황제 이치의 분노가 폭발했으며, 황후 폐위에 대한 공식적인 논의가 시작되었다. 정사가 아닌 야사에서는 무 소의가 황후를 모함하기 위해서 자신의 딸을 이불로 덮어 질식해 죽게 했다고 하지만, 사건의 현장에는 무 소의 혼자 있었으니 진위를 판단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후일 그녀가 보여준 잔인함이나 포악함으로 판단할 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이다.

 

 황제와 중신들이 모여 폐위를 논의하고 있는 왕 황후는 위국공(魏國公)의 딸이었다. 그러한 여인을 폐하고 무 소의를 황후로 봉하겠다는 황제의 의도는 난관에 봉착했다. 무 소의가 황제의 뒤에서 발을 내린 채 논의 과정을 모두 듣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공신들의 반발은 거셌다. 이세민이 수나라를 타도하고 천하를 얻게 만든 장본인인 장손무기와 재상인 저수량(楮遂良)은 목숨을 걸고 반대했다. 특히 저수량은 무 소의가 비천한 출신인데다 한때 선왕인 태종의 여인이었으므로, 그런 여인을 황후로 임명한다는 것은 불가하다며 이마에 피가 흐를 정도로 땅바닥을 머리를 찧으며 읍소했다.

 "저런 자를 어찌하여 때려죽이지 않으시는 겁니까!"

 

 분노한 무 소의가 참지 못하고 발 뒤에서 소리쳤다. 저수량은 목숨을 잃을 처지였지만, 다른 공신들이 나서서 그를 변호하여 간신히 호남(湖南) 지방의 장사라는 시골로 좌천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황제는 공신 이적(李積)에게 판결을 부탁했다. 그러자 이적은 황후를 폐하거나 다시 봉하는 일은 전적으로 황제의 개인적인 일이며, 그러한 문제는 중신들이 동의하고 말고 할 사안이 아니라고 못을 박았다. 결국 무 소의는 서른네 살의 나이로 황후에 책봉되었다.

 

 황후가 되어 야심을 이룬 무 태후에게 달콤한 복수의 시간이 찾아왔다. 심약하고 우유부단한 황제 이치와는 달리 그녀는 단호하고 엄정한 성격이었다. 황후의 책봉을 반대했던 중신들에 대한 숙청작업이 이루어져, 스무 명이 넘는 원로들이 좌천되었고, 이들의 의장 격이면서 황제에게는 외삼촌이 되는 장손무기는 유배를 당한 후 강요에 의해 목을 매달아 자결했다. 장손무기의 경우는 나약한 황제를 내세워 권력을 장악하려 했으니 인과응보였다고 할 수 있다.

 

 황제 이치는 정신적으로 나약했을 뿐 아니라 몸까지 허약했기 때문에 점차 무후에게 더 많은 권한을 위임하게 되었다.이러한 와중에도 무후는 아이들을 연이어 낳아, 어려서 죽은 딸을 제외하고도 슬하에 모두 4남 1녀를 두었다.

 

 네 아들은 순서대로 이홍(李弘), 이현(李賢), 이현(李顯), 이단(李旦)이었으며, 딸 하나는 후일 여러 방면에서 이름을 날리게 될 태평공주(太平公主)였다. 무 태후는 태자인 이충(李忠)을 폐하고 자신의 큰아들 이홍을 새로운 태자로 세웠다.

 

 황제 이치는 무후에게 권력이 집중되고 그녀의 전횡이 심해지자 점차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재상인 상관의(上官儀)를 은밀하게 불러 황후를 폐하는 조서를 작성하도록 지시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큰일이 무 태후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리 없었다. 무 태후는 황제에게 호소했고, 마음이 약한 황제는 모든 책임을 상관의에게 떠넘겼다. 상관의는 폐위된 태자 이충을 다시 세우기 위해 모반을 도모했다는 모함을 받아 이충과 함께 처형되었으며, 가족들은 모두 노비로 전락했다.

 

 무 황후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두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서적을 편찬한다는 명목으로 북문학사(北門學士)를 설립했다. 자신이 뛰어난 시인이었으므로 그녀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기관이기도 했지만, 무후는 이 기관을 통해 문인과 학자들로 구성된 두뇌집단을 확보했으며 끊임없이 새로운 인재를 양성해서 배출했다. 이 북문학사 출신들은 무 황후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시행했던 갖가지 정책에 대한 이론적인 기반을 제공했으며, 후일 그녀가 황제로 등극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될 집단이었다.

 

 스스로 황제가 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아들을 제치고 본인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겠다는 무 황후의 야심은 황제 이치가 생존해 있던 시절부터 이미 드러나고 있었다. 그녀는 일찌감치 황제 이치를 천황(天皇)으로 올리면서 자신은 천후(天后)로 승격시키는 조치를 취해 놓고 있었다. 그런데 절대 권력을 향한 가장 큰 장애물은 역설적으로 이충을 대신해서 태자가 된 아들 이홍이었다.

 

 천성이 너그럽고 겸허하면서도 심지가 굳었던 이홍은 황제와 중신들의 큰 기대를 받고 있었다. 몸이 약했던 황제는 그에게 가능한 한 빨리 양위하기 위해 열 살을 갓 넘긴 시절부터 이홍을 조회에 참석시켜 정치적 감각을 키워 주었다. 태자 이홍은 장성하면서 자신의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어머니와 대립하기 시작했다. 무후의 입장에서는 머지않아 권력이 자신의 손에서 떠나 아들에게 가리라는 사실은 불을 보듯 빤했다.

 

 이 상황에서 무후는 잔인한 선택을 했다. 자신의 아들에게 독주를 마시게 한 것이었다. 태자 이홍이 독살됐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스물네 살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심약한 황제가 받은 충격은 대단했다. 그는 국사를 거의 돌보지 못할 지경이 되자 둘째인 이현(李賢)을 태자로 임명하고 그에게 양위를 하려고 했다. 이현은 영리하고 책읽기를 좋아해 상당한 지식을 쌓았을 뿐 아니라 그의 형만큼이나 탁월한 능력과 함께 강건한 기백까지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무후는 이현에게 여러 번 경고를 보냈지만 태자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모자 사이의 대립이 심해지자 무후는 사람들을 사주해서 태자가 사생활이 문란할 뿐 아니라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고 모함하도록 했다. 동궁을 수색하자 마구간에 숨겨진 수백 종류의 무기가 발견되었다. 황제에게는 이러한 음모를 막을만한 힘이 없었다. 태자는 서인으로 강등되어 파주에 유폐되었고, 4년 후 황제 이치가 죽자 두 달 만에 살해되었다.

 

 둘째 아들 이현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다. 무후에게는 손자들이었지만, 후환을 두려워했던 그녀는 이 세 손자들을 황궁 깊숙이 유폐했다. 권력은 모정에 우선한다. 최소한 무 황후의 경우에는 그랬다.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서 두 아들을 살해하고 어린 손자들을 유폐했던 것이다.

 

 주로 병석에서 지내던 황제가 마침내 죽자 절대 권력을 향한 측천무후의 도전은 순풍에 돛을 올린 셈이 되었다. 병약했던 황제 이치였지만, 장장 35년이나 제위에 있었다. 그는 죽고 나서 고종(高宗)이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태자인 셋째 아들 이현(李顯)이 황제 직위를 계승하게 되었으니 이 사람이 중종(中宗)이다. 그는 원래 아버지처럼 심약하고 야심도 없는 인물이었으며 어머니에게 순종적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황제의 자리에 있은 날은 단지 55일이었다. 자신의 장인을 재상으로 삼으려고 한 일이 무후의 비위에 거슬렸던 것이다. 그녀는 셋째 아들을 유폐시키고 막내아들인 이단(李旦)에게 황제의 지위를 넘겼다. 이 사람은 후일의 예종(睿宗)이다. 이런 지경이니 이단은 있으나 없으나 매한가지인 허울뿐인 황제였다. 고종이 죽었을 때 측천무후의 나이는 이미 예순한 살이었는데, 권력에 대한 그녀의 집착은 점차 도가 심해졌다.

 

 무씨 친족들이 득세하면서 황족들과 원로대신들을 밀어내고 조정의 요직을 독차지했다. 황제가 어리거나 무능할 때 태후가 정치에 관여하는 일이야 흔했지만, 스스로 황제를 폐하고 새로운 황제를 세우는 일은 분명히 반역행위였다. 황후가 점차 왕조를 탈취하는 길로 들어서자 당연히 명분을 중시하는 사람들의 반발이 일어났다. 원로들은 물론 근왕병들의 움직임까지 심상치 않은 가운데 드디어 반란이 일어났다.

 

 중종의 폐위를 계기로 측천무후에 의해 좌천되었던 유주사마(柳州司馬) 서경업(徐敬業)과 고종의 신하였으나 측천무후가 부상하자 조정을 떠났던 저명한 문장가 낙빈왕(駱貧王) 이 주축이 되어 양주에서 봉기를 일으키자 순식간에 사람들이 모여 십만의 병력이 되었다. 승상인 배염(裵炎)은 이 반란을 진압하기보다는 이를 계기로 무후의 퇴진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측천무후에게는 최대의 위기였지만 유능한 장군들 덕분에 무장봉기는 40여 일 만에 진압되었으며 극심한 혼란은 수습되었다. 무후에게는 이 위기가 오히려 권력을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는 승상 배염을 사형에 처하면서 조정을 자신의 조카인 무승사(武承嗣)를 비롯한 충성스러운 측근들로 채웠다. 일단 위기를 넘긴 무후는 정권 탈취의 과정을 착착 진행시켰다.

 

 그녀가 서적 편찬을 위해 세운 북문학사는 어느새 비공식적이지만 막강한 권력기관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이미 이곳에서 '성씨록(姓氏錄)'을 발행해서 보잘 것 없던 자신의 무씨 가문을 최고의 명문가로 조작하였다. 그녀는 무씨 5대조를 왕으로 추증하고 수도를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길 계획을 세워 낙양의 이름을 신도(新都)로 바꾸었으며, 그곳에 대대적인 건축공사를 벌여 궁궐을 지은 후 명당(明堂)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때 환관 한 사람과 공모한 승려 법명(法明)이 '대운경(大雲經)'이라는 새로운 경전을 지어 무후에게 바쳤다. 이 경전에는 미륵불이 측천무후로 현신해서 세상을 다스릴 것이라는 예언이 포함되어 있었다. 무후는 불교의 미륵불 신앙을 바탕으로 해서 자신의 이름자를 바꾸었다. 원래 그녀의 이름은 '세상을 비춘다'라는 의미의 '조(照)'였다. 새로운 한자는 그 발음과 뜻은 그대로였지만, 해와 달이 합쳐진 '밝을 명(明)' 아래에 '허공 공(空)' 자를 쓰는 것이다. 미륵불이 환생하면서 하늘에 뜬 해와 달처럼 백성들에게 광명을 준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황제의 뒤에 쳐져 있는 발을 들어 올리고 자신이 직접 황제의 자리에 앉겠다는 의사의 표현이었다.

 

 정권의 탈취가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된 황실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중종 이현을 다시 황제로 옹립하자는 명분을 세워 당 고조의 열한 번째 아들 이원가(李元嘉)와 이정(李貞), 이충(李沖) 부자 등 황족 일가의 반란이 전국각지에서 산발적으로 터졌다. 그렇지만 지난 서경업의 난으로 단련이 된 무후는 이십여 일 만에 손쉽게 전국의 반란을 제압했다.

 

 마지막 결정적인 하늘의 뜻은 작은 조약돌을 통해서 전해졌다. 무후가 가장 신임하는 조카 무승상은 옹주 출신의 강동태(剛同泰)라는 인물이 낙수라는 장소에서 신비한 돌을 찾아냈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신기하게도 그 흰색의 돌에는 예언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성모께서 사람들 사이로 내려오셔서(聖母臨人)

 영원히 번창할 제업을 이룰 것이다.(永昌帝業)

 

 무후는 이 조약돌을 보도(寶圖)라고 이름 짓고, 발견 장소인 낙수에 커다란 절을 창건했다.

 

 또한 그녀는 새로 건축한 낙양의 새 궁전 명당의 이름을 만상신궁(萬象神宮)으로 짓고, 신궁의 대전 무성전(武成殿)에서 황제 이단이 '성모신황(聖母神皇)'이라는 존호와 함께 '신황지새(神皇之璽)'라는 새로 만든 옥쇄를 자신에게 바치도록 했다. 이제 황제가 모후에게 양위를 하는 아주 이상한 방식으로 진행될 역성혁명(易姓革命)은 시간 문제였다.

 

 이때 부유예(傅游藝)라는 관리가 수백 명의 지방 관리들을 대표해서 태후의 제업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무후는 그 청을 거절하면서도 부유예를 승진시켰다. 그러자 비슷한 내용의 상소가 빗발치면서 무려 육만 명이 넘는 관리, 귀족, 승려, 일반인 등등 갖가지 사람들이 이에 참여했다.

