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司馬遷(사마천)과 班固(반고)- 중국 역사학의 성립

 

 사마천의 『史記(사기)』와 반고의 『漢書(한서)』야말로 중국고대사를 명쾌하게 정리해주는 탁월한 역사서일 뿐 아니라, 시대를 초월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언제나 신선한 충격을 느끼게 하는 고전이다.

 사마천(司馬遷)은 기원전 145년 경, 士官(사관)인 太史令(태사령)을 역임했던 司馬談(사마담)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사마담은 역사서와 문서를 정리하는 직책을 수행했기 때문에 아들 사마천은 자연스럽게 역사학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기원전 110년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사마천은 태사령의 직책을 승계했다.

 역사서술에 몰두하던 사마천에게 갑자기 불행이 닥쳤다. 흉노와의 전투에서 투항했던 어느 장수를 변호하다 황제의 분노를 불러 일으켜 사형에 처해지게 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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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당시의 관행에 따라 사형도 돈으로 사면받을 수 있었지만, 집안이 넉넉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돈으로 목숨을 구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사형 대신 거세형을 택하여, 가부장적인 유교사회에서의 실질적인 목숨을 포기했다.

 이러한 불행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기』를 완성했다. 本紀(본기), 表(태), 書(서), 列傳(열전)등의 다섯 부분으로 구성된 『사기』는 1백30편, 모두 52만6천여자라는 방대한 양을 통해 전설시대인 黃帝(황제)때부터 한의 무제까지 약 3천여년의 역사를 기록했다.

 

 한편 반고(班固)는 후한시대 사람으로서 32년에 출생하여 92년에 사망했다. 반씨 집안은 대대로 명문 선비의 집안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반고와 반초 형제의 아버지인 班彪(반표)는 당대의 유명한 학자였다. 사마천의 『사기』에 대한 작업이 그의 아버지에 의해 이미 착수됐던 것과 같이, 반고의『한서』도 아버지 반표에 의해 토대가 마련됐다. 당시 사마천의 저서를 이어 그의 시내 이후를 기술해 줄 역사서가 마땅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반표는 자료를 수집하여「後傳(후전)」65편을 지었던 것이다.

 반고의 학문적 재질은 일찍부터 돋보였다. 그는 16세에 수도 洛陽(낙양)에서 최고 교육기관인 太學(태학)에서 학문을 닦다가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낙향하여 본격적인 역사 서술 작업에 몰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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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마천이 저술작업중 커다란 고난을 당했듯이, 반고도 중도에 엄청난 시련을 겪지 않으면 안됐다. 개인이 마음대로 역사를 편찬한다는 빌미로 향리에게 역사를 기술하던 그를 지방관이 투옥한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때 그는 동생 반초의 구명운동 덕에 풀려나, 착수 30여년 만에『한서』를 완성했다. 현재 전해지는『한서』는 그의 여동생 班昭(반소)등에 의해 보완된 것이다.

 반고는 사마천의『사기』의 체제를 따르면서 나름대로 변형을 시도하여 새로운 형태의 역사기술을 내놓았다.『한서』는 모두 12기, 8표, 10지, 70전으로 구성됐으며, 모두 10여만자로 쓰여졌다. 기원전 206년부터 서기 23년까지, 즉 한 대 초기부터 왕망 집권까지 230여년을 대상으로 서술이 이루어진 전한의 역사서인 것이다.

 

 후세 인들은 사마천과 반고를 함께 반마(班馬)라고 불렀고 그들의 역사 기록을 중요시하는 의미로 사한(史漢)이라 불렀다.

 

 

 

司馬遷(사마천 : B.C. 135?∼93?)

잉어와 사마천

 아무래도 민물고기의 황제는 잉어다. 잉어는 몸에서 발산하는 은은한 황금빛, 그리고 중후하게 생겼으면서도 기지와 패기가 넘쳐 흐르는 기상이 어딘지 모르게 동양적인 신비감을 느끼게 하고 있다. 예로부터 중국에서는 잉어를 지혜와 슬기의 상징으로 중히 여겼다.공자도 외아들의 이름을 "잉어"란 뜻의 "리(鯉)"라고 지었을 정도로 잉어를 좋아했다.

