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기(妲己)

 

달기(妲己, BC 11세기경)

 자() 달(妲). 성() 기()이다.

 고서에서는 달기(妲己)의 미모를 이렇게 형용하고 있다.

 구름처럼 검게 늘어진 머리카락, 살구 같은 얼굴 복숭아 같은 뺨, 봄 산처럼 옅고 가는 눈썹, 가을 파도처럼 둥근 눈동자, 풍만한 가슴 갸냘픈 허리, 풍성한 엉덩이 널씬한 다리, 햇빛에 취한 해당화나 비에 젖은 배꽃보다도 아름다워라.

 

 달기는 상(商)나라 유소(有蘇: 지금의 해남(海南) 온현(溫縣)) 부락 출신으로 후에 악명 높은 폭군 주왕(紂王)의 비가 되었으며, 우리에게는 '주지육림(酒池肉林)'의 고사로 잘 알려진 여인이다. 달기는 중국 역사상 가장 섹시한 여인 중의 한 사람이며 음탕한 여인의 대명사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그녀의 악명은 중국인들의 언어생활을 통해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중국 속어로 "달기정(妲己精: da ji jing)"이라 하면, 그것은 "달기같은 년", "여우같은 년(狐狸精)"이란 뜻으로 음흉하고 음탕한 여인을 욕하는 말이 된다.

 

 달기는 상(商)의 주왕(紂王, ?~BC 1046)을 유혹하여 잔혹한 형벌로 생사람을 다 죽게 만들어 놓고 그러한 장면을 보면서 자신의 성욕을 자극시켰다. 그녀의 이러한 흉악하면서도 음탕한 행위는 바로 변태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달기와 주왕에 대한 이야기는 유명한 역사연의(歷史演義) 소설 '봉신방(封神榜)'에 상세하게 전해오고 있다.

 

* 봉신방(封神榜) : 명나라 때의 장편 소설. 중국 고전 소설 가운데 신마 소설(神魔小說)의 대표작으로, 허중림(許仲琳)이 지었다고 전해진다. 일설에는 명나라의 육서성(陸西星)이 지었다고도 한다. 강자아(姜子牙)가 주()나라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을 보좌하여 상나라의 주왕(紂王)을 토벌한 역사적 배경을 그리고 있다.

 

 BC 11세기에 있었던 그들의 이야기는 그보다 수백년 이전에 있었던 하(夏) 걸왕(桀王)과 말희(妺喜)의 이야기와 너무나 흡사하다. 달기와 주왕이 상(商)나라를 패망의 길로 이끌었다고 한다면 걸왕과 말희는 하(夏)나라를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주왕은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고 아홉 마리 소를 뒤로 잡아당길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장사였으며, 그의 눈과 귀도 매우 예민하여 상당한 분별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자기 주장이 너무 강하고 성격이 포악하였다. 특히 그는 달기를 왕비로 맞은 후부터 그러한 성격이 더욱 심하게 드러나 마침내 자신의 손으로 상왕조를 파멸시키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달기는 주왕의 제후 소호(蘇護)의 딸로 빼어난 용모와 몸매를 갖춘 천하절색의 미인이었다. 소호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주왕이 막강한 병력을 파견하여 진압하자, 소호는 살아남기 위한 수단으로 자기의 딸 달기를 주왕에게 바치고 목숨을 구걸하였다.

 

 그러나 야사에서는 단지 그녀의 미모와 몸매 때문에 주왕이 그토록 정신을 못차릴 정도로 그녀에게 푹 빠질 수는 없었다고 전하고 있다. 즉, 그녀에게는 자신의 외형적인 미모를 훨씬 능가하는 다른 어떤 성적 매력이 있었으며, 그 성적 매력의 비밀은 바로 그녀의 성기에 있었다는 것이다. 즉, 그녀의 성기는 넓어졌다 좁아졌다 하고 질은 겹겹의 주름으로 이루어져 있어, 남자의 성기가 그 안에 들어오면 움직이지 않아도 저절로 액체를 분비하여 꿈틀거리면서 빨아들이고, 성기를 천천히 빨아들이면서 부드럽게 꽉 죄기 때문에 주왕은 쾌감이 극에 달하여 세상의 일을 안중에 두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야사의 기록에 따른다면 달기의 성기는 그야말로 보기드문 '명기(名器)' 중의 명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봉신방'의 작자는 달기가 단지 미모만으로 그렇게 간단히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지는 않았을 것이고, 반드시 그녀만의 특수한 침실에서의 섹스 비법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이야기를 전개하였다.

