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秦始皇(진시황) - 폭군인가, 영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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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시황제는 최초로 중국을 통일하는 과업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중국역사상 독보적인 존재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통일제국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인해 폭군으로 부각되는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중국이 전국 7웅에 의해 분열되어 서로 각축을 벌일 때 기원전 259년에 태어났다.

 성은 懶(영). 이름은 政(정).

 趙(조)나라의 대상인 여불위의 공작으로 즉위한 장양왕의 아들로서 13세에 즉위하였다. 처음에는 태후의 신임을 받은 여불위와 노애가 권력을 농단하였으나 BC 238년 친정을 시작, 노애의 반란을 평정하고 여불위를 제거한 후, 울요와 이사 등을 등용하여 강력한 부국강병책을 추진하여 BC 230~BC 221년에 한 ·위 ·초 ·연 ·조 ·제 나라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親政(친정)에 들어가 본격적인 영토 확장작업에 착수한 것은 23세 때였다.

 놀랍게도 그의 통일사업은 기원전 230년부터 221년까지는 아주 짧은 기간에 이루어졌다. 기원전 8세기부터 분열된 중국이 하나의 통치체제 밑에서 역사를 전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그는 중앙집권적 전제정치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그는 황제라는 존호를 최초로 제정하고 二世(이세)나 三世(삼세)는 물론 萬世(만세)까지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스스로 始皇帝(시황제)라 칭했다. 또한 전국을 하나의 통치체제로 편입시키기 위해 郡縣(군현)제도를 실시했다. 황제를 정점으로 西周(서주)(기원전 1122-1771)시대의 봉건체제를 대신하게 됐다. 이후 중국은 2천년 이상 군현제를 운영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不老長生(불로장생)에 대한 집착은 너무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이 영원하기를 원하듯, 통일제국이 영구히 존속하도록 온갖 노력을 경주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집념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가 기원전 210년 50세의 나이로 사망한 후 얼마 못되어, 진제국의 長壽(장수)도 그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왜 진이 이렇듯 단명하고 말았는가?

 우선 통일과업을 완성시킨 진시황제가 사망한 후, 왕위계승을 둘러싼 혼란이 지속됐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뒤를 이었던 泰二世(태이세)황제는 정통성 시비에 말려들기도 했다.

 더욱이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은 탄생했지만, 아직도 봉건제가 여전히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춘추전국시대의 오랜 세월을 거쳐 중국은 봉건적인 정치질서에서 중앙집권적인 체제로 전환해 왔다. 또한 통일 후 진은 전국시내에서 서로 자웅을 겨루던 나머지 6국의 지배층 1만호를 강제로 수도 咸陽(함양)으로 이주시켜, 제국이 분열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건제는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다. 결국 진제국 말기 지방 토호와 6국의 귀족세력이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진왕조를 전복시켰다.

 진시황제부터 시작된 무리한 토목공사도 진의 단명을 설명하는 데 빼놓을 수 없다. 지금도 인공위성에서 욱안으로 관찰 할 수 있는 유일한 인공 구조물이라는 1만 2천 7백리의 만리장성, 사치의 상징으로 거명되는 길이 690m, 폭 114m의 아방궁, 무수한 호화유적을 남긴 진시황제 무덤(높이 약 70여m, 동서 약 600m, 남북 200여m), 그 외에도 무수한 건축물이 조성됐다. 당연히 이를 위해 과다한 세금을 징수하게 되어, 통일된 후에는 세부담이 무려 20배로 늘었다고 백성들이 불평할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국토나 도량형, 문자 따위의 통일 뿐 아니라 사상의 통일까지 이루려고 했던 진은 결국 「통일작업」의 무리한 추진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단명을 초래했다.

 

 焚書坑儒(분서갱유)는 말로 사상통제가 낳은 불행한 사건이었다. 모두 460여명의 선비를 생체로 매장하여 반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지식인들을 단숨에 제거했다. 또한 진나라 외에 다른 나라의 역사를 다룬 역사서는 물론, 농업등 실용적인 목적을 지닌 책을 제외하고 거의 모두 책을 불사르는 문명파괴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행위는 지식분자, 특히 유학을 신봉하는 선비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 일으키는 직접적 원인이 됐다.

