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曹操(조조), 孫權(손권), 劉備(유비) - 삼국지의 주역들

 

 단지 반세기 정도의 시간밖에 차지하지 않았던 삼국시대가 중국인은 물론 우리나라 동양인 전체의 눈에 중국사중 가장 흥미진진하고 친숙한 시대로 비추어지는 것은 삼국저립의 세 주역인 조조 손권 유비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이들이 꾸려간 삼국시대야말로 전란의 시대이면서 개혁과 팽창의 시기이기도 했다.

 

 조조는 155년 安徽(안휘)에서 태아나 20세에 관직에 진출했다. 이미 현왕실이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시점에 이르자, 전국 각지에서는 농민봉기가 일어나고 그 진압을 구실로 군벌이 등장했다. 당시 패권을 장악한 대군벌 董貞(동정)을 제거하기 위한 연합세력에 참여한 그는 탁월한 군사적 역량을 과시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196년경에는 그 자신이 중앙정부를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의 통치영역은 북방지역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이미 남쪽에는 강남의 손권이, 四川(사천)지방 중심의 유비가 각각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조는 병력을 이끌로 천하통일을 위한 일전을 펼쳤다. 이것이 유명한 赤壁大戰(적벽대전:208년)이다. 여기에서 손권과 유비의 세력에게 패배함으로써 본격적인 삼국정립 시대가 개막됐다.

 

 적벽대전에서 패배한 후, 조조는 내치와 북방영토 확장에 더욱 힘을 기울였다. 특히 신분과 관계없이 인재를 등용하고, 兵農合一(병농합일)의 원칙 아래 새로운 토지제도인 屯田制(둔전제)를 실시하여 인적, 물적 토대를 강화했다. 그러나 조조는 통일을 완성시키지 못한 채 220년 사망하고, 그의 아들 曹丕(조비)가 한왕실을 폐쇄하고 魏(위)나라를 세우며 왕제를 칭했다.

 

 한편 적벽대전에서 승리를 거둔 유비는 근거지를 서남방향으로 확장해갔다. 유비는 161년 태어난 223년에 사망했는데, 탁월한 재상인 諸葛亮(제갈량)(181-234)의 도움으로 마침내 蜀(촉)이라는 나라를 세워 스스로 황제의 지위에 올랐다.

 

 마지막으로 강남의 손권은 188년에 태어나 252년에 죽었다. 그의 기반은 그의 아버지와 형에 의해 이미 강남에 구축됐지만, 적벽대전 이후에야 비로소 확실한 통치세력으로서 부상했다. 그는 현재의 江蘇(강소), 浙江(절강), 江西(강서)에서 세력을 점차 확대시켜 湖南(호남), 福建(복건), 廣東(광동), 廣西(광서)등지에까지 영토를 넓혔다. 그도 마침내 吳(오)를 세워 스스로 황제가 됐다.

 

 조조의 위, 유비의 촉, 손권의 오나라 모두 통일에는 실패했다. 정작 중국의 통일하고 천하의 패권을 잡은 인물은 위의 권문세가 출신인 司馬炎(사마염: 236~290)이었다.

 

 그는 265년 위를 무너뜨리고 晉(진)를 건국한 데 이어 마침내 280년 천하를 통일하기에 이르렀다.

 

 조조 유비 손권의 삼국시대는 전란의 시대였다. 그러나 이들 세 사람은 서로 살아남기 위해 전쟁하는 동안, 세 사람은 서로 살아남기 위해 경쟁하는 동안 매우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정책을 펼쳤다. 또한 그들의 영토 획득 경쟁은 중국영토가 더욱 확장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위는 만주의 遼東(요동)과 조선의 북반부까지, 오는 대만과 최남단 海南島(해남도)까지, 촉은 양자강과 황하의 상류지방까지 각각 영토를 확장하고 개발을 서두름으로써 결과적으로 중국의 영토는 더욱 커졌던 것이다.

 

 

조조(曹操: 155 ~ 220)

 조조(曹操: 155~220)는 중국 삼국시대 위왕조(魏王朝)를 세운 장군으로 위나라의 정치가이자 군인이며 시인이다. 자는 맹덕(孟德),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무황제(武皇帝)라 추존되었다.

 

 후한이 그 힘을 잃어가던 시기에 비상하고 탁월한 재능으로 두각을 드러내, 여러 제후들을 연달아 격파하고 중국 대륙의 대부분을 통일하여 위나라의 기틀을 닦았다. 조조는 삼국지의 영웅들 가운데 패자(覇者)로 우뚝 솟은 초세지걸(超世之傑)이라는 평가와, 후한을 멸망시킨 난세의 간웅(奸雄)이자 역신(逆臣)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 한 몸에 받는 인물이다. 나관중(羅貫中: 1330?~1400)의《삼국지연의》에 의해 권모술수에 능한 악인으로 저평가되기도 했지만 근년에 이르러 중국 사학계에서는 그를 재평가하는 논쟁이 일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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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조는 패국 초현 사람으로 조등의 양자인 조숭의 아들이다. 《삼국지》〈무제기〉에 따르면 ,전한 시대 유방의 심복으로 재상을 지낸 조참의 자손인 조등은 환제 때 중상시를 맡았다. 이에 대해 《후한서》〈조등전〉에 조참의 후예라는 기록이 없다는 점을 들어 조참 후예설을 위의 선양을 윤색하고 조씨 가문을 격상시키려는 데에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조등이 환관이라 아들이 없었으므로 조숭을 양자로 삼았다(《삼국지》〈무제기〉에 인용된 〈조만전〉의 일설에 따르면, 조숭이 하후씨이며 하후돈의 숙부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 환관의 손자라는 열등감이 나중에 조조의 인물상이나 생활 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된다.

 

 조조의 어릴 적 이름은 길리(吉利), 또다른 이름으로 아만(阿瞞)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교묘한 꾀와 기지를 발휘하는 일화가 많이 남아 있다. 소년 시절 매 날리기, 사냥과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는 조조를 보고 숙부가 종종 조숭에게 충고하곤 했다. 어느 날 조조가 숙부를 만나자 입이 마비된 듯한 시늉을 했다. 숙부가 조조에게 묻자 "마비증상이 갑자기 왔습니다"라고 답했고 숙부는 이 일을 조숭에게 알렸다. 조숭이 이를 놀라 듣고 조조를 불렀는데 조조는 태연하게 "원래부터 마비증상은 없었습니다"라고 답해 이후 아버지는 숙부의 말을 신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조조는 원소(袁紹:?∼202)와 일찍이 장난꾸러기 친구 사이였다. 언젠가 이 두 사람은 갓 결혼한 신부를 훔치러 갔다. 일이 실패하여 추적자를 따돌리면서 도망하던 도중, 원소는 그만 가시덤불 속으로 굴러 떨어지고 만다. 원소가 가시에 찔려 통증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자, 조조는 대뜸 범인이 여기 있다고 큰소리로 외쳤다. 원소가 기겁하여 통증도 잊고 얼른 가시덤불 속에서 나와 도망가기에 바빴다고 한다.

 

 이처럼 품행이 불량한 모습을 보고 누구도 조조를 좋게 봐주는 사람이 없었으나, 양나라의 교현과 남양의 하옹은 조조를 남다른 인물로 평가했다. 교현은 조조에게 "천하를 안정시키는 일은 아마도 그대에게 달려있다"라고 말했다. 조조는 교현의 권유로 허소와 깊은 친교를 갖는다. 어느 날 허소에게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물었는데, 허소는 조조를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子治世之能臣, 亂世之姦雄也(자치세치능신, 난세지간웅야))'(《삼국지》 배송지주)으로 평가했다(한편, 후한서 허소전에는 조조를 '태평시대의 도적, 난세의 영웅(君淸平之奸賊, 亂世之英雄(군청평지간적, 난세지영웅))'으로 평가한다.) 이 말을 들은 조조는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조조는 20살에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낭관(郎官)이 되고 낙양북부위에 임명된다. 그는 권세를 휘두르고 있었던 건석이라는 환관의 숙부가 금지된 야간 외출을 하자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법을 어긴 자는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가차없이 처벌했다. 이어서 그는 돈구(頓丘)의 현령, 의랑(議郞) 등으로 출세 가도를 달린다.