 

 주왕이 여와궁(女媧宮)에서 참배를 하면서 여와의 뛰어난 풍채를 보고 음탕한 마음이 일어 신을 모독하는 시를 지었다. 이에 여와는 크게 노하여 구미호를 내려보내 주왕을 현혹시켜 그의 조정을 파멸시키고자 하였다. 구미호는 소호가 딸 달기를 주왕에게 바치기 위해 경성 조가(朝歌)로 가는 도중에 달기의 영혼에 들어갔다. 이리하여 달기는 비로소 사람을 유혹하는 비법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주왕은 달기를 보는 순간 첫눈에 반하여 기다릴 것도 없이 그녀를 침대로 데려갔으며, 달기의 특수한 신체적 구조는 주왕을 극도로 흥분시켰다. 이날 이후부터 주왕은 다른 궁녀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정사도 팽개친 채 오직 달기에게만 정신이 빠져 있었다. 달기는 왕비에 책봉된 후에 주왕이 자기의 미색에 현혹되어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서서히 그녀의 황음무도한 본색을 드러내었다. 그녀는 먼저 주왕에게 웅장하고 화려한 궁궐을 새로 지어달라고 요구하고, 모든 난간과 기둥은 아름다운 마노(瑪瑙)와 옥으로 장식하게 하였다.

 

 주왕은 달기의 환심을 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백성들을 가혹하게 착취하여 경비를 조달하고, 10만여명의 장인들을 불러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사를 계속하도록 하였다. 7년이란 세월이 걸려 길이 3리(里), 높이 1천 척(尺), 대궁전 100여개, 소궁전 72개에 이르는 호화로운 궁궐이 완성되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녹대(鹿台)'이다. 주왕과 달기는 밤낮으로 이 '녹대'에서 꿈같은 세월을 보내며 마음껏 유희를 즐겼다. 심지어 그들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연월일을 잊어 버릴 정도였기에 사관은 그것을 "장야음(長夜飮: 밤새 술마시며 논다는 뜻)"이라 일컬었다. 이러한 상황을 본 대신 기자(箕子)는 "대왕의 측근들 조차 모두 왕조의 멸망을 모르지만 나만은 그것을 안다. 나의 처지가 실로 너무 위태롭구나!"라고 한탄하였다.

 

 달기는 음욕을 즐기는 것 외에도 잔혹한 형벌로써 생사람을 학살하는 장면을 구경하는 것도 좋아했다. 그녀는 주왕과 함께 여러 가지 새로운 무시무시한 형벌들을 고안해 내었다.

 

 처음에 상나라의 창시자 탕왕(湯王)은 하(夏)나라 걸왕(桀王)의 형법이 너무도 잔혹하여 그것을 폐지하고 비교적 경미한 형벌로써 죄인들을 처벌했다.

 

 그러나 주왕은 선왕들의 법제가 너무 가볍다고 여기고 특별히 대형 청동 인두를 제조하였다. 그리고는 형을 받은 죄수들에게 자신의 손으로 붉게 달아오른 인두를 자신의 벌거벗은 몸위에 놓고 지지게 했다.

 

 이렇게 잔혹한 형벌도 달기는 너무 시시하다 여기고 주왕에게 대형 청동 기둥을 주조하도록 건의하였다. 그리고는 시뻘겋게 타오르는 숯불을 그 안에 넣고 죄수를 벌거벗은 채로 숯불 위에 서서 붉게 달아오른 청동 기둥을 꽉 붙잡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그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포락(炮烙: 통째로 굽는다는 뜻)'이란 형이다. 이러한 처참한 상황을 보고 달기는 오히려 그것을 즐기면서 그녀의 변태적 성욕을 자극시켰다.

 

 한 사람의 죄수가 '포락(炮烙)'의 형을 받고 팔딱팔딱 뛰면서 재로 변할 때마다 그녀는 성에 굶주린 듯한 신음을 토해내며 주왕의 품에 달라붙어 몸부림쳤다. 그녀는 일종의 사디슴(sadism: 이성을 학대함으로써 성적 만족과 쾌감을 얻는 변태증)적 변태 성욕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본 후에 섹스를 하면 그녀의 천부적인 성기능은 평소보다 몇 배나 더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여 주왕에게 더욱 강렬한 만족을 안겨주었기 때문에 주왕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도 이 형벌로써 자주 달기의 성욕을 자극하였다. 짧은 1~2년 사이에 이 형벌로 죽어간 사람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다.

 

 이 '포락(炮烙)'의 형을 즐기는 것도 점차 지겨워지자 달기는 다시 고심 끝에 '돈분(躉盆)'이란 형을 고안해냈다. 그녀는 먼저 주왕에게 녹대 부근에 넓고 깊은 구덩이를 하나 파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수많은 독사와 전갈을 그 안에 집어넣은 다음 죄수들을 발가벗겨서 안으로 밀어넣게 하였다. 달기는 주왕과 함께 녹대 위에서 잔치상을 차려놓고 그 구덩이 안에서 독사와 전갈에 잡아먹히면서 몸부림치는 장면을 구경하면서 그것을 즐겼다. 주왕은 잔치상 바로 옆에 침실을 마련해두었다가 일단 달기의 성욕이 발동하면 언제든지 그녀를 침실로 데려가서 무한한 환락에 빠져들곤 하였다.