 진시황제의 분서갱유는 중국은 물론 동양문화 전체에 너무나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무엇보다도 국가권력에 의해 사상과 학문의 자유가 억업되는 최초의 선례가 됐던 셈이다.

 

 이로 말미암아 동양인은 전통적으로 획일적인 사고에 길들여졌으며, 2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중국인은 물론 동양인 전체가 다원화 사회를 실현시키기 위해 진통을 겪고 있다.

 

 

서안의 진나라 병마용갱(兵馬俑坑)

 병마용이란 흙으로 빚어 구운 병사와 말을 가리키는데, 불멸의 생을 꿈꿨던 진시황이 사후에 자신의 무덤을 지키게 하려는 목적으로 어마어마한 규모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세계 8대 불가사의로 꼽힐 만큼 거대한 규모와 정교함을 갖추고 있다. 서안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약 30km, 진시황릉에서 북동쪽으로 1.5㎞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이곳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74년 중국의 한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했고, 그제서야 세상에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현재에도 발굴이 진행중이다. 현재까지 3개의 갱이 발견되었으며 700여개의 실물 크기의 도용(陶俑)과 100개가 넘는 전차, 40여필의 말, 10만여개의 병기가 발굴되었다. 병기들 대부분이 실제무기이며 현재는 창고에 보관 중으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지 않고 있다.

 

 도용들은 모두 제각기 다른 자세와 표정, 복장, 헤어 스타일을 갖고 있어 그 섬세함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병마용갱은 총 3개의 전시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1호갱은 당시 농민이 처음 발견한 것이고, 후에 2, 3호갱이 발견되었다.

 1호갱은 세 곳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동서 길이가 약 230m, 남북으로 약 62m로 총 면적이 12㎢ 정도이다. 1호갱은 동서 쪽을 향한 긴 모양으로 장군과 병사가 배열되어있고, 2호갱은 면적이 약 6000㎡이며,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2호갱은 발굴이 되고 있는 상태에서 전시되어 있다. 3호갱은 면적이 520㎡으로 凹모양이며, 병마용들은 양쪽으로 늘어서 있다. 역시 현재까지도 발굴 작업이 진행중이다. 학자들은 발견된 3개의 갱 외에도 진시황릉 근처에 아직 발굴되지 않은 더 많은 병마용갱이 묻혀 있을 거라고 보고 있다.

 

o 개관시간: 08:30-17:30

o 입장료: 90위안(12월-2월까지는 65위안)

o 교통: 기차역 입구에서 306번 버스나 7번 관광버스를 타면 병마용갱까지 바로 갈 수 있으며, 요금은 5위안이다.

 

 

진시황릉(秦始皇陵)

 중국을 통일한 최초의 황제 진시황(기원전 259~210년)이 여기에 묻혀 있다. 능묘는 38년간에 걸려 완공되었는데 무덤의 높이 76m, 둘레 2,000m이다. 측량조사에 의하면 능원은 내외 두 성곽으로 둘러졌고 내성의 둘레 2,525m, 외성의 둘레 6,264m이다. 무덤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야산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아직 내부는 개발이 되지 않아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다고 해도 내부는 볼 수가 없다. 진시황이 무덤을 설계할 때 훗날의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서 수은 등을 이용한 여러 가지 함정들을 설치해 두었다고 하는데 아직까지 그 비밀을 풀 수 없어 과학이 조금더 발전하여 그 비밀을 풀 수 있을때 발굴 한다고 한다.

 

 따라서 진시황릉까지 간다고 해도 내부에는 들어갈 수 없고, 밖에서 사진 촬영을 하거나 릉 위에 오르는 정도의 관광을 할 수 있다. 요새는 릉 주변을 아름다운 공원으로 만들어 미니 전동카나 마차로 릉 주위를 돌거나 공원 주변에 전시해 놓은 옛 유물을 구경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1987년 유네스코는 진시황릉을 세계유산 명록에 넣었다.

