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장량은 다리에서 황석공(黃石公)이란 노인을 만나 <태공병법서(太公兵法書)>란
병서를
전수받고 이를 공부해 왕의 스승이 될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고 한다. 얼마후 그는 유땅에서 한의 유방을 만나는데, 그는 유방의 성품에 반해 그의
참모로써 활약하게 된다.
한의 유방이 성을 공략할
때, 가진 군사는 9천뿐이고 적군의 반항은 드세어 고민이었다. 이때 장량이
유방에게 항량에게 가서 5천의 군대를 빌리면 빌려줄 것이라고 조언한다. 유방이 반신반의하자, 장량은 2천은 빌려주지 않으나 5천은 빌려줄
것이라고 확언한다. 과연 항량은 5천의 군대를 빌려주었는데, 유방이 이것에 대해 묻자 장량이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2천의
군대는 저희가 보유한 9천의 군대에 흡수되기 쉽습니다. 즉 항량쪽에서 보면 거저주는 셈밖에 안됩니다. 하지만, 5천이라면 우리군대의 절반이 조금
넘는 숫자입니다. 즉 5천의 군사로는 하기에 따라 9천의 군대를 좌우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유방은 이로써 무사히 성을
함락시켰고, 계속 진군하여 진류현에 이른다. 진류의 장수는 유방의 군대를 맞아 선전하였고, 유방은 참다못해 이를 지나치려 하였다. 이때
장량이 건의한다.
"진류는 곡식과 군수물자가 풍부하므로, 반드시 함락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군대가 그냥 지나치는 척하며 군사를
옮긴뒤, 다시 돌아올때는 깃발을 바꾸어 온다면 진류의 장수는 우리군대가 지나가고 또 새로운 군대가 온것이라 생각하고, 이미 지나갔던 우리군대가
다시 돌아온다면 승산이 없을꺼라 여겨 항복할 것입니다."
유방은 이대로 했더니 과연 진류는 항복을
하였다.
계속 진군해
나가던 유방은 진나라의 무관을 돌파해 함양을 평정하게 된다. 이때 이미 항우는 군대를
거느리고 홍문에 진을 치고 있었고, 유방의 좌사마 조무상이 배반하여 항우에게 유방이 스스로 황제가 되려 한다고 밀고하자 항우는 크게 격분하여
패상의 유방을 공격하려 한다. 이때 장량은 유방을 설득하여 항우에게 가 사죄하게 하는데, 이것이 유명한 '홍문연(鴻門宴, 홍문에서 열린 연회)'이며 장량은 여기서
유방을 먼저 피신시킨뒤 스스로 항우와 범증(范增)에게 대신 사죄를 함으로써 위기를 무사히 넘겼다.
천하가 평정된 후, 항우는 유방을
촉, 파, 한중의 왕을 삼아 한왕이라 칭하고 남정에 도읍하게 한다. 이는 유방을 파촉의 산지에 가두려는 술책이었는데, 이때 장량은 남정으로
들어가는 모든 다리를 끊어 유방이 다시는 관중(關中)으로 진출할 의사가 없음을 나타내게 한뒤, 미리 샛길을 봐두어 유방에게 진언한다. 이에 유방은
샛길을 따라 관중으로 진출하여 삼진왕(장한, 사마흔, 동예)를 격파하고 관중을 평정하였다. 이를 안 항우는 불같이 노하며 군대를 일으켜
유방을 토벌하려 하는데, 이때 장량이 항우에게 편지를 보내 제나라의 전씨형제가 모반을 하므로 그들을 먼저 토벌함이 마땅하다고 설득하자 항우는
제나라를 공략하게 된다. 이로써 유방은 한때의 위기를 무사히 넘겼다.
천하가 초,
한으로 나뉘어 계속 싸움이 일자 장량은
구강왕 영포, 제나라 장수출신의 팽월, 유방의 대장군 한신 세사람을 천거하여 각기 왕으로 삼은뒤 이들을 중심으로 군대를 부려야 한다고
진언했다. 유방은 이대로 했는데, 과연 이 세사람은 한나라군대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한나라와 초나라는 오랜
싸움끝에 홍구를 경계로 화평을 맺게 된다. 이때 장량은 진평과 함께 유방에게 초나라를 계속 공격할 것을 진언하여 유방은 한나라의 군대를
거느리고 광무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이때 한나라의 장수 한신(韓信 ?∼BC 196),
팽월(彭越), 영포는 참전하지 않았으며 이에 유방은 크게 패하고 만다. 낙심한 유방이
장량을 불러 책망하자 장량은 황송해 하며 답했다.
"대왕께서 천하를 얻은 뒤, 그들에게 베풀 것을 약조하지 않으셨으므로,
그들이 오지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마땅히 그들에게 봉작을 준후에야 군대를 움직일 것입니다."
