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隋文帝(수문제)와 煬帝(양제)- 분열과 재통일

 

 중국제국의 역사는 통합과 분열의 반복이었다. 여기에 유목민족과 농경민족간의 대립도 가세하여 역사발전이 매우 역동적으로 전개됐다. 특히 한제국의 분열후, 중원대륙은 잦은 이민족의 침입으로 분열을 거듭했으며, 이러한 분열상을 극복하고 다시 통일제국을 출현시킨 인물은 수의 문제와 양제였다. 그러나 수정권은 단명했고 그 뒤를 이은 唐(당)에 의해 통일제국의 재건작업이 완결됐다.

 수문제의 본명은 楊堅(양견)으로, 540년에 태어나 604년에 죽었다. 그는 섬서출신으로, 北朝(북조)정권 중 하나인 北周(북주)의 靜帝(정제)(580-581)의 외할아버지였다. 양견은 580년에 宣帝(선제)(578-80)가 병사한 뒤, 8세 밖에 안되는 정제가 즉위하자 대승사의 자격으로 실권을 휘둘렀다.

 그는 선제의 폭정으로 야기된 문제점을 해결하고, 근검절약을 제창하는등 민심수습에 주력했다. 그 여새를 몰아 어린 정제를 핍박하여, 581년 소위 자발전 「禪讓(선양)」을 받아 황제에 오른 후 국호를 수(隋)로 바꾸었다.

 수문제가 된 양견은 270여년간 계속된 중국의 분열을 수습하고, 마침내 재통일의 과업을 완성했다. 그는 우선 남조의 後梁(후양)(555-587)을 물리치고 연이어 陳(진)(557-589)을 무찔렀다.

 이로써 東晉(동진)(265-316)시대 이래 시작된 약 3백년 간의 분열에 종지부를 찍었다.

 당시 중국제국이 경험했던 분열의 역사는 실제로는 위, 촉, 오 삼국시대가 전개되기 시작한 서기 22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후한에 의해 한제국의 맥이 계승됐지만, 후한의 황실도 농민운동인 黃巾賊(황건적)의 난으로 급격히 쇠퇴했다. 삼국정립의 분열상황은 司馬(사마) 가문의 晉(진)(265-316) 또는 西晉(서진)에 의해 일시적이나마 해소됐으나 291년부터 306년까지 무려 16년에 걸친 「8왕의 난」으로 중국은 다시 분열의 시대에 접어 들었다. 더욱이 북방의 유목민족들은 남방진출을 한층 더 가속화시켜 마침내 흉노족이 304년 수도 洛陽(낙양)을 격파하고 晉(진)의 황제를 포로로 삼자 晉(진)의 통일제국은 막을 내렸다.

 흉노의 남진으로 시작된 북방민족의 침략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기세를 떨쳤다. 그리하여 유목민족 정복왕조가 135년간 중국 북부를 지배했다. 이 기간에 흉노를 비롯한 정복왕조는 5호 16개의 나라를 건립하여, 북방에는 전쟁이 끊일 날이 없었다. 이때 진황실의 잔여세력은 망명정권을 유지했다. 그러나 동진정권도 1백년만에 붕괴하고, 남방에는 한족 4개 국가가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이리하여 5세기 초반부터 남북조시대가 전개되고, 南朝(남조)(420-589)는 한족 정권에 의해, 北朝(북조)(439-581)는 선비족의 정복왕조에 의해 각각 분리 통치됐다.

 이 시기 중국에서는 문화적 「오랑케」문화와 한족문화가 뒤섞여 발전했다. 한족은 세련된 농경문화를 통해 이민족에게 영향을 주었고, 반대로 다소 거칠은 유목민족 문화 역시 한족에서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유목민족의 복식인 긴 장화가 유행한다든지, 그들의 음식이 한족에 의해 사랑받는 등 이른바 胡漢(호한)문화의 통합이 절정에 올랐다.

 이러한 배경에서 수문제 양견은 재통일의 대업을 완성했다. 이는 정치적 통합에 그치지 않고 남북 분열의 종식, 농경민족과 유목민족의 융합을 의미했다. 이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바로 大運河(대운하)였다. 문제의 의해 시작되어 양제에 의해 완성된 대운하는 남과 북을 꿰뚫은 대동맥으로 부상했다.

