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隋文帝(수문제, 540~604)와 煬帝(양제, 569~618) - 분열과 재통일

독고가라(獨孤伽羅, 543~602) · 파경중원(破鏡重) · 일의대수(一衣帶水)

 

隋文帝(수문제, 540~604)와 煬帝(양제, 569~618) - 분열과 재통일

 중국제국의 역사는 통합과 분열의 반복이었다. 여기에 유목민족과 농경민족간의 대립도 가세하여 역사발전이 매우 역동적으로 전개됐다. 특히 한제국의 분열후, 중원대륙은 잦은 이민족의 침입으로 분열을 거듭했으며, 이러한 분열상을 극복하고 다시 통일제국을 출현시킨 인물은 수의 문제(隋文帝)와 양제(煬帝)였다. 그러나 수(隋)나라(581~619, 38년간)은 단명했고 그 뒤를 이은 唐(당, 618~907)에 의해 통일제국의 재건작업이 완결됐다.

 

隋文帝(수문제)와 煬帝(양제)

나라

지위

이름

생몰

재위기간

수(隋)

문제(文帝) - 수나라 제1대 황제

양견(楊堅)

540~604 (64세)

581~604 (23년간)

수(隋)

양제(煬帝) - 수나라 제2대 황제

양광(楊廣)

569~618 (49세)

604~617 (13년간)

 

 

 수문제(隋文帝)의 본명은 楊堅(양견)으로, 540년에 태어나 604년에 죽었다. 그는 섬서출신으로, 北朝(북조)정권 중 하나인 北周(북주)의 靜帝(정제, 580~581)의 외할아버지였다. 양견은 580년에 宣帝(선제, 578~580)가 병사한 뒤, 8세 밖에 안되는 정제가 즉위하자 대승사의 자격으로 실권을 휘둘렀다.

 

 그는 선제의 폭정으로 야기된 문제점을 해결하고, 근검절약을 제창하는등 민심수습에 주력했다. 그 여새를 몰아 어린 정제를 핍박하여, 581년 소위 자발전 '禪讓(선양)'을 받아 황제에 오른 후 국호를 수(隋)로 바꾸었다.

 

 수문제가 된 양견은 270여년간 계속된 중국의 분열을 수습하고, 마침내 재통일의 과업을 완성했다.

 그는 우선 남조의 後梁(후양, 555~587)을 물리치고 연이어 陳(진, 557~589)을 무찔렀다. 이로써 東晉(동진: 265~316)시대 이래 시작된 약 3백년 간의 분열에 종지부를 찍었다.

 

 당시 중국제국이 경험했던 분열의 역사는 실제로는 위, 촉, 오 삼국시대가 전개되기 시작한 서기 22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후한에 의해 한제국의 맥이 계승됐지만, 후한의 황실도 농민운동인 黃巾賊(황건적)의 난으로 급격히 쇠퇴했다. 삼국정립의 분열상황은 司馬(사마) 가문의 晉(진: 265~316) 또는 西晉(서진)에 의해 일시적이나마 해소됐으나 291년부터 306년까지 무려 16년에 걸친 '8왕의 난(八王之亂)'으로 중국은 다시 분열의 시대에 접어 들었다. 더욱이 북방의 유목민족들은 남방진출을 한층 더 가속화시켜 마침내 흉노족이 304년 수도 洛陽(낙양)을 격파하고 晉(진)의 황제를 포로로 삼자 晉(진)의 통일제국은 막을 내렸다.

 

 흉노의 남진으로 시작된 북방민족의 침략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기세를 떨쳤다. 그리하여 유목민족 정복왕조가 135년간 중국 북부를 지배했다. 이 기간에 흉노를 비롯한 정복왕조는 5호 16개의 나라를 건립하여, 북방에는 전쟁이 끊일 날이 없었다. 이때 진황실의 잔여세력은 망명정권을 유지했다. 그러나 동진정권도 1백년만에 붕괴하고, 남방에는 한족 4개 국가가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이리하여 5세기 초반부터 남북조시대가 전개되고, 南朝(남조: 420~589)는 한족 정권에 의해, 北朝(북조: 439~581)는 선비족의 정복왕조에 의해 각각 분리 통치됐다.