 

 184년 조조가 30살 때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다. 이때 기도위(騎都尉)에 임명되어 영천(潁川)에서 황건적을 토벌하고, 이 공적으로 제남국 재상으로 승진, 거기에서 그는 뇌물과 향락에 물든 상급 관리 8할을 파면하고, 당시 유행하던 사이비 종교나 미신 부류를 모두 금지시킨다. 그 후 동군태수로 임명되지만 부임하지 않고 돌연 사퇴했다. 그리고 고향에서 사냥과 독서를 즐기며 은거 활동에 들어갔다.

 

 금성의 한수와 변장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수도 방위를 위해 전군교위(典軍校尉)로 임명된다. 그 무렵 영제가 죽고 대장군 하진과 원소는 환관 주살을 계획한다. 그런데 황태후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동탁 등 각지의 제후를 소집하여 황태후에게 압력을 행사하려고 했다. 조조는 이 소식을 듣고 "일부러 제후들을 부르지 않더라도 환관의 우두머리만 처형하면 될 뿐, 그들을 모두 죽이려고 한다면 일이 탄로나 실패할 것"이라고 말했다. 과연 조조가 예상한 대로 동탁이 아직 도착하지 않는 사이에 하진은 환관들에게 주살되고 만다. 또한 환관들도 원소에게 모두 주멸되고, 이 와중에 실권은 동탁의 수중으로 떨어진다. 권력을 장악한 동탁은 조조에게 협조를 구하지만 조조는 거절하고 성을 탈출했다. 이때 조조가 왕윤에게 빌린 칠보검으로 동탁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여 도망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189년(중평 6년) 12월, 조조는 사비를 털어 군사를 모으고 원소를 맹주로 하는 반동탁 연합군에 가담하여 분무장군을 맡는다. 그런데 동탁군이 워낙 강력했으므로 제후들 중 누구도 선뜻 선두에 나서지 못했다. 그리고 동탁을 축겨하는 것에 대해서는 다들 냉소적이고 모두가 반대했지만 조조 혼자 결단하여 하후돈 등을 대동하고 동탁을 추격했다. 그러나 조조는 변수에서 동탁의 부하 서영에게 패하고 만다. 조조는 제후들이 주둔한 산조로 돌아오지만 그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군사를 움직이지 않자 결국 연합군은 와해되고 만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조조는 무형의 자산을 얻었으니 그것이 바로 인망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패할 것을 뻔히 알고도 불구하고 오직 황제를 구출하기 위해 홀로 뛰어들었다.'라는 이미지가 조조에게 강렬하게 박혀 조조의 밑으로 들어오는 인재들이 우후죽순같이 많아지게 된다.

 

 191년(초평 2년) 조조는 동군에 침공한 흑산적을 토벌해 원소로부터 동군 태수로 임명된다. 192년 4월, 동탁이 여포에게 살해된다. 같은 해 청주의 황건적 100만 명이 연주에 침공하자 군대를 이끌고 격파한다. 황건적이 항복하자 조조는 이들을 자기의 세력으로 영입하고, 그 가운데 정예 병력을 선발해 ‘청주병’으로 불렀다. 이때부터 유능한 인재가 그에게 부하로 들어오게 된다.

 

 같은 시기에 원소와 원술은 사이가 나빠진다. 원소는 형주의 유표와 연합하고, 원술은 유주의 공손찬과 서주의 도겸과 손을 잡는다. 조조는 유표와 연대해 각지에서 원술의 군대를 격파하고 있었는데, 그때 도겸이 연주 동쪽 태산군에 침공해 조조의 아버지 조승을 살해한다. 이 소식을 접한 조조는 193년부터 194년(흥평 원년)에 걸쳐 2차례 도겸 정벌에 나서 서주에서 무차별 살육을 자행했다.

 

《후한서》에는 "주민 수십만 명을 살해하고 개와 닭 등 가축도 가차없이 도살하였다. 이 때문에 사수(泗水)는 흐름을 멈추고 말았다."라는 처절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사건은 《삼국지연의》에서 조조가 악역으로 묘사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조조가 서주를 공격하는 사이에 친우였던 장막과 연주를 지키던 진궁이 조조에게 반기를 들고 여포를 연주목에 영입한다. 조조는 복양에서 궁지에 빠지고 메뚜기의 피해로 굶주림에 허덕이지만 2년에 걸친 공방 끝에 마침내 연주를 평정하는 데 성공한다.

 

 196년(건안 원년)에는 헌제를 옹립하여 대장군으로 임명되고 수도를 허창으로 옮긴다. 그와 함께 여러 개혁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같은 해에 조지와 한호(《진서》 선제기에서는 사마의)의 건의를 받아들여 둔전제를 실시해 농경을 전문으로 하는 농민을 널리 모집하여, 허도(허창) 주변에서 농업에 종사시켜 곡물 100만 석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이리하여 전쟁에 없어서는 안될 식량을 충실히 마련하여 천하를 장악할 수 있는 기반을 쌓는다.

 

 이때 유비가 여포에게 하비를 빼앗겨 조조 밑으로 도망온다. 부하 정욱은 "유비는 끝내 남의 밑에 남아있을 인물이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제거할 것을 진언하지만, 조조는 "지금은 영웅의 마음을 붙들 시기"라며 유비를 잘 대우한다.

 

 197년 조조는 완(宛)에 출진하여 장수(張繡)를 항복시키지만 나중에 그는 조조를 배신한다. 이 싸움에서 조조가 패하고 맏아들 조앙과 부하 전위가 전사한다. 198년 조조는 장수, 유표의 연합군을 안중에서 격파하고, 하비에서는 여포를 사로잡아 처형한다. 다음해에는 원술을 토벌하고 장수를 다시 굴복시켜 그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원술 토벌에 유비를 파견한 일이 문제가 된다. 유비는 하비에서 반기를 들어 서주자사 차주(車胄)를 살해했다. 그러나 200년에 조조가 친히 출진하여 유비를 격파하고 관우를 항복시켰다. 유비는 원소 밑으로 도망치고 마침내 원소와 천하를 놓고 자웅을 겨루게 된다.

 

 원소와 천하 패권을 다투는 전초전은 먼저 백마에서 치러진다. 여기에서 조조는 원소의 부하인 맹장 안량과 문추를 물리치고 전투를 유리하게 이끈다. 그러나 관도에서 대치가 길어지자 아군의 식량이 고갈되고 그 대담한 조조도 마음이 약해진다. 그래서 순욱에게 허도로 귀환하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 상담을 구했는데, 순욱은 격려의 답장을 보내와 그곳에서 버티게 한다. 마침내 원소의 부하 허유가 투항하고 고시와 오소에 있는 원소의 식량기지를 습격하기를 진언하여 형세는 역전, 원소군은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이때 몰수한 전리품 중에서 원소와 내통하고 있었던 조조의 부하의 편지가 무더기로 나왔다. 조조는 "원소의 대군을 상대로 해서 나 자신조차도 어찌 될지 알 수 없었다. 하물며 다른 사람들은 어떠했겠는가?"라고 말하면서 편지를 읽지 않고 모두 불태웠다고 한다. 그 후에도 북진을 계속하여 원씨 잔당 세력을 철저히 격파했다.