 

 당의 제3대 황제 고종(高宗) 이치가 죽고 나서 6년 후 드디어 무씨 왕조가 새롭게 탄생했다. 무후는 공자가 이상향으로 생각했던 고대의 주(周)나라를 모범으로 삼아 국호를 당(唐)에서 주(周)로 고치고 주나라의 문왕(周文王)을 시조로 삼았다. 무후의 아버지 무사확은 태조(太祖)로 추존되었다. 반면 황제인 이단은 황제의 아들이라는 의미의 황사(皇嗣)로, 황태자 이성기(李成器)는 황태손으로 강등되었다.

 

 무후가 세운 주나라를 원래의 주나라와 구별하기 위해서 후주(後周)라고 부른다. 이때 무후의 나이는 예순일곱이었으며, 당나라는 고조 이연이 왕조를 창업한 지 72년 만에 일단 공식적으로 종언을 고했다. 이로써 황실인 이씨는 급속히 몰락하고 무씨의 세상이 되었다. 무후의 조카인 무승사와 무삼사(武三思)를 비롯해 열 명이 넘는 일가들이 이씨 일가를 대신해서 군왕 이상의 직위에 봉해졌다.

 

 여인의 몸으로 황제의 자리를 차지한 측천무후는 공포정치를 통해서 정권을 유지했다. 그녀의 가장 기발한 발상은 밀고 제도를 체계화했다는 사실이다. 밀고를 받아 처리하는 전담부서를 만들었으며, 먼 지방에서 오는 밀고자들의 편의를 위해서 각 역에서는 역마를 제공했다. 밀고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접견했으며, 밀고한 내용이 사실로 밝혀지면 밀고자에게 녹봉을 내리거나 관리로 발탁했다.

 

 밀고와 관련한 심문에 대한 대비도 철저했다. 그녀는 잔혹한 성품을 가진 자들만 발탁해서 이들에게 심문에 관한 업무를 전담토록 했다. 이들 중에서 주흥(周興)과 내준신(來俊臣)이 가장 악명이 높았다. 이들은 가혹한 고문기법을 개발하고 새로운 고문도구를 발명했다. 일단 그들의 손아귀에 잡히면 죄가 있건 없건 빠져나오기는 불가능했다. 밀고 한 번에 수백 명의 목숨이 사라지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자 이러한 혹리(酷吏)들에 대한 원성이 높아져 갔다.

 

 무후의 목표는 명확했다. 정권을 탈취당해 불만이 많았던 황족들이 자연스럽게 밀고의 주요 대상이 되었다. 일단 반역의 혐의로 감옥에 갇히면 모진 고문이 기다리고 있어 자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후의 집권 초기에 황족들에 대한 집중적인 숙청이 이루어지자 당의 고조, 태종, 고종, 세 황제가 남긴 수십 명의 아들 중에서 무후의 소생인 중종 이현과 예종 이단만 남게 되었다.

 

 물론 이 밀고 제도로 인해서 황족뿐 아니라 그들과 연관된 중앙과 지방의 관리 수만 명이 목숨을 잃거나 모진 고문을 당한 다음 멀리 유배를 가야 했다. 불과 이삼 년 사이에 측천무후는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으며, 이와 함께 조정에는 인사 적체가 완전히 해소되고 젊은 피가 수혈되는 계기가 되었다.

 

 측천무후가 민심을 잡은 방식도 기가 막힐 정도로 멋진 것이었다. 그녀는 악명 높은 혹리들 중에서 먼저 주흥을 제거했는데, 이 일처리를 혹리의 좌장격인 내준신에게 맡겼다. 주홍은 본격적인 심문을 시작하기도 전에 모반의 죄를 자백한 후 처형되었다. 그 다음은 내준신의 차례였다. 주홍이 죽고 나서 얼마 후 측천무후는 내준신에게 폭정의 책임을 물어 그를 처형하면서 그의 일가까지 모두 멸했다.

 

 측천무후는 포퓰리즘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녀가 악명 높은 혹리들을 처형하자 민심은 일단 수습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인사 정책은 포퓰리즘의 핵심이었다. 그녀는 관직에 뜻이 있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스스로를 추천할 수 있다는 파격적인 조칙을 내렸다. 이론적으로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관리가 되어 녹봉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이러한 정책은 단지 구호에 그치지 않았고, 무후는 실제로 관리들을 지방에 파견해서 과거에 응시한 경험이 없는 선비들과 현재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사람들을 추천하도록 했다. 이런 식으로 추천받은 사람들은 정식 관리는 아니었으나 일단 시관(試官)이라는 이름으로 모두 임용했다. 단어의 의미 그대로 시관이 정식 관리로 발령받기 위해서는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야 했는데, 현대적인 인턴 제도와 유사한 시스템을 수백 년 전에 이미 시행한 셈이었다.

 

 원래 기득권 세력의 권력 세습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든 어떠한 사회체제 아래서나 발생하는 문제이다. 과거 제도는 이러한 병폐를 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아무리 과거 제도가 공정하게 운영된다고 해도 교육의 기회가 많은 명문가 출신들이 그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고 권력을 독점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그래서 과거 제도는 결국 기득권 계층을 보호하는 일종의 사회적 장벽으로 작동하기 마련이다.

 

 무후가 관직에 대한 문호를 실질적으로 개방하자 명문가들이 독점하고 있던 조정은 크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출세를 결정하는 요인으로 출신 집안이나 배경이 아니라 철저하게 개인의 능력이 우선시되었다. 측천무후 시절은 적인걸(狄仁杰), 이소덕(李昭德)과 같이 후세에 길이 이름을 남기게 될 명신들이 등용되고 활동하기 시작했던 시기이다.

 

 무후는 많은 사람들에게 관직을 개방해서 인심을 얻었다. 이러한 제도는 왕국에 기초한 봉건체제의 중국 사회가 거대한 관료기구에 의해 움직여지는 체제로 재편되어 간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그렇지만 이것은 양날의 칼과 같은 것이었다. 비대한 관료조직에는 엄청난 유지비용이 소요되며, 능력만 있다면 누구나 관리가 되어 토지로 봉록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기회의 균등'이라는 민주적인 기본적인 원칙이 실현된 것이지만, 먼 후일 대단히 비효율적이고 불건전한 형태로 변모하게 될 중국식 관료체제는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측천무후는 철저한 숙청작업과 포퓰리즘을 통해서 정치적으로는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개인적으로는 고독하고 불안한 날이 연속되는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한 이유에서였겠지만, 무후는 개인적인 삶의 상당 부분을 남자들에게 의존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그녀가 음탕한 요부였다고 매도하고 있지만, 이 문제는 호색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결론이 달라질 것이다. 사실 무후를 중국사에서 별로 이름을 남기지 못한 보통 황제들의 호색행각에 비교한다고 해도 대단히 정숙한 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측천무후는 말년에 황궁 내에 공학부(控鶴府)라는 기관을 두고 스무 살 안팎의 미소년 일흔두 명을 모아 자신의 잠자리 시중을 들게 하였다. 그러나 이 공학부는 무후가 색을 밝혔다는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이것은 황실에서 비전되었다고 하는 방중술의 일환으로, 역대 황제들이 어린 여자들과 성 관계를 함으로써 그들의 기운을 빌어 젊음을 유지했다는 채음보양(採陰補陽)의 상대개념인 채양보음(採陽補陰)의 비법이었다.

 

 쉽게 말하면 무후는 늙지 않기 위해서 결사적인 노력을 했던 것이다. 이러한 비법이 실제로 효험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무후는 일흔이 넘었을 때에도 그녀의 나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싱싱한 외모가 시들지 않았다고 전한다. 특히 피부가 일품이라 일흔이 넘은 나이임에도 십 대 소녀와 같은 탱탱한 피부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말년의 미소년들을 제외한다면 무후가 마음을 열었던 남자들은 몇 사람 되지 않았으며, 모두 순정적인 관계였다. 그리고 남자 복도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첫 번째 인물은 풍소보(馮小寶)라는 한량이었는데, 이 사람은 고향에서 죄를 짓고 도주해 백마사(白馬寺)라는 절에서 중노릇을 한 적이 있었다. 백마사는 무후가 비구니 자격으로 머물고 있던 감업사(感業寺)와 인근한 절이었다.

 

 무후와 풍소보는 이 시절에 만나 친하게 지낸 적이 있으며, 수십 년 만에 고종의 고모인 천금공주(千金公主)의 소개로 재회했다. 무후는 환속해서 장사를 하고 있던 풍소보에게 설회의(薛懷義, ?~695)라는 이름을 주고 다시 출가하도록 한 뒤 백마사의 주지로 임명했다. 설회의는 황실의 불교 행사를 주관한다는 명목으로 황궁에 자유롭게 출입했으며 태사(太師)라는 존칭으로 불렸다.

 

 그는 만상신궁의 건축 책임자이기도 했으며, 이 건축사업의 공로를 인정받아 양국공(梁國公)에 봉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설회의는 원래 믿을만한 사람이 아니었으며, 오만방자한 성격이었다. 무후의 총애를 받자 기고만장했으며, 무후의 사생활까지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녀 그녀의 수심이 깊어졌다. 그러자 어머니의 근심거리를 알게 된 외동딸 태평공주(太平公主, 665~713)가 자객을 보내 그를 제거했다.

 

 무후의 다음 남자는 사람 됨됨이는 쓸 만했다. 어전 시의(侍醫)였던 심남료(沈南蓼)라는 인물로, 무후와 비슷한 연배의 신중하고 온화한 사람이었다. 그는 무후의 주치의로 정성을 다해 그녀를 보살폈으며, 그러는 와중 정신적인 교감이 생겼다. 그는 무후의 총애를 업고 권력을 휘두르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무척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이어서 무후가 정신적으로 상당히 많이 의존했지만 좋은 친구 사이처럼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는 관계였다. 그의 신체는 이미 쇠약해서 육체적으로 무후를 만족시키는 일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장역지(張易之, ?~705)와 장창종(張昌宗, ?~705) 형제는 명문가 출신으로 스무 살을 갓 넘긴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외모도 준수할 뿐 아니라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사람들로 부와 권세를 가지고 있던 바람기 많은 귀부인들 사이에서는 이미 명성이 자자한 한량들이었다. 화려한 남성 편력을 자랑하던 이 낙양의 유한부인 그룹의 리더가 바로 태평공주였다. 그녀는 상당히 영리했지만 못 말리는 바람둥이로 공식적인 결혼만 세 번을 하면서 무후의 골머리를 썩였는데, 그녀가 이들 형제를 무후에게 추천했다.

 

 장역지와 장창종 형제는 공학부에 소속되어 무후의 총애를 받았다. 바로 이 형제가 무후의 시절 말년을 어지럽히게 되는 원흉들이다. 무후의 나이가 여든을 바라보자 그녀의 판단력이 현저히 흐려졌고, 장씨 형제들이 무후의 총애를 믿고 전횡을 일삼기 시작했다. 그들은 공학부 소속의 미소년들을 중심으로 파당을 만들어 정사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한편 측천무후의 말년에 살아남은 두 아들 중에서 셋째인 중종 이현은 유배되어 있었으며, 막내인 예종 이단은 '황제의 아들'이라는 신분으로 전락해 권력의 핵심에서 멀찌감치 밀려나 있었다. 이단 대신 무후를 보좌한 사람들은 두 조카인 무승사와 무삼사였다. 특히 무승사는 차기 황제로 유력시되고 있었으며, 이단이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태자의 자리를 원하고 있었다. 무승사가 후계자로 굳어지는 듯한 분위기에서 무후 자신이 발탁한 두 명신 적인걸과 이소덕이 무후를 찾아와 그녀에게 넌지시 물었다.

 "폐하께서는 아들과 조카 중에서 누구와 더 친하십니까?"

 

 이 질문에 무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는 이현이 유배되어 있던 곳으로 사람을 몰래 보내어 그를 은밀하게 낙양으로 불러들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황사 이단은 스스로 태자의 자리에서 물러나기를 청했다. 중종 이현이 다시 황태자로 복귀하자 조카인 무승사는 크게 실망해서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 죽었다. 무후는 자신의 소생인 이현과 이단, 태평공주 삼 남매와 무씨 일가를 한데 모아 천지신명에게 화평을 서약하게 하고 이를 쇠판에 기록해서 사관에게 보관하도록 했다.