 중국 황허의 싼시성 시안의 동북쪽으로 약 250km, 함곡관에서 항허를 따라 서북쪽으로 100여km 거슬러 올라가는 협곡에는 "롱먼(龍門)"이란 곳이 있다. 이 롱먼의 협곡은 물흐름이 거센 높은 폭포로 되어 있다. 롱먼 폭포수로 흐르는 항허에는 거센 물기둥을 거슬러 올라 가고 싶어 하는 많은 잉어들이 모여서 살고 있다. 해마다 복사꽃이 물위를 흐르는 봄철이 되면, 롱먼 에는 뭇 잉어들이 모여 들어 급류를 다투어 뛰어 오른다. 오랜 세월 동안 무수한 시행착오를 이겨내고 기어이 폭포를 뛰어 오른 잉어는 용으로 화신하여 등천한다. 즉 어변성룡(魚變成龍)하는 전설이 어린 롱먼은 "등용문(登龍門)"이란 말을 낳았다.

 그 롱먼이 바로 중국사의 아버지 또는 사성(史聖)이라 일컬어지는 사마천(司馬遷)을 나은 곳이다. 그의 [사기]는 중국고대사를 명쾌하게 정리해주는 탁월한 역사서일 뿐 아니라, 시대를 초월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등용문을 향해 솓구치는 잉어처럼 생생한 충격을 느끼게 하는 불후의 대작이다. 사마천은 기원전 145년 지금의 싼시성 한청(韓城)시의 롱먼(龍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사마담은 태사령이라는 관직을 갖고 있었는데 조상 대대로 집안이 사관(史官)을 맡았다.

 

여행가 사마천

 사마천은 여행가였다. 그는 열살 때부터 여행을 떠나기 시작하여 청년시절을 거의 하루도 쉬는 일이 없이 여행을 하였다. 말 마(馬), 옮길 천(遷) 성명 그대로 젊은 시절의 사마천은 여행광이었다. 사마천의 문장은 글 자체에서 얻어진 것이 아니다. 학자들이 책상머리에 앉아 글만 가지고 문장을 구하면 종신토록 애써도 새로운 진실을 찾기 어려운 것이다. 가까이는 황허와 화이허가 펼치는 중원지역, 멀리는 양쯔강의 상류 파촉지방(지금의 쓰촨성)까지 닥치는 대로 주유하였다. 그의 여행은 경치를 구경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지방의 풍속과 전설을 수집하려는 것은 물론 천하를 조감하고 자신의 안목을 넓히려는데 있었다.

 그리고 여행은 사마천에게 관용과 겸허함을 주는대신 아집과 편견을 버리게 해 주었다. 여행은 그에게 삶에 대한 애착을 갖게 하고 타인을 용서하는 마음을 길러주었다. 무엇보다 값진 것은 여행은 중국 전제군주시대 사람인 그에게 마음대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주었다. 방랑의 즐거움, 해질녘 붉게 타는 노을을 바로보며 느끼는 외로움, 고독. 그의 사유는 경험한 만큼 넓고 깊어 지게 되었다. 이러한 체험과 사색을 자기 글로 승화시켰다. [사기(史記)]가 바로 그것이다.

 사마천은 오랫동안 한무제의 낭중(오늘날 대통령 수행비서격)이 되었다. 기원전 110년, 사마천이 36세 때 아버지 사마담이 세상을 떠나며 자신이 시작한 [사기]의 완성을 부탁하였다. 부친이 죽고 난 3년 후, 사마천은 태사령이 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사마담이 모아놓은 엄청난 역사 기록과 황실 도서관의 책들을 미친 듯 연구하기 시작했다. [사기]의 집필 경위와 사마천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서술되어 있는 "태사 공자서" 부분에서 사마천은 이렇게 말한다. "소자 비록 모자라오나 아버님께서 하시던 일을 이어받고 예전부터 듣고 본 것을 남김없이 서술하여, 조금도 빠진 부분이 없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선친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사마천은 더 많은 역사 공부를 하고, 더 많은 여행을 해서 견문을 넓혔다.