 

o 교통 : 기차역에서 녹색 306번 관광전용선 버스를 이용

 

 

 

진시황(秦始皇)과 불로초(不老草)

 중국의 도교(道教)는 불로불사(不老不死)를 한몸에 구현한 '선인(仙人)'을 목표로 했던 종교다. 물론 그 시조라 불리는 노자와 장자가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것과 같이 현실 도피적이고 염세적인 가르침을 펼쳤던 사상가만은 아니다. 그들의 사상은 중국 고유의 신선사상과 결부되어 민간에 퍼지면서 도교라는 전대미문의 종교를 탄생시켰다. 도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불로불사의 신선이 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복약(服藥) 신선이 되는 약을 먹을 것

 피곡(皮穀) 곡물을 먹지 않을 것

 도인(導引) 기공 체조

 행기(行氣) 호흡술

 방중(房中) 남녀교접술

 

 이 중에서 가장 많이 시도된 것이 복약으로 한 마디로 선약(仙藥)을 만들어 먹는 것이다. 다섯 가지 방법 중에서 가장 간단하기도 하다. 늙지 않는 선약이 불로초만은 아니라고 알려졌지만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식물이라면 더욱 환상적이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선약 찾기는 진시황제만 했던 것은 아니다.

 

 중국 전국시대 제(齊)나라의 위왕(威王, 기원전 356~320년)과 선왕(宣王, 기원전 319~301년), 연(燕)나라의 소왕(昭王, 기원전 311~279년)이 신하를 시켜 발해(渤海)의 삼신산(三神山)에 가서 신선을 만나 불사약을 구해 오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삼신산(三神山)이라는 곳은 전하는 말에 의하면 발해 한가운데 있는데 속세로부터 그리 멀지 않다. 금방 다다랐다 생각하면 배가 바람에 불려 가버린다. 언젠가 가본 사람이 있었는데 신선들과 불사약이 모두 그곳에 있고 모든 사물과 짐승들이 다 희고 황금과 은으로 궁궐을 지었다고 한다. 도착하기 전에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구름과 같은데 막상 도착해보면 삼신산은 물 아래에 있다. 배를 대려 하면 바람이 끌어가버려 끝내 아무도 도달할 수 없었다 한다."

 

 제나라는 산둥반도에 있던 고대국가로 '삼신산'을 신앙하여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이런 신선 사상은 제나라의 사상가 추연(鄒衍 또는 騶衍)의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과 결부되어 보다 업그레이드된다. 그는 맹자보다 약간 늦은 시대 사람으로 세상의 모든 사상(事象)은 토(土) · 목(木) · 금(金) · 화(火) · 수(水)의 오행상승(五行相勝) 원리에 의하여 일어나므로 역사의 추이(推移)나 미래에 대한 예견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이런 사상을 아우르면 삼신산 즉 불로초는 당연히 존재해야 했다.

 

 불로초 찾기에 가장 열을 올린 사람이 바로 진시황제(秦始皇帝)다. 사마천의 『사기』 「진시황 본기」에 선약(불로초) 찾기와 방자 서복(徐福, 또는 서불(徐巿)에 관한 기록이 남다르게 보이는 이유다. 『사기』에는 진시황이 서복을 통해 불사약을 구하려는 내용이 매우 구체적으로 적혀있다. 시황 28년(기원전 219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제(齊) 땅 사람인 서불(徐市) 등은, 바닷속에 삼신산(三神山)이 있는데 봉래산(蓬萊山) · 방장산(方丈山) · 영주산(瀛洲山)이라 하며 그곳에 신선들이 살고 있으니 재계(齋戒)한 후 동남동녀(童男童女)를 데리고 신선을 찾으러 가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서불은 동남동녀 수천 명을 데리고 신선을 찾으러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서복(徐福, 또는 서불(徐巿))은 기원전 255년 제 나라 산둥반도 랑야(琅琊) 군에서 태어나 천문, 지리, 해양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인 방사로 알려진다. 진시황의 불로초 찾기는 계속되어 시황 32년(기원전 215년)에 진시황이 갈석산(碣石山)에 가서 연(燕)나라 출신 노생(盧生)을 파견하여 선문(羨門)과 고서(高誓, 전설상의 신선이름)라는 신선을 찾아보도록 했다는 기록도 있다.