 

 이 시기 중국에서는 문화적 '오랑케'문화와 한족문화가 뒤섞여 발전했다. 한족은 세련된 농경문화를 통해 이민족에게 영향을 주었고, 반대로 다소 거칠은 유목민족 문화 역시 한족에서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유목민족의 복식인 긴 장화가 유행한다든지, 그들의 음식이 한족에 의해 사랑받는 등 이른바 胡漢(호한)문화의 통합이 절정에 올랐다.

 

 이러한 배경에서 수문제 양견은 재통일의 대업을 완성했다. 이는 정치적 통합에 그치지 않고 남북 분열의 종식, 농경민족과 유목민족의 융합을 의미했다. 이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바로 大運河(대운하)였다. 문제의 의해 시작되어 양제에 의해 완성된 대운하는 남과 북을 꿰뚫은 대동맥으로 부상했다.

 

 장기간의 분열을 종식시킨 문제는 완전한 통합을 위한 구체적 정책을 실천에 옮겼다. 우선 3성과 6부의 중앙기구 및 주와 군의 지방행정체계를 구축하여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조직정비를 서둘렀다. 동시에 과거제를 설치하여 귀족문벌 출신이 아닌 평민들의 관계 진출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경제적으로 그는 균전제를 실시했다. 경제적 평등의 실현과 함께 모든 백성을 생산력 회복에 끌어들이기 위해 골고루 땅을 분배해 주는 파격적인 토지정책을 펼쳤던 것이다. 그외에도 전국적인 호구조사를 통해 문벌귀족에게 강제로 편입됐던 호구를 다시 찾아주는 작업도 서둘렀다. 이러한 경제정책으로 말미암아 문제 제위 말년에는 『천하에 축적된 바가 공히 50~60년은 충분하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중국 경제는 매우 번성했다. 그러나 문제는 말년에 대규모 토목공사를 실시하여 민심을 어지럽히고 지나친 형벌로 사회를 흉흉하게 만들었다.

 

 병든 아버지 文帝(문제)를 죽이고 황제에 등극한 양제(煬帝) 본명이 楊廣(양광)으로 569년에 태어나 618년에 죽었다. 양(煬)은 악한 황제를 가리키는 시호이다. 수나라 문제(文帝)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문헌독고(文獻獨孤) 황후이다. 처음에 진왕(晉王)이 되어 남조(南朝)시대 진(陳)나라 토벌에 활동하였으며, 600년에 형인 황태자 용(勇)을 실각시키고 스스로 황태자가 되었다.

 

 604년에 권신 양소(楊素)와 결탁하여 아버지와 큰형을 살해하고 그의 왕비를 범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제위를 찬탈한 그는 극도의 사치로 문제가 축적한 사회적 부를 모두 탕진하는데 그치지 않고 수의 멸망을 앞당기기에 이르렀다.

 우선 대규모 토목공사를 수없이 벌였다. 수나라 통치의 상징물인 대운하를 완성했으며, 수도 낙양에 아방궁등 호화스런 건축물을 여기저기에 지어 그가 병사할 때까지도 완성되지 못한 것들이 무수히 많았다.

 

 이를 위해 수많은 인력이 동원돼 부역을 제공해야 하는 백성들의 원성은 하늘에 닿았다.

 

 양제의 종말과 수의 붕괴를 앞당긴 또 하나의 잘못은 무리한 고구려 원정이었다. 당시 동북아는 통일제국 수를 중심으로 북방의 돌궐족과 동방의 고구려에 의해 좌우됐다. 고구려는 이미 후한 말기부터 삼국시대에 걸쳐 중원의 동북부를 자주 넘나들었다. 중국이 남북조의 혼란기에 접어들자 고구려의 영향력은 더욱 비대해지고 그 영토도 중국대륙 깊숙이 파고 들었다.

 

 수 양제는 612년 113만 명이라는 미증유(未曾有: 이제까지 한 번도 있어 본 적이 없음)의 대병력을 이끌고 고구려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이때 병참물자 수송에 징발된 인력까지 포함하면 고구려 침략전에는 3백만 명 이상이 동원됐던 셈이다. 그러나 수의 대군은 고구려에 비참하게 무너졌다. 특히 을지문덕 장군이 지휘한 살수대첩은 생존자가 고작 2천7백명 밖에 안되는 처참한 패배를 수에게 안겨 주었다.