 

《삼국지연의》에 따르면, 이때 조조는 군사를 몰아 장성을 넘어 모돈(冒頓 또는 묵돌)을 죽였다고 한다. 모돈은 기원전 209년부터 기원전 174년까지 흉노의 선우(대족장)를 지냈던 사람으로 조조와는 4백년 가까이 시차가 있는 인물이다. 조조의 모돈 살해는 나관중이 삼국지연의에서 꾸며낸 이야기다.

 

 원소 토벌 이후 중국 대륙의 최강자로 자리매김한 조조는 208년 승상(丞相)의 지위에 오르고, 형주의 유종을 항복시켜 적벽대전에서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과 대치하다가 대패하여 조조는 가까스로 도망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도망치는 도중에 3번이나 유비를 바보라고 비웃으며 "나라면 여기에 복병을 놓겠다"라고 말하는데, 그때마다 조운, 장비, 관우에게 차례로 습격당한다. 이후 중국 대륙은 위, 촉, 오 삼국의 삼국 시대에 접어들어 완전한 통일의 꿈이 멀어지지만 조조의 우세한 세력 기반은 변하지 않았다.

 

 210년에 조조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구현령과 술지령을 공포한다. “구현령”이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재능있는 사람이면 인재로 등용하는 것이다. “술지령”에서는 수여받은 4현 3만 호 가운데 3현 2만 호를 황제에게 반환하고, 제위 찬탈 등 야망이 없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제도다.

 

 211년 마초와 한수 등이 관중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조조가 토벌에 나섰다. 그런데 군대가 먼저 강을 건너 세력이 약해진 틈에 마초에게 습격당하여 위기에 빠졌지만 다행히 허저의 도움으로 구조된다. 또한 이때 흙을 쌓아올려 성벽을 만들고 물을 뿌려 하룻밤 사이에 얼음성을 완성시켰다고 한다. 결국 가후의 이간책으로 마초와 한수 사이가 벌어지게 하여 적을 물리치고 관중을 평정한다. 212년 오나라 정벌에 나서고 다음해 유수구에서 격파한다. 이때 다시 군사를 일으킨 마초를 토벌, 215년에는 한중의 장로를 항복시키는 등 매년 지칠 줄 모르고 전투를 벌였다.

 

 213년 위공(魏公)으로 책봉되었고, 216년 조조가 위왕(魏王)에 봉해지면서 위나라의 건국이 이루어졌다. 헌제는 사실상 허수아비였으며 이 무렵 후한의 실권자는 조조였으나 황제가 되지는 않고 죽을 때까지 위왕으로 남았다. 그러나 여기에는 비판도 만만찮다. 조조의 위공 취임을 반대한 순욱에게 자살을 명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자신의 의지에 반대하는 자는 비록 공로자라고 할지라도 가차없이 처분했다는 것이다.

 

 217년에는 손권과 다시 싸우고 219년 유비에게 한중을 빼앗기지만, 대신 손권과 연대해 형주의 관우를 멸한다.

 

 관우가 죽은 이듬해, 220년 1월 23일, 조조가 낙양에서 향년 66살의 나이로 서거했다.

 

 조조의 최후에 대해서는 여러 일화가 있다. 건시전을 지을 때 탁용사의 신목(神木)을 베자 나무에서 피가 흘러 이를 본 조조가 기절하고 말았다든가, 배나무를 옮겨심을 때 뿌리에 상처가 나 피가 흐르고, 이것을 본 후 병상에 눕게 되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있다.

 

 아들 조비가 위왕에 오르자 조비는 아버지 조조를 무왕(武王)으로 추증하였다가 헌제에게서 선위를 받고 즉위하자 다시 태조 무황제(太祖 武皇帝)로 추증하였다.

 

 문인으로서도 뛰어났던 조조는 문학을 사랑하여 많은 문인들을 불러들였으며, 자신도 두 아들 조비(曹丕)·조식(曹植)과 함께 시부(詩賦)의 재능이 뛰어나, 이른바 건안문학(建安文學)의 흥륭(興隆)을 가져오게 하였다. 훗날 아들 조비, 조식과 함께 당대의 문학계의 이름 있는 사람들이라 해서 삼조(三曹)라 불리기도 한다.

 

 '대기 만성' 조조는 군사, 학문, 무예, 내정 모두에 탁월한 재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시문, 그림, 노래 등 문예쪽으로도 아주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 또한 통솔력도 굉장하고 수하를 감동시키는 방법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또한 인격면에서도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당시에는 파격적인 기준으로 인재를 선발하였는데 그 기준이 바로 '능력'이었다. 어떠한 분야를 막론하고 한 가지 분야에 뛰어나기만 하면 그 사람의 신분이 아무리 천하다 해도 조조는 크게 인정해줬다. 호거아에게는 단지 '힘이 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커다란 금괴를 선물로 주기까지 했다. 이에 서황, 장료등이 감동받아 조조를 극진하게 섬기게 된다.

 

 다만 아쉬운 점은 그가 한(漢)황실 종친의 성씨인 유(劉)씨의 성이 아닌 환관 조등(曹騰)의 성씨인 조(曹)씨의 성을 지닌 것이 조조 본인에게도, 한 황조에도 불행이었다. 조조는 황제로서의 자질면에서는 누구보다도 뛰어났지만 한 황실종친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이 중국 전체를 다스릴 수 없었고 후일 나관중에 의해 저평가되는 빌미마저 제공했다. 하지만 조조는 그 나관중마저 감동시킨 일화를 만드는데 그것이 반동탁연합군이 와해되고 동탁이 장안으로 도망갈 때 극소수의 병력으로 죽을 것을 알고도 헌제를 동탁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뛰어들었다가 서영에게 패배한 것이다. 나관중조차 이에 감동받아 비록 조조를 이를 갈며 증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삼국지연의에서조차 조조의 부장인 하후돈이 조조의 추격을 막기 위해 동탁의 지시를 받은 서영을 창으로 찔러 죽였다고 묘사해줬다.

 

 동시대 사람 중 유명한 두 사람은 조조를 서로 상반되게 평가했는데, 양국(梁國) 사람인 교현은 그를 두고 난세의 영웅, 치세의 간적으로 평가했지만, 여남(汝南) 사람인 허소는 그를 두고 치세의 능신이자 난세의 간웅으로 평가했다.

 진수(陳壽:233~297)가 《삼국지》〈위서〉무제기에서 평하기를,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합리적으로 일에 대처했으며, 구악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는 과거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이성적인 판단으로 대처해 사람을 등용했다는 뜻이다.

 

 나관중(羅貫中:1330?~1400)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악인(惡人)의 상으로 그려지고 있다. 당대의 민중이 가지고 있던 조조에 대한 반감이 들어 있는 전승과 민간 설화 등을 이용하고 촉한의 인사들을 대부분 우국지사와 충의지사로 묘사함으로써 실제 역사와는 다르게 조조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삼국지연의》 내에서 자아내고 있다. 또한 조조를 악인으로 나타내기 위해 우스꽝스럽고 경망스러운, 때로는 인신모독에 가까운 묘사도 쓰고 있다.

 

조조의 무덤

 조조무덤 입구중국 고고학자들이 삼국시대 위나라를 세운 조조(曹操·155~220)의 진짜 무덤을 허난(河南)성에서 발굴했다.(2009년)

 허난성 문물국이 허난성 안양(安陽)현 안펑(安豊)향 시가오쉐(西高穴)촌에 있는 동한(東漢)시대 무덤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위나라 무왕 조조의 고릉(高陵)을 확인했다.