 

 측천무후의 후계 문제까지 깔끔하게 마무리되자 정국이 안정되고 천하는 태평했다. 이때가 무후의 나이 일흔다섯 살이었다. 공학부가 설치된 시기는 그 다음해이며, 미소년들이 득세를 한 것은 무후의 나이 여든이 되어 그녀가 병에 걸렸을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일이었다. 그 이전에도 무후가 장씨 형제를 귀여워하면서 그들에게 높은 벼슬을 내리자 그들의 권세에 기대고자 하는 자들이 줄을 섰지만, 무후가 앓아눕자 장씨 형제는 다른 중신들의 접근을 완전히 차단했다.

 

 그 형제 중에서 동생인 장창종은 이 절호의 기회를 이용해서 스스로 천자가 될 생각까지 가지게 되었다. 그는 점술가를 몰래 황궁으로 불러들여 자신이 장차 황제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받아냈다. 이 위기는 무후가 병석에서 일어나 한 달 만에 수습되었지만, 무후는 중신들의 강력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장씨 형제를 처벌하지 않았다. 이듬해에 무후가 다시 병석에 눕자 이번에는 중신들이 기민하게 움직였다.

 

 재상(宰相) 장간지(張柬之, 625~706)와 최현위(崔玄暐), 환언범(桓彦範)과 같은 중신들은 모두 무후가 발탁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군사들을 동원해서 장씨 형제가 걸어 잠근 황궁의 문을 부수고 침전까지 들어가 장씨 형제를 살해하고 무후에게 양위를 요구했다. 그리고 황태자였던 중종 이현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측천무후의 20년 정권도 막을 내렸다. 이 사건을 중국사에서는 '오왕의 정변(五王政變)'이라고 부른다.

 

 측천무후는 '오왕의 정변'의 충격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하고 무너져 병석에 여러 달 누웠다가 임종을 맞이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리기 위한 시도를 했다. 자신의 존호에서 '황제'를 빼고 '측천대성황후(側天大聖皇后)'로 부를 것과 고종의 무덤인 건릉(乾陵)에 합장할 것을 유언으로 남긴 것이다. 그녀는 이와 함께 자신의 정적이었던 왕 황후와 소 숙비의 일족들, 자신이 처단했던 고종 조의 신하들인 저수량, 한원, 유상 등의 일족들을 모두 사면하라는 유언도 함께 남겼다.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일생동안 총 93명을 살해했다.

 * 직계가족 23명

 * 당 왕족 34명

 * 대신 36명

 - 무측천정전(武則天正傳) 중에 - 임어당(林语堂, 1895~1976)

 

 

 측천무후의 유언 중에서 가장 획기적인 것은 자신의 능 앞에 세우라고 했던 무자비(無字碑)이다. 아무것도 적어 넣지 않은 이 거대한 비석만큼 중국의 사학자들을 당혹하게 하는 것은 없다. 자신의 업적과 과실에 대한 평가는 동시대의 사람들이 아니라 후세의 사람들에게 맡긴다는 의미였지만, 그녀에 대한 평가는 지금까지도 명확하게 내려지지 않고 있다.

 

 외교와 군사 측면에서는 잃은 것보다는 얻은 것이 훨씬 많았다. 그녀 이전 세대에 고구려를 정복해서 세웠던 안동도호부 전역을 그녀의 통치 시절에 대조영이 세운 신생국 발해에게 고스란히 내주어야 했지만, 발해와는 선린 관계를 맺는데 성공했다. 그들이 돌궐(突厥)이라고 부르던 튀르크와도 우호 관계를 유지해서, 튀르크가 그동안 당나라 큰 위협이었던 키탄(거란)까지 대신 제압해 주는 외교적인 성과를 올렸다. 이로써 당나라 입장에서는 동쪽 지역의 근심거리를 완전히 해소했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한자어로 토번(吐藩)이라고 불리던 서방의 고대 티베트 왕국에 대해서는 강경한 정책을 고수해서 결국 티베트 왕국을 정복했다. 티베트의 정복은 막대한 부가 창출되는 서방 교역로를 독점했다는 의미였다. 이는 곧바로 괄목할만한 경제부흥으로 이어졌다. 경제 문제에 관한 한 측천무후에 대한 평가는 대단히 긍정적이다. 그녀는 기존의 경제 체제를 잘 유지했을 뿐 아니라 경제가 낙후된 각 지방에 대해서 '농업과 양잠업을 중시하고 세금과 부역을 가볍게 한다'라는 단순한 경제 원칙을 세우고 이를 강력하게 밀고 나갔다.

 

 따라서 이러한 지방의 관리들에게는 기회와 위험이 동시에 주어졌다. 농지를 개간해서 경작지가 넓어지면 포상을 받고 파격적인 승진이 가능했으나 호구 수가 줄어들면 엄격한 처벌을 받았다. 또한 부역과 세금 감면 정책을 통해서 유랑민들을 정착시켰다. 그러자 당나라 전체의 호구 수는 65퍼센트 이상 늘어났다. 그 시대의 호구 수는 곧바로 국부(國富)를 의미했다. 일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문자 그대로 태평성대를 구가했던 것이다.

 

 초기에 티베트 정복을 위한 막대한 전비가 재정에 부담되었으나, 동서 교역로의 확보는 장기적으로는 크게 남는 장사였다.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무후는 새로운 황궁인 명당과 함께 대규모 사찰을 건립하면서 재정을 낭비한 과실도 있지만, 호구 수가 증가하면서 경제 규모 자체가 커졌기 때문에 백성들의 세금 부담은 그녀 이전의 태종이나 고종 시절보다 전반적으로 낮은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무칙천(武則天)은 산업발전, 특히 농업발전에 심혈을 기울였다. 고종 재위시 그녀는 이른바 '12개조의 건의'를 받아들였는데, 첫째 조항이 바로 '농업과 잠업을 권장하고 부역을 가볍게 하는것'이었다. 그리고 경지와 호구를 증대시킨 실적을 지방관의 포상에 대한 표준으로 삼았다. 이러한 적극적인 산업진흥정책 덕으로 그녀의 통치기간에 중국의 사회경제가 안정추세로 접어들었다. 특히 국가가 장악하는 호구의 숫자가 계속 늘어 당태종 제위시 3백80만호였던 전국의 호구가 무칙천 퇴위시에는 6백15만호로 비약적인 증가를 보였다. 그녀가 사망하고 唐(당)이 복구된 후 玄宗(현종, 712~756) 재위기간에 이루어진 이른바 '開元(개원)의 치적'도 그녀의 통치기간에 조성된 경제나 사회의 발전력이 비로소 효과를 발휘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무칙천은 변방강화를 위해 주변 이민적과의 관계개선에 주력했다. 고종 재위시 그녀는 북방민족의 침력에 대해 단호하게 무력으로 대처하는 동시에 적극적인 화해정책도 펼쳤다. 나중에는 지금의 新疆(신강)지역에 安西(안서)도호부와 北征(북정)도호부를 설피하여 서북 변방의 안정을 도모했다.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통치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몇가지 무리한 시책을 펼침으로써 정치적 수명을 단축시켰다. 무엇보다도 비밀정치와 공포정피를 감행하여 반대세력의 반발을 부채질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불교를 중흥시키기 위해 대규모 사찰을 축수하는 등 백성의 부담을 증대시켰으며, 사원경제가 국가의 통제를 벗어날 만큼 지나치게 확장되는 것을 방조했다. 더욱이 그녀의 통치말기에 친족들의 권력남용은 절정에 달했다.

 

 마침내 그녀가 중병에 걸리자 당의 재건을 위한 쿠데타가 일어났다. 정변은 결국 성공을 거두어 705년 당은 재건되고 중종황제가 복위했다. 같은 해 그녀는 병사했다. 이때 나이는 82세였다.

 

 무칙천이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천하대권을 휘두른 기간은 15년 정도 밖에 안됐다. 그러나 이미 660년부터 약 30년간 중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했기 때문에 그녀는 모두 45년간, 즉 80여년의 생애 중 절반이상을 최고의 권력자로 군림했던 것이다. 아마도 이헐게 장수한 권력자는 남녀를 통틀어 중국사에서 그리 흔하지 않았던 듯 하다. 철저하게 남성위주 사회의 중국에서 여성이 그렇게 오랜 기간 권력의 정상에 있었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무후에 대한 평가와 관련된 논쟁의 핵심은 항상 정치적인 측면과 이와 연관된 윤리적인 문제였다. 그녀는 피의 숙청을 통해서 권력을 창출했다. 언제라도 정권에 도전할 수 있는 황실의 직계 손들은 대부분 희생되었는데, 그중에는 자신의 몸에서 나온 두 아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비인간적인 잔인한 모정이었다.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황족뿐 아니라 무고한 사람들 수천 명이 죽고 수만 명이 유배되거나 노비 계급으로 전락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희생은 어디까지나 권력층 내부의 일이었지 일반 백성들과는 별 상관이 없는 일이었으며, 오히려 국가 전체로서는 득이 되는 일이기도 했다. 사실 당나라는 분열되었던 중국을 통일한 것도 아니었고, 민중혁명을 통해서 새로운 왕조를 창건한 것도 아니었으며, 단지 어려운 과정을 통해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로부터 정권을 탈취해서 세워진 나라였다. 때문에 건국 초기에 개국공신들에 대한 정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무후의 잔인한 숙청은 일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기득권 세력이 와해된 것을 의미했으며, 그것은 결국 자신들의 부담으로 유지되는 계급이 줄어든 것이었다. 또한 무후의 통치 시절은 지배를 받기만 하던 사람들에게도 공정한 기회가 주어진 시대였다. 결국 그녀에 대한 평가는 '선정을 베푼 찬탈자'라는 평가로 요약될 수 있으며, 이것은 우리의 인생에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문제로 귀결된다.

 

 측천무후의 '음탕함'을 비난하는 역사가들의 견해는 편협한 것이다. 공정한 입장이라면 역대 중국 황제들의 음탕함을 동시에 비난해야만 한다. 남자 황제들이 자기의 딸이나 손녀 또래의 여자들을 수백 명씩 불러들여 즐기는 것에 대해서는 관대하면서 유독 무후의 남성 편력을 비난하는 것은 성에 대한 이중적인 잣대를 적용하는 것이다. 움직일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은 측천무후는 550명에 달하는 중국의 황제들 중에서 유일무이한 여성이지만, 엄연히 '황제'였다는 점이다.

 

 

▲ 則天武后(측천무후)의 평가

 개원(開元) 4년(716) 측천무후의 아들이었던 태상황(太上皇) 예종이 사망하자 현종은 무측천의 시호에서 '황제'를 제외하고 무측천의 정책을 부정했으며 그녀나 무씨 일족에 의해 숙청된 자들의 명예회복을 실시하였다.

 

 후세 중국 사회나 문인 사회에서 측천무후는 여성으로써 군주의 권한 위에 군림하면서 당의 황위를 찬탈하였다는 부정적 평가가 이어졌고, 찬탈에 실패한 위황후의 행실과 함께 '무위(武韋)의 화(禍)'라 부르는 등 부정적인 이미지가 대부분이었다. 치세 중의 사적에 대해서도 그녀가 정치를 펼쳤던 시대에 떠돌거나 도망친 호수가 늘어나는 등 전적(田籍) 파악이 등한시되고 은전(隠田)이 늘어나 균전제를 실시하기 곤란해졌으며, 측천무후 자신의 씨족을 요직에 앉혀서 정치를 좌지우지한 것에 대해서도 혹평되고 있다.

 

 한편으로 그녀가 권력을 쥐었던 시기에 중국에서 농민반란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정관 말기의 호수가 줄지 않고 유지되었다는 점에서 민중의 생활은 그전보다 안정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나아가 그녀의 인재 등용 능력은 측천무후를 혹평했던 후세의 역사가들도 인정하는 것으로, 측천무후에 의해 등용되었던 인재들이 현종 시대 개원의 치를 이끌었다는 점도 주목할만 하다. 또한 전근대의 사학자들 가운데서도 '밝지 못했다고 할 수는 없다'라고 평했던 남송의 홍매(洪邁)나 '여자 중의 영명한 군주(女中英主)'라 부르며 현상 유지나 구습 타파에 대해 호평한 청나라의 조익(趙翼)처럼 무측천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사람도 존재한다.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을 지휘했던 장칭(江靑, 1914~1991)에 이르러서는 남편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 재위: 1945~1976) 주석의 사후 후계자가 되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명실공히 중국의 국정을 쥐었던 측천무후를 자신에게 겹쳐서 이를 칭찬하는 운동을 일으켰다. 장칭과 문혁은 중국공산당에 의해 부정되었으나 무측천을 주인공으로 하는 연속 텔레비전 드라마가 제작되기도 했다.