 

 양제는 결국 고구려를 굴복시키지 못한 채 정복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고구려 원정의 실패는 민심의 동요를 가져왔다. 국고는 탕진됐고, 이러한 제정궁핍을 만회하기 위한 가렴주구(苛斂誅求: 가혹하게 세금을 거둬들이고 백성의 재물을 빼앗음)는 더욱 극성을 떨었다. 그 결과 전국 각지에서 무려 120여 민란이 발생했고, 마침내 양제는 그 부하의 손에 의해 살해됐다. 양제가 죽자 그의 손자가 즉위했지만 대세를 되돌이킬 수 없었으며, 결국 3대 38년만에 수는 멸망하고 말았다.

 

 

 

▲ 일부일처제(一夫一妻制)  - 문헌황후(文獻皇后) 독고가라(獨孤伽羅, 543~602)

 수(隋)나라의 황후로, 수문제(隋文帝)의 부인이자 수양제(隋楊堅)의 어머니.

 시호는 문헌황후(文獻皇后). 

 기호지세가 유래된 일화가 수서(隋書)의 '독고황후전(獨孤皇后傳)'에 나오는 등 '독고 황후'라고 불리는 경우가 많다.

 

 독고신의 일곱 번째 딸. 중국사에서 손꼽을 만한 여걸로서, 능력과 성격이 대단해서 수문제의 정치적인 조언자 역할을 했는데 수문제에게 자신 이외 여인에게서 자식을 낳지 않겠다고 맹세하게 할 정도로 첩실 견제가 심했다.

 

 대대로 가문이 귀하고 융성하면서도 겸손하면서 공경했고, 근검절약했으며, 책 읽는 것을 좋아해 나랏일에 대해 말하는 것이 대부분 수문제에게 부합하여 수문제가 총애하면서도 꺼렸다. 궁중에서는 수문제와 함께 두 성인이라 칭했고, 독고가라는 수문제와 함께 수레를 타고 나오다 문에 이르러서 멈췄으며, 환관에게 수문제를 살피도록 하면서 정사에 착오가 있으면 즉시 고치도록 간하였고 수문제가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돌아갔다. 돌궐에서 명주 한 상자를 구입할 것을 청하자 이를 사지 않고 공이 있는 자에게 주었고 내외종간에 해당하는 최종인이 법을 어기자 수문제가 죄를 면제하려고 했지만 죄에 연루되어 죽게 했다.

 

 자치통감에서 수문제가 울지형의 손녀를 총애하자 수문제가 조정에서 정사를 하는 틈을 타서 그녀를 죽였는데, 수문제는 이를 듣고 화를 내며 산중으로 숨어 들어갔는데, "나는 신분이 천자이면서도 자유가 없다."라고 한탄하는 문제를 진정시키기 위해 고경이 한 사람의 부인 때문에 천하를 가볍게 한다고 했다. 독고가라는 환궁하는 수문제를 문 앞에서 기다렸다가 절하고 울면서 사과했다고 한다.

 

 이후 고경이 말한 '한 사람의 부인'이 자신을 뜻한다고 여겨 고경을 미워하게 되었으며, 고경을 여러 차례 참소해서 실각하게 만들었다.

 

 그의 일족 중에서 독고타가 사악한 요술을 좋아해 묘귀를 이용해 사람을 살해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 일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수문제가 신하들의 의견에 따라 독고타를 죽이려 했지만 탄원을 해서 독고타는 죽음을 면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죽었다고 한다.

 

 황태자 양용이 591년에 후궁 소훈 운씨를 총애해, 황태자비 원씨가 마음의 병으로 사망하자 이를 책망했다.

 

 차남 양광은 형 양용이 여자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일부러 궁녀를 태자의 거처에 보내 술을 마시게 해서 사치스럽다는 이미지를 뒤집어씌웠는데, 독고가라는 양용이 궁녀와 술마시는 것을 보고 양용이 태자 자리에 있기에는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라 판단해 양광, 양소 등과 결탁해 양용을 태자 자리에서 쫓아내고 600년에 양광을 태자 자리에 오르게 했고 59세였던 602년 8월 19일에 사망했다. 그러나 이 선택은 이후 수나라를 멸망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수문제도 죽기 전 양광의 흉계를 뒤늦게 깨닫고 '내가 황후의 말을 들은 것이 큰 실책이었다'라고 말했으나 이미 때가 늦은 뒤였다.

 

 참고로 독고가라의 언니 명경황후 독고씨는 북주 명제의 황후였고, 또 다른 언니 원정황후(추존) 독고씨는 당고조의 생모다.

