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책(陽翟) 출신의 여불위(呂不韋)는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거상(巨商)으로, 여러 곳을 왕래하며 물건을 싸게 사서 비싸게 팔아 천금의 돈을 쌓은 사람이었다.
그즈음 진(秦)나라에서는 소왕(昭王,
또는 昭襄王,
BC 325~251, 재위: BC 306~251, 진나라 3대 왕)의 태자가 죽어 둘째 아들 안국군(安國君,
효문왕(孝文王, BC 302~BC 250, 재위: BC 250),
진시황의 할아버지)이 태자가 되었다. 소왕이 집정이 너무 길어서(55년) 태자인 안국군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술과 여자를 즐기는 일뿐이었다. 하여 그에게는 여자도 많고 자식도 많았다. 안국군은 그중에서도 화양부인(華陽夫人)을 가장 총애하여 그녀를 정부인으로 삼았다.
안국군에게는 20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 자초(子楚)의 어머니인 하희(夏姬)가 안국군의 총애를 잃는 바람에 자초는 조(趙)나라에 볼모로 가게 되었다. 자초는 조나라에서 냉대를 받았으며, 돌봐 주는 사람도 없는 인질 신분이었으므로 생활 또한 곤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불위가 장사하러 조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에 갔을 때 자초를 가련히 생각하여 그를 찾았다. 여불위는 자초를 보고 '이는 기이한 물건이니 쌓아 둘 만하다(기화가거(奇貨可居))'고 생각하고 자초와 더불어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기 시작했다. 당시 진왕은 나이가 많았고, 뒤를 이을 태자 안국군의 총애를 받고 있는 화양부인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여불위는 자초를 화양부인의 양자로 만들어 세자로 세울 계획을 짰다. 이 계획을 들은 자초는 일이 성공할 경우 여불위와 더불어 진나라를 나누어 가지겠다고 약속했다. 여불위는 자초에게 500금을 주어 빈객들과의 교제 비용으로 쓰도록 하고, 자신도 500금으로 진기한 노리개 등을 사 진나라에 들어갔다.
여불위는 돈을 뿌려 연줄을 찾아 화양부인의 언니를 만나고, 그 언니를 통해 가지고 온 물건을 모두 화양부인에게 바쳐 환심을 산 후, 기회를 보아 화양부인에게 말했다.
"자초는 어질고 지혜가 있으며, 널리 천하 제후의 빈객들과 교제를 맺고 있습니다. 또한 언제나 부인을 마음의 하늘로 우러른다는 말을 하며, 태자와 부인을 흠모하여 눈물을 흘립니다."
이 말을 듣고 부인은 매우 기뻐하였다.
여불위는 다시 그 언니에게 부인을 설득하도록 했다.
"용모가 잘난 것으로써 쓰인 사람은 용모가 늙으면 총애도 시들해진다고 합니다. 부인께서는 태자를 모시어 매우 총애를 받지만 아들이 없습니다. 어째서 지금 여러 공자들 중에서 현명한 자와 인연을 맺어 후사로 이을 양자를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남편이 세상에 있으면 그대로 존경을 받지만, 남편이 죽은 후면 양자가 왕이 되어야만 세력을 잃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평소 이를 걱정해 오던 화양부인은 언니의 충고에 따라 안국군을 설득하여 자초를 후사로 삼겠다는 약속을 받아 내었다. 이로써 자초는 인질의 신분에서 일거에 세자가 되었고, 명성이 차차 제후들 사이에서 높아졌다.
여불위는 용모가 뛰어나고 춤을 잘 추는 한단의 여인
조희(趙姬,
BC 280~BC 228)와 동거했는데, 이 여인는 얼마 후 여불위의 아이를 임신했다. 그런데 자초가 여불위의 초청을 받아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이 여자를 얻고 싶다고 청하였다. 여불위는 처음에는 화를 냈으나, 가산을 기울여서까지 자초를 위해 진력한 것도 그것으로 큰 이익을 낚으려는 것이었음을 상기하고, 마침내 여인를 자초에게 바쳤다. 여인는 임신한 사실을 숨기고 있다가 열두 달 만에 사내아이를 낳아 그 이름을 정(政)이라 했는데, 이이가 바로 훗날의 진시황(秦始皇)이다.