 

 

▲ 則天武后(측천무후)의 야사

측천무후는 미각이 뛰어났다고 한다. 재위 시절 중, 민가에서 엄청나게 큰 무가 나와서 그녀에게 진상했을 때, 측천무후는 황실 요리사에게 무를 이용한 요리를 만들라고 명했다. 요리사는 무를 채 썰어 녹두 가루를 묻혀 볶은 후, 오징어, 새우, 살코기를 넣어 측천무후에게 바쳤다. 이 요리를 그녀가 '가연채(假燕菜)'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그녀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고 전해지는데, 그 이유는 그녀의 식습관과 연관이 깊다고 한다. 측천무후는 비타민과 무기질이 많이 들어있는 식품을 많이 섭취했으며, 꽃으로 만든 음식을 즐겨 먹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유명한 관상가 원천강이 무사확의 집에 들렀다 갓난아기였던 무측천을 보고 봉황의 목과 용의 눈을 지닌 귀한 상이며 여자아이라면 황제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고 한다.

 

그녀가 의도하진 않았지만 그녀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인물이 한명이 있었다고 하는데 바로 당태종 당시 좌무위장군을 역임했던 이군선(李君羨)이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능력있는 인물이었는데도 화주지사로 강등된 뒤 반역죄로 죽었는데 바로 여주무왕의 예언과 더불어 그의 이력 때문이었다. 그는 낙주(洛州) 무안(武安)출신으로 아명이 오낭(五娘)이었으며 유무주(劉武周)를 토벌해 무련현공(武連縣公)에 봉해져 헌무문(玄武門)을 수호하고 있었는데 그의 이력에 무(武')자가 많고 아명에 낭(娘)이 들어가는 바람에 당시 여주무왕의 예언을 전전긍긍하던 당 태종의 본보기가 되어 여주무왕으로 지명되어 죽었던 것. 그리고 훗날 그의 가족들이 탄원을 올려 이군선은 명예회복이 되었고 관직까지 돌려받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군선의 명예회복을 시켜준 인물이 아이러니하게도 여주무왕의 당사자였던 측천무후였다. 다만 이 이야기가 야사라는 이야기도 있어 정확도는 알 수 없다.

 

측천무후와 관련된 일화 중, 용수나무에 관한 일화가 있다. 측천무후가 어느 날 가마를 타고 산책을 나갔을 때, 비가 갑자기 엄청나게 쏟아져서 시종들이 모두 무척이나 당황했다고 한다. 그때 측천무후는 침착하게 주변을 둘러보다가, 거대한 용수나무를 보고 비를 피했다고 한다. 그 때 그녀는 무언가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듯, 용수나무 앞에 향을 피우고 "어느 날 뿌리가 마르고 손님이 주인이 되리라"라고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그리고 진짜 이씨 왕조 대신 무후가 황제가 되었다... 이 때문에 측천무후는 황제의 자리에 등극한 후 모든 사찰에 용수나무를 심고 받들라 명했다고 한다. 이는 용수(龍樹) 즉 용화수나무에 담긴 불교적 의미와도 관련이 깊은데, 불경에서는 미륵보살이 마지막 부처로써 용화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고 용화수나무 아래에서 3번의 설법을 행함으로써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고 되어 있다.

 불교를 숭상했던 측천무후 자신이 미륵의 화신임을 강조하고자 내세운 프로파간다 가운데는 '대운경(大雲經: 측천무후가 천명을 받아 나라를 통치한다고 논설한 책)'이라는 불경에 "미륵의 화신인 정광천녀(淨光天女)가 중생을 구제한다"고 언급한 부분도 있었는데, 이 '대운경(大雲經)'을 토대로 여자로써 즉위한 자신의 위치를 정당한 것으로, 나아가 필연적인 것으로 굳히겠다는 목적이 있었다. 이 '대운경(大雲經)'을 전국에 뿌리면서 각 지역마다 대운사라는 절을 새로 짓게 했으며, 이 제도는 일본에 전해져서 고쿠분지 건립에도 영향을 주었다(유명한 도다이지도 그러한 고쿠분지의 하나).

 측천무후의 즉위나 통치를 반대했던 세력(특히 유학자)에서는 측천무후가 자기의 통치를 위해 아예 위경 하나를 새로 지어냈다고까지 몰았고, 오늘날에는 '대운경(大雲經)' 자체는 위경은 아니라고 보는 반론도 나와 있다. 아예 가짜 경전을 지어냈든 원래 있던 경전의 내용을 끌어온 것이든 측천무후가 불교를 자신의 정치에 끌어들여 입지를 굳히려고 한 것만은 틀림없다.

 

측천무후 그녀의 성욕이 엄청나 남첩 3,000명을 뒀었다는 드립(유머, 개그, 농담)도 있는데, 측천무후를 포함한 여성 권력자 관련 섹드립(성드립, 음담패설)은 이런 식으로 비상식적인 드립이 많다. 남첩 3,000명 드립에 대해서는 측천무후 후대인 현종의 첩 4만 명 기록이 있다. 거의 동시대의 기록이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것을 봐서는 기록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 則天武后(측천무후)의 기타 이야기

측천문자(則天文字)라는 것을 만들기도 했는데, 완전 다른 문자를 만들어낸 게 아니고 그냥 한자의 제작 원리에 따라 만든 글자, 즉 한자 몇 개 더 만든 셈이다. 이들 문자는 기존 한자보다 획수가 더 많고 복잡한 경우가 많아서 측천무후 시기가 끝난 뒤로 사멸해 갔다. 스스로를 노자의 후손을 자처하고 도교를 숭상한 당나라와 달리 측천무후는 불교를 숭상했다. 이에 한몫을 거든 건 그녀의 내연남인 풍소보(馮小寶)로, 미륵 신앙을 이용해 측천무후를 떠받들었다.

 

불경을 읽을 때 해당 불경을 찬미하기 위해 서두로써 읽는 개경게(開經偈)는 측천무후가 직접 지었다고 한다.

 無上甚深微妙法 (무상심심미묘법)   무상(無上)의 깊고도 깊은 미묘한 법은

 百千萬却難遭遇 (백천만겁난조우)   백천만 겁이 지나도 다시 뵙기 어려워라.

 我今聞見得受持 (아금문견득수지)   나 지금 듣고 보고 받아 지니고자 하오니

 願解如來眞實義 (원해여래진실의)   바라건대 여래께서 진실한 뜻을 풀어 주옵소서.

 

유달리 문자에 집착하는 성향을 보여, 명칭을 갈아치우는 것을 상당히 즐겼다. 3성 6부를 근간으로 하는 당나라의 관제는 그대로 두고 이름만 바꾸는가 하면 정적들의 성씨를 나쁜 뜻의 글자로 고치기도 했다. 보통 황제들의 시호는 한 글자 또는 두 글자가 일반적이었으나 무후가 집권하면서 고조와 태종, 고종의 시호를 대폭 늘리는 바람에 시호 인플레가 벌어져 당나라부터는 부득이 묘호나 연호로 황제를 통칭하게 되었다. 그리고 15년도 채 되지 않는 재위 기간 동안 연호를 14차례나 바꾸어 역사가들의 골머리를 앓게 했다.

 

주변국들과의 전쟁에서는 큰 재미를 못 보다 보니, 재미있게도 최초의 판다 외교를 시도한 인물로서 알려져 있다. 측천무후는 2마리의 판다를 일본에 선물로 보낸다. 요동(발해), 동(신라), 서(토번), 북(돌궐)까지 당나라의 군사 영역이 크게 축소되다 보니, 동부의 신라와 발해를 견제함과 동시에 외치의 안정을 취하려고 했던 것이다. 당나라에게 있어서 가장 위협적인 방향이라고 할 만한 북쪽에는 돌궐, 서쪽에는 토번, 동북-동해에 이르는 영역에는 발해-신라가 들어서는 상황이었다. 이들이 제각기 한꺼번에 당나라를 견제하기 시작한다면, 연이은 참패로 군사 역량이 꺾인 당나라로서는 그 큰 땅덩어리가 도리어 악재로 작용하여 사방의 국경 지대가 공중 분해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괜히 그 자존심 높은 중국의 황제가 일본에게 다급한 화친 의사를 보낸 것이 아니다.

 

한국에서 그녀에 대해 안 좋은 평을 한 최초의 인물은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이다. 심지어 권근(權近, 1352~1409)은 "당태종이 선덕여왕을 왕으로 임명했기에 측천무후가 중국에 나왔다"고 비난했다. 사실 좀 알고 보면 권근의 이야기가 웃긴 셈인데, 맨 처음에는 당 태종이 오히려 사람을 보내어 대신 통치하도록 하려고 했고, 측천무후가 황제에 오른 것과 당 태종은 큰 관계가 없다.

 

측천무후 이후로 중화권에는 서태후 등 실권자를 제외하면 공식적으로 여성 최고 지도자가 나오지 않다가, 2016년 대만의 차이잉원 총통이 집권함으로써 무려 1311년만에 공백이 깨지게 되었다.

 

관중18릉이라고 하는 당나라의 자연적인 산을 능침으로 만들었는데 기록으로는 5대 10국기의 온도가 건릉을 제외하면 모두 도굴 되었다고 하며 탐사를 해본결과 도굴되었을 가능성은 없다고 한다.

 

현재로서는 안정공주(安定公主, 654~654)나 태자 이홍의 사망이 측천무후의 짓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지만, 다른 문헌에서는 아예 정설인 것처럼 서술되어 있어서 받아들이는 데 주의가 필요하다.

 

 

 

* 則天武后(측천무후)의 무자비(無字碑)

 중국 최초의 여황제였던 則天武后(측천무후)는 세상을 떠날 무렵 자신이 이룩한 업적이 너무나 많으므로 비석 하나에는 다 기록할 수 없을 테니 그저 아무 것도 새기지 말고 비워 두라는 유언을 남겼다.

 

 여러 역사서들이 전하는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유제(遺制), 즉 유언에 따르면 그는 "황제의 칭호를 거두고 측천대성황후(則天大聖皇后)라 칭하라" 명했다.

 

 복위한 중종은 어머니에게 측천대성황제(則天大聖皇帝)의 존호를 올리며 존중했지만, 황제의 칭호를 고집한다는 것은 무씨의 종묘사직을 고집한다는 뜻이 되고, 이것은 측천무후 자신의 사후에 무씨에 대한 적대감을 고조시킬 수 있었다.

 측천무후는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정치력을 발휘한 셈이다. 이에 따라 측천무후는 고종의 황후로 간주되었으며 주나라 황제였다는 사실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했다.

 

 측천무후는 무씨 집안 인물, 특히 자신의 조카 무승사를 후계자로 세울 생각도 했지만 봉각시랑 이소덕이 간하는 말을 듣고 깨달은 바 있어 이씨로 하여금 뒤를 잇게 했다(중종의 뒤는 폐위되었던 예종이 이었다).

 

 

 시안(西安)에서 60km 떨어진 건릉에 이르는 길가에는 120여 개의 석상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석상의 길이가 500m에 이르는 이 능에는 당나라 고종과 그의 황후 측천무후가 묻혀 있다. 한편 이 길 가장 안쪽에는 무자비(無字碑), 즉 아무런 글자가 새겨져 있지 않은 비가 세워져 있는데, 그 까닭은 이렇다.

 

 중국 최초의 여황제였던 측천무후(則天武后, 625~705)는 세상을 떠날 무렵 자신이 이룩한 업적이 너무나 많으므로 비석 하나에는 다 기록할 수 없을 테니 그저 아무것도 새기지 말고 비워 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 그 유언을 충실히 지킨 후대인들은 이런 비석을 세워 그녀의 업적을 기렸다.

 

 그렇다면 죽음에 직면해서도 야망을 감추지 않았던 측천무후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중국 역사를 보면 모든 황제는 남성이었는데 단 한 사람의 예외가 있었다. 당나라 고종의 후궁으로 들어와 나중에는 황후에 올랐으며, 결국에는 놀라운 야망을 이용해 중국에서 전무후무한 황제에 오른 인물. 그가 바로 측천무후다.

 

 사실 측천무후는 고종의 어머니뻘이었다. 열세 살에 고종의 아버지인 태종의 후궁으로 궁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의 부친 무사확은 당나라 시조인 고조 이연의 부하였는데, 아리따운 딸 무측천이 그런 연유로 이연(李淵)의 아들 이세민(李世民), 즉 당 태종의 후궁이 된 것이다.

 

 그런데 고작 11년 후, 그러니까 그녀의 나이 스물넷 되던 해 태종은 세상을 떠나고 고종이 뒤를 잇는다. 이에 무후는 그 시대의 관례에 따라 비구니가 되어 절에 은거하게 되었다. 그러나 태종 생전부터 고종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던 만큼 고종이 절을 자주 찾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편 다른 이야기도 전해 오는데, 슬하에 자식이 없는 고종의 황후 왕씨가 고종이 후궁 소숙비를 총애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무후를 궁으로 다시 끌어들였다고 한다.