 촉나라의 유비, 오나라의 손권과 함께 천하를 다투었던 조조는 죽기전 무덤이 도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의 장례를 간단히 치르고, 72개의 가짜무덤을 만들고, 봉분 등 흔적을 남기지 말라고 유언을 했던 것으로 전해져 그 동안 그의 진짜 무덤을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중국 허난성 문물국은 2009년 12월 27일 베이징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고고학자들의 조사 결과 허난성 안양현 안펑향 시가오쉐촌에서 발견한 동한시대 무덤이 조조가 묻힌 '고릉(高陵)'임을 최종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고고학자들은 무덤에서 발견한 '위나라 무왕이 자주 쓰던 창' '위나라 무왕이 자주 쓰던 칼'이라는 명문과 유골 등을 통해 조조 무덤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조조는 생전에는 '위나라 무왕'이라고 했다가 사후 아들 조비가 위나라 황제로 등극하면서 '위나라 무황제(위무제)'로 추존되었다.

 고고학자들은 무덤에서 60대 남성 1명의 유골과 40대와 20대 여성의 유골을 발견했으며, 남성 유골이 바로 65세에 세상을 떠난 조조 유골이라고 밝혔다.

 조조의 무덤은 갑(甲)자와 같은 형태로 동쪽을 향하고, 묘도와 전·후실(雙室(쌍실)), 그리고 4개의 측실(側室)로 이뤄져 있다. 묘도는 길이 39.5m, 폭 9.8m, 가장 깊은 곳은 지하 15m이다. 무덤은 동쪽은 가로 22m, 서쪽은 가로 19.5m, 동·서쪽 무덤 사이 길이는 18m이다. 무덤 전체 면적은 740㎡이다.

 

 조조무덤에서 발굴된 조조임을 보여주는 명문들. 조사단은 철로 만든 갑옷, 옥구슬, 마노구슬 등 250여점을 수습했다. 이 가운데 '위나라 무왕'이라는 글자가 적힌 명문 59점이 조조의 무덤임을 밝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허난성 문물국은 이번 발견을 계기로 묘지 배치와 건축물 조사 등을 추가로 마친 뒤 무덤을 보존해 영구 전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허난성 문물국은 이 무덤이 2004년부터 여러차례 도굴되자 2008년 12월 국가문물국의 허가를 받아 고고학자들을 동원해 본격적인 발굴 작업을 벌여왔다.

 

 

 

손권(孫權:182~252)

 손권(孫權:182~252)은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의 초대 황제이다. 자는 중모(仲謀),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대황제(大皇帝)이다. 손견의 둘째 아들로 손책의 동생. 200년, 형 손책이 급사하자, 오후(吳侯)의 자리에 올라, 강동을 다스렸다. 수성(守成)의 명수로 평가되고 있다.

 

 손권이 태어날 당시 아버지 손견은 갓 태어난 그의 풍모를 보고 고귀한 위치에 오를 상이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어머니 오부인은 손책을 낳을 때 달이 품 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손권을 낳을 때는 태양이 품 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각각 꾸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손견은 "달과 태양은 음과 양의 정수로 최고위의 상징이므로, 우리 자손은 번영을 누릴 것이 틀림없다"라고 예견했다.

 192년(초평 3년) 아버지 손견이 전사하고 원술 밑에서 몸을 의지하고 있던 손책이 강동에서 궐기하자, 손권은 형을 따라 각지를 전전하였다. 손권은 명랑하고 도량이 넓고, 생각이 깊으면서 동시에 결단력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손책은 책략을 세울 때 항상 손권과 상의하였고, 그의 의견을 높이 평가하여 손책 자신도 그에게 못 미친다고 말했다.

 손권은 겨우 15살에 양선현의 수장이 되었고 그로부터 얼마 뒤 추천을 받아 봉의교위대행이라는 직무를 맡게 된다. 199년(건안 4년) 손권은 손책을 따라 노강태수 유훈을 쳐서 격파하고, 더욱 진군해 사선에서 황조를 격파했다. 그러나 200년에 손책은 허공 휘하의 자객에게 습격당해 26살에 단명하고 만다. 손책은 후사를 19살의 손권에게 부탁했다. 손권은 형의 죽음을 슬퍼해 울음을 그치지 않았는데, 손책의 장사(長史)였던 장소는 그를 격려해 상복을 벗게 하고 말에 태워 진영을 시찰하도록 했다. 훗날 손권은 손견을 무열황제에 추증했지만 손책을 장사환왕으로 추증했다.

 

 당시 오나라가 지배하던 지역은 회계, 오군, 단양, 예장, 노릉 등이었지만 그들 군에서도 험준한 오지까지는 복종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군신 관계도 제대로 정착되지 않아 항상 사태를 주시하면서 주군을 물갈이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주유와 장소는 손권이 장차 대업을 이룰 수 있는 인물이라고 예견하고 정성을 다해 그를 섬긴다. 그리고 장소를 스승으로 예우하고 주유, 정보, 여범 등을 군사지휘관에 임명하며, 노숙과 제갈근 등 우수한 인재를 불러들였다. 그런 다음 그들을 각지에 파견해 불복종 지역을 토벌할 것을 명했다. 조조는 손책의 죽음을 기회로 삼아 손권을 공격하려 했지만, 오나라의 사자로 허도에 머물고 있던 장굉은 오히려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며 조조를 설득했다. 그래서 조조는 손권을 토로장군에 임명하고 회계태수를 겸임시켰다.

 

 202년 원소를 격파한 조조는 손권에게 편지를 보내 자식을 인질로 보내도록 요구했다. 손권은 주유와 어머니 오씨 부인과 상의한 뒤, 결국 인질을 보내지 않았다. 같은 해 오씨 부인이 서거했다.

 

 203년 손권은 황조를 토벌하러 나서 그 수군을 격파했다. 하지만 거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사이에 산악지대의 불복종민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자 회군해 진압하였다. 207년에도 황조를 공격해 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왔다. 208년 봄, 손권은 또다시 황조를 공격했다. 황조는 수군으로 손권의 침공을 저지하려 했지만 여몽에게 격파되었다. 그리고 능통, 동습 등이 정예병을 이끌고 공격했기 때문에 거성은 마침내 함락되었고, 황조는 죽임을 당했다. 이로써 손권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 손권은 이 과정에서 황조의 부장이였던 감녕도 얻게 된다.

 

 같은해 형주목 유표가 죽자 조조는 형주를 침공하고, 유표의 후계자 유종은 조조에게 항복한다. 남쪽으로 도망온 유비는 제갈량을 손권에게 사자로 보냈다. 손권은 개전과 항복을 놓고 결단하지 못했는데, 제갈량에게 설득당해 유비와 동맹을 체결하여 조조와 싸우기로 결정하였다. 그 무렵 조조로부터 "이번에 수군 80만의 군세를 정비하여 그대와 오나라 지역에서 사냥을 하고 싶다"라는 편지가 당도했다. 군신들은 항복하지 않으면 토벌하겠다는 조조의 최후통첩으로 알고 두려워했다. 장소 등이 항복을 주장하며 신료들 간에 논의가 길어지자 손권도 차츰 마음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항전파 주유의 한마디로 개전을 결의, 손권은 책상 모서리를 칼로 자르며 "앞으로 항복을 입에 담는 자는 이 책상과 같은 운명이 될 것"이라며 단호한 의지를 표명했다. 전황은 조조 진영에서 역병이 돌고 황개의 거짓항복이 조조에게 통해서 싸움이 우세하게 전개되어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적벽에서 조조군을 완전히 격파하였다.

 

 209년 주유는 1년간의 공방 끝에 조인을 남군에서 퇴각시켜 그 지역을 평정했다. 손권은 주유를 남군태수로 임명하고 좌장군 유비가 형주목을 맡아 공안에 근거지를 구축했다. 그러나 손권은 점차 유비의 세력이 확대되어가는 것에 두려움을 느껴 여동생을 유비와 혼인시켜 우호관계를 깊게 하였다. 211년에는 자신의 본거지를 말릉으로 옮기고, 다음해 건업으로 개명했다.