 

사형수 사마천

 그러나 기원전 99년, 사마천에게 비극적인 일이 생겼다. 장군 이광리(李廣利)의 부하로서 흉노 정벌에 나섰던 장수 이릉(李陵)이 흉노의 포로가 되었다. 이릉은 뛰어난 장수였지만 5천 명의 보병 부대를 지휘하여 출정했다가 8만 명이나 되는 흉노의 기마 부대에 포위되어 어쩔 수 없었다. 이릉은 심한 부상을 당하고 쓰러졌고, 결국 흉노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던 것이다. 한나라 조정에서는 이릉이 사로잡혔다는 사실 때문에 그에 대한 비난이 빗발쳤다. 그러나 사마천은 이릉을 변호했다. 결국 한무제의 노여움을 사 사형수의 신세가 되고 만다.

 사형을 면하는 방법은 첫째, 금전속죄. 황금 3만 8천근을 바치고 서인으로 떨어지는 것. 둘째는 궁형이다. 궁형이란 사내의 고환을 썩히는 형벌이다. 즉 거세를 의미하는데, 당시로서는 궁형을 받고 구걸하듯 목슴을 부지한 자는 사람축에 끼지를 못했다. 상장군의 아들 진평이 사기꾼 패거리에 걸려 보증을 잘못 섰다가 죄인으로 몰린일이 있었다. 진평은 스스로 죄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사형을 거절하고 궁형을 자청했다. 그뒤로 어디를 가거나 진평에게는 놀림의 웃음소리가 따라 다녔다. 반면에 궁형을 거절하고 몸이 찢겨죽은 살인범이 있었는데, 그는 오히려 죽어서 때깔을 빛내고 있었다.

 40대 중반 사마천은 치욕의 극치인 궁형을 택했다.

 궁형에 처해지고 나서도 사마천은 전혀 죽을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동정하고 있던 사람들도 비판의 소리가 높았다.

 "살아 수모를 당하는 겁쟁이 놈, 목숨을 아끼는 비겁한 놈"

 꼼짝않고 틀어 박혀 있는 사마천의 집으로 어느날, 북방경비를 맡고 부임해 온 친구 임안 장군이 찾아왔다.

 "자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찾아왔네. 나는 의에 두처운 자네를 뒤따르는 자가 있다고 믿고 있네. 자네가 한일은 옳은 것일세. 그러나 황제 앞에서 국가를 위해 직언했을 때, 상당한 각오를 했을 것이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해서 오늘날까지 수모를 당하고 있는 것인가. 그 이유를 듣고 싶네."

 "목숨이 아깝네. 단 그뿐일세."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받고서도 말인가?"

 "그렇네"

 장군은 자세를 고치고

 "실은 두 개의 선물을 가지고 왔네. 하나는 단검, 이것으로 자결하게, 하지만 자네는 나와 달리 문관일세. 칼보다 독약쪽이 나을지도 모르지. 이 가죽 주머니속에 독약이 들어있네. 어느 쪽이든 하나를 고르게. 내가 최후를 지켜보겠네."

 사마천은 조용히 머리를 저었다.

 "그 아무것도 소용없네"

 "자네답지 않군. 살아 생전 수모를 당하고 언제까지 세간의 웃음거리가 될 생각인가."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네. 하지만 아무래도 살고 싶은 것일세."

 "사마천이여, 남자답게 죽어주게"

 "나는 일만번 형벌을 받는다 해도 끝내 살아갈 작정일세"

 "어째서인가? 왜 비겁자의 오명을 듣고 오래 살고 싶어하는 건가?"

 사마천은 끝까지 침묵으로 버텼다. 장군 임안은 드디어 화를 내어

 "더 이상 묻지 않겠네. 목숨을 아끼는 말따윈 듣고 싶지 않네. 그런 수치를 모르는 비겁자와는 오늘로 절교일세!"

 그는 거칠게 자리를 걷어차고 떠났다.

