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韓信)은 한고조(유방)를 원망하며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말을 남겼다. BC 196년 진희(陳豨)의 난에 가담하였다가 탄로나자 여후(呂后)의 부하에게 참살당하였다.
불우하던 젊은 시절에 시비를 걸어오는 시정(市井) 무뢰배의 가랑이 밑을 태연히 기어나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한신(韓信, ?∼BC 196)이 조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연나라를 항복시킨 여세를 몰아 제나라로 진격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한신이 이끈 총병력은 10만명이 되지 않았지만, 항우가 패왕으로 있던 초나라의 오랜 공격에 시달리고 있던 제나라는,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한고조의 사신으로 온 역생(酈生)에게 항복의사를 밝혔다.
그리하여 한신은 제나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려고 하였다. 그
때 한신의 책사인 괴통(蒯通)은 역생이 항복을 받아내긴 하였지만, 한고조로부터 공격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받은것은 아니라며, 한신이 힘들게 얻은 공로가
역생이라는 일개 서생의 공로보다 더 적어서는 안된다고 역설하였다.
그 말을 들은 한신은 계속하여 제나라로의 진격에 더욱 속도를
가하게 되었다. 한편 역생에게 항복의사를 밝혔음에도 한나라의 군대가 계속 진격해오자, 제왕은 역생에게 속았다고 판단하고 그를 끓는 물에 삶아
죽여 버렸다.
그리고 급히 초나라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당시 한고조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던 초패왕 항우로서는, 동쪽에 자리잡고 있던
제나라와의 우호관계가 매우 절실한 상태였다. 따라서 초패왕은 용저(龍且)에게 20만 대군을 주어 제나라를 돕게 하였다.
그리하여
한신의 제나라에 대한 원정은 사실상 초한전 양상을 띄게 되었는데, 용저는 한신과 같은 지역출신으로 그가 불량배와 건달들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갔던
일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신의 진면목을 몰랐던 용저는 그저 싸울 용기도 없는 겁쟁이 정도로 밖에 보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
상대방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이 승부를 가르는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다.
한신은 유수라는 강 상류에 모래주머니로 댐을 만들게 한
후, 초나라 20만 대군을 유인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패하면서 달아났지만, 그를 가볍게 여긴 용저는 충분히 전방의 사정을 살펴보지도 않은 체
너무도 쉽게 유인책에 걸려 들고 말았다. 그로인해 용저 자신도 참살되고 말았으며 절반
이상의 병력이 전사하였다.
이 승리로 인해
한나라는 초나라에 병력의 우위를 점할 수 있었을 뿐더러, 한신은 제나라를 확고하게 점령할 수 있었다.
또한 한신은 제나라가 다시 초나라와
연합하는 것을 막기위해, 자신을 임시로나마 왕으로 봉해줄 것을 한고조에게 요청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요청은 한신이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새로운
세력을 구축하려는 것으로 보였고, 이때부터 한고조와의 사이에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초패왕 항우와 접전중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불신을 드러낼 수 없었다.
오히려 한고조는 한신에게 정식으로 제왕을 봉해줌으로써, 절대적으로 신임하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한편 후방배후에 강력한 세력이 자리잡기 시작하자 초패왕도 한신과의 관계를 정상화 시킬 필요가 있게 되었다.
따라서
초패왕은 한신에게 무섭(武涉)이라는 사신을 보내 화해를 요청하게 되었다. 무섭은 한고조에 대해 천하를 모두
갖기전에는 군사를 거두지 않을 끝없는 탐욕을 부리고 있다고 말하며, 오늘 초패왕이 지게되면
다음은 바로 한신이 될 것이라고 설득하였다. 따라서 서로 싸울 것이 아니라 서로 협력하여 중국을 삼분하여 갖자는 제안을
하였다.
그러나 한신은 오늘날 이 같은 지위에 오른것은 모두 한고조가 알아준
덕분이었다며 무섭의 제안을 거부하였다.
무섭이 돌가간 뒤에도 괴통이 다시 나서서 제왕 한신을 설득하였다.
초패왕과 당시 한왕이었던 한고조는 서로 싸우가다 지쳐있기 때문에, 한신이 항복시킨 위,
조, 연, 제의 땅을 합치면 충분히
중국 3분의 형세를 갖출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한신은 한고조와의 의리와 옛정을 내세우며 중국 3분의
계책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런데 괴통도 쉽게 물러서지 않으며 다음과 같이 설득해 나갔다.