BC
257년, 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하자 조나라에서는 자초를 죽이려고 했다. 자초는 여불위와 의논하여 금 600근의 거액으로 감시하는 관리를 매수하여 도망쳐 무사히 진나라로 귀국했다. 여불위는 자초에게 초(楚)나라 의복을 입고 화양부인을 알현하도록 했다. 원래 초나라 사람이었던 화양부인은 이런 자초를 보고 아주 흡족해했다. 자초의 원래 이름은 이인(異人)이었는데, 이때 화양부인이 자초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조나라에서는 자초의 부인과 아들을 죽이려고 했지만, 부인이 조나라 호족의 딸이었으므로 모자는 여러 사람들의 보호를 받아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다.
소왕이 죽고 안국군이 무려 53세의 나이로 왕이 되었는데, 이이가 바로 효문왕(孝文王,
BC 302~BC 250, 재위: BC 250)이다. 효문왕은 화양부인을 황후로 하고, 자초를 태자로 봉했다. 조나라는 자초의 부인과 아들을 정중히 진나라로 돌려보냈다. 효문왕이 즉위한 지 3일 만에 죽어 자초가 왕이 되었는데, 이가 바로 장양왕(莊襄王,
BC 281~BC 246. 재위: BC 249~BC 246)이다. 장양왕은 여불위를 승상에 앉혀 문신후(文信侯)로 봉하고, 낙양의 10만 호를 식읍으로 주었다. 장양왕은 또한 양모 화양부인과 생모 하희를 태후로 옹립했다. 장양왕은 즉위 3년 만에 죽고 태자 정이 그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이때가 BC
246년으로 정의 나이 13세 때였다. 그는 여불위를 존경하여 상국(相國)으로 삼고 중부(仲父)라 불렀으며, 하남 낙양의 10만 호를 식읍으로 주었다. 여불위의 집은 하인이 1만 명이나 되었다.
'당시 위(魏)에 신릉군(信陵君), 초에 춘신군(春信君), 조에 평원군(平原君), 제(齊)에 맹상군(孟嘗君) 등 전국 사공자(戰國四公子)가 있어 선비들을 대우하고 빈객들을 끌어들이는 경쟁을 하였다. 여불위는 진나라가 강국이면서도 이들 나라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여 선비들을 불러 후대하니 빈객이 3천 명이나 되었다. 당시 제후들의 나라에는 변사가 많았는데, 순경(荀卿)의 문하 사람들의 경우는 책을 저술하여 천하에 널리 알려졌다. 여불위는 빈객들에게 각각 견문을 저술케 하고 그들이 쓴 것을 집대성하여 팔람(八覽), 육론(六論), 십이기(十二紀) 등 20여 만 자로 된 책을 만들었다. 여불위는 이 책이 천지만물과 고금의 일들을 모두 망라했다고 여겨 그 이름을 《여씨춘추(呂氏春秋)》라고 하였다. 그는 이 책을 도성인 함양(咸陽)의 성문에 진열하고 그 위에 천금의 상금을 걸고 제후국의 유사와 빈객이 와서 한 자라도 증감할 수 있으면 천금을 주겠다고 했다.
(當是時, 魏有信陵君, 楚有春申君, 趙有平原君, 齊有孟嘗君, 皆下士喜賓客以相傾. 呂不韋以秦之彊, 羞不如, 亦招致士, 厚遇之, 至食客三千人. 是時諸侯多辯士, 如荀卿之徒, 著書布天下. 呂不韋乃使其客人人著所聞, 集論以爲八覽, 六論, 十二紀, 二十餘萬言. 以爲備天地萬物古今之事, 號曰呂氏春秋. 布咸陽市門, 懸千金其上, 延諸侯遊士賓客有能增損一字者, 予千金.)'
이 이야기는 '사기(史記)' '여불위열전(呂不韋列傳)'에 나오는데, 한 자라도 더하거나 덜 수 있으면 천금을 주겠다는 말에서 '일자천금'이 유래했다. 당시에는 여불위의 권세를 두려워하여 이 책의 잘못된 부분을 발견했다고 나선 사람이 하나도 없었는데, 동한(東漢) 시대에 고유(高誘)라는 사람이 11곳의 잘못된 부분을 발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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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례
많은 작가들이 '일자천금'의 가치를 지닌 글을 쓰면서도 생활은 궁핍하니, 이런 모순이 어디에 있는가?
소왕(昭王,
또는 소양왕(昭襄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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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문왕(孝文王,
안국군(安國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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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양왕(莊襄王,
자초(子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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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325~BC 251
재위:
BC 306~BC 251 (재위 55년)
진나라
3대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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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302~BC 250
재위:
BC 250 (재위 3일)
진시황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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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281~BC 246
재위:
BC 249~BC 246 (재위 3년)
진(秦)나라
1대 황제 진시황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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