 

 얼마후 달기는 다시 '돈분(躉盆)' 좌우로 연못을 하나 파달라고 한 다음, 연못을 피하여 왼쪽에는 술지게미를 쌓은 작은 언덕을 만들고 거기에 나무를 심게 했다. 그 나무 위에 고기덩어리를 매달아두고 그것을 '육림(肉林)'이라 하였으며, 오른쪽 연못에는 술을 가득 채워놓고 그것을 '주해(酒海)'라 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궁녀와 환관들을 불러모아서 나체로 씨름을 하게 한 다음, 승자는 '주해육림(酒海肉林)'에 들어가서 마음껏 먹고 마시게 하고, 패자는 주왕의 존엄함을 욕되게 했다고 하여 '돈분(躉盆)'에 집어넣었다.

 

 당시에 구후(九侯), 악후(鄂侯), 서백(西伯: 이후의 주나라 문왕)이라는 삼공(三公)이 있었다. 주왕은 구후의 딸이 달기에 필적할 정도로 그 용모가 아름답다고 들었다. 그리하여 그녀를 강제로 데려와서 후궁에 앉힌 다음 그녀와 달기의 옷을 하나도 남김없이 벗겨놓고 차례로 훑어보면서 비교해 보았다. 그녀의 용모에 흡족한 주왕은 그녀를 비에 책봉했으나 정숙한 구후의 딸은 그처럼 황음무도한 생활에 적응할 수 없었다. 그녀는 결국 주왕의 노여움을 사서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잔인한 달기는 기뻐한 나머지 또다시 독랄한 형벌을 생각해냈다. 미꾸라지를 여러 마리 잡아오게 한 다음, 구후의 딸을 벌거벗겨서 사지를 큰 대자로 침대 기둥에 묶어놓고 미꾸라지를 그녀의 음부에 집어넣게 했다. 미꾸라지는 습하고 따뜻한 구멍을 좋아하는지라 그녀의 음부속으로 다투어 파고들었다. 구후의 딸은 이렇게 처참하게 죽어갔던 것이다. 그래도 주왕은 분노가 가시지 않아 다시 구후를 잡아오게 하여 살을 갈기갈기 토막내어 버렸다.

 

 악후도 몇 번이나 간언을 하다가 결국 처형당했다. 서백 희창(姬昌)은 이 소식을 듣고 하늘을 우러러 세 번 탄식하고,  기산(歧山)에서 비밀리에 군사들을 훈련시키면서 폭군 주왕을 토벌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달기의 악랄한 위세는 날로 심해져 인명을 파리 목숨보다 가벼이 여겼다. 주왕은 오로지 그녀의 성욕을 자극시키느라 무고한 백성들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산사람을 화살 과녁으로 삼거나 호랑이 우리에 집어넣었다. 달기는 심지어 임산부의 배에 들어있는 태아의 성별을 감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하면서 주왕과 내기를 하고, 임산부를 잡아와서 직접 배를 갈라 확인해 보기도 하였다. 이처럼 잔인한 행위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3대에 걸친 공신 비간(比干)이 죽음을 무릅쓰고 주왕에게 간언을 하자, 달기는 주왕에게 자기가 심장병이 들었는데 성현의 심장을 먹어야 나을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주왕은 당장 충직한 신하 비간의 가슴을 갈라 심장을 꺼냈다.

 

 BC 1057년 서백 희창의 아들 희발(姬發: 후의 주나라 무왕)과 군사(軍師) 강자아(姜子牙: 강태공)가 대군을 거느리고 상나라의 수도 조가(朝歌)를 공격하였다. 대세가 이미 기울었다고 판단한 주왕은 '녹대'에 올라가서 그 아래에 붙혀둔 불길 속으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달기는 강자아의 병사들에게 붙잡혔을 때,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큰소리로, "나에게는 공은 있으되 죄는 없다. 만약 내가 주왕을 유혹하지 않았더라면 너희들이 어찌 상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었겠느냐?"라고 외쳤다.

 

 강자아는 달기를 봉신방(封神榜)으로 끌고가서 참수를 명했다. 그런데 망나니가 칼을 뽑아 형을 집행하려고 할 때 달기는 돌연히 머리를 돌려 요염한 웃음을 날리면서 그를 홀렸다. 망나니는 갑자기 넋이 빠져 달기를 멍청히 바라보다 그만 칼을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다른 망나니들로 바꾸어서 계속 집형을 시도해 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강자아는 달기의 사람 홀리는 술책이 이미 입신의 경지에 도달했음을 알고, 부하의 화살을 꺼내어 직접 숨을 죽이고 정신을 집중하여 그녀의 심장을 향하여 연속해서 세 발을 쏘았다. 이로써 달기는 영원히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파란만장했던 상나라의 역사도 종말을 고하고 새로 일어난 주나라 무왕(武王)에게 그 지위를 물려주게 되었다.