 

 

騎虎之勢(기호지세)

 騎: 말 탈 기   虎: 범 호   之: 갈 지   勢: 형세 세

 호랑이를 타고 달리는 기세(氣勢)'라는 뜻으로, 범을 타고 달리는 사람이 도중(途中)에서 내릴 수 없는 것처럼 도중(途中)에서 그만두거나 물러설 수 없는 형세(形勢)를 이르는 말.

 

 이 말은 수(隋)나라 문제(文帝)인 양견(楊堅)의 황후(皇后) 독고씨(獨孤氏)가 남편을 격려하는 말 가운데 나와 있다.

 

 독고 씨의 아버지는 북주(北周, 557~581)의 대사마(大司馬) 하내공(何內公) 신(信)이다. 신은 양견이 앞으로 크게 될 사람으로 예견하고 열네 살짜리 딸을 양견에게 주어서 사위를 삼았다. 그녀는 결혼 당초에 남편에게 첩의 자식을 낳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았다고 하는데, 어찌나 질투가 심했던지 언제나 후궁에게 감시의 눈을 떼지 않았고, 그녀가 쉰 살로 죽을 때까지 후궁에게서는 단 한 명의 자식도 태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단 한 번 문제가 후궁의 미녀에게 손을 댄 일이 있었는데, 이것을 안 그녀는 문제가 조회에 나간 사이에 그 미녀를 죽이고 말았다. 화가 치민 문제는 혼자 말을 타고 궁중을 뛰쳐나가 뒤쫓아온 신하들을 보고, "나는 명색이 천자(天子)로서 내가 하고 싶은 일도 할 수 없단 말인가?" 하며 울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과거에 북주(北周)의 선제(宣帝)가 죽고, 양견이 나이 어린 정제(靜帝)를 업고 모든 일을 혼자 처리하고 있을 때, 독고 씨는 환관(宦官)을 시켜 남편 양견에게 이렇게 전하게 했다.

 "큰일은 이미 騎虎之勢(기호지세)로 되고 말았소. 이제 내려올 수는 없소, 최선을 다하시오."

 이리하여 결국 양견은 정제를 밀어내고 수(隋)나라 황제(皇帝)가 된 것이다.

 

 우리 속담에 '벌인 춤'이란 말이 있다. 잘 추든 못 추든 손을 벌리고 추기를 시작했으면 추는 데까지 출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破鏡重(파경중원)

 破: 깰 파,   鏡: 거울 경,   重: 다시 중,   圓: 둥글 원

 

 깨졌던 거울이 다시 둥글게 되다.

 헤어졌던 夫婦(부부)가 다시 만난 것을 일컫는 말. 생이별(生離別)한 부부(夫婦)가 다시 결합(結合)한 것.

 

 남북조시대 북주(北周)의 승상 양견(楊堅)은 나이 어린 황제 정제(靜帝)를 죽이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수(隋)나라를 세운 다음 남조의 마지막 왕조 진(陳)을 공격했다.(일의대수(一衣帶水) 참조) 당시에 진의 황제인 후주(後主) 진숙보(陳叔寶)는 나라가 망해 가는데도 주색에만 빠져 있었다.

 

 당시에 진나라 태자의 사인(舍人)이었던 서덕언(徐德言)의 부인은 진숙보의 여동생으로 낙창(樂昌)공주에 봉해졌으며, 재주와 미모가 뛰어난 여인이었다. 진나라의 정세가 혼란스러워지자 서덕언은 아내를 지켜 줄 수 없음을 알고 아내에게 말했다.

 "그대의 재능과 용모로는 나라가 망한 후 틀림없이 권세 있는 집안으로 넘어갈 것이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영원히 헤어지게 될 것이오. 인연이 끝나지 않았다면 다시 만날 수 있게 될 터이니 그렇게 되리라고 믿읍시다."

 

 그러고는 거울을 깨어 반쪽씩 나누어 갖고 약속을 했다.

 "반드시 정월 보름에 도성의 시장에다 팔도록 하시오. 내가 거기에 있다가 그날로 그대를 찾아갈 것이오."

 

 진나라가 망하자 낙창공주는 과연 월공(越公) 양소(楊素)의 집으로 넘어갔는데,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서덕언은 유리방황 갖은 고생을 다하며 겨우 수도로 가, 마침내 정월 보름에 시장에 갔다. 어떤 하인이 거울을 팔고 있었는데 너무 높은 값을 부르자 모든 사람이 다 비웃었다. 서덕언은 그를 숙소로 데려가 밥을 대접하고 그간의 사정을 일일이 말해 주었다. 서덕언은 나머지 반쪽 거울을 꺼내 맞추어 보고는 시를 지었다.

