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陳勝(진승: ?~B.C. 208)과 吳廣(오광: ?~B.C. 208) - 최초의 농민운동

대초흥(大楚興) 진승왕(陳勝王) ∥ 借屍還魂(차시환혼)

 

 진승(陳勝: ?~BC 208)과 오광(吳廣: ?~BC 208)은 중국 최초의 농민운동가이며 그들이 주도한 농민봉기는 중국역사상 최초의 농민전쟁이다.

 

 BC 221년 오랜 겸병전쟁을 끝내고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 진(秦)나라가 탄생하였다. 그러나 진시황은 통일왕조를 건설한 후에 사회적 안정과 경제적 회복에 중점을 두지 않고 경제적 불안과 사회적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다. 그는 육국(六國)의 궁궐 양식을 모델로 하여 수도 함양(咸陽)에 대규모의 아방궁(阿房宮)과 호화로운 여산릉(驪山陵)을 축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만리장성과 도로를 건설하고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흉노(匈奴)와 남월(南越)을 정벌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통일제국을 공고히 다지는데 일정 부분 긍정적인 역할도 하였지만, 여기에 장기간 수많은 인력과 물자를 투입함으로써 그것은 오히려 백성들의 조세와 부역에 대한 부담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또 가혹한 형법을 제정하여 백성들이 조금만 법을 어겨도 그것을 엄격하게 적용함으로써 죄인들이 수십만에 달하였다.

 

 결국 진시황 통치 말기에 가혹한 정치를 더이상 견디지 못한 백성들은 전국 도처에서 반기를 일으켰으며, 육국의 잔존 귀족세력들도 그러한 틈을 타서 반진(反秦)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BC 218년(진시황 29년)에 진시황은 동쪽으로 순찰을 나갔다가 박랑사(博浪沙: 지금의 하남성 중모(中牟) 서북)에서 자객의 저격을 받기도 하였던 것이다.

 

 진시황이 사구(沙丘)에서 병사한 후 진이세(秦二世) 호해(好亥)가 즉위하였으나, 부패무능한 진이세의 학정과 이때 실권을 장악한 환관 조고(趙高)의 전횡으로 백성들은 더 심한 고통에 시달리게 되었다. 형을 받은 자가 도로의 절반을 차지하였으며, 죽은 자들이 날마다 저자거리에 쌓여갔다. 진시황의 옛신하들과 진왕실의 친족들도 조고의 모함으로 대부분 살해되어 통치권 내부에도 심각한 불안이 조성되었다.

 

 진이세 원년(BC 209) 7월, 진승과 오광은 빈민 900명과 함께 징집되어 어양(漁陽: 지금의 북경 밀운현(密雲縣) 서남)을 수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원래 빈민들은 징집 대상에서 제외되었으나 계속된 징집으로 부족해진 인력을 보충하기 위해서 마구잡이로 징집을 한 결과였다.

 

 진승은 河南(하남) 출신으로 字(자)가 涉(섭)이므로 진섭이라고도 부른다. 그는 집이 가난하여 머슴을 살았다. 당시의 머슴은 노예나 노비의 신분이라기보다는 남에게 고용된 농업노동자라고 이해하는 편이 옳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노동력을 고용하여 농업경영을 하는 방식이 이미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는 중국의 농촌경제가 매우 오래전부터 다양하게 발전하고 있었음을 반영하고 있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진섭세가(陳涉世家)의 30세가 중 하나에, 진승은 머슴을 살 때 주인과의 대화에서 매우 유명한 成語(성어)가 남아있다.

 燕雀安知鴻鵠之志哉(연작안지홍곡지지재)-  "어찌 참새가 기러기나 백조의 큰 뜻을 알겠는가"라고 한 말로 보아 그는 자신이 훗날 무엇인가 성취하리라고 확신했던 것 같다.

 

 오광도 진승과 같은 하남 출신으로, 역시 매우 가난한 농민이었다.