 시황 35년(기원전 212년)에는 노생이 진시황에게 자신들이 영지(靈芝), 선약(仙藥), 신선을 찾으러 나섰으나 항상 찾을 수 없었던 것은 아마도 무언가가 이를 방해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며, 진시황이 항상 신분을 숨기고 비밀리에 다니면 악귀가 피하고 비로소 진인(眞人)이 나타나 불로초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진시황은 진인이 한없이 부럽다고 했는데 노생과 후생은 불로초를 찾지 못하자 자신들에게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했다. 결국 진시황이 천성이 포악하고 고집스럽게 자기주장만 내세운다며 도망갔다. 이 사건은 진시황에게 방사에 대한 큰 배신감을 심어주었는데 후대에 두고두고 비난받는 분서갱유(焚書坑儒)의 단초를 제공한 것으로도 알려진다. 진시황이 불로초에 집착하자 그동안 진시황에게 불로초를 찾겠다고 공언한 서복은 자신에게도 화가 미칠 것으로 생각해 시황 37년(기원전 210년)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봉래산의 선약은 구할 수 있으나 커다란 교어(鮫魚, 상어)가 방해하여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청컨대 활 솜씨가 뛰어난 사람들을 저희와 함께 보내 주시어 상어가 나타나면 쇠뇌(連弩)를 이용하여 집중적으로 화살을 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진시황은 자신이 직접 쇠뇌를 들고 대어가 나타나면 쏘려고 기다렸다. 랑야에서 북쪽으로 영성산(榮成山)에 이르도록 계속 올라가면서 초조하게 기다린 끝에 대어 한 마리를 발견하고 사살한다. 마침내 바다를 따라 서쪽으로 가지만 병이 생겨 죽는다.

 

 궁극적으로 진시황제는 불로초를 구하지 못하고 사망했지만 불로초에 대한 믿음은 중국 황제에게 계속 매력적인 주제로 전해졌다. 한(漢)의 무제(武帝, 기원전 148~87년) 역시 여러 사람을 삼신산에 보내어 신술(神術)을 익히고 불로초를 구해오게 했다. 위 · 촉 · 오 삼국시대에 오의 손권도 230년경 장생불사를 꿈꾸던 진시황이 선약을 구하기 위해 서복을 파견했다는 전설의 땅 이주(夷洲)와 단주(亶洲)로 군대를 파견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국인들의 관심을 자아내는 것은 삼신산이 봉래산(금강산), 방장산(지리산), 영주산(한라산)을 의미한다는 설이다. 바로 서복이 한국을 찾게 된 이유가 바로 이들 산에 있는 불로초를 찾기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이다.

 

 

 

여불위(呂不韋 : ?~BC 235)

 중국 전국시대 말기 진(秦)나라의 정치가로서 원래 양책(陽翟: 河南)의 푸양[陽] 사람이다. 대상인(大商人)으로 조(趙)나라의 한단(余鄲)으로 갔을 때, 진나라의 서공자(庶公子)로 볼모로 잡혀 있는 자초(子楚)를 도왔다. 그의 도움으로 귀국한 자초는 왕위에 올라 장양왕(莊襄王)이 되었고, 그 공로에 의해 그는 승상(丞相)이 되어 문신후(文信侯)에 봉하여졌다. 장양왕이 죽은 뒤 《사기(史記)》에 여불위의 친자식이라고 기록된 태자 정(政: 始皇帝)이 왕위에 올랐다.

 최고의 상국(相國)이 되어 중부(仲父)라는 칭호로 불리며 중용되었으나, 태후(太后: 진시황의 모후)의 밀통사건에 연루되어 상국에서 파면, 자신의 봉지인 허난으로 돌아갔다. 그후 반란을 두려워한 황제가 그를 촉(蜀: 지금의 쓰촨 성[四川省]) 지방으로 쫓아버리려 하자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고 한다.

 

 전국 말기의 귀중한 사료인 《여씨춘추(呂氏春秋)》는 그가 3000명의 식객들을 시켜 편찬한 것이다. 이 책은 도가(道家)사상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나, 유가(儒家)· 병가(兵家)· 농가(農家)· 형명가(刑名家) 등의 설(說)도 볼 수 있다. 또한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의 시사(時事)에 관한 것도 수록되어 있어 그 시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론서이다. 《여씨춘추(呂氏春秋)》가 완성되자 여불위는 셴양[咸陽]의 시문(市門)에 걸어놓고, 이 책의 내용을 한 자라도 고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천금을 주겠다고 하여 완벽한 내용을 과시하였다.