 

 달기와 주왕에 관한 위의 이야기는 대부분 '봉신방(封神榜)'을 근거로 한 내용들이다. 그러나 '봉신방'은 많은 야사들을 기록한 일종의 신화소설로, 여기에 기록된 내용을 전부 진실로 간주하기는 다소 곤란하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발견된 은허(殷墟: 지금의 하남성 안양현(安陽縣) 소둔촌(小屯村))에서는 은(殷) 상(商) 시기의 많은 유물들이 발굴되었는데, 여기에서 달기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이 언급된 곳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상나라 시대에는 국가의 대소사를 모두 거북 껍질에 기록하여 점을 치는 형식을 통해서 결정하였는데, 주왕이 일방적으로 달기의 말에 따라 모든 국가의 대소사를 결정지었다는 것이 납득하기 어렵다. 또 달기가 주왕을 좌지우지 할 정도로 그렇게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면, 지금까지의 중국역사를 살펴볼 때(물론 우리나라 역사나 세계의 역사도 마찬가지 임), 그녀의 친정 세력이 충분히 권력의 중심에 들어섰을 법도 한데, 어떤 역사서에도 그녀의 일족인 유소씨(有蘇氏)의 권력 장악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이 점도 우리에게 많은 의구심을 자아내게 하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달기에 관한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일부 학자들은 그것을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새로 등장한 주(周)나라가 자신들의 명분을 정당화하기 위해 많은 부분 사실을 왜곡한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는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뒤에 권력을 잡은 정권이 자신들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해서 직전의 역사를 부정하거나 왜곡한 예를 도처에서 보아왔기 때문에 이러한 설도 상당히 설득력 있어 보인다. 주왕의 포악성과 달기의 음란함을 어느 정도 인정은 하지만 상상을 불허할 정도의 만행을 저지른 부분이 특히 왜곡된 부분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하나의 추측일 뿐 아직까지 반론을 제기할 만한 확증은 나오지 않고 있다.

 

 달기의 죽음에 대해서도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司馬遷)은 주왕이 '녹대(鹿臺)'에서 뛰어내려 분신자살한 후에 달기는 주(周) 무왕(武王, BC 1169~BC 1116)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세설신어(世說新語)'에서는 공융(孔融)의 말을 인용하여 주나라 군대가 조가(朝歌)에 진입한 후에 주공(周公)이 달기를 취하여 그의 시녀로 삼았다고 하였다. 이것은 주나라 군대가 조가에 진입한 이후에 더 이상 달기를 비방하는 말이 없었다는 것을 하나의 방증으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어떤 측면에서 보면 달기는 뒤에 일어난 왕조에 의해 역사적으로 희생된 인물일 가능성이 크지만,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그녀는 여전히 악녀와 요녀의 화신으로 자리잡고 있다.

 

달기와 여우의 전설

 중국의 문학에서 달기는 주로 구미호의 화신이었다는 전설과 결부되어, '전상평화(全相平話)'의 한 대목인 '무왕벌주평화(武王伐紂平話)'에도 여우의 화신으로서 달기가 등장한다. '천자문(千字文)'에서 "주가 은의 탕을 벌했다"는 부분에 대한 주석에서 은의 주왕(BC 11세기경)을 유혹해 나라를 기울게 한 달기를 구미호로 지적했으며, 이 설을 기초로 명나라 때의 '봉신연의(封神演義)'가 창작되었다. '봉신연의'에서 달기는 천년 묵은 여우 요괴로 등장하며, 은에서 주로 넘어가는 '혁명(革命)'을 실현시키기 위한 임무를 띠고 지상으로 파견되어, 기주후(冀州侯) 소호(蘇護)의 딸이었던 소달기(蘇妲己)의 혼을 빼앗아 달기가 되어, 마침내 주왕을 타락시켜 은을 멸망에 이르게 했다. 또한 '사기(史記)'에는 나오지 않는 호희미(胡喜媚), 왕귀인(王貴人)이라는 두 명의 가공의 여성이 달기와 함께 주왕의 총희(寵姬)로서 등장하고 있는데, 호희미는 머리 아홉 달린 꿩의 정령이고, 왕귀인은 옥석으로 만든 오래된 비파(琵琶)의 정령으로 설정되어 있다.

 

 또한 일본에서는 달기가 일본으로 도망쳐서 천황의 총비가 되어 나라를 어지럽히려 했다는 타마모노마에(玉藻前) 전설로 연결된다. 고대 중국과 인도, 일본의 세 나라를 돌며 3천년에 걸쳐 전생을 반복하며 남자를 유혹해 파멸로 이끌고 나라를 멸망시키려 한 구미호의 이야기를 다룬 에도 시대의 소설 '삼국악호전(三国悪狐傳)'에서 달기는 화양부인(華陽婦人), 포사(褒姒), 타마모노마에와 함께 구미호의 화신으로 등장하고 있다.