 

 이들 두 사람은 진시황의 아들이 황제를 계승한 기원전 209년에 변방으로 징발됐다. 이들이 가게 된 곳은 지금의 北京(북경)에 가까운 지역으로 당시는 주로 가난한 이들만 변방수비를 위해 동원됐다. 그러나 미처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 홍수를 만나 길이 막힌 그들은 도저히 기한 내에 도달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다. 당시의 법은 정해진 시일 안에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할 경우 무조건 처형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진승과 오광은 "지금 도망가도 죽고, 봉기해도 죽을 수 있다. 이왕 죽는 것이 마찬가지 일 바에는 난을 일으켜 나라를 위해 죽는 편이 낫다"고 결심하기에 이렀다.

 그들은 "진에 의해 천하가 고통당한지 이미 오래라... 천하를 위해 일어서면 호응하는 자들이 많으리!"라며 봉기를 결정하고 일행을 선동했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이 어찌 처음부터 따로 있겠는가?"

 

 진승은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국호를 張楚(장초)로 정했다. 자신의 행동이 전국시대의 초나라를 재건하기 위한 것임을 천명하기 위해서였다. 장초는 중국 최초의 농민정권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봉기한 지 얼마 안되어 농민군은 정부군에 진압됐다. 애초 진승의 농민군은 두 개의 대열로 나누어 진격했다. 진승은 본부대에 잔류하고, 오광은 병력 일부를 이끌로 서쪽으로 나갔다. 오광의 부대는 곧 정부군 지도자를 내세워 수도로 돌진했다. 그로나 예기치 않던 정부군의 습격을 받아 주문(周文)과 오광 양부대는 대패하고 말았다. 승기를 놓친 진승은 BC 208년 12월, 농민군 내주의 반도에 의해 피살됐다. 봉기한지 1년여만에 중국 최초의 농민운동은 종지부를 직었던 것이다.

 

 진승과 오광은 실패했지만, 이들은 진의 멸망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그들이 반란한 틈을 이용하여 전국 각지의 귀족세력, 특히 통일전 진나라와 자웅을 겨루던 나머지 6국의 후예들이 진에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특히 項羽(항우: BC 232~202)와 劉邦(유방: BC 256~195) 두 인물이 등장하여 패권을 겨루다가 결국 BC 206년 진이 붕괴하고 한이 탄생했다. 진의 멸망과 한의 계승은 진승과 오광에 의해 그 계기가 마련됐던 셈이다.

 

 거시적 측면에서 볼 때 진승과 오광이 이끈 농민운동은 중국사의 독특한 발전 모형을 형성시켰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후 거의 모든 왕조의 쇠퇴기에는 농민운동이 극성을 떨었고, 이로 말미암아 왕조는 교체되고 말았다. 진 이후 통일과업을 완수한 漢(한)나라도, 고대제국을 완성시킨 唐(당)왕조도, 세계적인 대국을 일으켰던 몽고족의 元(원)제국도, 궁극적으로 농민운동에 의해 성립된 明(명)정권도, 마지막 전제왕정을 이끌었던 淸朝(청조)도 농민운동에 의해 무너졌다.

 

 아마도 중국에서는 다른 농업사회보다 농민운동이 역사에 미치는 작용이 더욱 컸던 것 같다. 거대한 통일제국을 무너뜨리는 대규모 농민운동이 이미 2천년 전에 발생했다는 사실이야 말로 매우 놀라운 일이다. 20세기의 공산혁명이 농민을 주축으로, 농촌을 혁명기지로 성공을 거두었던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다. 

 

 

 

대초흥(大楚興) 진승왕(陳勝王)

 사기(史記) - 세가(世家) - 진섭세가(陳涉世家)

 

 진승(陳勝)은 양성(陽城) 사람으로 자(字)는 섭(涉)이다. 

 오광(吳廣)은 양하(陽夏) 사람으로 자는 숙(叔)이다. 