 

 213년 조조가 유수를 침공하자, 손권은 이를 저지하며 1개월 넘게 서로 대치하였다. 당시 손권은 몸소 배에 올라타 조조의 진영을 시찰하러 나섰다고 한다. 손권의 시찰단은 무기나 대오 등 어느 것 하나 흐트러짐 없이 완벽히 정돈된 상태였다. 그 모습을 본 조조는 "자식을 낳는다면 손권과 같은 자를 원한다"라고 칭찬하며 군사를 퇴각시켰다고 한다.

 

 214년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자 손권은 형주 반환을 요구했다. 이에 유비는 양주를 손에 넣으면 돌려주겠노라 답한다. 이에 화가 난 손권은 여몽을 파견해 장사, 영릉, 계양 세 군을 무력으로 탈취해 형주를 지키는 관우와 대립하게 된다. 그러나 조조가 한중을 침공해 왔으므로 유비는 익주를 잃을 것을 두려워하여 손권과 화해하였다. 이리하여 형주를 동서로 분할해 동쪽을 손권이, 서쪽을 유비가 다스리게 되었다.

 

 그후 손권은 합비를 10만 군세로 포위했는데,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퇴각하다가 장료에게 기습당했다. 손권의 군사는 뿔뿔이 흩어지지만, 능통의 분전으로 겨우 궁지에서 벗어났다.

 

 217년 손권은 조조에게 항복하였다. 이는 형주를 둘러싼 유비와의 불화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219년 관우는 조인이 지키는 양양을 포위했다. 구원에 나선 우금마저 패하고 투항하여 조조가 곤경에 처하게 되자, 이때 손권이 충성의 증거로 관우를 치겠다고 조조에게 서신을 보냈다. 이리하여 손권은 관우의 배후를 쳐 형주를 평정하고 그를 사로잡아 처형했다.

 

 220년 조조가 죽자 그의 아들 조비가 헌제를 폐하고 스스로 황제(문제)로 즉위하였으며, 다음해에는 촉한의 유비도 제위에 올랐다. 손권은 계속하여 위나라에 신하의 예를 갖춰 문제로부터 오왕으로 봉해진다. 같은 해 7월, 유비가 군사를 이끌고 오나라를 침공하자 손권은 육손을 총지휘관에 임명해 방어케 하였다. 그리고 이 틈에 위나라로부터 침략 받지 않도록 자주 사자를 파견했다. 이때 문제가 상아, 진주, 공작 등 귀한 진상품만을 헌상할 것을 요구하자 가신들이 일제히 분개하며 거절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손권은 "백성들의 목숨이 나 한 사람의 결단에 달려 있다"라며 이를 물리치고 바라는 물품을 모두 보내줬다고 한다.

 

 222년(황초 3년) 육손이 화공으로 유비군을 격퇴시켰다.

 

 그러나 그 무렵부터 위나라와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문제가 손권의 자식을 조정 관직에 취임시켜주겠다는 명분으로 인질을 요구했고, 손권이 이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나라는 오나라를 침공하고, 오나라는 촉한에 사자를 파견해 다시 우호관계를 수복하였다. 229년(황룡 원년) 손권은 여러 신하들의 권고로 마침내 황제에 즉위하였다. 이때 손견을 무열황제로 추존하면서 堅과 같았던 甄의 발음을 바꿔 버린다.

 

 233년 요동의 공손연이 사자를 파견해 손권에게 번국의 예를 갖추었다. 손권은 답례로 병사 1만 명을 이끌고 금은보화를 공손연에게 보내도록 하고 배를 타고 요동으로 향했다. 승상 고옹 등은 아직 공손연이 신뢰할 만한 인물인지 알 수 없다며 반대했지만, 손권은 이 말을 듣지 않고 사자를 파견했다. 과연 공손연은 손권의 사자를 죽여 그 목을 위나라로 보내고, 오나라의 군대와 재물을 탈취했다. 손권은 격노하며 공손연을 토벌하려고 했지만 주위의 만류로 겨우 제지된다.

 

 그리고 241년에 황태자 손등이 죽자 후계 선정을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났다. 손권은 처음에는 손화를 다음 황태자로 삼았지만, 손패도 아껴 그를 노왕에 봉하고 황태자와 동등하게 대했다. 그래서 신하들은 손화파와 손패파로 분열되었다. 고옹의 뒤를 이어 승상이 된 육손은 "적자와 서자의 대우에는 차별을 두어야 한다."라고 자주 상소했다. 그래서 손패파에게 죄가 날조되어 유형에 처해지고 만다. 손권이 문책 사자를 보내 추궁했으므로 육손은 분을 이기지 못해 죽게 된다. 그래서 후계 싸움은 더욱 격화되어갔다.

 

 250년 손권은 양쪽 모두 벌하는 형식으로 손화를 황태자에서 폐하고, 손패에게는 자결을 명한 뒤 그 일당을 모조리 처형했다. 그리고 막내 손량을 황태자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손화 폐위를 간언한 신하 수십 명을 처형하거나 유배보냈다. 손권은 252년 4월, 제갈각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71살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삼국시대의 대부분의 영웅호걸들이 영토 확장을 꿈꾸었던 점과 비교해보면 손권은 평화주의적이었으며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방어를 성공적으로 해낸 인물이다. 그러나 진무가 전사하자 진무의 아내에게 자결을 명령하고 이복동생 손랑이 군용자재를 화재로 소실시키자 손가의 성씨를 박탈하는 등 냉혹한 모습도 있다.

 

 

 

유비(劉備:161∼223)

 유비(劉備:161~223)는 중국 삼국 시대 촉한의 초대 황제(221~223)로, 자는 현덕(玄德), 시호는 소열황제(昭烈皇帝)이다. 탁군(河北省) 출신. 묘호는 열조(烈祖)라 하지만 이는 사후에 사가에서 추존한 것이므로 정식 묘호가 아니다.

 전한(前漢) 경제(景帝)의 아들인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삼국지의 흔한 군웅들과 달리 뚜렷한 기반이 없이 짚신 장수로 출발한 유비였지만 한고조의 풍도를 가지고 관우, 제갈량등 같은 인재들을 등용하여 당대의 패자였던 조조와 끝까지 맞써 제국 촉한을 건국하였다.

 유비는 탁군 탁현 출신으로, '후한의 왕손'으로 기록되었으며, 팔이 길어 그대로 뻗어 무릎까지 닿고, 귀도 남달리 커서 거울을 사용하지 않고도 자신의 귀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어려서 아버지 유홍을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짚신과 멍석을 만들어 생계를 꾸려나갔다. 집안 동남쪽에 높이 5길이 넘는 뽕나무가 있어 가마 덮개처럼 보였기 때문에 "이 집에서 귀한 인물이 날 것이다"라고 예언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유비도 이 나무에 올라가 놀면서 "나도 이러한 덮개가 달린 가마(황제의 가마)를 탈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숙부 유자경은 "함부로 말하지 마라. 구족이 멸한다."고 주의를 시켰다고 한다. 15살 때 유학해 노식 문하에서 수학한다. 이때 공손찬도 유비와 함께 공부했다.