 

 악녀라는 달기의 이미지에서 나온 것이 가와타케 모쿠아미(河竹黙阿弥)의 '달기 오햐쿠(妲己のお百)'으로 알려진 요시와라(吉原)의 유녀(遊女), 독부(毒婦) 오햐쿠이다. 오햐쿠는 교토(京都) 구조도리(九条通)의 천한 집에서 태어나, 빼어난 용모로 열네 살에 기온노 나카무라야(祇園中村屋)라는 유곽의 유녀가 되어 고노이케 젠고에몬(鴻池善右衛門)의 수청을 들게 되었는데, 에도의 배우 진타우쿠라(津打友蔵)와 간통하여 에조로 가서 우쿠라의 사후 니이키치하라(新吉原)의 오와리야 세이주로(尾張屋清十郎)의 부인을 거쳐 사타케(佐竹) 집안의 가신 나와 주자에몬(那河忠左衛門)의 첩이 되었다가 아키타 소동(秋田騒動)과 관련되어 이름을 '리쓰(りつ)'로 고친다. 아키타 소동과 관련해 나와가 처형된 뒤에도 오하쿠는 단순한 고용인이라는 이유로 처벌도 받지 않고 머지 않아 에도를 나와 다시 다카마 소동(高間騒動)의 주동인물이 되는 다카마 이소에몬(高間磯右衛門)의 첩이 되었다고 한다. 다섯 번이나 남편을 살해하고 갈아치운 그녀의 편력은 에도 시대 호레키(宝暦) 연간의 퇴폐상을 대표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중국 역사상 가장 억울한 인물 - 주왕(紂王)과 달기(妲己)

 달기(妲己)는 유소씨의 딸로 상(商)나라 주왕(紂王, BC 1169~BC 1116) 자신(子辛)이 아끼는 후궁이다.

 미색이 뛰어났고, 주왕(紂王)이 그녀를 아주 총애했다. 그녀의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주었고,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았으며, 밤낮으로 연회를 베풀고 놀았다. 나중에 주나라 무왕이 제후를 모아서 주왕(紂王)을 토벌했다.

 목야지전(牧野之戰)을 거쳐 일거에 상(商)나라를 멸망시킨다.

 주왕(紂王)은 녹대(鹿臺)로 가서 스스로 자결하고, 달기는 무왕(武王, ?~BC 1043?)에 붙잡혀 죽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달기와 주왕에 관한 내용이다. 그러나 달기는 아주 억울하다. 역대 문인들은 억측과 상상을 동원해서 그녀에게 죄를 하나하나 덧씌웠고, 그녀는 천고제일악녀라는 악명을 등에지게 되었다.

 

 주왕과 달기에 관한 민간의 '봉신연의(封神演義)'를 보면, 달기는 천년묵은 여우가 변신한 것이다. 그녀는 여와의 명을 받아 상나라를 망하게 하기 위하여 온 것이고, 주왕도 그래서 괴이하게 변하고 잔인하게 변한 것이라고 한다. 당연히 이런 것은 미신적인 것이고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 달기라는 미녀가 천년묵은 여우가 바뀐 것이라는 것은 사실일 수가 없다. '진어(晉語)'를 보면, "은나라의 자신(주왕)은 유소를 정벌했다.유소씨의 딸이 달기이다" 이를 보면 달기는 바로 주왕이 유소씨를 정복하고 얻은 '전리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유소씨는 구미호를 토템으로 하는 부락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봉신연의(封神演義)'에서는 달기를 천년묵은 구미호의 화신으로 그린 것이다.

 

 역사의 기재에 의하면 주왕은 황음하였으며, 술을 흘려 못을 만들고, 고기를 걸어 숲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것이 주지육림(酒池肉林)이라는 말의 유래가 되었다. 게다가 주왕은 달기의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주어서, 달기가 좋아하는 사람은 승진시키고, 달기가 싫어하는 사람은 죽여버리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이리하여 제후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달기는 다시 주왕에게 독한 형벌을 발명하여 제안하는데 바로 포락지법(炮烙之法)이다. 바로 커다란 구리기둥을 옆으로 뉘어놓고, 그 아래에는 숯불을 태운 후에 죄가 있는 자로 하여금 그 구리기둥 위를 걷게 하는 것이다. 벌겋게 단 구리기둥을 걷다가 숯불 속으로 떨어져서 산채로 타죽는 것이다.

 

 이뿐아니라, 주왕에게는 충신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숙부인 비간(比干)이다. 비간은 도저히 그냥 참을 수가 없어 진언한다: "선왕의 법도를 지키지 않고 여인네의 말만 들으니, 화가 곧 닥칠 것이다"라고 한다. 이는 주왕의 아픈 곳을 찔렀고, 매우 화가난다. 그가 요망한 말로써 사람을 현혹시킨다고 하여 처벌하게 된다. 이때 달기는 옆에서 "내가 듣기로 성인은 심장에 일곱 구멍이 있다든데..."라고 하자, 주왕은 바로 그자리에서 비간의 가슴을 열어 심장에 구멍이 있는지를 살펴본다.

 

 사서에 의하면 그는 구후와 악후의 두 신하를 한면은 칼로 다져 육장(肉醬)을 만들고, 한명은 육포(肉乾)를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또다른 신하인 서백창(西伯昌, 주문왕 희창)은 원래 '포락'의 형을 내리려고 하였는데, 희창은 총명하여 바로 죄를 인정하고 주왕에게 미녀와 기이한 물건과 좋은 말 그리고 자기의 영지인 낙서지방을 바쳐서 겨우 풀려났다. 나중에 신하들은 미친척 할 수 있는 사람은 미친 척하고, 바보인척 할 수 있는 사람은 바보인 척 하고, 반란에 가담할 사람은 반란에 가담하고, 유배갈 사람은 유배를 갔다. 이리하여 서창백의 아들인 주무왕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상나라는 바로 무너지게 된 것이다. 주왕은 죽으면서도 가장 멋진 옷을 입고, 가장 멋진 악세사리를 달고, 스스로 녹대에서 불에 타 죽었다. 달기는 더 불행했다. 목이 잘린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녀의 잘린 목은 깃대 위에 꽂혀서 천하사람들에게 보여지게 되었다.