 

》여불위와 부친과의 대화

  "아버님, 농부가 농사를 지을 때 백 냥 가량의 자본을 투자했다면 그 소득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부친은 어리둥절하였으나 즉시 대답했다.

  원래가 어리석지 않은 아들의 질문이라 까닭이 있을 거라 생각하여 느낀 대로 대답했다.

  "약 열 배 정도는 되지 않겠는가?"

  "그럼 주옥(珠玉)을 사서 잘 보관하였다가 팔면 그 이익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아마 백 배는 될 것 같구나."

  이 말을 듣자 여불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넌지시 물었다.

  "그럼 왕이 될 자를 도와주고 나중에 권력을 차지하면 그 이익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엉뚱한 물음에 여불위의 부친은 뚫어지게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그거야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익이 아니겠느냐?"

  이와 같은 대답에 여불위는 밝은 표정을 지으며,

  "사실 농사는 육체가 피로하고 장사는 마음이 피로한데다가 그 수입마저 고정되어 있습니다. 저는 방금 지난번 전쟁 때 생포된 황손(皇孫) 이인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상(相)이 차후 천하에 으뜸가는 귀인이 되겠더군요."

 

 

 

<一字千金(일자천금)>

 

 一: 한

 : 글자

 : 일천

 : 쇠

- 한 글자엔 천금의 가치가 있다는 뜻으로, 아주 빼어난 글자나 시문(時文)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출 전]《史記》<呂不韋列傳>

 

 전국 시대 말엽, 제(齊)나라 맹상군(孟嘗君)과 조(趙)나라 평원군(平原君)은 각 수천 명, 초(楚)나라 춘신군(春申君)과 위(魏)나라 신릉군(信陵君)은 각 3000여 명의 식객(食 客)을 거느리며 저마다 유능한 식객이 많음을 자랑하고 있었다.

 한편 이들에게 질세라 식객을 모아들인 사람이 있었다. 일개 상인 출신으로 당시 최강국인 진(秦)나라의 상국(相國: 宰相)이 되어, 어린(13세) 왕 정(政: 훗날의 시황제)으로부터 중부(仲父)라 불리며 위세를 떨친 문신후(文信侯) 여불위(呂不韋)가 바로 그 사람이다.

 정의 아버지인 장양왕(莊襄王) 자초(子楚)가 태자가 되기 전 인질로 조나라에 있을 때 '기화가거(奇貨可居)'라며 천 금을 아낌없이 투자하여 오늘날의 영화를 거둔 여불위였다. 그는 막대한 사제(私財)를 풀어 3000여 명의 식객을 모아 들였다.

 이 무렵, 각국에서는 많은 책을 펴내고 있었는데 특히 순자(荀子)가 수만어(語)의 저서를 내었다는 소식을 듣자 여불 위는 당장 식객들을 시켜 30여만 어에 이르는 대작(大作)을 만들었다. 이 책은 천지만물(天地萬物), 고금(古今)의 일이 모두 적혀 있는 오늘날의 백과 사전과 같은 것이었다.

'이런 대작은 나 말고 누가 감히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의기양양해진 여불위는 이 책을 자기가 편찬한 양《여씨춘추(呂氏春秋)》라 이름 지었다. 그리고 이《여씨춘추》를 도읍인 함양(咸陽)의 성문 앞에 진열시킨 다음 그 위에 천금을 매달아 놓고 방문(榜文)을 써 붙였다.

 "누구든지 이 책에서 한 자라도 덧붙이거나 빼는 사람에게는 천금을 주리라."

 이는 상혼(商魂)이 왕성한 여불위의 우수 식객 유치책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기화가거(奇貨可居)

 奇 : 기이할

 貨 : 재물

 可 : 옳을

 居 : 있을

 

 진기한 물건은 사 둘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으로, 훗날 큰 이익으로 돌아올 물건이나 사람한테 투자를 해 두는 것을 말한다.

