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王莽(왕망) - (), 後漢(후한)의 分岐(분기)와 新()의 등장

 

 왕망(王莽: BC 45~AD 23)은 前漢(전한)과 後漢(후한)의 분기점이 新(신)(서기 8~23)의 건립자라는 사실뿐 아니라, 일부에서는 그를 사회주의자라 부를 만큼 그의 정책은 매우 급진적이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인물이다.

 왕망은 기원전 45년 河北(하북)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元帝(원제)(기원전 49~33) 때부터 득세하기 시작했다. 왕망의 고모는 다름아닌 원제의 황후로서, 궁중은 물론 조정도 왕씨 집안에 의해 장악됐던 것이다. 특히 원제가 죽고 태자인 成帝(성제)(기원전 33~7)가 즉위하면서 그들은 본격적인 외척정치를 펼쳤으며, 이후 자그만치 10명의 제후가 왕씨 집안에서 나왔다. 기원전 8년에는 왕망자신도 숙부의 대를 이어, 大司馬將軍(대사마장군)에 올라 실권을 움켜쥐었다. 이때 그는 고작 38세에 불과했다.

 그러나 哀帝(애제)(기원전 7~1)가 즉위하면서 권력을 잃고 잠깐 관직에서 물러나 자신의 封國(봉국)에서 은거하다가 기원전 1년 다시 실세로 부상했다. 겨우 9살짜리 황제, 平帝(평제)(기원전 1~서기5)가 즉위하면서 이전의 직책인 대사마장군을 되찾았으며, 이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왕망은 서기 5년 평제가 독살하고 어린태자를 즉위시켜 섭정을 하다가 다음해에 스스로 假皇帝(가황제)(임시로 황제를 대행한다는 뜻)라 칭하고 왕조교체를 위한 준비를 마친 뒤 서기 8년 漢(한)황실을 폐쇄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라, 新(신)을 창건했다.「신」이라는 명칭은 일찍이 그가 제후로 봉해졌을 때 新都候(신도후)라는 작후를 받았던 데서 연유한 것이다. 이로써 2백년 역사의 한왕실이 일단 붕괴되고, 서한 또는 전한의 역사도 여기에서 종지부를 찍었다.

 왕망이 새로운 왕조를 시작했을 당시의 중국사회는「총체적 위기」라 할 수 있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우선 토지사유화가 진전돼 토지집중현상이 심화됐다. 이 과정에서 대량의 유민과 노비가 생겨 각지에서 농민봉기가 잇따랐다. 한편 왕실은 부패에 찌들어 있었다. 왕실의 부패는 관료사회의 부패로 연결되어 결국 통치력 부재라는 극한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특히 왕씨일가의 외척정치는 정치적 문란을 가속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 자신이 한나라 왕실의 몰락에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던 왕망은 건국하자마자「새정치」를 펼치기 시작했다.

 첫째, 王田制(왕전재)라는 새로운 토지제도를 실시했다. 전국의 토지를 모두「왕전」이라 개칭하고 개인간 매매를 금지했으며, 성인 남자 8명 이하의 농가는 1정(井송(정)=900무), 즉 6ha 이상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규정했다. 왕전제는 일종의 토지국유제에 바탕을 둔 토지재분배정책이었다.

 둘째, 노비의 매매를 금지하는 이른바 私屬制(사속제)를 실시했다. 일체의 노비를「사속」이라 칭하고, 이들의 매매를 금지했다. 이러한 급진적인 정책 없이 토지문제 해결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셋째, 소위 五均(오균)과 六管(육관)을 설치했다.「오균」이란 장안등 대도시에 오균관을 두어 시장의 물가를 관리하고 공.상업稅(세)를 징수케 하는 제도였다. 또한 오균관은 돈의 대출을 관장하여, 장례나 제사를 치르는 빈민에게 돈을 빌려주고, 공.상업을 시작하고자 하나 돈이 없는 이들에게 대출도 해주었다. 전자의 경우 이자를 면제해주고, 후자의 경우 10%라는 싼 이자를 매겼다. 한편 육관은 소금 철 술에 대한 국가의 전매와 화폐의 주조에 대한 독점, 그 재료의 채굴과 아연에 대한 장악 및 산림주택에 대한 세금 징수등 이른바 6가지 물자에 대한 국가통제를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넷째, 화폐제도를 개혁했다. 네 차례의 화폐제도 개혁을 통해 동전보다는 지폐의 활용을 적극 추진했다. 이외에도 도량형의 통일, 관제의 개혁, 지명의 개칭, 행정구역의 대폭 개편등 많은 급진적 정책을 펼쳤다.

 흥미롭게도 그의 급진적 정책은 유교의 복고주의에 이념적 토대를 두었다. 왕전제는 맹자의 井田制(정전제) 주장을 응용한 것이며, 오균도《易經(역경)》의 논리에 근거를 두었다. 다시 말해 그는 유교적 복고주의에 기초한 개혁을 추진했던 셈이다.

 

 왕망정권이 추진한 혁명적 변화에 대한 반발은 거의 즉각적이었다. 특히 왕망의 정책에 가장 큰 타격을 입었던 귀족세력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의 정권은 혁명적인 변혁을 강력하게 추진할만한 상태에 있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정권의 부패가 漢代(한대)에 못지 않았다. 이는 왕망 자신의 전횡에서부터 비롯됐다.

 드디어 왕망은 급진정책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실패는 개혁정치의 중단만을 의미하는 선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의 정권자체가 커다란 도전을 받았고, 신말에는 대규모 농민전쟁이 재차 발생했다. 당시 농민운동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綠林(녹림)과 赤眉(적미) 봉기를 꼽을 수 있다.

 23년 반란군은 수도의 동쪽 성벽을 뚫고 침공해왔다. 몇 시간에 걸친 시가전 끝에 반란군들은 저녁 무렵 성벽에서 약 6.4km 떨어진 황궁에 도착했다. 그 다음날 아침 수도의 백성들이 반란에 가세하여 황궁으로 들어와 불을 질렀다. 불은 점점 더 번져 나갔고 싸움은 그날 내내 계속되었다. 왕망은 자줏빛 의복을 입고 제왕의 인장(印章)을 흔들며 마법의 힘을 빌려 황궁을 지키려고 했다. 그는 음식도 전혀 먹지 않아 점점 더 쇠약해져갔다. 그해 10월 6일 새벽에 그는 전차(戰車)로 미앙궁(未央宮)으로 옮겨가 그곳에서 1,000명 이상이나 되는 측근과 마지막 저항을 벌였다. 그들은 화살촉이 다 떨어질 때까지 수비를 했고, 그후에는 단검을 뽑아들고 육탄전을 벌였다. 왕망은 장안(長安)의 미앙궁(未央宮)에서 부하에게 찔려 죽음으로써 건국한지 15년에 멸망하고, 후한이 그 뒤를 이었다.

 

 

 

스타투어(Star Tour)

☎:(02)723-6360

http://www.startour.pe.kr

블로그 : 스타투어

E-mail: startour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