 

 그러나 유비는 그다지 독서를 좋아하지 않아 개를 좋아하고 놀러다니거나 음악을 듣는 데에 몰두했다. 말수가 적고, 늘 남을 공손히 대하고,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황건적의 난때 장각은 청주, 유주, 서주, 이주, 양주, 연주, 여주, 형주등으로 세력을 점점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혼란한 시기에 유비는 기꺼이 천하호걸과 교류했으므로 젊은이들이 앞다투어 그의 밑으로 모여들었다. 그 가운데 관우와 장비도 있었는데, 세 사람의 깊은 관계가 《삼국지연의》의 첫 부분에 나오는 '도원결의(桃園結義)'의 전설을 낳게 된다. 유비의 무기는 2개의 검으로 이름이 쌍곡(고)검이였다고 기록이 되어있다.《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의 첫째부인이 '부용낭자'라 하며 부용을 3번째 만나던 날 어떤 마을 근처에서 하룻밤 묶고 가려니 깜깜한 밤 부용낭자를 만나게 되었다. 칙사독우가 그 마을에 나타나서 부용한테 주책스러운 짓을 하려다 유비에게 들켜 결국 칙사독우를 살해한 후 유회라는 상인한테 부용을 맡기고 떠난다.

 

 영제 말,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유비는 관우와 장비와 함께 주군(州郡)에서 모집한 의병들을 이끌고 교위인 추정의 군대에 가담해 황건적을 토벌하여 그 공적으로 안희현위(安喜縣尉)에 임명되었다. 독우가 공무 때문에 안희로 왔을 때 유비가 독우에게 만나기를 청했지만 거절당하고 이에 곧바로 독우가 거처하고 있는 곳으로 들어가 곤장을 들고 200대를 때렸다. 그리고 인수를 풀어 독우의 목에 걸고 그를 말뚝에 묶은 다음 관직을 버리고 달아난다고 적혀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독우가 유비에게 뇌물을 요구하자 장비는 독우의 숙소로 쳐들어가 그를 포박한 다음 200회나 매질을 하였고, 유비는 이를 제지하고 관직을 그만둔 것으로 묘사한다. 얼마 후 유비는 단양에서 병사를 모집하는 임무를 맡은 도위 관구의와 행동을 같이하다가 하비에서 적을 무찌른 공로로 하밀승(청주 북해국 하밀현의 현승)에 제수되었지만 다시 관직을 버린다. 그 뒤 유비는 고당위(청주 평원국 고당현의 현위)에 임명되어 현령으로 승진하나 적에게 격파되어 공손찬에게로 달아난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때 동탁 토벌에서 크게 활약한 것으로 묘사한다.

 

 공손찬은 유비를 별부사마(別部司馬)에 임명하고 청주 자사 전해와 함께 기주목 원소와 싸웠는데, 그가 자주 전공을 세웠으므로 평원상으로 임명했다. 이윽고 조조가 서주를 정벌하자 서주목 도겸이 전해에게 구원을 요청해 왔으므로 유비는 전해와 함께 도겸을 돕는다. 이때부터 전해 밑을 떠나 도겸에게 몸을 의지하여, 예주 자사에 임명된 후 소패에 주둔하였으며, 도겸이 죽은 후에는 주위의 권유를 받아 서주를 지배하게 된다.

 

 196년(건안(建安) 원년) 유비는 조조로부터 진동장군에 임명되어 원술과 대치하는데, 그 사이에 하비의 수장인 조표가 배신하여 여포를 불러들였고, 여포는 하비를 기습하여 유비의 처자를 사로잡는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장비가 취한후 여포의 장인인 조표가 충고하자, 조표에게 매질을 했기 때문에 그가 원한을 품고 여포를 불러들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유비가 여포에게 화친을 구하자 여포는 유비의 처자를 유비에게 되돌려보내고 유비는 소패로 돌아온다. 그러나 소패로 돌아온 유비가 1만여 명의 병사를 모집하자 여포는 이를 꺼림칙하게 생각해 유비에게 공격을 감행하였다. 유비는 패주하여 조조에게 귀부하였는데 조조는 유비를 후대하여 예주목으로 삼았고 유비가 소패에서 군사를 모아 여포를 견제하는 것을 지원하였다. 이에 여포는 고순을 보내 소패를 공격하였고 조조는 하후돈을 지원군으로 보냈으나 결국 유비는 고순에게 패배하여 다시 유비의 처자는 사로잡혀 여포에게 보내진다.

 

 10월, 이에 조조는 친히 여포를 정벌하여 유비와 함께 여포를 하비에서 포위하여 사로잡고 여포를 참수한다.

 

 유비는 조조와 함께 허도(許都)로 귀환해 좌장군에 임명되고 조조에게 후한 대우를 받았다. 유비가 왔을 때 조조의 참모 정욱 등은 “유비는 남을 섬길 인간이 아니다”라고 말한 뒤 그를 죽일 것을 권하지만 조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무렵 헌제의 숙부인 거기장군 동승이 조조를 주살하라는 밀칙을 받고, 유비도 은밀히 이 계획에 가담했다. 어느 날 조조는 유비를 식사에 초대해 “지금 천하에 영웅이 있다면 그대와 나뿐이다.”라고 말했다. 유비는 이 말을 듣고 놀라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화양국지(華陽國志)》에 따르면, 이때 천둥이 쳤기 때문에 유비는 그 탓으로 돌렸는데, 이것은 《삼국지연의》에서도 똑같이 기술된다. 그래서 유비는 조조 주살 계획이 탄로나기 전에 원술 토벌을 빙자해 서둘러 조조 밑을 떠난다. 그리고 원술을 멸한 후 유비는 하비를 점거하고 서주차사 차주를 죽인 후 관우를 남겨 하비를 수비하게 한 뒤 소패로 돌아온다. 이때 군현들 다수가 조조를 배반하여 유비의 군세는 수만명에 이르렀다고 정사에 기술되어 있다. 유비는 세력을 키움과 함께 손건을 원소에게 사신으로 보내 조조에 대항하는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이때 조조는 왕충과 유대를 보내 유비를 공격하나 패배하게 된다. 200년 조조는 유비를 토벌하고, 유비는 또다시 패배하여 원소 밑으로 몸을 의지한다. 원소는 장수를 보내 유비를 영접하고 업에서 2백리 떨어진 곳까지 가 유비를 만나는 등 유비를 대단히 환영했다고 한다. 전투에서 승리한 조조는 유비의 처자를 붙잡고 관우를 사로잡아 돌아온다. 그리고 조조와 원소가 패권을 다투는 관도 전투가 시작되자, 유비는 여남에서 조조를 배반하여 원소에 호응한 황건적 유벽 등과 함께 허도 주변을 침범하지만 조조군에게 패해 원소 진영으로 돌아간다. 전풍이 유비는 매우 위험한 인물이라 원소에게 유비를 죽일것을 진언했지만 원소는 이 진언을 기각하고 유비를 그대로 뒀다.

 

 그 후 유비는 관우가 조조의 휘하에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관우에게 편지를 보내자 관우는 유비의 가족들과 같이 유비에게로 돌아왔다. 유비는 원소 밑을 벗어나려고 원소에게 형주의 유표와 협공하도록 진언하였다. 이리하여 원소는 유비를 여남에 파견하여 황건적 공도의 무리와 합쳐 수천명의 병사를 이끌어 여남에 진을 치고, 조조는 채양을 시켜 공격하지만 채양은 패배하고 전사한다. 조조는 원소를 격파한 후 몸소 남하해 유비를 격파하였다.

 

 유비는 유표 밑에 몸을 의지한다. 유표 역시 교외에서 직접 유비를 영접하는 등 유비는 상빈으로서 대우받았고, 유표는 유비에게 군사를 주어 신야에 주둔하게 한다. 그러나 이후 형주의 호걸 중에 선주에게 귀부하는 자가 날로 더욱 많아지자, 유표는 그의 마음을 의심하여 은밀히 제어하였다.