 

 여하튼 무후는 쫓겨났던 궁으로 귀환할 수 있었고 이때부터 그녀의 놀라운 능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무후는 우선 궁중 내의 후궁들을 차례로 제거하고 결국에는 황후까지 폐위시킨 후 서른한 살이 되던 655년에는 황후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고종과 자신 사이에 낳은 자식을 죽인 후 이 사건이 황후의 짓이라고 세상에 알려 황후를 폐위시켰으니 그 사실 여부를 가릴 필요도 없이 그 시대에 무후가 어떤 인물로 알려져 있었는지를 상상할 수 있다.

 

 한편 황후에 오른 무후는 이번에는 중신들을 차례로 숙청했다. 원로인 장손무기와 저수량 등이 무후가 고관 가문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와 함께 태종의 후궁임을 내세워 이는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며 황후에 봉해지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한편 병약한 고종이 정사를 소홀히 하자 무후는 전권을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고, 이러한 사태는 683년 고종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무후가 그동안 자신의 사리사욕만을 챙긴 것은 아니었다.

 

 한편 고종이 세상을 떠나자 뒤를 이어 태자 철이 즉위했으니 그가 중종이다. 그러자 중종의 황후인 위씨는 중종의 무능함을 이용해 자신 또한 무후와 같은 위치에 오르고자 노력했다. 이를 안 무후는 중종을 폐위시키고 둘째 아들 단을 즉위시키니 그가 예종이다. 이로써 중종은 고작 54일 동안 제위에 머무를 수 있었다. 그러나 권력은 여전히 무후의 손아귀에 있었고, 예종은 명목상의 황제에 불과했다.

 

 690년, 급기야 무후는 명목상의 황제 예종을 물러나게 하고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 해에 수많은 백성들이 국호 변경을 청했고, 봉황과 공작 등의 상서로운 조짐들이 나라 곳곳에서 보고되었는데, 이 모든 것이 무후를 비호하는 세력의 공작이었다. 이에 힘입은 무후는 나라 이름을 주()라 개칭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했다. 그런 후 스스로 성신황제(聖神皇帝)라 칭했으니, 이를 역사에서는 무주혁명(武周革命)이라고 부른다. 이때 무후의 나이 65세였다.

 

 그때부터 나라의 권력은 무씨 집안 출신들이 다른 관료들과 합의해 좌지우지했다. 무후의 국가는 한동안 평온을 유지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무후는 노쇠해졌고, 698년에는 측근들의 간언을 받아들여 궐 밖으로 추방했던 중종을 불러 태자로 책봉했다. 705년에는 무후가 중병에 걸린 틈을 타 여러 대신들이 모반을 일으켜 무후에게 양위를 강요했고, 그 뒤를 이어 중종이 황제에 올랐다. 한편 이궁하여 머물던 무후는 그해 12월 세상을 떠났고 이로써 당나라 왕조는 재건되었다.

 

 그러나 중종은 결국 제2의 무후가 되고자 했던 위황후(韋皇后, 660?~710)에게 독살당했다. 그러자 예종의 셋째아들 이융기(李隆基)가 다시 군사를 일으켜 위황후 일파를 제거하고 혼란을 마무리 지었다. 이융기(李隆基)는 훗날 '개원(開元)의 치()'라 불리는 당나라 제2의 전성기를 가져온 현종(玄宗, 685~762, 재위: 712~756)이다.

 

 

 

▲ 중국 당() 중종(中宗)의 황후(皇后) - 측천무후처럼 스스로 황제가 되기를 바랬던 韋皇后(위황후, 660?~710)

 당() 중종(中宗)의 황후(皇后).

 측천무후처럼 자신이 직접 황위에 오르기 위해 710년 중종을 독살하고 온왕(溫王) 이중무(李重茂)를 황제로 옹립하였지만, 임치왕(臨淄王)과 태평공주(太平公主) 등이 정변을 일으켜 살해되었다.

 

 당() 중종(中宗, 656~710, 재위: 684년 1월 3일~684년 2월 26일)의 황후로서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 출신이다.

 

 중종은 어머니인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에 대항하기 위해 위황후(韋皇后)와 그 일족을 매우 신임하였다. 683년 고종(高宗, 재위: 649~683)이 죽고 중종이 즉위하자, 배염(裴炎) 등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버지인 위현정(韋玄貞)을 시중(侍中)으로 삼아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려 했다. 하지만 황태후(皇太后)였던 측천무후의 노여움을 사서 중종(中宗)은 684년 폐위(廢位)되었고, 예종(睿宗, 662~716, 재위: 684~690, 710~712)이 즉위하였다. 

 

 중종(中宗)은 여릉왕(廬陵王)으로 강등되어 균주(均州, 지금의 湖北省 丹江口)와 방주(房州, 지금의 湖南省 房縣) 등으로 유배되었고, 위황후는 실의에 빠진 남편을 격려하며 중종에게 더 큰 신임을 얻었다. 698년 재상(宰相) 적인걸(狄仁傑, 630~700)이 측천무후에게 직간(直諫)하여 중종은 다시 태자(太子)가 되어 황궁(皇宮)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705년 재상(宰相) 장간지(張柬之, 625~706) 등이 정변을 일으켜 측천무후가 중종에게 양위(讓位)하고 태상황(太上皇)으로 물러나면서 위씨(韋氏)도 다시 황후가 되었다.

 

 중종이 황위에 오르자, 위황후는 중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무삼사(武三思, ?~707) 등과 결탁하여 정치를 농단하였다. 위황후는 무삼사(武三思)와 정치적 협력자 사이를 넘어, 간통하는 사이까지 되었다. 위황후의 아버지인 위현정(韋玄貞, ?~684)은 왕으로 봉()해졌고, 사촌인 위온(韋温)은 조정(朝廷)의 실권을 장악하고 전횡을 부렸다. 위황후(韋皇后)는 시어머니인 측천무후(則天武后)처럼 스스로 황제가 되기를 바랐고, 위황후(韋皇后)의 딸인 안락공주(安樂公主, 684~710)도 황태녀(皇太女)가 되어 황위를 계승받으려 했다. 위황후(韋皇后)와 안락공주(安樂公主)는 커다란 절과 도관(道觀) 등을 건립하며 재정을 낭비하였으며, 매관매직(賣官賣職)을 일삼으며 부패를 저질러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710년, 자신의 음란(淫亂)한 행위가 중종에게 알려질 것을 두려워한 위황후는 딸인 안락공주와 공모(共謀)하여 중종을 독살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인 온왕(温王) 이중무(李重茂, 695~714)를 황제로 옹립(擁立)하고, 자신이 실권을 장악하려 했다.

 

 하지만 예종의 아들인 임치왕(臨淄王) 이융기(李隆基, 玄宗, 685~762)와 측천무후의 딸인 태평공주(太平公主, 663?~713) 등이 정변을 일으켜 상왕(上王)으로 물러나 있던 예종이 다시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위황후는 궁중(宮中)에서 살해되고, 지위도 서인(庶人)으로 격하되었다.

 

 

 

▲ 거울을 보며 눈썹을 그리다가 목이 떨어져 나간 안락공주(安乐公主, 684~710 (26세))

 중국 역사상 가장 예뻤던 공주 - 안락공주(安樂公主)

 중국 역사상 최초로 황태녀(皇太女)를 꿈꾸었던 안락공주(安樂公主)

 

 안락공주(安樂公主, 684~710)는 당나라의 황족이다.

 당 중종(中宗)과 위황후(韋皇后)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성은 이(李), 이름은 과아(裹儿)이다.

 

 측천무후의 손녀이며, 당 중종과 위황후의 막내딸. 당 예종은 태평공주에게는 조카, 당 현종에게는 사촌 여동생이 된다.

 아버지 당 중종이 할머니 측천무후에 의해 폐위되어 유배지로 떠나는 도중에 태어났다.

 제대로 된 출산 준비를 할 수 없어 낡은 천으로 아기를 감쌌는데, 그래서 '과아'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감쌀 과(裹)'에 '아이 아(兒)')

 

 안락공주가 14세가 되던 698년에야 당 중종 일가는 비로소 유배에서 풀려나게 되었고, 705년에 당 중종은 다시 황제로 즉위했다.

 

 어려서부터 부모의 총애를 받았으며 자라서는 할머니 측천무후의 조카 무삼사(武三思)의 차남 무숭훈(武崇訓)에게 시집갔고, 무숭훈이 죽고 난 다음에는 무연수(武延秀)와 재혼했다. 무삼사(武三思)는 위황후와 정치적 협력자 사이를 넘어, 간통하는 사이까지 되었다.

 

 안락공주는 권력욕이 강한 인물로 자신의 배경을 믿고 관직을 팔았다. 이 때문에 벼슬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돈을 들고 안락공주의 집을 찾았다. 이후 아버지(중종(中宗))가 셋째 아들 위왕(衛王) 이중준(李重俊, ?~707)을 태자로 삼으려 하자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안락공주는 이중준을 폐하고 황후의 딸인 자신을 황태녀(皇太女)로 삼아달라고 중종에게 청하였다.

 

 위원충(魏元忠, ?~707)의 반대로 황태녀가 되지는 못했지만 이중준(李重俊)은 자신의 앞날이 위태롭다는 것을 알고 대장군 이다조(李多祚, 654~707)와 군사를 일으켜 안락공주의 집에 쳐들어갔다. 이중준은 안락공주의 남편 무숭훈과 그 아버지 무삼사를 죽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위황후나 안락공주를 처단하지 못하고 잡혀 죽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안락공주의 횡포는 갈수록 심해졌다.

 

 710년 지방 관료 연흠융(燕欽融, ?~710)이 상주서를 올려 위황후와 안락공주가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다고 질책하자 위황후는 자신의 심복 종초객(宗楚客)에게 그를 죽이게 했다. 이 사건으로 중종은 심기가 불편해졌고 위기를 느낀 위황후와 안락공주는 공모하여 산기상시(散騎常侍) 마진객(馬秦客)과 광록 소경(光祿少卿) 양균(楊均) 등을 이용해 아버지 중종을 독살했다. 그 결과 안락공주의 고모 태평공주와 사촌오빠 이융기(李隆基, 玄宗, 685~762)에 의해 정변이 일어나, 안락공주· 위황후· 무연수 일당은 살해되었다.

 

 '청사고(淸史稿)'에는 안락공주가 화장을 하며 눈썹을 그리고 있던 도중 반란군이 쳐들어와 그녀의 목을 쳐, 안락공주는 눈썹을 똑바로 그린 얼굴로 죽었다고 한다.

 안락공주(安樂公主)는 죽은 뒤 그 지위가 패역서인(悖逆庶人)으로 격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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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나라의 제3대 황제 高宗(고종, 李治, 628~683 (55세), 재위: 649~683 (34년))

 당 고종 이치(唐 高宗 李治, 628~ 683)은 당나라의 제3대 황제이다.

 당 태종(唐 太宗) 이세민(李世民)의 9남이며 이름은 이치(李治)다.

 모친은 문덕황후 장손씨이며, 자는 위선(爲善)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신라와 함께 멸망시킨 황제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여황제였던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 (81세))의 남편

 

 그는 649년 아버지 태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뒤, 아버지가 추진했던 주변국가의 정벌정책을 계승했다. 국내통치 면에서는 그의 아버지가 왕궁을 건립하는 데 들인 과다한 지출을 중지시켰다. 그러나 그는 나약한 통치자였으며, 말년에는 병이 들어 아버지의 후궁이었다가 그의 황후가 된 측천무후에게 조종당하는 꼭두각시 황제가 되었다.

 

 측천무후는 태종(太宗)의 죽음으로 비구니가 되었으나 고종(高宗)의 눈에 들어 다시 후궁으로 들어왔고, 그뒤 여러 가지 책략으로 황후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고종이 죽은 다음, 측천무후는 친아들 중종(中宗)과 예종(睿宗, 662~716 (54세), 재위: 684~690, 710~712)을 꼭두각시 황제로 내세워 섭정하다가 690년에 정식으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유가의 대의명분과 적장자 계승의 원칙을 목숨처럼 주요하게 생각하는 대신들도 당제국의 차기 황제는 이승건(李承乾, 618∼645, 태종의 장남)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당태종은 황제로 즉위하자마자 8세에 불과한 이승건을 태자로 책봉했다. 또 이승건이 제왕의 자질을 타고났으므로 일찍부터 그에게 '후계자 교육'을 시킬 목적이었다.

 

 이승건은 부모의 기대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이 학업에 열중했다. 태자가 조금이라도 나태한 태도를 보이면 장손황후가 엄격하게 훈계했다. 부모 모두 고난의 세월을 극복하고 황제와 황후의 자리에 올랐다. 제국의 창업보다 수성이 더 어려우며 아울러 백성들에게 신망을 잃으면 언제라도 망할 수 있다는 역사적 교훈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당나라의 미래가 달린 태자 교육에 심혈을 기울인 것이다.