 진섭(陳涉)이 젊었을 때 일찍이 다른 사람들과 남의 집에 고용되어 농사를 지은 적이 있었는데 밭두둑 위에서 일손을 멈추고는 한참 동안 실의하여 원망하면서 말했다.

 "만약 부귀해지면 서로 잊지 말자."

 고용된 자들이 비웃으면서 말했다.

 "너는 고용되어 농사짓는 주제에 어찌 부귀해진단 말인가?"

 진승은 크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허! 제비나 참새 따위가 큰 기러기의 뜻을 어찌 알리오!"

 

 2세 원년(BC 209) 7월, 빈민가 백성들을 징발하여 수자리를 보내 어양(漁陽)을 지키게 하여 900명이 대택향(大澤鄕)에 주둔하게 되었다. 진승과 오광 모두 차례가 되어 이 행렬에 편입되어 둔장(屯長)을 맡게 되었다. 마침 하늘에서 큰비가 내려 길이 막히게 되어, 따져보니 기한을 이미 놓친 것으로 추측되었다. 기한을 놓치면 법에 의해 모두 참수 당하게 되어 있었다. 이에 진승과 오광이 모의하여 말했다.

 "지금 도망쳐도 죽고, 큰일을 일으켜도 죽는다, 죽는 것은 마찬가지이니 나라를 위하여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진승이 말했다.

 "천하가 진(秦)나라의 통치로 고통을 받은 지 오래다. 내가 듣기에 2세 황제는 막내아들로 제위를 계승할 수 없으며, 마땅히 제위에 오를 사람은 바로 공자 부소(扶蘇)이다. 부소가 여러 차례 간언을 한 까닭에 주상이 부소에게 병사를 이끌고 변방을 지키도록 했다. 지금 어떤 사람이 듣기에 죄도 없는데 2세가 그를 죽였다고 한다. 백성들은 대부분 그가 어질다는 것만 들었지 그가 이미 죽은 것은 모르고 있다. 항연(項燕)이 초나라의 장수가 되어 여러 차례 공을 세우고 병사들을 아껴서 초나라 사람들이 그를 좋아한다. 어떤 사람은 그가 죽었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도망쳤다고도 한다. 지금 만약 우리들이 스스로 공자 부소와 항연을 사칭하여 천하를 위하여 앞장서서 외친다면 마땅히 호응하는 자들이 많을 것이다."

 

 오광은 옳다고 생각했다. 이에 점을 치러 갔다.

 점쟁이가 그들의 뜻을 알고는 말했다.

 "당신들의 일은 모두 성공할 것이고 공을 이룰 것이다. 그런데 당신들은 어찌 귀신에게 길흉을 묻지 않는가!"

 

 진승과 오광은 기뻐서 점쟁이가 말한 귀신을 생각하며 말했다.

 "이는 우리가 먼저 여러 사람들에게 위엄을 보이라고 가르친 것이다."

 

 이에 비단에 붉은 글씨로 '진승왕(陳勝王)'이라 써서는 누군가가의 어망 속 물고기 뱃속에 넣어 두었다. 수졸(戍卒)이 물고기를 사서 삶아 먹는데 물고기 뱃속의 글을 보고는 참으로 괴이하게 여겼다. 또 오광에게 몰래 주둔한 곳의 숲 속 사당에 가서 밤에 모닥불을 피우고 여우가 우는 듯한 소리로 "대초(大楚)가 일어나고 진승이 왕이 된다(대초흥(大楚興) 진승왕(陳勝王))."라고 외치도록 강요했다. 수졸들이 모두 밤중에 놀라 공포에 떨었다. 이튿날 아침, 수졸들이 여기저기서 숙덕거리는데 모두 눈으로 진승을 가리켰다.

 

 오광은 평소 사람들을 아껴서 사졸들 대부분이 그에게 임용되고자 했다. 장위(將尉)가 술에 취하자 오광은 일부러 여러 차례 도망가고 싶다는 말로 장위를 화나게 만들어 자신을 욕보이게 함으로써 사람들을 분노하도록 자극했다. 장위가 과연 오광에게 매질을 했다. 장위가 칼을 뽑자 오광이 일어나 칼을 빼앗아 장위를 죽였다. 진승이 오광을 도와 함께 두 명의 장위를 죽였다.