 

 정사의 주석에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유비가 주연 석상에서, 변소에 가서 허벅지에 살이 찐 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눈물 자국을 본 유표가 그 이유를 묻자 “나는 항상 말안장에서 떠나본 일이 없기 때문에 허벅지에 살이 찌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은 말에 오르지 않아 벌써 허벅지에 살이 붙고, 세월이 흘러 노년에 가까운데 아무런 공적도 세우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한탄한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유명한 ‘비육지탄(脾肉之嘆)’이란 고사다. 또한 유표의 부하 괴량, 채모 등이 연회를 이용해 유비를 살해하려고 하자 유비는 적로를 타고 힘을 내라며 다그치자 놀랍게도 3길이나 뛰어올라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한편 조조는 하후돈과 우금에게 유표를 공격하라 명을 내렸는데, 유비가 박망 지역에서 이를 막아낸다. 유비는 자기 진영을 불태우고 도망가는 것처럼 꾸미고 복병을 써서 그들을 완전히 격파했다. 208년 유표가 죽자 후계자 유종이 조조에게 항복했다. 제갈량은 “유종을 없애고 형주를 지배해야 한다”라고 진언했지만 유비는 듣지 않았다. 이때 유종의 측근과 형주 주민의 상당수가 유비를 따라나서 하루에 겨우 10리 정도밖에 행군하지 못했다. 그래서 유비에게 “먼저 행군하여 강릉을 지켜야 한다”라고 진언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유비는 "지금 사람들이 나만 의지하고 있는데, 어찌 이들을 버리고 갈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조조가 기병 5천 명을 급파했기 때문에 유비는 당양의 장판교에서 추격당해 크게 패하고 만다. 유비는 유표의 큰아들 유기가 있는 하구로 도망쳤다. 그후 유비는 손권과 동맹을 맺어 적벽에서 조조의 대군을 격파했다. 그리고 유기를 형주 자사로 천거하는 한편, 무릉, 장사, 계양, 영릉 등 4군을 평정하였다. 유기가 죽자 군신들은 유비를 형주목으로 추대했으므로 손권은 유비를 두려워해 자기 여동생인 손상향과 결혼시켜 관계를 돈독히 하려 애썼다.

 

 211년 익주목 유장이 조조의 침공을 두려워하자 유장의 별가종사였던 장송은 유비로 하여금 장로를 토벌하게 하자고 진언했다. 이를 받아들인 유장은 법정을 유비에게 파견했다. 그러나 실은 장송이나 법정 모두 유비를 익주의 새 주인으로 맞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촉의 지형, 병기, 인마의 적고 많음 등의 정보와 지도를 제공한 장송의 행동에서 추측할 수 있다. 드디어 유비는 부군사 중랑장 방통과 함께 익주로 들어서고, 유장은 몸소 마중나와 맞이했다. 유장은 유비를 행대사마 겸 사예교위로 천거하고 병사를 증강시켜 백수의 주둔군을 지휘하도록 했다. 유비는 곧바로 장로를 토벌하지 않고 은혜를 베출어 인심 장악에 힘썼다.

 

 211년 조조가 손권을 토벌하자 손권은 유비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므로 유비는 유장에게 1만 명의 병사와 군수 물자를 요청했다. 그러나 유장은 병사 4천 명과 요구한 군수 물자를 절반밖에 보내지 않아, 이에 유비는 격노했다. 때마침 장송은 "지금 촉 공략을 앞에 두고 어찌해서 떠나려는 것인가?"라는 내용의 편지를 유비에게 보내는데, 형 장숙이 이 사실을 유장에게 알려 장송이 처형된다. 이때부터 유비와 유장의 사이는 악화되었다. 유비는 백수관을 지키는 양희, 고패를 참살한다. 유비는 지름길로 관중에 이르러서, 여려 장수들과 군사와 처자들을 인질로 잡고, 병사를 이끌고 황충, 탁응 등과 함께 진격해 부성에 도착하여 그 성을 점거했다. 유장이 유귀·냉포·장임·등현 등을 보내 부성에서 유비를 막게 했지만 모두 격파되어 패하여, 퇴각하여 면죽을 보전했다.

 

 유장이 다시 이엄을 보내 면죽의 여러 군대를 감독하게 했지만, 이엄은 부하들을 통솔하여 유비에게 항복했다. 유비의 군대는 더욱 강해지니,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파견해 군 아래의 현들을 항복시켰고, 제갈량, 장비, 조운 등이 병사를 거느리고 강을 거슬러 올라 백제(百帝)성과 강주, 강양을 평정하였으며, 오직 관우만이 남아 형주를 진수했다. 그리고 유비가 진군하여 낙성을 포위하는데 이때 유장의 아들 유순(劉循)이 성을 지키고 있었고, 공격당한지도 또 1년이 되었다.

214년 낙성이 격파되자 유비는 제갈량, 장비, 조운을 이끌고 성도를 포위하고 유장의 항복을 받아냈다. 유비는 익주목을 겸하게 되고, 유장의 옛 신료도 그대로 고관으로 취임시켜 촉한의 기반을 구축했다.

 

 215년 유비는 형주를 둘러싸고 손권과 대립하였으며, 결국 형주 동부의 강하, 장사, 계양을 오나라에 양보하는 것으로 매듭지었다. 218년 유비는 마초와 장비를 시켜 무도의 하변을 취하게 하고 그곳 이민족들과 연계하여 무도를 혼란스럽게 만든다.조조가 조홍에게 군사를 주어 마초를 물러나게 한다.유비는 양평관에 주둔하고, 219년 봄 군대를 이끌고 정군산에 진지를 구축해 하후연과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다. 유비는 황충에게 명해 높은 곳에 올라 북을 크게 치게 하고 적군이 혼란에 빠진 틈을 이용해 공격, 하후연을 패퇴시켰다. 이에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한중으로 나섰지만, 유비는 한중을 끝까지 사수하며 상용까지 공략했다. 그리고 같은해 7월 위왕에 오른 조조에 맞서 한중왕에 오른다. 한편 형주에 있던 관우는 위의 조인이 지키는 번성을 공격하다가 손권에게 배후를 찔려 전사했다. 결국 오나라에게 형주를 빼앗기고 만다.

 

 220년(황초 원년) 조비가 헌제에게 선양받아 황제가 되었는데, 이때 촉한에서는 헌제가 살해되었다고 전해진다. 헌제 살해 소식은 물론 그릇된 소문이었지만, 이것이 유비가 제위에 오르는 명분이 되었으므로 제갈량은 유비에게 황제에 즉위하도록 권했고, 221년 4월 마침내 유비는 황제가 되었다. 연호를 장무(章武)로 하고, 유선을 황태자로 세웠다.

 

 이때 《삼국지연의》에서는 모든 신하가 칭제를 간하고 유비가 그것을 사양하였다고 나온다. 《삼국지》에서는 대부분의 신하가 간하고 유비가 그것을 받아들일 때 몇몇 신하가 반대한다. 특히 전부사마 비시는 상소를 올려 "강대한 적을 아직도 이기지 못하고 있는데 즉위하는 것은 오히려 사람들의 의심을 사기 쉽지 않습니까? 옛날 한 고조께서는 초와 약정을 맺어 진나라를 격파시킨 사람을 왕으로 칭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전하께서는 문 앞으로 나가지도 않고 황제에 오르려 하십니까?"라고 하였다(삼국지 촉서 비시전). 이에 유비는 비시를 좌천한다.

 

 유비는 손권이 관우를 해한 것에 분노하여 오나라를 정벌하려고 했었고, 황제에 오른 이후 직접 오나라 정벌에 나섰다. 조운과 제갈량이 이를 말렸지만 유비는 무시해 버렸다. 그러나 장비는 부하였던 범강과 장달에게 살해된다.