 

 이승건은 어린 나이임에도 태자의 책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하지만 부모뿐만 아니라 신하들도 미래의 황제가 될 자신에게 끊임없이 성군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강압적 요구에 엄청난 부담을 느꼈다. 아들 교육에 그토록 엄격했던 장손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이승건은 새장에서 빠져나온 새처럼 자유를 만끽하기 시작했다. 이때 그는 사춘기였다.

 

 이승건의 폐위 후 당태종이 태자 책봉 문제로 근심하고 있을 때, 이태(李泰, 620~653)가 이치(李治, 628~683)를 협박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태를 책봉하면 그가 또 자기처럼 친형제들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훈구대신들도 모두 이치(李治)를 적극적으로 지지한 데에는 까닭이 있었다. 이태가 평소에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그들을 업신여겼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치(李治)는 천성이 착하고 고분고분하여서 그들이 보필하기 편했다.

 

 

 "너는 이적에게 은혜를 베푼 적이 없다. 내가 그를 변방의 한직인 첩주도독으로 쫓아내겠다. 내가 죽은 뒤 네가 황제가 되면 그를 중용해라! 그러면 이적은 너의 은혜에 감동하여 충성을 다할 것이다."

 당태종은 자신의 사후에 그가 태자 이치의 말을 듣지 않고 전횡을 부리지 않을까 두려웠다. 그래서 태자가 그에게 은혜를 베푸는 방법으로 그의 새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이끌어내려고 했다.

 이 찻잔속의 태풍으로 끝난 민란은 아버지의 정책과 유업을 계승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한 당고종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아무리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더라도 백성을 착취하면 반드시 민란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고종은 민심을 다독이기 위하여 고구려 원정과 대규모 토목 공사를 중지하는 조서를 반포했다. 백성들의 고혈과 피땀을 요구하는 국가의 대사업이 중지되자 민심이 다시 회복되었다.

 

 당고종 이치의 원배(元配: 이별하거나 사별한 첫 아내) 황후는 왕황후(皇后 王氏, ?~655)이다. 그녀의 작은할머니는 당고조 이연의 친여동생 동안공주(同安公主)이다. 왕씨는 집안으로 보나 인물과 성품으로 보나 왕비가 되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왕황후는 국모로서 소임을 다하여 남편뿐만 아니라 신하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이치도 그런 아내를 무척 사랑했다. 하지만 왕황후에게는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다. 황제의 아들을 낳지 못했다. 황후가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지체가 아무리 높다 해도 황위를 계승할 아들을 끝내 낳지 못하면 하루아침에 쫓겨나거나 궁녀와 다를 바 없는 신분으로 전락하기 마련이었다.

 

 큰아들 이충(李忠, 643~665)은 당고종 이치가 태자였을 때 동궁의 시녀 유씨와 눈이 맞아 낳은 아들이었다. 봉건왕조 시대에 궁녀가 제왕의 아들을 낳으면 키울 권한이 없었다. 법모인 황후나 왕비가 양육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충이 서자 출신이지만 적장자가 없고 서자들 가운데 장남이므로 당연히 황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유석은 생각했다. 왕황후는 이충에게 모든 것을 걸었다.

 

 그런데 당고종이 점차 왕황후를 멀리하고 태자 시절에 비빈으로 맞아들인 소숙비(淑妃 蕭氏, ?~655, 측천무후에 의해 살해당함)를 총애하기 시작했따. 소숙비는 자태가 요염한 여자였다. 당고종과 운우지정(雲雨之情: 남녀 사이에 육체적으로 관계를 맺는 사랑)을 나눌 때면 그의 혼을 빼놓았다. 당고종은 자기에게 1남 2녀를 안겨준 그녀를 더욱 총애했다. 왕황후는 소숙비가 남편의 지극한 총애를 등에 업고 언제 자기 자리를 노릴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남편을 소숙비의 품에서 떼어내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해야 했다.

 

 당태종은 정권 말기에 몸이 병약해지자 태자 이치를 곁에서 머물게 했는데, 당태종을 모시던 무재인과 이치가 몰래 불륜을 저질렀다. 당태종은 두 사람의 관계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왕황후는 남편이 무재인과 간통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무재인을 이용하여 소숙비를 제거하려고 했다. 왕황후가 배후에서 두 사람이 우연을 가장하여 만날 수 있게 했다. 뜻밖에도 왕황후가 무재인을 다시 궁궐로 불러들이라고 종용했다. 육궁(六宮: 중국의 궁중에 있었던 황후의 궁전과 부인 이하의 다섯 궁실)의 안주인인 황후가 그렇게 말하니, 당고종은 대신들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재인을 환궁하게 했다.

 

 무재인은 자신을 구원한 왕황후를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왕황후는 무재인을 심복으로 생각했다. 남편을 가끔 만나면 무재인이 얼마나 선량하고 효성이 지극한지 끊임없이 말했다. 소숙비는 점차 황제의 눈 밖에 났다.

 

 하지만 당고종의 총애를 받기 시작한 무소의(昭儀(무측천))는 보통 사람의 상상을 초월한 잔혹한 여자였다. 왕황후는 늑대를 몰아내려다가 호랑이를 불러들인 꼴이 되었다. 무소의가 당고종의 장녀 안정사공주(安定思公主)를 낳았다. 왕황후가 무소의의 침전으로 가서 그 갓난아이를 몇 번 어루만진 후 나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무소의가 혼자 있는 틈을 타서 자기가 난 딸의 숨통을 끊고 이불로 덮었다. 잠시 후 당고종이 딸을 보러 왔다. 무소의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당고종을 침전으로 모셨다. 무소의가 이불을 들추어보고 갑자기 대성통곡했다. 즉시 궁녀들에게 누가 다녀갔냐고 추궁했다. 왕황후가 방금 전 사람들이 아무도 없을 때 다녀갔다고 말했다. 당고종은 진노했다.

 

 당고종은 고명대신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뜻대로 왕황후를 폐위하고 무소의를 황후로 책봉했다. 한편 왕황후와 소숙비는 무황후를 살해하려고 했다는 누명을 쓰고 궁궐 한 귀퉁이의 음침한 방에 갇혀 유령처럼 지냈다. 어느날 당고종은 한떄 총애했던 두 여인이 불현 듯 생각나 유폐된 곳으로 가보았다. 당고종은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조만간 풀어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떠났다.

 

 당고종의 동태를 파악한 무황후는 눈에 살기가 돌았다. 그들을 당장 죽이지 않으면 그들이 심약한 당고종의 동정심을 자극하여 무슨 일을 벌일지 몰랐다. 대역죄인이 감히 황제에게 청원했다는 것을 구실로 형리에게 곤장 100대를 때리게 했다. 엉덩이가 갈기갈기 찢어졌다. 그래도 분이 안 풀렸는지 그들의 사지를 자르고 몸뚱이를 거대한 술항아리에 집어넣게 했다. 그들은 간장에 조린 고기처럼 몸이 짓눌린 채 죽었다. 당고종은 그들이 얼마나 잔인하게 죽임을 당했는지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했다. 그는 이미 무황후의 손에 놀아나는 허수아비 황제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무소의(昭儀(무측천))도 장손무기(長孫無忌, 594~659 추정)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반대하면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녀는 당고종에게 장손무기를 관직과 재물로 매수하자고 했다. 장손무기는 비로소 두 사람이 찾아온 이유를 알았다. 왕황후는 당태종과 장손황후가 간택한 황후이며 자식을 낳지 못한 결점이외에는 잘못한 것이 없으므로 폐위가 불가하고, 이와 반면에 무소의는 선황제를 섬긴 여자이므로 절대 황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무소의를 황후로 책봉하면 황실을 더럽히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당고종은 황제로 등극한 직후에는 장손무기, 저수량(褚遂良, 596~658) 등 고명대신들의 가르침을 잘 따랐다. 하지만 왕황후를 폐위시키는 일이 그들의 반대 때문에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자 좌절감에 빠졌다. 바로 그때 무소의가 심약한 당고종을 부추겼다. 고명대신들의 월권행위를 방치하면 이씨의 당제국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무서운 충고였다. 결국 영휘6년(655) 왕황후는 폐위되고 무소의가 황후로 책봉되었다.

 

 예부상서(禮部尙書) 허경종(許敬宗, 592~672), 중서사인(中書舍人) 이의부(李義府) 등 권력의 향배에 민감한 기회주의자들이 무황후의 충견을 자처했다. 그들은 무황후의 사주를 받고 장손무기를 제거할 음모를 꾸몄다. 허경종은 사람들을 잔혹하게 고문하여 거짓 진술을 요구했다. 위계방은 자살을 시도하여 장손무기를 보호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허경종이 당고종에게 장손무기가 역모를 꾸민 증거가 있다고 했다. 허경종이 당고종에게 한문제(漢文帝, BC 202~BC 157)가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 않고 박소(薄昭, ?~BC 170)를 죽였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그가 현명한 군주로 평가되고 있다고 했다.

 

 이때 당고종이 장손무기를 불러 친국했다면 무황후와 허경종의 음모가 드러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거동조차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몸이 쇠약했다. 무황후와 허경종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당고종은 장손무기를 차마 죽이지 못하고 검주로 귀양을 보냈다. 조정이 이미 무황후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을 확인한 허경종은 중서사인 원공유를 검주로 보내 장손무기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게 했다. 당나라 건국의 일등공신이었던 장손무기는 이렇게 무황후의 흉계에 의해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무황후는 권력을 장악하자마자 당태종 시대이 훈구대신들 가운데 자기에게 맞선 자들은 모조리 숙청했다.

 당고종은 아버지의 후궁이었던 무씨를 총애하여 자신의 소의(昭儀), 나아가 황후로까지 봉했다.

 무씨는 황후가 되자 폐황후 왕씨를 지지했던 장손무기 등 개국공신집단(관롱집단(關隴集團))을 가차없이 처형했으며 이후로도 자신에게 의견에 반대하는 신하들은 모두 죽여버렸다. 이를 계기로 이 시기 관료집단의 구성이 개국공신에서 과거 북제영역이던 산둥 출신의 새로운 관료로 변화되었다. 그 후 당고종이 병이 나자 측천황후가 정치를 대행하였으며 674년에는 황제의 칭호를 고쳐 천황(天皇)으로, 황후를 천후(天后)로 칭하였다.

 

 재위 34년째인 683년 12월 27일, 고종은 56세의 나이로 붕어하여 건릉(乾陵)에 묻혔다.

  

 

 

▲ 당나라 측천무후 시절 천재적인 여류 시인 상관완아(上官婉兒, 664~710 (46세))

* 채서원(彩書怨) - 편지에 원망을 그려 넣는다

 葉下洞庭初 (엽하동정초)   나뭇잎은 궁궐 깊은 정원에 떨어지기 시작하고

 思君萬里餘 (사군만리여)   만리나 떨어져 있는 님을 그리워하네

 露濃香被冷 (로농향피랭)   이슬은 짙어져 향긋한 이부자리 차갑기만하고

 月落錦屛虛 (월락금병허)   달마져 떨어지니 비단 병풍은 허전하기만 하네

 欲奏江南曲 (욕주강남곡)   마음같아선 강남의 사랑노래 연주하고 싶건만

 貪封薊北書 (탐봉계북서)   계북땅으로 보내는 편지를 봉하고 있네

 書中無別意 (서중무별의)   편지속에 이별의 심정 끝 없이 모두 담았더니

 惟帳久離居 (유장구리거)   단지 오랫동안 떨어져 지낼 빈 장막만 남았네

 

 이 시는 당나라 측천무후 시절 천재적인 여류 시인이자 정치인으로 이름을 날렸던 상관완아(上官婉兒)가 지은 '채서원(彩書怨)'이라는 시이다. '편지에 원망을 그려 넣는다'라는 의미로, 멀리 북방의 임지에 나가있는 연인을 그리워하는 내용이다.

 상관완아는 이러한 주옥같은 서정시를 수백 편이나 지었지만 거의 모두 실전되었고, 현재는 '전당시(全唐詩)'에 실려 있는 32편의 작품만 전해지고 있다.

 

 705년 중국 역사에서 유일한 여성 황제였던 측천무후가 세상을 떠나고, 무후의 셋째 아들 중종(中宗) 이현 (李顯)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여전히 여인들의 손에 있었다. 이 시기는 중국 역사에서 명실 공히 '여인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여성들이 부각되었는데, 대표적인 인물들은 무후의 막내딸 태평공주(太平公主), 중종의 황후 위(韋) 씨, 그녀의 딸 안락공주(安樂公主), 그리고 상관완아(上官婉兒)를 꼽을 수 있다. 이 여인들 중에서는 완아만 유일하게 황실 출신이 아니다.