 

 그리고는 무리들을 불러 놓고 말했다.

 "여러분들은 비를 만나 모두가 기한을 놓쳤으니 기한을 놓치면 참수를 당한다. 만약 단지 참수를 당하지 않는다 해도 수자리에서 본래 열에 여섯 일곱은 죽기 마련이다. 또 대장부가 목숨을 내놓지 않을 것이라면 그만이지만 목숨을 건다면 크게 이름을 내야 할 것인데, 왕과 제후, 장수와 재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단 말인가!"

 

 따르는 무리들이 모두 

 "삼가 명을 받들겠소!"라고 했다.

 

 이에 공자 부소와 장수 항연을 사칭하고 민중이 원하는 바를 따르기로 했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대초(大楚)'라 칭하였다. 단을 만들어 맹서하고 장위의 목을 제물로 바쳤다.

 

 진승은 스스로 장군이 되고, 오광은 도위(都尉)가 되었다. 대택향을 공격하여 거두고 기현(蘄縣)을 공격했다. 기현을 함락시킨 후 부리(符離) 사람 갈영(葛嬰)에게 병사들을 이끌고 기현 동쪽을 항복시키도록 했다. 질(銍), 찬(酇), 고(苦), 자(柘), 초(譙)를 공격하여 모두 함락시켰다. 행군하면서 병사들을 거두었다. 진현(陳縣)에 이르렀을 때는 전차가 6, 7백대, 기병이 1천 여명, 보병이 수만 명이 되었다. 진현을 공격했을 때 진현의 수령(守令)들은 모두 없었고 수승(守丞)이 혼자 초문(譙門)에서 싸웠다. 수승이 패하고 죽자 마침내 입성하여 진현을 점거했다. 며칠 뒤 진승이 삼로(三老)와 호걸들을 부르자 모두 모여 일을 논의했다.

 

 삼로와 호걸들이 모두 말했다.

 "장군께서 갑옷을 걸치시고 날카로운 무기를 들어 무도함을 토벌하고, 포악한 진나라를 벌주어 초나라의 사직을 다시 세우려 하시니 공으로 보자면 마땅히 왕이 되셔야 합니다."

 

 이에 진섭(陳涉)은 스스로 왕위에 오르고 국호를 장초(張楚)라고 했다.

 

 

 

借屍還魂(차시환혼, jiè shī huán hún)

 借: 풀이빌릴 차,  屍: 주검 시,   還: 돌아올 환,  魂: 넋 혼

 

 시체를 빌려 혼이 되돌아오다.

 죽은 사람의 영혼이 다른 사람의 시체를 빌려 부활하다.

 이미 멸망한 것이 다른 형식을 빌려 살아나고, 힘을 얻고, 강해지는 계책을 말한다.

 

 

 동한(東漢) 말년, 유비(劉備)는 손권(孫權)의 오(吳)나라와 연합하여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조조(曹操)를 대파하고, 형주(荊州)에 겨우 근거지를 만들게 되었다. 이때 조조는 다시 한중(漢中)의 장로(張魯)를 공격했다. 한중 바로 옆에 있는 익주(益州)태수 유장(劉璋, ?~219)은 몹시 당황했다. 유장의 모사 장송(張松, ?~212)이 조조가 한중을 얻었으니 반드시 익주를 치러 올 것이라며, 차라리 유비를 불러 장로를 토벌하고 조조의 군대를 막자고 건의했다.