 

유협의 비조 사마천

 역사에는 과연 정의가 있는가? 세상에는 진실이 있는가? 왜 정의와 진실은 패배하곤 하는가? 사마천은 역사의 기록 앞에서 이러한 안타까움과 의문을 품고 분노를 곰삭이며 [사기]를 완성하였다. 그러면서도 사마천은 정의와 진실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는 않는다. 진실은 비극을 각오해야 한다. 진실의 극치는 비극이니까 그런 비극을 사기 저술로 승화시킨 정신은 그 이후 암울한 시대의 많은 인물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현실의 부정부패를 과감히 비판하고 정의와 의리를 찬송하는 내용은 사마천 이후의 역사서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사기]는 인간학의 보물창고다. 고대중국의 각박한 역사 현실 속에서 갖가지 인물 군상들이 빚어내는 한편의 장엄한 드라마이다. [사기] 중에서도 명문으로 첫번째 손꼽히는 문장은 예양 섭정 전제 형가 곽해 등이 줄지어 등장하는 "자객열전"과 "유협열전"이다. 사마천 말고 어떤 누가 조직폭력배나 테러리스트로 매도당할 수 있었던 협객들의 삶과 죽음을 "자객열전"과 "유협열전" 등으로 기록할 수 있었겠는가? 사마천이 없었으면 자객이나 유협은 없었다. 즉 자객이나 유협은 사마천으로 인하여 영원한 삶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자객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필살의 유협론을 폈던 것이다. 사마천이야 말로 협객 중의 협객, 천하 제1대협이다. 그러나 열전을 읽는 사람들이 정작 읽어야 할 것은 마치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 핍진한 생생한 필치에 대한 경탄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사마천의 정신이라는 것이다. 확실히 [사기]에는 후세의 중국의 관선사서(官選史書)에서는 볼 수 없는 일종의 개인적인 감개와 비판 정신이 흐르고 있다.

 사마천에게는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살아남을 필요가 있었다. 자기의 눈으로 보고, 자기의 분노로서 역사를 쓰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목숨을 건 비원이었던 것이다. 살아서 수모를 겪고 끝내 살아가는 고통도 그의 뜻을 굽힐 수는 없었다. 정의가 통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분노로 굴욕을 견디어내며 대업 [사기]를 완성했다. 절대적 권력의 황제에게 정의감에 불타 직언을 하다 궁형에 처해진 사마천은 자신의 울분을 [사기]저술로 승화시킨다.

 사마천은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되뇌이며 인류의 보편적 과제인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탐구했다. 따라서 우리는 [사기]를 읽으며 인생의 의미, 처세의 태도, 인간 관계 등에 대해 깊이 사색하게 된다. [사기]는 세계 최초의 문화사, 사회사를 겸한 일대사서로서 후세에 남겼다.

 관광명소보다 잊혀진 곳이나 남들이 잘 안가는 곳을 즐겨하는 북경원인에게는 롱먼 답사는 잉어가 등용문을 거슬러 올라가는 만큼이나 몹씨 힘들었다. 시안에서 지프를 잡아타고 시안 북쪽의 웨이허(渭河)를 건넌다. 거기서 항허본류를 향해 동북쪽으로 방향을 틀면 지도에도 없는 팍팍한 황톳길이 가도 가도 끝없이 계속된다. 해거름 무렵에야 가까스로 롱먼에서 약 5km 남쪽에 있는 외진 소도시 한청(韓城)시에 도착한다. 시내 최고급이라지만 우리나라의 장급 여관보다 훨씬 못한 롱먼빈관에서 1박을 한다. 다음날 아침 눈이 뜨기가 무섭게 황허 서편 강 절벽 저 높은 곳에 우뚝 서있는 사마천의 사당을 향해 떠난다. 사당은 사마천의 의관을 모셔놓은 곳으로 그의 석상과 함께 그를 기리는 61개나 되는 비석이 놓여있다. 사당 뒷뜰에 대리석으로 잘 다듬어 놓은 전망대에서는 아래로 흐르는 황허를 굽어살펴 본다. 거기서 2km가량 북쪽 상류가 이른바 롱먼, 등용문. 도도히 흐르는 황허는 그곳에 이르러 무슨 격정에 겨운듯 심하게 몸부림을 치고 있다.

 롱먼에로의 여행은 일거양득이다. 등룡문과 사마천을 동시에 만날 수 있어서다. 잉어가 등룡문을 통과하여 용이 된 전설의 현장 뿐 만 아니라 치욕과 절망을 극복한 위대한 영혼, 사마천 그를 느낄 수 있어서이다. 롱먼의 추억은 좀처럼 누렇게 뜬 황톳빛으로 변색되지 않는다. 그것은 열두발 상모로 흐르는 가슴속 강물에 퍼런 물고기 비늘로 싱싱하게 살아있다.