 

 상관완아의 첫출발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녀는 멸문의 화를 입은 집안의 유일한 생존자였다. 무후가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기 한참 전, 아직 고종(高宗)의 태후로 있을 때인 664년 자신이 죽은 후 무후가 권력을 잡아 분란을 일으킬 것을 경계한 고종은 당시 재상인 상관의(上官儀)를 시켜 그녀의 폐위를 도모하다 계획이 드러나자 자신은 발뺌을 했다. 대역죄는 모두 상관의가 뒤집어썼다.

 

 이 일로 인해서 상관의와 그 일가족은 모두 참살을 당했는데, 갓난아기였던 완아와 그의 어머니 정(鄭) 씨만은 죽음을 면하고 궁중의 노비 신분으로 살아남게 되었다. 그녀의 외가가 무후의 측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언제 복권이 되었는지는 '당서(唐書)'나 '신당서(新唐書)'에 기록이 남지 않아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어릴 적부터 시(詩)와 서(書)를 공부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노비 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완아의 할아버지 상관의는 일찌감치 정계에 진출한 정치인이었지만 당대 가장 유명한 시인 중 한 사람이기도 했는데, 완아는 어릴 적부터 재능이 출중해서 할아버지를 능가하는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이 소문은 인재를 발탁하는 데 적극적이었던 무후의 귀에 들어갔다. 완아에 대한 역사서의 서술은 그녀가 열네 살의 나이에 처음 입궁해서 무후를 만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상관완아를 처음 만난 무후는 "아버지를 죽인 자신을 원망하느냐?"라는 지극히 간단하면서도 까다로운 질문을 던졌는데, 이 질문에 대한 맹랑한 대답으로 인해 그녀는 그 자리에서 무후의 측근으로 발탁되었다.

 "원망하면 불충(不忠)이요, 원망하지 않으면 불효(不孝)입니다."

 

 완아가 이 시기부터 정치에 개입한 것은 아니었다. 측천무후는 그녀의 시가 '전당서'에 실릴 정도로 시인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고 문학과 예술을 무척 사랑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완아가 처음 맡은 일은 문학 분야에 관계되는 것이었다. 무후는 종종 신하들에게 시의 제목을 내리고 그 제목에 맞추어 시를 짓게 했는데, 이 시기 완아의 역할은 이렇게 지은 시들에 대해 심사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십 대 천재 소녀는 곧 순수함을 잃고 권력자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때는 무후가 실질적으로 국가를 통치하고 있던 시기였고, 그녀로부터 개인적인 총애를 받게 된 완아는 점차 무후의 조칙을 쓰는 일까지 맡게 되었다. 완아에 대한 무후의 총애는 부모들의 내리사랑과도 같은 것이었다. 기질적으로 예술가였던 완아는 십 대 시절에는 무후에게 상당히 반항적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는 무후가 낳은 여섯 형제 중 막내인 태평공주의 영향도 상당히 컸을 것이다. 완아와 태평 두 사람은 같은 또래라는 점 말고도 몇 가지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도 그 시대의 대표적인 미인들로 꼽힐 정도로 출중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용모와 성격이 어머니를 그대로 빼닮은 태평 역시 완아만큼이나 대단히 당차고 영리한 여자였다.

 

 또한 가장 결정적으로 두 사람 모두 개방적이고 자유분방한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상관완아와 태평공주가 죽을 때까지 깊은 신뢰와 우정을 나누고 있었다는 사실은 역사적인 기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특별한 유형의 여자들은 자기들끼리 강한 연대감을 갖기 마련이고, 그녀들이 십 대 초반이었던 무렵에 황궁에서는 또래의 여인들을 찾기 힘들다는 환경적인 요인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젊은 시절에 보였던 완아의 반항아적 기질은 결국 사고로 이어졌다. 이에 대한 역사의 기록은 그리 상세하지 않지만, 무후와 완아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많은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정사 역사서인 '신당서'와 이를 인용한 '자치통감(資治通鑑)'의 짧은 기록에 의하면 완아는 자주 '무후의 뜻을 거슬렀다'라고 한다. 그러다 사형을 당할 정도의 중한 죄를 범했다.

 

 684년 당대의 대문호인 낙빈왕(駱賓王)이 유주사마(柳州司馬) 서경업(徐敬業)이 일으킨 반란에 가담했을 때 완아가 이 반란 모의를 사전에 알고도 낙빈왕에 대한 연민의 정과 존경심 때문에 이를 무후에게 알리지 않았다. 사태가 수습된 이후에 그녀가 사전에 모반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난리가 났다고 일부의 역사소설 저술가들은 말한다. 그러나 정사(正史)의 기록들은 사실 여부에 대한 확인을 하지 않고 있다.

 

 측천무후가 상관완아를 끔찍하게 아꼈던 것은 확실한 사실로 생각된다. 무후는 완아를 처형하는 대신 주사(朱砂)와 청사(靑砂)로 그녀의 얼굴에 작은 매화 모양의 문신을 새기는 것으로 처벌을 마무리했으며, 황제의 조서를 작성하는 막중한 일도 계속하도록 했다. 완아는 이 문신 때문에 사람을 만나도 고개를 숙이면서 부끄러움을 많이 탔는데, 이 모습이 더욱 아름다웠기 때문에 당시 여자들 사이에서는 얼굴에 매화 문양을 그려 화장을 하는 것이 크게 유행했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해진다.

 

 이러한 사고와는 상관없이 상관완아는 측천무후의 최측근이자 실세였다. 무후는 완아를 친딸만큼이나 아꼈고, 그녀도 무후를 충심으로 보좌했다. 이 시절 황제의 명으로 내려진 조칙(詔勅)은 모두 완아에 의해 작성된 것들이다. 현대와 비교하자면 국민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율을 확보하고 있는 막강한 여성 대통령 밑에 막강한 여성 비서실장이 있는 셈이었다. 그렇지만 완아에 대한 논란은 황실 내외에서 끊이지 않았는데 바로 그녀의 남성 편력 때문이었다.

 

 완아는 자유연애주의자였으며, 그녀의 화려한 남성 편력은 막강한 무후조차 제어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여러 명의 연인들이 있었다. 당시 조정의 대신들을 포함해서 많은 선비들이 그녀에게 시문을 배우고자 했기 때문에 괜찮은 남자를 찾을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신당서(新唐書)'는 완아가 측천무후의 조카인 무삼사(武三思)와 사통했다는 사실을 비난하고 있다. 한때 황제가 될 야심까지 가졌던 무삼사는 역사적으로 그리 좋은 평가를 받는 인물이 아니며 더욱이 애가 줄줄이 딸린 유부남이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굳이 비난받을만한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그녀에게는 어쩔 수 없는 정치적인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완아는 권력의 중심에 있었지만 그녀의 유일한 보호자는 측천무후뿐이었고, 그 무후는 늙어가고 있었다. 완아의 일가는 모두 그녀가 어렸을 때 처형되었으며, 그녀가 정식으로 결혼을 한 적도 없었다. 그녀가 698년 황태자로 복귀한 중종 이현을 유혹해서 육체 관계를 맺은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해야 한다.

 

 즉 의지할만한 인물이라고는 전혀 없었던 완아는 무후가 죽은 다음을 대비해야만 했던 것이다. 무삼사도 마찬가지지만 이현도 완아가 매력을 느낄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황태자로 복귀하기 전에 멀리 귀양을 가 있던 이현은 무후로부터 황태자에 복귀하라는 조서가 도착하자 어머니가 자신을 죽이려는 줄 지레 짐작하고 그 조서를 읽어 보기도 전에 자살을 하려고 했던 심약한 인물이었다.

 

 완아는 무삼사와 이현을 유혹해 연인으로 삼는 사전조치를 통해서 705년 장간지(張柬之) 등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이른바 '오왕의 난(五王之亂)'으로 무후가 퇴위하고 이현이 황제에 복위했을 때에도 자신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이현뿐 아니라 황후 위 씨로부터도 신임을 얻게 된 완아는 오히려 더욱더 권력의 핵심에 자리 잡게 되었다. 그녀는 계속 황제의 조칙을 기초하는 업무를 맡고 있었으며, 이현의 후궁으로 들어가 최종적으로 여섯 번째 서열인 소용(昭容)의 자리까지 차지했다.

 

 그렇지만 그녀가 가졌던 소용의 직위는 명목적인 것이었다. 그녀는 황궁 바깥에 자신의 집을 따로 가지고 있었으며, 여전히 자유분방한 삶의 방식을 고수하고 있었다. 완아는 이미 사십 대에 접어든 나이였는데도 뛰어난 미모는 시들지 않았고 오히려 원숙함을 더해 주었다. 그녀는 남자들을 계속 갈아치우면서 극히 현대적인 스타일의 인생을 즐기고 있었지만 이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절대적인 권력자였던 측천무후도 결국 못 본 척하고 말았던 것이라 아무리 이현이 황제라도 이 문제에 관한 한 그녀를 제어할 힘은 없었다.

 

 완아는 천부적인 시인의 재능 못지않게 뛰어난 정치적인 감각도 가지고 있었다. 무후가 죽은 다음에 무씨 일가는 당연히 숙청대상 제1호였다. 그렇지만 완아는 황후 위 씨를 설득해서 오히려 황실과 무씨 일가와의 정치적인 연합을 성사시켰다. 무후를 축출한 혁명의 주체 세력이었던 장간지의 권력이 지나치게 커졌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녀는 이현의 복위로 실각했던 무후의 중신들까지 복귀시켰다. 결국 장간지는 위 황후와 무삼사의 협공을 받아 실각했다.

 

 중종 이현의 황후 위 씨는 명문가 출신으로 상당히 부덕했다고 알려진 여인이었다. 이현이 황제가 된 지 두 달 만에 무후에 의해 쫓겨나 귀양을 간 후 의기소침해져서 번거로운 삶까지 벗어던지려고 하자, 위 씨는 그를 잘 다독여서 용기를 잃지 않도록 했다. 그녀는 이현이 복위된 다음에도 무후가 생존해 있을 때에는 말과 행동으로 궁궐 여인들에게 모범을 보였던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무후가 죽고 나자 그녀의 태도는 완전히 돌변했다. 권력의 달콤한 맛에 눈을 뜬 것이다. 여기에 그녀의 딸인 안락공주(安樂公主)가 가세했다. 안락공주는 무삼사의 아들인 숭훈(崇訓)과 결혼한 사이였다. 그녀는 이현이 가장 총애하던 자녀였으며, 이를 믿고 자신이 황태녀(皇太女)가 되려는 야심을 키우기 시작했다. 당시 황태자는 이중준(李重俊)이었는데 이현의 큰아들이었지만 그의 어머니는 위 황후가 아니라 지체가 아주 낮은 여인이었기 때문에 황후와 안락은 그를 '노예'라고 부르며 경멸하고 있었다.

 

 이 음모를 알게 된 황태자 이중준이 반격을 시도했다. 그는 황궁에 들어와 있던 말갈인 장군 이다조(李多祚)의 도움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는 먼저 당시의 최고 실력자들인 무삼사와 숭훈 부자를 죽이고 그 다음에 황궁을 공격했다. 위 황후와 안락공주를 제거하는 것이 최종적인 목적이었지만, 그의 살생부에는 상관완아의 이름이 가장 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녀만이 유일하게 자신을 제거하고 안락공주를 후계자로 만들 수 있는 정치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중준의 쿠데타는 아슬아슬하게 불발로 끝났다. 황궁에서 벌어진 결정적인 전투에서 패배한 것이다. 완아는 다행히 이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황궁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화를 피할 수는 있었지만, 그 과정 자체가 그녀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이것은 오랫동안 권력에 취해 있던 그녀에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는 위 황후와 안락공주와는 거리를 두면서 원래부터 밀접했던 태평공주와 더욱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완아는 중종 이현을 가까이 모시면서 충심을 다해서 그를 보좌하기 시작했다. 대략 3년 정도가 그녀가 헌신적인 정치인으로서 혼신의 힘을 다했던 기간이었다. 그동안 위 황후는 측천무후의 전례를 따라 자신이 황제가 되면서 안락을 황태녀로 삼으려는 생각을 굳혔다. 그녀가 선택한 방식은 무후보다 훨씬 더 악랄한 것이었다. 황제 이현을 독살한 것이다. 그녀는 당분간 이현의 죽음을 비밀로 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규합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완아는 태평공주와 연합해서 일단 위 황후의 계획을 저지했다. 열두 살 먹은 이현의 막내아들 이중무(李重茂)가 황위를 계승하면서 위 황후와 함께 예종(睿宗) 이단(李旦)을 섭정으로 하는 것이 황제 이현의 유지였다고 발표한 것이다. 예종 이단은 독살된 이현의 동생으로 무후 시절 중종이 퇴위한 후 꼭두각시 황제 노릇을 했던 인물이다. 황후의 격렬한 반대로 인해 이단은 일단 섭정에서 제외되었지만, 완아가 창작한 중종의 유지는 그대로 집행되었다.