 

 유장은 ‘유비는 한 왕실의 종친이고, 조조의 원수이며, 용병에 능하니 그를 부르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고, 장송의 건의를 받아들여 법정(法正, 176~220)을 파견하여 유비를 맞이했다. 법정은 유비에게 익주를 손에 넣으라고 권하며 자신과 장송이 안에서 호응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유비는 군대를 이끌고 장로를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유장에게서 많은 물자와 병마를 얻어 내었고, 결국 참모 방통(龐統, 179~214)의 계책에 따라 유장에게서 얻은 병마로 성도(成都)를 공격하여 서천(西川)을 손에 넣었으며, 이 땅을 근거지로 건국의 대업을 이루었다.

 

 한번 떠난 영혼은 본래의 몸체로 돌아오지 못한다. 영혼은 할 수 없이 다른 사람의 시체라도 빌려 부활해야 한다. 유비는 영웅의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지만, 기반이 없어 죽은 사람의 영혼이나 다름없이 떠도는 운명이었다. 대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정착하여 기개를 펼 수 있는 기반이 필요했지만, 유비에게는 근거지로 삼을 만한 땅도 없었다. 그런데 유비는 마침내 영혼을 부활시킬 수 있는 시체를 하나 발견했으니, 그게 바로 유약하고 무능한 유장이었던 것이다.

 

 

 중국의 역사를 보면 왕조교체기 때 차시환혼의 사례를 대거 접할 수 있다.

 패망 위기에 몰렸거나 이미 패망한 왕조의 황자(皇子)나 황족의 일원을 자처하며 무리를 모을 때 흔히 사용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진시황의 급서 직후에 일어난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의 난’이다. 사기(史記) 진섭세가(陳涉世家)에 따르면 진나라 2세 황제 원년(BC 209) 7월, 지금의 하남성 등봉현 동남쪽에 있는 양성(陽城) 출신 진승과 지금이 하남성 태강현인 양하(陽夏) 출신 오광이 차시환혼의 계책을 활용해 지금의 안휘성 숙주시 동남쪽인 기(蘄) 땅에서 반기를 들었다.

 진승과 오광은 자신들의 신분이 미천해 사람을 모으기가 어렵다고 생각해 백성의 존경을 받고 있는 진시황의 큰 아들 부소(扶蘇)와 초나라 명장 출신 항연(項燕)을 사칭했다. 당시 사람들은 부소와 항연이 이미 죽은 사실을 자세히 알지 못했다. 이들의 계책은 그대로 적중했다. 진나라의 패망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자가 섭(涉)인 진승은 원래 머슴 출신이다.

 하루는 밭두둑 일손을 멈추고 휴식을 취하던 가운데 길게 한숨을 내쉬며 한탄했다.

 "만일 부귀하게 되면 서로를 잊지 말도록 합시다."

 머슴들이 비웃었다.

 "당신은 남의 머슴으로 있는 주제에 어찌 부귀를 이룬다는 것인가?"

 진승이 탄식했다.

 "아! 연작(燕雀)이 어찌 홍혹(鴻鵠)의 뜻을 알겠는가!"

 

 '연작(燕雀)'은 제비와 참새 등의 작은 새로 곧 소인을 상징한다. '홍혹'은 봉황과 유사한 전설상의 새로 영웅을 뜻한다. 당초 진승과 오광은 부역에 징발된 900명의 백성을 이끌고 지금의 북경시 밀운현 서남쪽인 어양(漁陽)으로 가던 중이었다. 이들이 지금의 안휘성 숙현 남쪽인 대택향(大澤鄕)에 이르렀을 때 마침 갑작스럽게 내린 폭우로 길이 끊기게 되었다. 당시 기한을 어긴 자는 모두 참수형에 처해졌다. 모두들 기한을 넘기게 되었다며 크게 두려워했다. 진승과 오광이 장위를 죽인 뒤 무리를 모아놓고 이같이 선동했다.

 

 무리가 모두 찬동했다. 곧 대택향을 공격해 점령하자 백성이 호응해 몰려들기 시작했다. 진승과 오광이 차시환혼(借屍還魂)의 계책을 구사해 부소와 항연을 사칭하며 천하의 인재와 백성을 그러모으기 시작한 단초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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