 

 

이릉(李陵)의 화(李陵之禍)

 장군 이광은 활을 들고 식인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는 산을 오르고 있었다. 여러 가지의 일로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사냥이라도 하고자 함이다.

 이미 해는 져서 어둡다. 갑자기 눈앞에 커다란 호랑이가 나타났다. 긴장된 상태에서 이광은 활을 힘껏 당겨 호랑이를 향해 쏘았다. 화살은 정확히 호랑이의 몸통에 맞았다.

 호랑이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 호랑이에게 다가가보니 호랑이가 아니고 호랑이처럼 생긴 바위였고 화살은 바위 깊숙히에 꽂혀있었다. 화살이 바위에 박힌 것은 처음이라 이상하게 생각하고 이광은 다시 한 번 원래 화살을 쏜 위치에서 힘껏 활을 쏘아보았지만 모두 튕겨나왔다.

 이 이야기는 사람이 한 곳에 정신을 집중하면 의외의 힘이 생긴다는 것을 말할 때 자주 사용하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이광은 태양왕이라 불리어진 한(漢)나라 무제(武帝)때의 유명한 장군이다. 무제에게는 처음에는 좀처럼 아들이 대어나지 않다가 궁중 가수인 위자부라는 여자를 후궁으로 받아들여 위자부에게서 아들이 태어났고 그 아들을 태자로 삼고 위자부를 황후로 삼는다.

 위자부의 동생인 위청과 위청의 다른 누이의 아들, 즉 위청의 생질인 곽거병 장군이 만리장성을 넘어 흉노를 토벌하는 큰 공을 세운다. 흉노에게 무서운 존재로는 신출내기 장군인 위청과 곽거병이 아니고 바로 역전의 명장인 이광장군이었기 때문에 방어시 주력부대로 이광군을 막았고, 위청과 곽거정은 물론 장군으로서의 능력도 있었지만 일종의 어부지리로 대승을 거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논공행상 때 이러한 사실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이광의 두 아들은 아버지의 그러한 점을 알고 다른 전쟁에서 맹렬히 싸우다 모두 전사했다. 이광의 손자인 이릉도 흉노와의 전쟁에서 용감히 싸웠지만 결국 흉노의 포로가 된다. 흉노는 그 유명한 이광의 손자인 이릉(李陵 :?∼B.C. 72)을 정책적인 면에서 이득을 보기 위하여 사형시키지 않고 항복하라고 끈질기게 회유했고 결국 이릉은 항복하고 흉노의 여자와 결혼까지 하여 흉노 땅에서 살았다.

 이를 안 무제는 크게 노하여 이릉의 일족(一族)을 참형에 처하라고 엄명했다. 그러나 중신을 비롯한 이릉의 동료들은 침묵 속에 무제의 안색만 살필 뿐 누구 하나 이릉을 위해 변호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이를 분개한 사마천(司馬遷:B.C. 135?∼93?)이 그를 변호하고 나섰다. 사마천은 지난날 흉노에게 경외(敬畏)의 대상이었던 이광(李廣) 장군의 손자인 이릉을 평소부터 '목숨을 내던져서라도 국난(國難)에 임할 용장(勇將)'이라고 굳게 믿어 왔기 때문이다. 그는 사가(史家)로서의 냉철한 눈으로 사태의 진상을 통찰하고 대담하게 무제에게 아뢰었다.

 "황공하오나 이릉은 소수의 보병으로 오랑캐의 수만 기병과 싸워 그 괴수를 경악케 하였으나 원군은 오지 않고 아군 속에 배반자까지 나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패전한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하오나 끝까지 병졸들과 신고(辛苦)를 같이한 이릉은 인간으로서 극한의 역량을 발휘한 명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옵니다. 그가 흉노에게 투항한 것도 필시 훗날 황은(皇恩)에 보답할 기회를 얻기 위한 고육책(苦肉策)으로 사료되오니, 차제에 폐하께서 이릉의 무공을 천하에 공표하시오소서."

 이 사건으로 사마천은 이릉과 같은 부류에 넣어져 무제로부터 형벌을 받게 되는데 남자에게는 가장 치욕적인 형벌인 궁형(궁형(宮刑 : 생식기를 제거하는 벌)이었다. 남자로서는 이보다 더한 굴욕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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