 장기간의 분열을 종식시킨 문제는 완전한 통합을 위한 구체적 정책을 실천에 옮겼다. 우선 3성과 6부의 중앙기구 및 주와 군의 지방행정체계를 구축하여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조직정비를 서둘렀다. 동시에 과거제를 설치하여 귀족문벌 출신이 아닌 평민들의 관계 진출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경제적으로 그는 균전제를 실시했다. 경제적 평등의 실현과 함께 모든 백성을 생산력 회복에 끌어들이기 위해 골고루 땅을 분배해 주는 파격적인 토지정책을 펼쳤던 것이다. 그외에도 전국적인 호구조사를 통해 문벌귀족에게 강제로 편입됐던 호구를 다시 찾아주는 작업도 서둘렀다. 이러한 경제정책으로 말미암아 문제 제위 말년에는 『천하에 축적된 바가 공히 50-60년은 충분하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중국 경제는 매우 번성했다. 그러나 문제는 말년에 대규모 토목공사를 실시하여 민심을 어지럽히고 지나친 형벌로 사회를 흉흉하게 만들었다.

 

 병든 아버지 文帝(문제)를 죽이고 황제에 등극한 양제(煬帝) 본명이 楊廣(양광)으로 569년에 태어나 618년에 죽었다. 양(煬)은 악한 황제를 가리키는 시호이다. 수나라 문제(文帝)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문헌독고(文獻獨孤) 황후이다. 처음에 진왕(晉王)이 되어 남조(南朝)시대 진(陳)나라 토벌에 활동하였으며, 600년에 형인 황태자 용(勇)을 실각시키고 스스로 황태자가 되었다.

 604년에 권신 양소(楊素)와 결탁하여 아버지와 큰형을 살해하고 그의 왕비를 범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제위를 찬탈한 그는 극도의 사치로 문제가 축적한 사회적 부를 모두 탕진하는데 그치지 않고 수의 멸망을 앞당기기에 이르렀다.

 우선 대규모 토목공사를 수없이 벌였다. 수나라 통치의 상징물인 대운하를 완성했으며, 수도 낙양에 아방궁등 호화스런 건축물을 여기저기에 지어 그가 병사할 때까지도 완성되지 못한 것들이 무수히 많았다.

 이를 위해 수많은 인력이 동원돼 부역을 제공해야 하는 백성들의 원성은 하늘에 닿았다.

 양제의 종말과 수의 붕괴를 앞당긴 또 하나의 잘못은 무리한 고구려 원정이었다. 당시 동북아는 통일제국 수를 중심으로 북방의 돌궐족과 동방의 고구려에 의해 좌우됐다. 고구려는 이미 후한 말기부터 삼국시대에 걸쳐 중원의 동북부를 자주 넘나들었다. 중국이 남북조의 혼란기에 접어들자 고구려의 영향력은 더욱 비대해지고 그 영토도 중국대륙 깊숙이 파고 들었다.

 수 양제는 612년 113만명이라는 미증유(未曾有: 이제까지 한 번도 있어 본 적이 없음)의 대병력을 이끌고 고구려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이때 병참물자 수송에 징발된 인력까지 포함하면 고구려 침략전에는 3백만명 이상이 동원됐던 셈이다. 그러나 수의 대군은 고구려에 비참하게 무너졌다. 특히 을지문덕 장군이 지휘한 살수대첩은 생존자가 고작 2천7백명 밖에 안되는 처참한 패배를 수에게 안겨 주었다.

 양제는 결국 고구려를 굴복시키지 못한 채 정복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고구려 원정의 실패는 민심의 동요를 가져왔다. 국고는 탕진됐고, 이러한 제정궁핍을 만회하기 위한 가렴주구(苛斂誅求: 가혹하게 세금을 거둬들이고 백성의 재물을 빼앗음)는 더욱 극성을 떨었다. 그 결과 전국 각지에서 무려 120여 민란이 발생했고, 마침내 양제는 그 부하의 손에 의해 살해됐다. 양제가 죽자 그의 손자가 즉위했지만 대세를 되돌이킬 수 없었으며, 결국 3대 38년만에 수는 멸망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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