 

 전국 시대 말엽, 한(韓)나라의 큰 장사꾼 여불위(呂不韋)는 조나라 도읍 한단[邯鄲(감단)]에 갔다가 진나라 소양왕(昭襄王)의 손자인 자초(子楚)를 우연히 알아 친하게 되었다. 자초는 볼모의 신분으로 조나라에 와 있었는데, 그동안 두 나라 관계가 나빠지는 바람에 신분에 어울리는 대접을 받지 못하고 찬밥 신세로 떨어져 있었다.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대상을 발견했다고 기뻐한 여불위는 장사를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늙은 아버지한테 지혜를 구했다.

 

"밭을 갈아 농사를 지으면 한 해에 어느 정도의 벌이가 될까요?"

"많아야 10배 정도겠지."

"보석에 투자를 하면요?"

"그건 넉넉잡아 100배쯤 될까."

"그럼 한 나라의 임금을 만드는 경우의 투자 효과는 어떨까요?"

"그야 천만 배도 더 되겠지. 하지만 그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

 

 여불위는 기뻐하며 아버지에게 자초의 이야기를 했다.

 "소자가 보기에 자초 공자는 지금 불우한 처지에 있을망정 눈빛에 정기(精氣)가 돌고 식견이나 태도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투자할 충분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판단했습니다."

 이렇게 설명하여 아버지한테 동의를 구한 여불위는 조나라에 다시 가서 자초를 만났다.

 

 "공자님의 부친이신 안국군(安國君)께서는 연로하신 부왕의 뒤를 이어 머잖아 보위에 오르실 것이 확실합니다. 그런데, 잘 아시다시피 정빈이신 화양부인(華陽夫人)에게는 소생이 없으므로, 부득이 공자님을 비롯한 여러 서출(庶出) 왕자들 중에서 어느 한 분을 세자로 세워야 합니다. 그럴 경우, 과연 어느 분이 영예를 입게 될까요?"

 "글쎄요. 배다른 형제가 무려 스무 명이나 돼서..."

 "공자님은 어떻습니까?"

 "나야 타국에 와서 붙잡혀 있는 몸이니 누구보다 불리한 조건이겠지요."

 

 한숨을 섞어 말하는 자초에게 여불위는 바짝 다가앉았다.

 "그렇게 절망적으로 생각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공자님을 도와 드리겠습니다."

 "아니, 어떻게?"

 "저한테 천금(千金)이 있으니, 공자님의 이름으로 화양부인께 좋은 선물을 올려 환심을 사 두겠습니다. 그런 한편 공자님이 귀국하실 수 있도록 백방으로 손을 쓰겠습니다."

 

 감격한 자초는 여불위의 손을 덥썩 잡으며 말했다.

 "만일 천만다행으로 내가 보위에 오를 수만 있다면, 맹세코 공과 더불어 평생동안 부귀를 함께 나눌 것이오."

 

 여불위는 귀국하자마자 막대한 헌상품을 가지고 화양부인을 찾아가 자초가 전하는 물건이라며 전했다. 그리고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 부인에게 은근히 말했다.

 "자초 공자께서는 마마를 여간 존경하시지 않습니다. 외람된 말이지만, 마마께서 그분을 아들로 삼으시면 장래가 편안하시리라 여겨집니다. 여러 공자님들 중에 그분을 덮을 만한 인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럴 것 같군요. 하지만 자초가 조나라에 붙들려 있으니 어쩌지요?"

 "그야 방법이 왜 없겠습니까."

 

 화양부인의 마음을 사는 데 성공한 여불위는 조정 대신들을 구워삶아 자초가 귀국할 수 있는 길을 트도록 했다. 그렇지만 양국의 정치적 이해에 걸려 공식적인 귀국이 용이하지 않자, 많은 돈을 가지고 조나라에 다시 들어가서 성문 수비병들을 매수한 다음, 장사꾼으로 변장시킨 자초를 감쪽같이 빼내어 진나라로 데리고 왔다. 

 

 이렇게 해서 귀국한 자초에게 여불위는 자기 씨앗을 잉태한 천하절색의 애첩 조희(趙姬)까지 헌납하여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고, 막대한 재력과 탁월한 말솜씨로 그를 적극 지원하여 세자로 세우는 데 성공했다. 마침내 자초는 왕위에 올라 장양왕(莊襄王)이 되었고, 여불위는 재상이 되었다. 장양왕은 불과 3년 만에 세상을 떠났지만 여불위는 상국(相國)의 지위에 올라 영화를 더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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