 

 이단의 셋째 아들 이융기(李隆基)는 영리하고 야심만만한 인물이었다. 그가 바로 오십 년 가까이 황제의 자리에 있으면서 '개원의 치(開元之治)'라는 태평성대를 이룬 명군이자 말년에 양귀비로 인해서 망가지게 될 현종(玄宗)이다. 그렇지만 양귀비를 만나기 한참 전인 젊은 시절의 이융기는 문무를 고루 갖춘 젊은 영재로 당시의 황실에서 가장 걸출한 인물이었다.

 

 황제가 되려는 야심이 상관완아에 의해 저지되자 위 황후는 폭력을 통한 사태 해결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조정은 친황후파와 반황후파로 완전히 갈라지게 되었다. 반황후파의 핵심 세력은 이융기와 태평공주였다. 중종 이현이 죽은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이 두 사람은 연합전선을 구축해 먼저 쿠데타를 일으켰다. 황후와 안락공주는 일가와 함께 살해되었으며 예종 이단이 황제로 복위했다.

 

 이 쿠데타 와중에 상관완아가 이융기에 의해서 살해되었다. 쿠데타 당시 이융기가 완아를 살해한 것은 의외의 행동이었다. 당시 완아는 위 황후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고 이융기의 쿠데타가 일어날 수 있도록 정치적인 상황을 만들어낸 장본인이었다. 당시 완아는 황궁에 머물다 쿠데타군이 진입하자 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그녀를 보자 이융기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가차없이 그녀의 목을 베었다.

 

 이융기가 완아를 제거한 이유는 3년 전에 이중준이 그녀를 제거하려고 했던 이유와 같다. 이 시절의 이융기는 대단한 야심가였다. 그는 차기 황제가 바로 자신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쿠데타를 일으킨 시점에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머지않은 장래에 고모인 태평공주와의 대결이 불가피하다는 계산이 서 있었으며, 태평공주의 사람들 중에서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인물이 바로 완아였던 것이다.

 

 상관완아에 대한 이융기의 태도는 그녀의 죽음을 계기로 극적으로 반전되었다. 완아는 쿠데타가 성공한 직후 곧바로 복권되었고, '혜문(惠文)'이라는 시호까지 얻었다. 그녀가 문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칭송이었다. 또한 그는 황제에 오르고 나서 곧바로 완아의 시와 사(詞)와 문(文)을 모두 모아서 스무 권의 문집으로 편찬했다. 문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녀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한 것이다.

 

 상관완아가 천재였다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측천무후 시절에는 황궁을 중심으로 응제시(應制詩)가 유행했다. 응제시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단지 제목만 주고, 그 다음 다수의 사람들이 일정한 시간 내에 제목에 맞는 시를 짓는 것이다. 그중에서 제목과 가장 잘 어울리는 작품을 선정하는 방식으로 참가자들 사이에 경쟁을 한다. 완아는 바로 이 응제시의 대가였다.

 

 또한 당시(唐詩)는 대구에 대해 형식적인 엄격함을 요구하기 때문에 짓기가 대단히 까다로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할아버지인 상관의에 의해 처음 제시된 당시의 일반적인 형식은 상관완아가 최종적으로 완성했다고 할 수 있으며, 그녀가 정립한 시 이론은 다음 세대에 이태백(李太白), 두보(杜甫), 백거이(白居易)와 같은 위대한 시인들이 등장하는 데 토대가 되었다.

 

 그녀가 문학 발전에 행정적으로 기여한 바도 대단히 크다. 그녀가 중종을 적극적으로 보좌했던 707년부터 710년까지 3년의 기간 동안 황실의 서관이 크게 확장되고 재능있는 문사들이 대거 등용되면서 전국적으로 시문을 대대적으로 수집하고 평가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황실에서 주도한 이 문화 사업은 현종의 시대에 그대로 이어졌고, 이태백과 두보가 등장하면서 당 문화의 황금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분명히 상관완아는 완벽한 인물은 아니었다. 자유분방한 삶의 방식이야 개인적인 문제이니 논외로 하더라도, 정신 차리고 바른 정치에 몰두했던 말년의 몇 년을 제외한다면, 그녀는 뇌물수수, 매관매직과 같은 수법으로 부를 축적하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즐겼던 '권력형 부조리'의 화신이었다. 두 손만 가지고는 모두 꼽을 수 없는 다수의 남자 친구들을 정부의 요직에 천거했으며, 그들 중에는 재상에 오른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에게서는 한밤중에 일어나 머릿속에 떠오른 시상을 미친 듯이 써내려가는 천재 시인의 모습, 삶의 시작과 끝을 권력 투쟁에 희생당했던 불우한 정치인의 모습, 평생을 방종과 탐욕으로 일관했던 여인의 모습을 동시에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은 그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반항적이기까지 했던 순수한 문학 소녀에게 권력을 쥐어 준 여걸 측천무후의 잘못인지도 모른다.

 

 

 

▲ 명재상(明宰相) 적인걸(狄仁傑, 630~700 (70세))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잔혹하게 제거했지만 재능이 출중한 인재들은 신분을 따지지 않고 파격적으로 임용했다. 그래서 주변에 재능이 비범한 대신들이 많이 모이게 되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바로 재상 적인걸(狄仁杰)이다.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세운 무주(武周) 시대의 재상(宰相)으로, 중종(中宗)을 다시 태자로 세우도록 하여 당(唐) 왕조의 부활에 공을 세웠으며 수많은 인재들을 천거하여 당(唐)의 중흥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자(字)는 회영(懷英)이고, 병주(幷州) 태원(太原, 지금의 山西 太原)출신이다. 명경과(明經科)에 급제(及第)하여 하남(河南)의 변주(州) 판좌(判佐)로 근무하다가, 그 지방을 시찰하던 공부상서(工部書) 염립본(閻立本)의 눈에 띄어 병주도독부(幷州都督府) 법조(法曹)로 발탁되었다.

 그리고 고종(高宗, 재위 649~683) 의봉(儀鳳) 연간(676~679)에 조정(朝廷)에 들어가 사법기관의 관리인 대리승(大理丞)이 되었다. 적인걸(狄仁傑)은 성격이 강직하고 청렴하여 1만7천여건의 사건을 판결하면서도 잘못된 판결이나 억울한 자가 생기지 않아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686년 이후, 그는 저주(州, 지금의 甘肅 縣)와 복주(州, 지금의 湖北 沔陽) 자사(刺史) 등을 역임하다가, 691년 호부(部)의 일을 담당하는 지관시랑(地官侍)이 되어 다시 조정(朝廷)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봉각난대평장사(鳳閣鸞臺平章事)가 되어 재상(宰相)의 자리에 올랐다. 당시 당(唐, 618~907)은 고종(高宗)의 황후(皇后)인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가 690년에 나라 이름을 '대주(大周)'로 고치고 자신이 직접 황제가 되어 통치하고 있었다. 역사가들은 이를 고대의 주(周, BC 1046∼BC 771)와 구분하여 '무주(武周)'라고 부르며, 측천무후(則天武后)의 통치기는 태종(太宗, 재위: 626~649)이 다스리던 '정관(貞觀)의 치(治)'에 버금간다는 평가를 받아 '무주(武周)의 치()'라고 불린다. 그리고 당(唐)의 전성기인 현종(玄宗, 재위: 712∼756) 때의 '개원(開元)의 치(治)'의 기초를 마련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적인걸은 측천무후 시대에 재상(宰相)을 지내며 정치를 쇄신하여 '무주(武周)의 치(治)'를 이끈 인물이다.

 

 무측천은 황제가 된 다음에 적인걸을 더욱 신임했는데, 적인걸의 관직은 계속 승진하였으며, 결국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 ‘한 사람의 아래, 만 사람의 위라는 뜻으로 '領議政(영의정)'의 지위를 이르는 말)'의 재상이 되었다. 그러다가 692년에 적인걸은 혹리(酷吏: 악하고 잔혹한 관리) 내준신(來俊臣, 651~697)의 모함을 받아 옥에 갇히고 말았다. 적인걸은 역모를 꾀했다고 자인했는데, 고문 끝에 죽임을 당하는 것보다는 살아남아 때를 기다리는 것이 낫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내준신은 공모한 다른 대신들의 이름을 대라고 강요했다. 격노한 적인걸은 머리를 기둥에 처박으며 자살하겠다고 내준신을 위협했다. 이에 내준신은 더 이상 적인걸을 심문하지 못했다.

 

 나중에 적인걸은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서 남몰래 고소장을 아들에게 건네주었다. 아들은 급히 그 고소장을 무측천에게 올렸다. 고소장을 본 무측천은 즉시 적인걸을 불러 무엇 때문에 역모를 꾀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적인걸은 이렇게 대답했다.

 "소신은 절대로 역모를 꾀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역모를 승인하지 않았다면 지금쯤은 죽어 귀신이 되었을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폐하를 뵙고 신원을 할 수 있겠사옵니까?"

 

 무측천은 그러면 '사죄표(謝罪表)'는 왜 썼느냐고 물었다. 적인걸은 내준신의 모함일 뿐 절대로 그런 일은 없다고 대답했다. 무측천은 그제야 내준신이 적인걸을 해치려고 모함했음을 알게 되었다.

 

 후에 적인걸은 다시 재상으로 복직되었다. 당시 무측천은 이씨 자손(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삼을지 아니면 본가집인 무씨 자손(자신의 조카)을 태자로 삼을지 망설이고 있었다. 무측천의 본가집 조카인 무승사(武承嗣), 무삼사(武三思) 등은 태자가 되기 위해 암암리에 분주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신들로 하여금 무씨 자손을 태자로 삼아야 한다고 무측천에게 여러 번 간하게 했다. 자고로 황제가 성이 다른 사람을 태자로 삼는 법이 어디 있는가, 지금의 신성황제 무측천이 무씨이니 마땅히 무씨를 태자로 삼아야 한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적인걸은 무측천이 용단을 내리지 못하자, 이씨 성을 가진 아들을 태자로 삼아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고모와 조카가 더 가까운지 어머니와 아들이 더 가까운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폐하께서 아들을 태자로 삼으시면 그 후손들은 천추만대 내려가면서 길이길이 폐하를 태묘(太廟)에 모시고 제사를 지낼 것입니다. 그러나 친정 조카를 태자로 삼으면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태묘에 고모를 모시고 제를 지내는 법은 자고로 없지 않습니까?"

 

 태묘란 황실에서 역대 조상들에게 제를 지내는 곳이다. 적인걸의 이 말에 무측천은 친정 조카를 태자로 삼으려던 생각을 버리고 자기 아들을 태자로 삼기로 결정했다.

 

 재상(宰相)이 된 적인걸(狄仁傑)은 698년 측천무후에게 여릉왕(廬陵王) 이현(李)을 황궁(皇宮)으로 불러들여 태자로 삼을 것을 직간(直諫)하였다. 이현(李)은 측천무후의 아들로 고종(高宗)이 죽은 뒤 683년 당(唐)의 4대 황제인 중종(中宗, 재위: 683~684, 705~710)이 되었다가 684년 폐위되어 방주(房州, 湖北 房縣)에 유배되어 있었다. 측천무후가 적인걸의 건의를 받아들여 중종(中宗)은 황궁(皇宮)으로 돌아와 태자(太子)가 되었고, 이로써 이씨(李氏)의 당(唐) 왕조가 계승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적인걸은 두려움 없이 측천무후에게 직간(直諫)하여 정치의 기강을 바로세웠을 뿐 아니라, 민생을 안정시켜 백성에게도 존경을 받았다. 그리고 장간지(張柬之), 환언범(桓范), 경휘(敬暉), 두회정(竇懷貞), 요숭(姚崇) 등 새로운 인재들을 추천하여 정치의 기풍을 쇄신하였다. 이들은 모두 당(唐)을 중흥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장간지(張柬之), 환언범(桓范) 등은 705년 측천무후를 압박하여 당(唐) 왕조가 부활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요숭(姚崇) 등은 현종(玄宗) 시대 당(唐)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적인걸이 만년에 이르자 무측천은 그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고 존경하는 뜻으로 '국로(國老)'라고 불렀다. 700년에 적인걸이 병으로 죽자, 무측천은 너무도 비통한 나머지 사흘이나 조회를 하지 않았으며, 그에게 문창우승(文昌右丞)의 직위와 문혜(文惠)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그 뒤 예종(睿宗) 때에는 양국공(梁国公)으로 봉(封)해졌다.

 

 그 후 무측천은 결정을 내릴 수 없을 때마다 적인걸을 생각하며 "하늘도 무심하시지, 국로님을 그렇게 일찍 데려갈 것이 뭐람."하고 탄식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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