 

 거울은 사람과 함께 갔는데, 거울만 돌아오고 사람은 아니 왔네.

 항아의 그림자는 다시 없고, 달빛만 그저 머무는구나.

 (人俱去(경여인구거), 鏡歸人不歸(경귀인불귀). 無複嫦娥影(무복항아영), 空留明月輝(공유명월휘).)

 

 낙창공주는 이 시를 보고 울기만 하고 식음을 전폐했다. 양소가 이를 알고 비통해하며 즉시 서덕언을 불러 아내를 데려가도록 했으며, 많은 재물을 주었다. 이 말을 듣고 감탄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 낙창공주는 드디어 서덕언과 함께 강남(江南)으로 돌아가 평생을 함께했다.

 

 이 이야기는 맹계(孟棨)의 '본사시(本事詩)' '정감(情感)'에 나오는데, 거울을 깨서 나누어 가졌다가 다시 거울을 맞추었다는 데서 유래하여 '파경중원(破鏡重)'은 헤어졌던 부부가 다시 결합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파경(破鏡)'은 부부 관계가 깨어지는 것을 말한다.

 

 '파경(破鏡)'은 본래 이 고사에서처럼 원래 남녀가 헤어졌다 다시 만나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 파경중원(破鏡重圓), 반경중원(半鏡重圓), 반경환원(半鏡還圓), 파경중합(破鏡重合), 경파(鏡破)라고도 한다. 후에는 남녀가 헤이지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 더 많이 사용되었고, 이별할 때 나누어 가진 거울이 부인이 배반하자 까치로 변했다는 이야기의 경화작비(鏡化鵲飛)와 같은 의미로 쓰인다.

 

 

一衣帶水(일의대수)

 : 한 일,   : 옷 의,   : 띠 대,   : 물 수

 

 한 줄기의 띠와 같은 좁은 시냇물.

 허리띠처럼 좁다랗게 가로지르는 개울물. 매우 좁고 작을 때 쓰는 말.

 (수)나라 文帝(문제) 楊堅(양견)이 장강(長江)을 一衣帶水(일의대수)에 비유함.

 

'남사(南史)' '진본기(陳本紀)'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나는 백성들의 어버이로서, 어찌 옷의 띠와 같은 물을 한하여 이를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我爲民父母 豈可限一衣帶水 不拯之乎)."

 수()나라의 문제(文帝)가 진()나라를 공격하면서 장강(長江)을 두고 한 말이다. 장강(長江)은 예로부터 천연의 요충지대로서, 삼국시대 이래 동진(東晉)과 남조(南朝)의 송(), 제(), 양(), 진() 모두 이를 방패 삼아 북쪽의 이민족에 대항해왔던 곳이다. 이런 장강(長江)을 문제는 '하나의 옷의 띠와 같은 물'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저 '기우장대(氣宇壯大)'로 한 말은 아니었다.

 

 수나라 문제 양견(楊堅)은 즉위하면서부터 천하통일이라는 웅대한 구상을 품었다. 그는 대외적으로는 남조의 진과 평화공존 정책을 취하면서 북쪽의 돌궐(突厥)에 대비하였으며, 안으로는 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를 폐지하고 중앙집권력을 강화하면서 검약에 힘쓰는 등 국력의 충실을 도모했다. 그러나 진나라는 후주(後主) 진숙보(陳叔寶)가 즉위한 뒤,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이에 문제는,

 "나는 즉위한 이후로 오직 진나라의 정복을 구상해왔다. 이제 진나라의 임금이 방탕하여 의지할 곳이 없어진 백성은 도탄의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 나는 백성의 부모로서 이를 무시할 수는 없다. 장강(長江)의 험함은 두려워할 것이 못되니, 저런 강을 두려워하여 백성이 죽는 것을 보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하며 진나라의 정벌을 선언하였다.

 

 589년에 문제의 차남 양광(楊廣)을 총대장으로 하는 51만 8천의 군대는 일제히 장강(長江)을 건너 진나라를 공격하였다. 얼마 뒤 진숙보가 수나라의 병사들에게 사로잡힘으로써 진나라는 다섯 임금 33년 만에 멸망하였다. 이로써 중국 전토에 걸친 대제국이 출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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