 

 한마디로 주왕과 달기는 악인의 요소는 모두 갖추고 있는 것이며,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악행을 저지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그들이 정말 그렇게 나쁜 사람이었을까?

 

 역사서는 정사이건 야사이건 모두 달기는 사갈미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는 너무나 많이 알려져 있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문제는 과연 역사적 진실도 그러할까라는 점이다.

 

 먼저 주왕(紂王)에 대하여 얘기해보자. 역사서에는 그를 폭군으로 그리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이미지는 그의 진정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일찌기 춘추시대초기에 자공(子貢)은 공자와 주왕에 대하여 토론하면서, 후세사람들이 고의로 주왕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고 불평한 바 있다. 자공의 말이 이치에 틀린 말이 아니다. 주나라는 상나라를 대체했고, 이기면 왕이요, 지면 도적인 것이 역사의 철칙이다. 역사는 항상 승리자에 의하여 쓰여진다. 승리자가 뭐라고 하면 그것이 바로 역사가 되는 것이다. 주왕조는 자신의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이전의 상왕조에 대하여 여러가지 폄하하는 선전을 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주나라의 성립 자체의 근거를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춘추시대에 알려진 주왕의 죄상은 "비간이 간언하는데 죽였다"는 정도였다. 전국시대가 되자, 비간이 죽은 방법에 대하여도 여러가지 살이 붙게 된다. 굴원은 비간을 물에 빠트려 익사시켰다고 하였고, 여불위의 문객은 그가 심장이 도려내어져 죽었다고 하였다. 한나라때의 사마천은 '사기(史記)'를 쓰면서 다시 더 생동감있게 묘사했다. 즉, 주왕이 비간의 심장을 도려낸 것은 달기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즉, "성인"의 심장은 정말 구멍이 일곱개 있는지 보고 싶었던 것이라는 것이다. 진(晋)나라가 되자 황보밀은 그 자신이 의사인 관계로 주왕이 달기의 종용하에 임신한 부녀를 해부해서 태아의 모습을 살폈다고까지 적었다. 주왕이 나쁘기는 했더라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후세의 사람들이 자기의 호불호 기준에 따라 가공하고 덧붙였이면서 와전되었다.

 

 주왕의 가장 유명한 "주지육림", "포락"의 전설에 대하여도, 주나라때의 문헌에는 전혀 기록이 없다. 춘추시대에도 없다. 그런데, 갑자기 전국시대가 되면서 한비자가 아주 구체적으로 언급하기 시작한다. "옛날에 주왕이 상아젓가락을 썼다 그러자, 기자가 두려워했다. 상아젓가락을 쓴다면 흙으로 만든 그릇에 먹을 수 없을 것이니, 반드시 서각 옥과 같은 잔을 쓸 것이다. 상아젓가락, 옥그릇에 보통 야채요리를 담지는 않을 것이니, 반드시 진귀한 고기를 찾을 것이다. 진귀한 고기를 먹으면 띠집에서 간단한 옷을 입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고, 비단 옷에 구중궁궐을 지으려 할 것이며, 고대광실을 지을 것이다. 오년이 지나자, 주왕은 육포(肉圃)를 만들고, 포락을 두고, 조구(糟丘)에 올랐으며, 주지(酒池)에 임하였다. 주왕은 결국 멸망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한비자는 말더듬이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글은 아주 뛰어나다. 이처럼 상상력이 풍부한 글이 바로 그 예이다. 당시의 "제자백가"는 모두 말재주가 뛰어나고, 자기의 주장을 팔아먹고, 자기의 견해를 입증하기 위하여 문자를 과장하고 억지로 끼워맞추는 경우가 많았다. 사마천은 아주 신중하게 글을 썼지만, 한비자의 "주지육림"을 기초로, 다시 "남녀가 발가벗고 그 사이를 뛰어다녔다"고 아주 합리적으로 상상한 내용을 덧붙였다. 당연히 그보다 이전에도 이미 주지의 면적에 대하여 삼천여명분이 된다는 등 과장을 했다. 이러한 상상력은 그저 "광적이다"는 말로밖에 더 할 말이 없을 정도이다.

 

 아마도 그들이 보기에 어차피 주왕은 좋은 사람이 아니니까. 그를 아무리 더 음탕하게 묘사하고, 황당하게 묘사하여도 무방하다고 생각했을지는 모르겠다. 역사의 또 다른 목적이 바로 후세인들에게 경계하게 하는 것이니까. 그래서 그들은 상상력과 윤색을 통하여 이처럼 대담하게 묘사한 것이다. 예를 들어 사마천이후의 사학자인 유향은 주왕의 녹대면적에 대하여 크기가 3리이고, 높이가 천척(千尺)이다라고 적었다. 진나라의 황보밀은 더 심해서 아예 녹대의 높이를 10배나 올려버렸다. 높이가 천장(千丈)이라고 하였다.

