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武則天(무칙천) - 중국사의 유일한 여성황제

 

 중국사에서 여성의 정치적 역할은 매우 제한됐다. 기껏해야 최고 권력자인 황제를 뒤에서 조정했던 것이 고작이다. 그러나 잠시나마 唐(당)제국의 맥을 끊고 스스로 황제에 오른 여성이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무칙천이었다. 그녀는 중국사의 유일한 여성황제로서 과거제 실시 등 매우 진보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무칙천은 624년 山西(산서)의 무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원래 목재상으로, 수말기에 李淵(이연), 즉 唐高祖(당고조)을 좇아 봉기하여 당의 건국에 참여했다. 그 공로로 당 건국 후에는 고위직을 차례로 역일할 수 있었다.

 

 무칙천은 14세 때 궁녀로 선발되어 입궁했다. 그녀의 본명은 조(曌-비칠 조)으로 이 글자는 그녀 스스로가 만들었다. 태양을 가리키는「일」과 달을 지칭하는「월」그리고 하늘을 의미하는「공」세 글자가 합쳐 이루어진 것으로 하늘에 해와 달이 동시에 떠있어 비춘다는 뜻이다.

 

 太宗(태종)(626~640)은 그녀에게 「武媚(무미)」라는 칭호를 내렸다. 태종이 죽은 후 그의 후궁들과 함께 절로 들오간 그녀는 태종을 이은 高宗(고종)(649~683)에 의해 다시 환속되어 그의 후궁이 됐다. 다음해 고종은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녀를 황후로 봉했다. 이로써 그녀는 권력의 핵심으로 진입하는 계기를 마련했던 셈이다.

 

 일찍부터 총기 있기로 소문난 무칙천은 역사에 대한 지식이 두터웠고 판단력도 뛰어났다. 그녀는 와병중이던 고종을 660년부터 본격적으로 보좌하기 시작했다, 고종이 683년 사망하자 뒤를 이어 즉위한 태자 中宗(중종)(683~684)을 폐위하고 대신 네 번째 아들을 황제로 내세운 그녀는 황태후의 신분으로 전권을 위둘렀다. 그녀는 결국 황제를 폐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워 국호를 周(주)(690~705)라 칭하고 그녀 스스로 황제가 됐다. 이로써 당왕조의 맥이 일시 끊기는 사태가 초래됐다.

 

 황제가 된 무칙천은 반대세력을 잠재우고 확고한 통치가반을 마련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강구하기 시작했다. 우선 인재 등용을 위한 획기적인 조치를 취했다. 즉 과거제를 통해 선발한 인원수를 증가시키는 동시에, 황제 앞에서 과거시험을 치르는 殿詩制(전시제)를 설치하여 과거제 체제의 위상을 높였다. 주왕조가 멸망하고 당이 제건됐을 때 활약한 명신중 상당수가 이때 그녀의 획기적인 인재선발 정책을 통해 관계에 진출했던 인물들이다.

 

  宋代(송대)부터 더욱 발전하기 시작한 과거제는 중국제국이 오랫동안 유지되는 비결 중 하나였다. 과거제는 관직임용에 출신보다는 능력을 우선하여 우수한 인력이 황제를 위해 봉사할 수 있도록 만든 제도적 장치였다. 또한 일반 서민들에게도 사회적 상승의 숨구멍을 터줌으로써, 사회적 안정을 통해 제국의 질서가 탄탄한 토대위에서 유지되게 됐다.

 

 아울러 과거제의 실시로 새로운 성격의 지배층이 중국사회에 출현했다, 이때부터 중국의 지배층은 과거제를 통해 관료를 역임했거나 예비적인 관료군으로 올라선 사대부에 의해 구성됐다. 이들 지배층은 실제로 토지나 상업 자본과 같은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형성됨으로써, 세가지의 다른 얼굴, 즉 지주-상인-지식인의 면모를 동시에 지녔다. 이처럼 토지-상업자본-학식이 결합된 지배층의 기반이 과거제를 통해 확립되면서 전제왕정은 오랬동안 비교적 안정되게 유지될 수 있었다.

 

 무칙천은 또한 산업발전, 특히 농업발전에 심혈을 기울였다. 고종 재위시 그녀는 이른바 「12개조의 건의」를 받아들였는데, 첫째 조항이 바로 『농업과 잠업을 권장하고 부역을 가볍게 하는것』이었다. 그리고 경지와 호구를 증대시킨 실적을 지방관의 포상에 대한 표준으로 삼았다. 이러한 적극적인 산업진흥정책 덕으로 그녀의 통치기간에 중국의 사회경제가 안정추세로 접어들었다. 특히 국가가 장악하는 호구의 숫자가 계속 늘어 당태종 제위시 3백80만호였던 전국의 호구가 무칙천 퇴위시에는 6백15만호로 비약적인 증가를 보였다. 그녀가 사망하고 唐(당)이 복구된 후 玄宗(현종)(712-756)재위기간에 이루어진 이른바 「開元(개원)의 치적」도 그녀의 통치기간에 조성된 경제나 사회의 발전력이 비로소 효과를 발휘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무칙천은 변방강화를 위해 주변 이민적과의 관계개선에 주력했다. 고종 재위시 그녀는 북방민족의 침력에 대해 단호하게 무력으로 대처하는 동시에 적극적인 화해정책도 펼쳤다. 나중에는 지금의 新疆(신강)지역에 安西(안서)도호부와 北征(북정)도호부를 설피하여 서북 변방의 안정을 도모했다.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통치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몇가지 무리한 시책을 펼침으로써 정치적 수명을 단축시켰다. 무엇보다도 비밀정치와 공포정피를 감행하여 반대세력의 반발을 부채질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불교를 중흥시키기 위해 대규모 사찰을 축수하는 등 백성의 부담을 증대시;켰으며, 사원경제가 국가의 통제를 벗어날 만큼 지나치게 확장되는 것을 방조했다. 더욱이 그녀의 통치말기에 친족들의 권력남용은 절정에 달했다.

 

 마침내 그녀가 중병에 걸리자 당의 재건을 위한 쿠데타가 일어났다. 정변은 결국 성공을 거두어 705년 당은 재건되고 중종황제가 복위했다. 같은 해 그녀는 병사했다. 이때 나이는 82세였다.

 무칙천이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천하대권을 휘두른 기간은 15년 정도 밖에 안됐다. 그러나 이미 660년부터 약 30년간 중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했기 때문에 그녀는 모두 45년간, 즉 80여년의 생애 중 절반이상을 최고의 권력자로 군림했던 것이다. 아마도 이헐게 장수한 권력자는 남녀를 통틀어 중국사에서 그리 흔하지 않았던 듯 하다. 철저하게 남성위주 사회의 중국에서 여성이 그렇게 오랜 기간 권력의 정상에 있었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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