이에 유방이 한신,
팽월, 영포를 왕에
임명하자 그들은 즉각 군대를 이끌고 와 초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해하에 몰아넣었다.
이때 장량은 한나라 군대에서 초나라 출신의 병사들을
선출해서 그들에게 초가를 가르친뒤 부르게 한다. 이를 들은 초나라 군대는 크게 동요하였으며, 마침내 800여명의 용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고 한다. 이로써 결국 항우는 멸망하였고, 그는 배에 오르라는 정장의 말을 거부한채 자결함으로써 삶을
마감하였다.
이후 유방은 황제가 되었고, 장량에게 3만호를 주려 하지만, 장량은 자신이 유방과 만난 곳이
유땅이므로 유땅만 주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이에 유방은 장량을 유후에 봉했는데, 그뒤로 장량은 한나라의 정치엔 참여하지 않았다 한다. 다만
후계자 문제를 둘러싸고 여후의 자문을 받자, 유방이 존경하는 상산사현(商山四賢
- 동원공(東園公)· 하황공(夏黃公)· 녹리선생(甪里先生)·
기리계(綺里季) :
현명한 4명의 노인으로 유방이 초청했으나 오지 않음)을 불러 황태자 효혜를
보좌하면 유방이 후계자를 바꾸지 못할것이라 귀뜸한다. 여후는 이대로 실행했는데, 과연 유방은 후계자를 바꾸지 않았다.
유방이 항우를 제거하고 완전하게 한 왕조를 세운 후 장량은 정치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또 한 번 혀를 내두르게 만드는 장량의 처세를 엿볼 수 있다. 유방은 황제에 등극하자 공신들을 제후왕에 봉해 그 공을 치하했다. 유방은 장량에게 제나라 지역의 3만 호를 다스리도록 하려 했지만, 이를 사양하고 전쟁의 피해가 가장 심해 3천 호에 불과했던 하남성 중부의 유현(留縣)을 선택했다. 이때 장량은 자신이 유현에서 유방을 두 번째로 보았는데, 이는 하늘의 뜻이었으며 한나라 건국에 자신의 공은 미미하다고 말하며 스스로 몸을 낮췄다. 권력에 초연한 모습을 보여 권력 다툼에서 생명을 보전하고자 함이었다.
또한 장량은 기원전 201년 자신의 건의로 유방이 낙양에서 관중 지역으로 천도한 후부터는 항상 신병을 이유로 조정에 출석하지 않고 두문불출하여 권력의 중심에서 비켜서 있었다. 실제로 기원전 196년 개국공신 한신은 유방의 정부인인 여태후의 농간에 죽임을 당했고, 후에 소하는 수감되었으며, 함께 해하 전투를 치렀던 양나라 왕 팽월도 살해되었다. 이들 모두 개국공신으로 한나라가 개국된 후 권력과 부의 중심에 있던 인물들이었다. 장량은 이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장량은 건국 후 단 한 번 정치에 개입한 적이 있었다. 바로 유방의 후계자 문제로 여태후가 장량을 닦달했을 때다. 유방은 말년에 애첩인 척희(戚姬)를 사랑해 그가 낳은 아들 여의(如義)로 황태자 유영(劉盈)을 대신하려고 했다. 다급해진 여태후는 장량을 다그쳤고, 장량은 유방이 존경해 마지않던 상산사호(常山四皓)에게 황태자의 보좌를 맡기면 유방이 황태자를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과연 유방은 후계자를 바꾸지 않았고, 이로써 장량은 황태자와 여태후를 살린 은인이 되어 자신의 목숨을 보전했다.
기원전 196년 장량은 다시 관직에서 물러나 신선술을 배우겠다는 이유로 다시 두문불출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이것 역시 한신과 팽월의 살해와 이에 공포를 느껴 일어난 경포의 반란 등 살벌한 세상에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처세술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여태후가 장차 장량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모함하자 유방은 장량이 머물고 있던 장가계(張家界)를 공격해 왔다. 하지만 유방은 천연의 요새인 이 지역을 끝내 정벌하지 못했다. 장량은 유방이 세상을 뜨고 8년 후 세상을 떠났고 이곳에 묻혔다.
장량이 유방을 돕게 된 데는 조국 한(韓)나라에 대한 충성심과 진나라에 대한 보복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장량의 복수는 단순히 진나라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에서 끝나지 않았다. 장량은 다른 사람을 존중할 줄도, 의로운 일에 목숨을 걸거나 죽음을 태연하게 받아들일 줄도 모른데다 참을성까지 없었던 유방을 한나라의 건국자로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장량의 뛰어난 계책과 가르침은 한 고조 유방을 완전한 대륙의 패자로 만들었다. 장량이 한 고조 유방을 돕지 않았다면 중국의 역사상 가장 강대했던 시기 중 하나인 한나라의 시대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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