 

 동시에 달기의 요사스러움과 독랄함에 대한 묘사도 점차 업그레이드되었다. '상서(尙書)'에서 주왕을 토벌할 때 "부인의 발을 듣는다"로부터 시작해서 '국어(國語)'에서는 "달기가 총애를 받아서...은이 망했다"라고 적었고, '여씨춘추(呂氏春秋)'에 와서는 "상나라 왕은 크게 어지러워서 주색에 빠졌다. 달기가 정치를 하니 상과 벌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도 이 정도까지는 그다지 크게 과장한 것은 아니고 어느 정도 합리적인 상상력의 수준 범위내이다. 나중이 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상상력은 더욱 풍부해졌다. 기록들도 보다 구체적으로 되어 갔다. 나중에 나온 '봉신연의(封神演義)'에 이르러서는 역사학자가 아니므로 아무 생각없이, 역대문인들이 제공했던 단서들을 가지고 더욱 심하게 적게 되었다. 그리하여 천고악녀라는 악명을 그녀는 얻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달기의 거의 변태적인 행위는 비록 후세의 두찬(杜纂)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왜 그렇게 즐겁게 그렇게 기꺼이 온갖 악명을 그녀에게 덧붙이려고 했던 것일까?

 

 왜 주왕과 달기에 대한 묘사는 이렇게 극악하게 되었을까?

 

 주왕 본인에 대하여부터 얘기해보자. '사기(史記) 은본기(殷本紀)'에 보면, 주왕은 "자질이 뛰어나고 말을 잘하였으며, 민첩했고, 보고 듣는 것이 모두 빨랐다. 재주와 힘이 남달랐으며, 손으로 맹수를 잡았다" 이러한 기록을 보면 주왕은 용기와 지혜를 모두 갖추고, 문무를 겸비한 대장부로 보인다. 아쉽게도 이처럼 남보다 뛰어난 재능을 타고 났으므로 스스로 교만했고, 다른 사람의 견해를 듣지 않았다. 다른 자들이 모두 자기보다 못하다는 자만감이 커졌다.

 

 동시에 그는 술을 좋아했고, 여색을 밝혔다. 군왕으로써, 영웅으로써, 그리고 남자로써, 이 정도의 결점은 큰 결점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는 절대 후세인들이 과장하는 것처럼 황음무도하지 않았다. 상나라 사람들은 술을 좋아했고, 식사를 하면서 술을 곁들이며, 여러명이 같이 모여 술을 마시는 것이 당시의 기풍이었다. 출토되는 기물을 보더라도, 상나라후기의 술을 마시는 도구가 확실히 늘어났다. 이는 사회에 술마시는 것이 아주 유행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이것은 중대한 사회문제라고 볼 수는 있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망국에 이를 정도라고 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리고, 상나라시대의 형벌이 과중했다고 한다는 것은 객관성과 공정성을 잃은 것이다. 모든 시대에는 그 때마다의 특징이 있는 법이고, 우리가 현대의 문명사회를 기준으로 그들에게 그 수준을 요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 상서(尙書) 대우막(大禹謨)'의 기재에 의하면 하나라때 이미 "오형(五刑)" 제도가 있고, "하대(夏臺)"감옥이 있었다고 한다. 목을 자르는 외에, 삶거나, 육장으로 만들거나, 차열(車裂), 요참(腰斬), 교살(絞殺), 소사(燒死), 기시(棄市), 멸족(滅族)등의 잔혹한 형벌이 있었다. 즉, 이런 형벌은 상나라 주왕이 독창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시의 형벌에 대하여 '한비자'를 보면, "은(상)나라의 법은 공로에 재를 뿌리는 자는 손을 잘랐다"는 것이 있다. 이는 언듯 보기에 경한 죄에 중한 벌을 과하는 것같다. 당시 자공은 죄는 경한데 벌은 중한 것같아서 공자에게 가서 물었다. 그러나 공자는 이런 형벌을 제정한 사람은 치국의 도리를 아는 자라고 하였다. 만일 재를 뿌릴 때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얼굴에 먼지를 뒤집어쓰게 되고, 그 사람은 반드시 크게 화를 낼 것이고, 싸우게 될 것이다. 싸우게 되면 당시 법률로는 삼족을 멸하는 죄였다. 그래서 재를 길에 뿌리는 것이 가벼운 것같지만 실제로는 중한 죄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중형도 다 이치에 맞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상서(尙書) 강곡'에서는 "은나라의 벌은 체계가 잡혀 있었다"라고 칭찬하였던 것이다. 이는 결국 상나라의 형벌이 지금의 기준으로는 야만적이지만, 당시의 사회배경에 부합하는 점이 있고, 합리적인 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잔인무도한 임금이 아니었는데 왜 실패한 것일까?