 

 222년(장무 2년) 2월, 유비는 친히 제장들을 이끌고 자귀에서 진군하여 무릉에 다다른다. 유비는 시중 마량을 보내여 오계 소수민족을 회유하고 진북장군 황권에게 장강 북쪽의 제군을 통솔하게 하여 이릉에서 오군과 맞선다. 연의에서 유비는 75만 대군을 일으켰다고 기록되지만 실제 정사의 기록으로 추정하여 볼 때 당시 유비가 이끌었던 촉한의 군세는 4만 ~ 8만명 규모의 익주 본대와 형주 유랑군, 이민족의 연합군(총합 10~12만 가량)으로 추정된다. 촉군은 장수 풍습(馮習)이 무현에서 이이 등을 공격해 격파하고, 주태의 군대를 몰아세우는 등 초반 오군과의 전투에서 선전하였으나 손권이 육손을 대도독으로 임명한 후 전투의 양상은 달라지게 된다. 육손은, 오반을 선봉으로 내세워서 유인한 후 복병 8천으로 공격하려는 유비의 계책을 간파하였고 지구전을 통해 유비의 유인책에 말려들지 않았으며 촉군과의 대치 국면을 유지한다.

 

 6월, 육손은 병사들에게 띠풀을 가지게 하여 화공을 통해 유비군을 공격하고, 형세를 갖추어 동시에 공격하여 장남, 풍습 등의 촉장의 머리를 베고 40여곳의 진영을 격파한 후, 마인산에 포진된 유비의 군대를 포위, 공격해 유비군의 진영을 붕괴시키는데 촉군은 이 전투에서 대패하여 죽은 군사가 8만이 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벌에 실패한 유비는 겨우 달아나 백제성으로 들어간다.

 

 8월, 유비는 군사를 거두어 무현으로 돌아온다. 겨울 10월, 손권은 유비가 백제에 머문다는 것을 알고 사자를 보내 화친을 청하고 유비는 이를 허락하여 태중대부 종위를 보내어 답례하였다.

 

 223년 4월 관우, 장비의 사망과 이릉전쟁으로 인한 화병이 심해진 유비는 제갈량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이엄을 보좌로 삼고 영안궁에서 63살의 나이에 사망하였고, 8월에 혜릉(惠陵)으로 이장되었다.

 

 263년 촉한은 멸망했다. 그와 함께 유선(劉禪)과 그의 일곱 후손들은 모두 위나라 내지(內地)로 옯겨졌다. 그 후, 유선의 6남인 유순(劉恂)이 안락공직을 이었으나 영가의 난에 휘말려들어 유비의 적자손들은 절멸당하였다. 그러나 유선의 동생인 유영(劉永)의 손자 유현(劉玄)은 살아남아 성한(成漢)으로 도망가 황제 이수(李羞)에게 안락공의 칭호를 받는다. 그 후, 동진(東晉)의 장수 환온은 성한을 공략, 멸망시켰는데 도중에 환온을 따라온 역사가 손성은 유비의 증손자이자 마지막 후예인 유현을 만났다고한다. 그 후 유현의 소식은 불분명하지만 그의 후손은 중국 각지에 퍼져 촉한 소열황제 유비의 혈통을 잇고 있다고 전해진다.

 

 나관중의 촉한 중심주의로 인해 유비는 오랫동안 정의의 사자이자, 한 황실 정통성의 대명사가 되었다. 유비의 명성과 인덕의 경우는 정사의 여러 기술에서도 기술된 바가 있다. 연의에서는 당시 민중의 성군상과 유교적인 영웅을 묘사하기 위해 본인의 능력보단 그릇과 덕, 인재를 알아보는 능력을 강조하여 묘사한 바가 있고 현대에 들어 유비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면서 일부 학자들에게 무능한 군주였다는 평을 받기도 하지만 실제로 유비와 그의 부하들과의 관계는 상호보완적이었던 면이 있으며 살아서 치뤘던 대부분의 전투의 지휘와 정책의 시행은 유비 그 자신이 총괄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선주는 홍의(弘毅-포부가 크고 굳셈), 관후(寬厚-너그럽고 후함)하고 지인(知人-사람을 알아 봄), 대사(待士-선비를 잘 대우함)하니 한 고조의 풍도와 영웅의 그릇을 갖추었던 것 같다. 나라를 들어 제갈량에게 탁고했으나 심신(心神-마음)에 두 갈래가 없었으니 실로 군신(君臣)의 지공(至公-지극히 공정함)함은 고금의 성궤(盛軌-아름다운 본보기)다. 기권(機權-기지와 임기응변), 간략(幹略-재능과 모략)은 위 무제(조조)에는 미치지 못해 이 때문에 그 영토는 협소했다. 그러나 꺾일지언정 굽히지 않고 끝내 남의 아래에 있지 않았으니, 저들의 기량으로 필시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리라 헤아리고, 오로지 이익만을 다투지 않고 해로움을 피하려 했다 말할 수 있겠다.>

 

 진수의 평을 볼 때 진수는 유비를 조조와 함께 묶어 평가하고 있는데 진수의 조조에 대한 평가를 보면, 조조는 한신과 백기라는 중국역사상 기권간략의 대명사인 두 명장에 이름을 견줄 정도로 동시대에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다고 보고 있다. 즉 진수가 기권간략면에서도 최고라는 전제를 내린 조조와 대등한 관계로서 평가, 비교하고 있는 군웅은 유비뿐인 만큼, 그러한 면에서 볼 때 진수의 평에서 유비의 역량은 조조에 미치지 못했다고 볼 수는 있으나 진수가 유비를 조조에 떨어지는 무능력한 인물로 보고 있지는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인들이 군주의 그릇과 풍도를 평할 때 유비를 가장 전설적이었던 군주인 한고조와 역량을 견줄 정도로 유비의 역량을 동시대 인물 중에서 최고로 친 것이다.

 

 

유비의 묘 혜릉(惠陵)있는 무후사(武侯祠 : 우호우츠)

 무후사는 중국 3세기를 풍미한 유비와 장비, 관우 등 촉나라의 여러 명장을 거느린 전설의 전략가, 제갈공명, 그 제갈량을 기리기 위해 서진 영안 원년에 만들어진 사당이다. 무후사의 이름은 제갈량이 죽은 후의 시호인 충무후(忠無候)에서 유래되었다.

 경내로 들어가면 유비전과 제갈량전, 촉한의 문·무관 28위의 동상 및 '제갈고(諸葛鼓)'라 칭해지는 북, 동고(銅鼓) 등의 문화재가 보관되어 있다. 유비전은 정문으로 들어가 최초의 건물인데 황금의 유비상이 안치되어 있고 벽에는 공명의 정치·군사상의 전략사항으로 유명한 융중대(隆中對)의 액자가 걸려있다.

 

 관우, 장비 등의 문·무관 28인의 상은 옆 동(棟)에 있고 벽에는 그들의 문장과 업적을 기리는 액자와 연(聯)이 전시되어 있다. 제갈고는 공명이 남쪽을 정벌하면서 만든 것으로 낮에는 그것으로 밥을 짓고 밤에는 경보를 발했다고 한다.

 또 무후사 뒤편에는 유비의 묘인 혜릉(惠陵)과 문장, 서법, 석각에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로 꼽힌 당비(唐碑)가 있다.

 무후사는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삼국시대의 사당으로 여겨지며 1961년 국무원에 의해서 전국 중요 문물 보호단위로 정해졌다. 무후사가 정확하게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략 6세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존재하는 무후사는 청대 강희 11년(1672년)에 옛 터 위에 중건된 것이다.

 

o 위치 : 성도시 남부 교외

o 교통편 : 1, 10번 버스, 무후사역

o 개방시간 : 08시~18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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