"들짐승이 없어지면 사냥개는 쓸모 없게 되어 잡아먹는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또 용기와 지략이 군주를 떨게하는
자는 몸이 위태롭게 되고 공로가 천하를 뒤덮는 자는 상을 받지 못합니다. 장군은 한왕의 신하이면서도 군주를 벌벌 떨게 하는 위세를
가졌으며, 그 이름 또한 천하에 드날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장군께서는 이미 대단히 위태로운 처지에 놓이신
겁니다."
괴통이 이처럼 간언하자, 한신도 잠시 흔들렸다. 이에 괴통은 망설이고
있는 호랑이는 벌 한마리만도 못하고 기회는 두 번 오지 않는다며 더욱 한신을 설득하는데 힘을 썼다. 그러나 한신은 끝내 괴통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늘 열린마음으로 다른사람의 의견을 경청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한신이었지만, 한고조와의 의리를 차마 저버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신은 제왕의 권좌보다 의리를 선택하였고, 초나라를 배후에서 더욱 압박하는 한편 초패왕의 주력군과 지속적인
소모전끝에 결국 격파함으로서 기원전 202년 한고조가 중국을 재통일하는데 1등공신이 되었다.
그리고 한나라가 중국을 재패하자, 황제의
제위에 등극한 한고조는 제왕 한신을 느닷없이 초왕으로 임명하였다. 비록 초나라는 한나라에 패하였지만, 가장 극렬한 반한(漢)감정이 남아있는
지역이 아닌가?
이것은 사실상 한고조가 한신을 불신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다. 또 초나라지역에서 초나라 부흥운동이
얼마동안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그조차도 한신의 반란혐위로 덮어 씌워졌다.
결국 한고조는 한신을 운몽이라는 큰 호수지역으로
송환하였다. 그러나 전혀 문책받을 일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한신은, 한고조와 원한이 있었지만 항우의 맹장(猛將)이었던 종리매(鍾離昧)의 목을 베어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한고조로부터 반역의 혐의
정도는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런데 체포당한 종리매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 초왕 한신에게 따끔하게 충고한다.
"한왕의 비위나 맞추기 위해 나를 잡아가다니, 차라리
내 스스로 목을 내어 놓겠소, 하지만 내일은 당신 차례가 될 것이오."
그래고 한신은 한고조를 믿어 보기로 하며,
종리매의 목을 가지고 갔다. 그러나 한고조는 반역혐위로 한신을 체포 낙양성으로 압송하였다. 한신은 다행히 1등공신에 책봉되었기 때문에 사형은
면할 수 있었지만, 제후로 강등되었으며 이때부터 강한 불만을 품기 시작하였다.
이후 한신은 병을 핑계삼아 조정에 입조를 거부하다가,
거록의 태수 진희(陳稀)와 공모하여 반역을 꾀한 것으로 사기는 전하고 있다.
그리고 진희는 과연 한고조 제위 10년만에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발맞추어 한신도 죄수들을 풀어주어 궁궐을 장악한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한신의 부하중 한명이 여태후(呂太后,
BC 241~BC
180)에 보고하여 발각되었다고
한다. 당시 한고조는 진희가 일르킨 반역을 진압하기 위해 도읍밖으로 나간 상태였기 때문에 여태후가 실권을 잡고 있었다.
그런데 여태후는
한고조의 명을 사칭하여 한신을 불러들이기로 하고, 진희가 이미 처형당하였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단독으로 반란을 성공시키기 어렵다고 생각한
탓인지, 한신은 더이상의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여태후가 꾸민 가짜 소환에 응하고 말았다.
그리고 아무 무장도 없이 혼자몸으로
입궐하고 말았다. 그것이 한신의 최후가 되었다. 한신은 참수되기 직전 '그 때 괴통의 말만 들었어도...'란 말을 하였다고 한다.
한신은 분에 못이겨 울부짖었다.
"아! 교활한 토끼가 죽자 사냥개가 죽음을 당하고 비조(飛鳥)가 없어지자 양궁이 감추어지고 적국이
파멸되니 묘신이 망한다(狡兎死良狗烹 飛鳥盡良弓藏 敵國破謀臣亡)고 하더니 천하가 평정되어 두려운 적이 없어진 지금 교활한 토끼가 다 잡히면
충실한 사냥개가 삶겨져 주인에게 먹히듯이 온갖 충성을 다한 내가 이번엔 고조의 손에 죽는구나."
결국 천하삼분의 기회를 저버림으로서 토사구팽의 희생량이 되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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