 

 사료를 분석해보면, 가능성이 가장 큰 것은 주무왕이 일으킨 정변의 성공은 우연과 투기에 의한 것이라고 보는 편이 합당하다는 것이다. 당시 주왕은 비간을 죽이고 기자를 가두었다. 이는 아마도 정치적인 견해가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미자(微子, 주왕의 친형)에 대하여는 전혀 대비하지 않았다. 나중에 미자가 자기의 형제와 국가를 배신하고, 주무왕을 끌어들일 줄은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모택동 주석이 이 당시의 역사를 읽고는 "미자가 가장 나쁜 놈이다"라고 말한 것이 이해가 된다.

 

 주왕은 아주 능력있는 군주였다. 당시 상나라는 강대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의 부대는 선진적인 청동기병기와 갑옷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코끼리부대와 같은 특수부대도 있었다. 고서에 의하면 "상나라 사람들은 코끼리를 다루어 동이를 짓밟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의 부대는 가히 천하무적이라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그에게는 두 명의 적수가 있었는데, 하나는 서쪽의 주방국(周方國)이고 다른 하나는 동쪽의 이인(夷人) 부락이었다. 주왕은 일찌기 산서 여성에서 주문왕과 악전을 벌인 적이 있고, 문왕을 일패도지하게 만들었다(문왕이 포로로 잡혀서 갖힌 것이 아마도 이 전투에서일 것이다), 만일 동이에서 온 군사인 강태공이 동이국의 난을 획책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주문왕은 곱게 살아서 풀려날 수 없었을 것이다.

 

 잠시 쉰 다음 주왕은 병사를 일으켜 동이를 공격했다. 이리하여 동부의 위협을 제거하고자 했던 것이다. 우세한 병력을 가지고 상나라군대는 추풍낙엽처럼 동이를 쓸었고, 장강하류까지 진격했으며 많은 동이부락을 복속시켰고, 수천수만의 동이인들을 포로로 잡았으며 대승을 거두었다. '좌전'에 기록된 시기를 보면 그는 아마도 이 동이를 정벌하는 전쟁의 와중에 유소씨부락에서 달기를 얻었을 것이다.

 

 청나라때의 한 사람이 주왕에게 뒤집어씌워진 거의 백가지에 이르는 악행에 대하여 하나하나 고증을 해본 적이 있다. 그러면서 그는 점점 주왕의 소위 죄악이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문인들의 윤색을 거치면서 점차 증가하였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역사적으로 주왕에 대한 기록을 믿을 수 없는 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때문이다.

 

 첫째, 정치적 필요. 주무왕은 주왕을 멸한 후, 정치적인 구호가 필요했다. 반드시 주왕을 추악한 인물로 이미지메이킹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반란을 일으킨 것에 명분이 없게 되기 때문이다. 중상, 모략, 유언비어등등을 만들어내야 했다. 이는 정치투쟁의 수단이며, 정치적인 필요에 의한 것이다. 적수를 마귀로 만들고, 추악하게 만들지 않으면 대중의 믿음과 지지를 끌어낼 수 없기때문이다.

 

 둘째, 투쟁책략. "여자가 화근이다"라는 것은 주무왕의 정치구호였다. 달기를 공격하는 것은 바로 적의 수뇌를 공격하는 것이다. 닭을 가리키지만 실제는 개를 욕하는 것이다. 이것도 중국과 외국의 역사적인 투쟁수단으로 많이 애용된 것이다. 일개 국가의 군주가 어찌 한 여인이 시키는대로 할 것인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선전은 극단적으로 주왕을 깍아내리는 것이고, 주왕에 대한 백성들의 위망을 폄하하는 것이다. 이것도 정치적인 필요에 의한 것이다.

 

 셋째, 유언비어로 무기를 삼다. 말이라는 것이 전해지다보면 살이 붙고, 전혀 다른 내용으로 바뀌게 된다. 이런 일은 자주 발생한다. 최근에 혁명당시 인물들의 회고록이나 전기와 같은 것이 유행하였다. 한번은 어느 혁명간부가 자신에 대해 쓴 글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는 분노해서 그 글을 쓴 기자를 불러 물었다. "나는 체포된 적은 있지만, 중간에 도망쳤다. 적들에 붙잡혀서 고문을 당한 적은 없다. 그리고 나는 국민당의 여간첩과 연애한 적도 없다. 그런데 왜 그렇게 썼는가?"

 그러자 그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모두 그렇게 말하니, 절대 틀림없을 겁니다. 아마도 어르신께서 기억을 못하시는 거겠지요. 분명히 적에게 붙잡혀 고문당했을 것이고, 예쁜 여간첩이 당신과 사랑을 나누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미인계에 ;빠지지는 않은 것이지요."

 

 그 노간부도 이런 기자에게 아무 말도 더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개인의 역사에 대하여 본인이 아니라고 부정해도 소용이 없다. 이렇게 본다면, 주왕이 지금까지 살아 있다고 하더라도, 자기의 역사에 대하여 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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